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남침은 대략 준비기간이 2년이 걸렸다.
1948년 북한정규군이 창설될 시의 인민군은 3개사단규모였는데
6.25 때는 10여개 사단에 이르는 19만명에 이른다.
인민군 총참모장은 강건으로 소련군 출신이다.
(평양의 강건군사학교는 현재도 북한 최고의 사관학교)
방호산의 6사단은 전원이 팔로군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임정이 환국한 중국에서 공산당은
그 세력을 키우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만주로 이동한 공산당은 조선인들을 흡수하여 세를 확대하여
국공내전에 참전함은 물론이며
방호산은 이 때 팔로군 제 166사단의 정치위원이었다.
팔로군의 166사단을 비롯한 2개사단이 북한으로 들어와서
인민군 제 5,6,7(후에 12사단) 사단으로 편성되었는데
대략 이들의 숫자가 4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방호산은 이 때 6사단장으로 임명된다.
* 북한군은 '49년 1월 하얼빈 회담결과 중공으로부터 중공내전에 참전했던
한인계 중국인 약 3만 명이 대거 입북하여
김창덕이 지휘하는 중공군 제164사단이 북한군 제5사단으로,
방호산의 중국군 166사단이 북한군 6사단으로,
소련으로부터는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 참전했던 5000명의 한인계 소련인이 입국하여
전차부대에 배치되는 등, 인민군 전체의 1/3이상이 실전경험을 갖고 있었으나
당시의 국군은 김홍일 장군이 사단급 이상을 이상을 지휘한 경험 외에는
공비토벌작전의 경험 정도밖에 없는 전투경험이 없는 상태였다.
이 방호산의 인민군 6사단은 옹진반도의 국군 제17연대가 담당하던 45km의 전선을 돌파하면서
최선봉 사단으로 서울점령과 더불어 호남지역을 단숨에 휩쓸면서 낙동강전선의 서부에
기습적으로 출현하여 워커8군사령관을 놀라게 하였다.
백인엽대령이 지휘하던 국군제17연대는 옹진반도 45km의 전선을
방호산의 6사단 예하 14연대(한일래 대좌)와 제3경비여단(여단장 최현 소장)을 맞아
악전고투하였으나 17시에 옹진과 강령을 내주고 1대대장 김복태 소령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1,2대대와 주력 3대대가 갈라져서 부포항과 사곶항 등에서
민간어선을 징발하여 인천으로 간신히 후퇴하였다.
방호산 / 시인 고은
젊은 날 혁명이
오직 살아있는 이유
숨쉬는 이유였다
대륙의 싸움터
총을 사랑했다.
조국으로 돌아왔다
3년 전투
군복이 벗겨졌다
숙청 총살형 전날 밤 꿈 속
어린시절 개울가였다
총을 사랑한 일생 총맞다 끝났다
복면사절 맨얼굴로 죽었다
남은 아내는 이사명령을 받았다
*무정[武亭]
방호산 더불어 익히 알고 있는 무정은
1924년 북방군관학교에 입학하여 포병과를 졸업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의 대장정에 참가하여 조선인10명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로
중국공산화와 관련하여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1937년 팔로군 총사령부작전과장이 되고 동년 말에
중국최초의 포병부대인 팔로군 포병단 단장이 되었다.
1941년 조선인으로 구성된 화북조선청년연합회 결성을 주도하였고
1942년 이 연합회를 화북조선독립연맹으로 바꾸고
산하의 군대조직인 조선의용군 사령관을 지냈다.
해방 후 귀국하여 북한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2비서
1946년 2월 조선인민군의 전신인 보안간부훈련대대 포병담당 부사령관
1948년 조선인민군 창설 이후 제2지휘소 사령관 임명
6.25 시 조선인민군 제2군단장 역임
후퇴 시 평양방위사령관 임명
1950년 12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격렬한 비판을 받고 직위박탈.
1952년 10월 위장병으로 사망.
1950년 12월의 조선노동당 중앙위 제3차 전원회의에서
무정이 비판받은 사항 중의 하나는
부하에 대한 불법총살형이란 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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