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10대전투의 하나인 육군 제1사단의 다부동전투
다부동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항 직후부터 반격으로 전환할 때까지 국군 제1사단이 대구 북방의 왜관과 다부동 일대에서 제105전차사단으로 증강된 북한군 제2군단(제3, 13, 15사단)의 8월공세를 27일간에 걸쳐 저지한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북한군 3개 사단과 25일 동안의 교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8월공세를 저지한 후, 미 제1기병사단에게 진지를 전개하고 신녕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따라서 다부동 전투는 1차 세계대전시 프랑스 수도의 관문으로 파리를 위기에서 구했던 베르덩(Verdun) 전투에 비유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동양의 베르덩 전투라고도 한다.
북한군의 8월공세시 주공부대의 목표는 당시 한국의 임시수도인 대구와 부산 교두보였다. 적은 대구공격을 위해 투입된 5개 사단중 제1, 제13, 제15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을 대구축선에 집중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군은 3개 사단, 즉 중앙에 국군 제1사단(왜관-낙정리)을, 우측에 제6사단(낙정리-의성)을, 죄측에 미 제1기병사단(현풍-왜관)을 대구북방에 배치하였다.
제1사단은 7월 31일 미 제25사단의 엄호하에 낙동강을 건너 새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그런데 8월 1일 마산이 위협받게 되고 미 제25사단이 그쪽으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 미 제25사단의 책임구역을 제1사단이 맡게 되었다. 1사단은 이 때부터 9일간에 걸쳐 낙동강 연안지구 방어전투에서 적 3개 사단과 맞서 적 사살 6,867명, 각종 포 23문, 전차 파괴 10대 등의 전과를 올렸다.
한편 육군은 8월 11일부로 그동안 계획중이던 축소된 방어선인 왜관 북방 303고지-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이동하여 적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1사단이 강변전투를 종결짓고 12일 야간에 철수를 개시하여 다부동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방어선으로 이동하였다.
제1사단의 다부동지역은 좌로는 328고지, 수암산과 유학산 일대의 횡격실 능선과 우로는 가산, 팔공산에서 뻗은 고지군으로 둘러싸여 대구에 이르는 관문에 해당되는 전술상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제1사단은 13일 다부동지역에 집결한 후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기 위하여 제15연대가 328고지일대, 제12연대가 수암산과 유학산 일대로, 제11연대가 신주막일대의 계획된 진지로 진출하였다.
적도 13일 제3사단 일부병력이 약목일대에서 도하하여 328고지로 공격하고, 제15사단이 국군 제1사단보다 한발 앞서 유학산에 진출하였으며, 제13사단은 도로를 따라 신주막의 제11연대 정면으로 접근하면서 일부병력을 우회시켜 미처 제11연대가 병력을 배치하지 못한 674고지를 선점하였다. 이로써 국군 제1사단은 방어선의 중앙돌파와 다부동이 점령당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대구 정면의 적은 당초 '남한 해방'을 목표한 날인 8월 15일부터 다시 총공격을 재개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제15연대가 328고지를 빼앗기고 뺏는 쟁탈전을 전개중이었고, 제12연대가 유학산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반복하였으며 제11연대도 전차 7대를 앞세운 적 연대규모의 공격을 받아 복곡일대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처럼 대구 방면에서 적의 공세가 한창 전개되고 있을 때인 8월 16일 11:58∼12:24분에 대구전선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유엔군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출격한 B-29 폭격기 98대가 왜관서북쪽 낙동강변일대 5.6×12㎞ 지역에 960t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그러나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16일에는 가산으로 침투하려는 적이 741고지에서 다부동 바로 서측 466고지를 공격해옴으로써 국군 제1사단은 돌파되느냐 고수하느냐의 기로에서 놓여 있었다. 이에 제8군은 사단 병력만으로는 방어선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8월 17일 군예비인 미 제25사단 제27연대를 다부동으로 투입하였다.
18일 새벽에는 가산에서 침투한 일부의 적이 사격한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낙하하자 대구의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 충격으로 이날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난령이 하달되어 대구는 일대 혼란에 휩싸였으나, 조병옥 내무부 장관이 경찰과 함께 직접 가두에 나서 피난령을 취소하고 민심을 수습함으로써 가까스로 질서가 회복되었다.
이와같은 위기를 타개하고 계획된 방어선을 회복하기 위하여 국군 제1사단은 18일에 지원된 미 제27연대와 협동으로 적진돌파작전을 전개하였다. 미 제27연대는 대부동-돌머리 축선에서 전차중대를 도로상에, 보병 2개 대대를 그 좌우 낮은 능선에 전개하여 보전협동으로 공격을 주도하고, 그 좌우 고지에서는 제1사단이 미군부대와 협조된 공격을 실시하였다.
