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saw Uprising 즉 바르샤바 봉기라고 하는
2차대전의 막바지에서 바르샤바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단 한가지 교훈만을 남겨준다.
그것은 바로 공산주의와 함께 하는 연공전략의 부당함을
일깨우는 것이다.
2차대전에서 독소전쟁이라 불리는 나치독일과의 동부전선은
소련이 2700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포함한
4천만명의 사상자라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독일은 600만명에 이르는 인명손실 중 80%를 동부전선에서 입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의 수천 km에 이르는 땅이 초토화되었으며
전차를 비롯한 각종 전투장비의 동원된 화력은 매우 거대하였다.
무자비한 숙청으로 자국인을 살해하였던 스탈린조차도 이 전쟁에서
첫째 아들을 잃어버리는가 하면
소련인들 중에서 일가친척이 모두 무사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말을 하였을만큼
인명피해는 막심하였다.
독일로 향하여 가는 소련군의 진격과 동구공산화의 과정에서
바르샤바의 봉기가 일어난다.
1944년 8월 1일 폴란드인들은 소련의 적군(赤軍)이 바르샤바를 접수하기 전에
바르샤바 통치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국가군으로 불리는 바르샤바의 지하조직은 소련군의 지원 약속에 따라서
거사를 단행하였는데
그 결과는 영국에 있는 폴란드 망명정부가 폴란드 통치권을 얻는 것이 아닌
친소 폴란드 행정부가 통치권을 장악하여 폴란드 공산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7월 말까지 바르샤뱌 근처에 도달한 소련의 적군은 너무 장시간 추격을 했던 터라
선봉 부대의 전력이 많이 약화된데다, 독일군 또한 소련군에 맞서 바르샤바를 요새화하기 위해
바르샤바 인근에 병력을 투입하려던 실정이었다.
이에 따라 1만 5천 명이던 바르샤바 주둔 독일군 수비대의 수는 3만 명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던 바르샤바 봉기군 사령관인 볼 코모로브스키 장군은
W-hour를 1944년 8월 1일 오후 5시에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바르샤바 내 국가군 중에서 충분한 무기와 탄약을 장비한 사람은 약 2,500 명 정도였고,
그외 여성이 4,000여 명, 총 4만 명 가량이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봉기를 개시할 시간이 한참 남는 무렵, 봉기군의 유격대 1천여 명이 갑자기 집결해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따라 봉기군은 계획보다 앞당겨 봉기를 하게 되는데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이 계략으로
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봉기군은 빠른 시간 안에 바르샤바의 대다수를 점거하고
봉기 개시 이틀만에 중앙 우체국과 조폐창, 병원, 인쇄소, 발전소, 공장을 점령했으며,
바르샤바 볼라 지구에서는 봉기군이 친위대 식량창고와 군복 저장소를 점령해
일부 봉기군이 친위대 군복 완장에 폴란드 국기를 상징하는
흰색과 붉은색이 그려진 완장을 차고 다녔다.
봉기로 인해 바르샤바를 통해 이루어지던 동서간의 보급로가 차단되었다.
첫째날, 2천 명의 봉기군과 500명의 독일군이 전사했다.
해질 무렵엔 거리마다 바리게이트가 생겨났다.
8월2일 봉기군은 손수만든 첫 신문을 배포했다.
130부 씩 찍어낸 봉기군의 신문은 반란 기간 동안 계속해서 만들어졌다.
이날, 소련군이 바르샤바에서 12마일 떨어진 프라가에 도달했지만,
더이상 진격을 하지 않고 재정비를 하고 있었다.
소련 공군 또한 바르샤바에서의 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SS 총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는 봉기 소식을 접하자 즉시 진압 작전을 명령했다.
이에 포츠난에서 주둔 중이던 하인츠 하인리히 라인파레트 휘하의 SS 경찰부대,
디들레방거 사단, 카민스키 ROAN여단, 아제르바이잔 보병대대가 바르샤바로 출동하고
헤르만 괴링사단도 바르샤바로 출동한다.
히믈러는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위한 본보기로
바르샤바 진압작전을 개시하였다.
바르샤바의 모든 포로와 군관민에 대한 사살명령이 떨어졌다.
소련 공군기가 제공권 획득을 포기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래 전에 전장에서 사라졌던 Ju-87슈투카 폭격기가 매일 바르샤바에 폭격을 쏟아부었다.
폰뎀 바흐 장군은 9월 9일과 10일 양일간 시민들에게 도시를 떠나라는 권유문을 살포했다.
폴란드 적십자협회의 협상으로 수천 명의 시민들이 도시를 떠나는 2시간 동안 사격이 중단되었다.
이후 독일군은 도심 북부에 대한 공세를 폈고, 600mm 박격포가 매 8분 마다 포를 쐈다.
9월 11일 소련군은 다시 바르샤바로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소련군의 공격으로 독일군은 밀리기 시작했고, 바르샤바 상공에서도 소련 항공기가 나타나
독일 공군기와 공중전을 벌였다.
독일군은 민간인이건 봉기군이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살했다.
반란 초기에 65,000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집단으로 처형당하고,
볼라 지구의 세인트 라차루스 병원에선 1,360 명 이상의 환자와 병원 직원들이 처형당했다.
독일 특수부대는 바르샤바 곳곳에서 방화와 약탈, 강간, 화형을 일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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