스미스특수임무부대의 오산전투(1950. 7. 5)
오산전투는 한국전쟁 초기에 한강 방어선이 붕괴되고 한국군이 지연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 한국에 최초로 파병된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남하중인 전차 1개 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4사단 소속 2개 연대와 오산 북방 죽미령 일대에서 교전을 전개한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밀려드는 북한군의 보·전부대를 맞아 보·포 협동으로 6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를 치렀으나, 적의 전차부대를 막지 못하고 안성을 경유하여 천안으로 철수한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는 미 지상군부대가 한국전에서 최초로 싸운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은 미국에게 큰 충격이었다. 1949년 6월 30일 주한미군의 마지막 부대가 한국땅에서 철수한지 불과 1년만에 미국은 한국에 대규모의 군대를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냉전하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은 미국에게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a noise far away)이 아니라, 미국의 국가이익과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공산권의 자유 세계 전체에 대한 선전포고였던 것이다. 이에 따른 미국의 한국전쟁에 대한 조치는 신속하고, 치밀하였다. 유엔 안보리의 소집과 북한에 대한 침략자로 규정한 결의안 채택, 한국에 대한 지원 결정, 유엔군 파견 등 일련의 조치는 미국이 건국이래 약 200여개의 전투 및 분쟁에 개입하였지만, 한국전 개입처럼 신속하면서도, 적극적이며 단호한 조치를 내린적은 거의 없었다. 미국의 이러한 조치와 의지는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의 한강전선 시찰과 미 전방지휘소 설치로 가시화 되었다.
이후 맥아더의 전선 시찰 결과에 따른 건의에 의해 미 지상군 파견이 결정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 주둔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가 선발대로 지정되어 한국 전선에 파견됨으로써 개전 3일만에 서울을 빼앗긴 한국에게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고, 미국의 참전은 없을 것이며, 있다 하더라도 미국이 파병 절차를 밟는데 최소한 2개월이 소요될 것이라는 가정하에 세워진 북한군의 남침계획에는 개전 초반부터 찬물을 끼얹은 격이 되었다.
선견대로 지명된 제21연대 제1대대장 스미스(Charles B.Smith) 중령은 대대의 B, C중대를 중심으로 밤새 스미스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였다. 이 부대는 7월 1일 08:45에 부산에 도착하였으며 부산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들은 다시 20:00에 기차로 부산을 출발하여 7월 2일 08:00에 대전에 도착하였다. 스미스 중령은 전방지휘소에 도착하여 처치 장군에게 신고하고 상황설명을 들은 후 오산 북방 죽미령까지 지형정찰을 실시하고 대전으로 복귀하였다. 그는 처치 장군으로부터 평택·오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날밤 기차로 다시 부대이동을 하여 오산과 평택에 1개 중대씩 배치하고 대대지휘소를 평택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4일에는 사단포병 제52포병대대장 페리(Millero Perry) 중령이 A포대를 인솔해와 합류하게 됨으로써 보포를 통합한 하나의 특수임무부대가 구성되었다.
이처럼 스미스부대가 한국전선에 투입됨으로써 한국전쟁의 전개과정에서 한미연합전선의 형성이라는 하나의 큰 전환점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평택-안성선에 전개한 미지상군이 경부국도를 중심으로 한 서부전선을 담당하고, 국군은 그 이동에서 동해안까지 전선을 분담하여 공동으로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는 스미스특수임무부대가 부산에 전개한 7월 1일 총참모장 정일권 소장이 미 극동군사령부 전방지휘소장 처치 준장과의 작전협의에 근거한 것이다.
한편 스미스 부대는 7월 4일 시흥방어사령부가 수원에서 평택으로 철수하자, 서부전선의 최전선부대가 되어 수원을 점령한 적이 공격해 올 것에 대비한 전투준비를 서둘렀다. '가능한 북쪽에서 적을 지연하라'는 임무에 따라 2회의 정찰까지 실시한 후 평택을 출발, 7월 5일 03:00에 죽미령 고개에 도착하였다.