국군 제1사단 정면의 적도 전차를 새로이 보충받아 보·전협동으로 전면적인 야간공격을 개시함으로써 피아간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풀이 되었다. 제27연대는 천평 전방에서 3.5 로켓트포로 적전차 2대를 파괴하였으나 적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적은 도로상의 지뢰로 인해 큰 진전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제15연대는 328고지에서 적과 수차례의 수류탄 공방전을 전개하면서 쟁탈전을 거듭하였고, 제12연대는 쌍방간에 많은 손실을 낸 채 19일 수암산을 재차 피탈당하고 유학산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공반전을 반복하였으나 대체로 적의 돌파확대를 저지하고 있었다. 이날 제8군명령에 따라 미제2사단 제23연대를 후방인 두전동에 배치하여 방어종심을 증가하였다. 육군본부에서도 제8사단 제10연대를 제1사단에 배속시켜 가산일대에 배치하였다. 이와같이 다부동의 전황은 국군 1개 연대와 미군 2개 연개가 지원될 만큼 위급하였다.
그러나 20일 밤 적측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적은 더이상 다부동전선을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했음인지 유학산 일대에 전개한 제15사단을 의성방면으로 이동시킨 후 국군 제8사단 정면 영천방면으로 공격하도록 임무를 부여하였으며, 이로써 적은 제3사단 일부가 수암산 일대에, 제13사단이 유학산 우측면을 담당하게 되어 공격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국군으로서는 당시 적 제1사단의 위협이 가중되어 다부동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였으므로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8월 21일부터 국군 제1사단의 전황은 점차 호전되어 갔다. 이날 야간 특기할 것은 다부동 계곡에서 한국전쟁 최초로 전차전이 전개되었다. 적은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워 조공을 제11연대로, 주공을 미제27연대 정면으로 지향하여 대규모 야간역습을 감행하였다.
미 제27연대는 가용포를 총집중하여 적전차와 보병을 분리하고 아군전차를 추진하여 적에 대응하였다. 다부동 계곡에서 쌍방간에는 전차포에 의해 발사된 철갑탄이 5시간 동안이나 교차되면서 불꽃을 튀기었다. 당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제27연대 장병들은, 불덩이의 철갑탄이 어둠을 뚫고 좁은 계곡의 도로를 따라 메아리치며 상대방 전차를 파괴하기 위해 곧장 날아가는 모양이 마치 볼링 공이 맞은 편에 세워진 목표로 핀을 향하여 재빠르게 미끄러져 가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볼링장(Bowling Alley)전투라고 하였다.
더구나 다음날 오전에 적 제13사단 포병연대장(정복욱 중좌)이 제11연대지역으로 작전지도를 갖고 귀순함으로써 적의 전투의지는 극도로 저하되었고, 그의 진술에 따라 유엔 전폭기 편대가 대거 출격하여 122㎜곡사포 7문과 76㎜곡사포 13문이 은폐되어 있는 적의 포진지와 집결지를 강타함으로써 적 제13사단의 화력지원을 무력화사켰다. 제12연대는 그동안 8차례의 공격끝에 이날밤 최초로 야간기습을 시도하여 마침내 유학산 탈환에 성공하였다.
제1사단은 마침내 주저항선을 안정시켜 작전의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 제27연대는 증원임무에서 해제되어 마산의 모체부대로 복귀하였다. 적은 전투력이 현저히 약화되어 거의 접촉을 단절하였으며, 귀순한 포병연대장의 증언에 의하면 제13사단은 유학산에서만 1,500명이 전사상되고 총 3,000명의 손실을 입고 있었다.
26일부터 제1사단은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방어진지를 미군에게 인계할 준비의 갖추면서 수색정찰을 강화하였다. 또 28일에는 수암산을 피탈 10일만에 탈환하였다. 결국 제1사단은 8월 12일에 점령하게 되어 있던 방어선을 16일 후에서야 점령한 결과가 되었다. 제1사단은 방어선상의 가장 중요한 지형인 유학산을 적에게 선점당하여 그간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다부동 전선을 방어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제1사단은 적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328고지-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하여 대구 고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북한군 3개 사단과 25일 동안의 교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8월공세를 저지한 후, 미 제1기병사단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신녕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결국 다부동 전투로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의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공세 이전의 계기를 포착하여 다른 유엔군 부대들과 함께 반격작전으로 이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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