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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전쟁 10대전투(1) 국군 제6사단 춘천전투

구름위 2013. 5. 7.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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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제6사단의 춘천전투(1950.6.25∼30)


춘천 전투는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중동부 전선의 춘천과 홍천 북방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제6사단이 전차 1개 연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2군단 제2사단과 제12사단의 공격을 받고 춘천, 어론리, 현리, 말고개 일대에서 치른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은 방어에 유리한 소양강과 말고개의 지형적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5일 동안의 방어전을 전개하여 북한군 2개 사단에게 상당한 타격을 가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북한군 2군단은 춘천-홍천 축선으로의 진출이 지연되었다. 따라서 춘천전투는 당나라의 침공을 물리친 고구려의 안시성 전투에 비유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북한군 선제타격계획에 커다란 타격을 준 전투였다.

1950년 6월 25일 당시 중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던 국군 제6사단은 춘천에 제7연대를, 홍천 북동쪽에 제2연대를 각각 배치하고 제19연대는 사단예비로서 원주에 집결보유하여 적목리로부터 진흑동까지 84㎞의 광정면을 방어하고 있었다. 사단은 방어지역 서측의 북한강과 전방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소양강을 이용하여 제7연대는 소양강 북안에, 제2연대는 소양강 남안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하지만 좌일선의 제2연대는 6월 20일에 사단에 예속되어 가까스로 이곳에서 제8연대와 진지교대를 마쳤으며, 예비인 제19연대도 5월 1일에 예속된 바 이들의 방어 및 전투태세는 아직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이미 1/3병력이 외출·외박한 상태이지만 사단은 6월 19일에 생포한 포로진술과 정찰대를 화천과 양구에 파견하여 확인한 정보에 따라 적의 전면적 또는 국지적 공격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자체로 경계조치를 취해두고 있었다.

사단 정면의 적은 제2군단으로써 북한군의 조공으로 중·동부지역 공격을 담당하여 공격 당일에 춘천을 점령할 계획하에 그 예하 제2사단을 주공으로 화천-춘천 축선에 투입하고, 인제-홍천 축선에는 독립전차연대로 증강된 제12사단을 투입하였다. 이들은 조기에 춘천·홍천을 점령하고, 서울 포위를 위해 이천-수원으로의 우회기동을 할 계획이었다.

6월 25일 북한군 제2사단과 제12사단은 국군 제6사단 제7연대와 제2연대가 담당하고 있던 춘천 북방과 인제 남방지역을 동시에 공격해 왔다. 북한군 제2사단은 아군 제7연대지역을 정면으로 공격하면서 일부병력을 북한강 계곡으로 침투시켜 아군 제7연대의 퇴로를 차단하여 춘천북방에서 섬멸하려고 하였다. 제7연대는 제1대대를 북한강 계곡에 투입하여 병력과 장비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형의 이점을 이용하여 적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하면서 지지를 고수하였으며, 포병은 화력을 집중하여 전진해 오는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한편 전차로 증강된 북한군 제12사단의 주력은 강원도 인제군에 있는 관대리 남쪽에 위치한 38교를 지키고 있던 1개 소대병력에 의해 2시간이나 전진을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제2연대는 예비대 제2대대를 투입하여 자은리(自隱里)에서 전방으로부터 지연전을 펴온 제1대대와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의 전차를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현리 정면을 방어하고 있던 제3대대가 후퇴함에 따라 6월 26일 오후부터는 자은리 방어선을 포기하고 한계리와 북창을 잇는 말고개로 철수하게 되자, 제6사단 퇴로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 적 제2군단장 김광협은 춘천을 공격하던 제2사단의 공격이 부진하자 적 제12사단의 1개 연대를 제외한 주력을 춘천의 동측방 공격에 가담케 하였다. 제2사단의 서울 동남방의 진출이 지연될 경우 북한군의 전반적인 작전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한 적 제2군단장의 조치였던 것이다.

6월 27일 적은 제12사단 병력으로 증강된 제2사단을 투입하여 춘천 탈취를 위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 왔다. 홍천 북방 말고개에도 맹렬한 공격을 계속했다. 이에 제7연대는 병력부족으로 춘천 남쪽 원창고개에 제2대대 병력을 배치한 후 홍천으로 철수하였으나, 원창고개에 있던 제2대대는 거짓 항복해 오는 적군을 환영하다가 기습을 받고 고개를 빼앗겼다. 또 말고개를 지키고 있던 제2연대도 제19연대의 지원을 받아 적을 막아내다가 명에 의하여 6월 29일 밤 홍천으로 철수하였다.

이로써 개전 이후 3일간이나 춘천을 확보하며 선전했던 국군 제6사단은 비교적 사단의 편제를 유지하면서 홍천, 횡성, 원주, 제천을 거쳐 7월 1일 충주로 철수하였다. 5일간에 걸친 춘천지구 전투에서 제6사단은 적 제2사단의 서울 진출을 봉쇄하였으며, 적 제2, 제12사단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또한 김일성은 춘천전투의 패전을 물어 7월 초에 제2사단장 이청송 소장을 최현(崔賢) 소장으로, 12사단장 전우 소장을 최충국(崔忠國) 소장으로 교체하고 2군단장 김광협 소장을 해임하고 김무정(金武亭) 중장을 후임으로 임명하는 인사조치를 단행하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은 적 살상 6,800명, 포로 120여명, 전차와 자주포 18대를 파괴한 반면, 아군은 전사 200명, 부상 350여명, 그리고 1,300여명의 실종자가 나왔으나, 이들은 대부분 부대로 복귀하였다.

이 전투로 북한군은 수도권을 포위하기 위하여 2개 사단을 춘천-홍천-이천-수원 축선으로 우회기동시키려던 당초의 작전계획에 커다란 차질을 빚게 되었으며, 국군은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었다.

출처 : 성호 콘덴서
글쓴이 : 베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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