죽미령에 도착한 스미스부대는 B중대가 경부국도를 가로 타고 90고지와 117고지를, C중대가 92고지를 점령하고, 105㎜포대(탄약 1,200발)는 죽미령후방 수청리에 포진하였고 그중 5번포 1문은 대전차고폭탄 6발과 함께 죽미령까지의 중간지점으로 추진하였다. 이무렵 북상한 국군 제17연대도 제2대대를 포병진지 우측 88고지에 배치하였다.
07:00경 수원 부근에서 북한군 제4사단이 제107전차연대를 앞세우고 1번국도를 따라 남진하는 것이 관측되었다. 8대의 전차를 선두로 죽미령고개 1.8㎞까지 접근하자 스미스특수임무부대는 105㎜ 곡사포의 포격을 개시로 선제공격을 가하였으나 적전차는 계속 전진하였다. 전차가 보병진지 전방까지 들어왔을 때, 75㎜ 무반동총이 전차를 향해 공격을 가하였으나, 적전차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5번 포로부터 발사된 대전차고폭탄에 명중된 선두전차 2대가 정상에서 정지하였다.
09:00경 후속하던 적전차는 파괴된 전차를 길옆으로 밀어 치우고 미 보병과의 교전을 피하면서 4대씩 무리를 이룬 가운데 도합 33대가 모두 죽미령을 통과하여 포대쪽으로 내려갔다. 이에 포병들은 각 포를 도로방향으로 돌려 적전차에 직접 조준사격을 가하고 2.36 로켓조도 대전차사격에 가담하였으나 적전차를 저지하지는 못하였다. 선두 전차군이 응사를 하며 오산쪽으로 내려간 10여 분 후 더 많은 전차가 접근해 오자, 포병들은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전장공포증으로 진지를 이탈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복귀하여 후속전차와 사격전을 벌였다. 포진지를 정확히 발견하지 못한 적의 전차가 모두 오산쪽으로 내려갔을 때 궤도에 포탄을 맞아 파괴된 전차 2대가 도로변에 서 있었다.
11:00경 전차 3대를 선두로 긴 차량종대가 뒤따르고 또 그 뒤에는 수 ㎞에 늘어선 도보부대로 된 적주력부대의 선봉이 보병 진지전방 900m까지 접근해 왔다. 대대장의 사격명령으로 야포, 박격포, 기관총 및 소화기 등 각종사격이 집중되자 적의 보병은 산개하고 선두전차가 능선 200m까지 다가와 전차포와 기관총사격을 가하였다. 그동안에 적 보병부대의 일부가 반월봉에서 북으로 뻗은 능선을 점령하고 지원사격을 하는 동안 주력부대는 죽미령 좌우로 우회하였다.
보병전투가 벌어진지 약 1시간이 지났을 때 B·C중대가 또 위험하게 되자, 스미스 중령은 철수를 결심하였다. 부대는 포위될 상황에 있고 적전차의 남진시 보·포통신망의 두절로 포지원도 못받고 기상의 불량으로 항공지원도 받을 수 없으며 더군다나 증원 희망도 없었다.
거의 12시간 동안 진지를 지킨 스미스부대는 14:30 죽미령에서 철수를 개시하였다. 대대는 B중대의 엄호하에 철수 순서에 따라 92고지를 경유 오산방향으로 철수하였다. 스미스 중령은 B중대와 같이 철수하다가 포병과 합류하여 오산으로 철수하였고, 국군 제17연대는 평택을 경유하여 철수하였다. 죽미령에서 철수시 스미스부대는 동측방으로부터의 적 공격에 병력은 분산되었고 모든 공용화기를 유기하는 등 많은 인원, 장비의 손실을 입었다. 이 부대들이 안성을 거쳐 천안에 집결했을 때 스미스 대대원의 전사, 부상, 실종을 합하여 총 손실은 150여명에 달하였다. 적의 손실은 전사 42명, 부상 85명, 전차파손 4대였다.
오산 전투는 미군과 북한군의 첫 전투로, 북한군으로서는 미 지상군의 참전이 처음으로 확인된 전투였다. 북한군은 그때 미국이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고, 미국의 참전 가능성에 관해서 생각지도 않았는데, 오산에 있는 미군을 보고 몹시 놀랐다. 미군도 이 전투를 통해 비로소 북한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했음을 인식하고 적을 바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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