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알레시아 전투 (Battle of Alesia)

구름위 2013. 3. 29.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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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59년 로마의 북서방면 국경은 알프스 산맥에서 론 강 상류의 왼쪽 연안을 따라 피레네 산맥까지 뻗었고, 세벤 산맥 기슭을 따라 가론 강 상류에 이르렀다.


-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

BC 58년 오늘날의 프랑스 남부 지방 '프로빈키아'속주 총독이 된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갈리아 지역 전체에 대한 정복 사업을 열정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다.

준비를 마친 카이사르는 국경을 넘어 갈리아로 진격하고, 라인 강 동안 출신의 게르만 용병 아리오비스투스를 격파했다.

BC 57년 벨기에족을 정복했고, 부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오늘날의 노르망디 지방과 브르타뉴 지방을 평정했다.

BC 56년 오늘날의 브르타뉴 남부에 살던 베네티족이 북서부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그때까지 정복당하지 않은 도버 해협 해안의 모리니족과 라인 강 하류 남쪽 연안에 사는 메나피족이 이 반란을 지원했다. 카이사르는 간신히 베네티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BC 55년에는 나머지 두 부족 또한 전멸시켰다. 같은 해 코블렌츠 바로 밑에서 라인 강을 건너 게르마니아를 공격했으며, 도버 해협을 건너 브리튼섬을 급습했다.

BC 54년 재차 브리튼 섬을 공격했으며, 갈리아 북동부 지역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란을 진압했다.

BC 53년에는 갈리아에서 다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라인 강을 건너 2번째로 게르마니아를 공격했다.

승승장구하던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사업은 BC 52년에 위기를 맞았다.



- 베르킨게토릭스의 등장 -

아르베르니족의 족장 베르킨게토릭스(Vercingetorix)가 갈리아 중부 지방에서 민족 지도자로 등장한 것이다.

기원전 52년 초 카이사르가 키살피네(Cisalpine)속주 평정에 여념이 없을때, 베르킨게토릭스는 자신의 영역 내에 거주하는 로마인들을 살해하는 것으로 저항운동을 개시한다.


갈리아 전사

그는 주위 다른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동맹 부족의 유력자 아들들을 인질로 받는 방법으로 자신의 지휘통솔권을 유지했다.
또한 지형을 활용한 방어 계획을 세우고, 마을들을 불태워서 로마 군단이 발붙이지 못하게 하려했다.

그러나 베르킨게토릭스의 설득에도 동포들이 모두 고통스러운 초토화 작전 계획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비투리게스족은 아바리쿰(Avaricum, Bourges)에서 로마군의 포위 공격을 견디며 농성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로마군에 포위되어 댓가를 치른다.

반란 진압에 나서 몇번의 실패를 거듭하던 카이사르는 결국 아바리쿰(Avaricum, Bourges)을 점령하고 4만명의 주민들을 살해함으로서 화풀이를 한다.


이어 카이사르는 승리의 기세를 타고 게르고비아에서 베르킨게토릭스를 포위했다. 인내가 필요한 공성전에서, 카이사르의 급한 마음은 결국 패배를 부른다.

로마식의 정통 공성법을 사용하지 않고, 성급한 공격을 하다가 로마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것은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당한 최초의 참패였다.

승리의 여세를 몰아 베르킨게토릭스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기병을 투입. 로마군을 추격한다. 


갈리아 기병


기병들은 기동력을 살려 로마군을 앞질러가서 행군중인 로마군을 좌우와 앞의 세 방향에서 공격하고, 베르킨게토릭스가 직접 이끄는 8만 명의 보병은 강을 사이에 두고 로마군의 후방을 차단하는 완벽한 포위전술로 임했다. 

1만 5천 갈리아 기병대는 대부분 예전 카이사르 휘하에서 싸운 고참병이기도 했다. 그런데 병력에서 열세인 카이사르는 기병과 보병을 기능적인 전술로 지휘했고, 결국 갈리아 기병대는 형편없이 패하여 도망쳤다.

게르고비아의 실패를 반복할까 두려워한 카이사르는 적을 깊이 추격하지 않았다.카이사르가 찬란한 경력에 흠이 날까 우려해 몸을 사리고 퇴각을 하자, 베르킨게토릭스는 추격군을 내보냈지만 결과는 성공도 실패도 아닌 형태로 쌍방에 많은 손실만을 냈을 뿐이었다.



- 알레시아 전투 - 

베르킨게토릭스는 소모전이 지속되면 부족장들의 인내심이 빠르게 바닥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갈리아인들의 聖地인 알레시아(Alesia)에 농성하고 카이사르를 유인하여, 게르고비아의 대승리를 재현하려 한다.

갈리아 기병들은 다음과 같은 훈령을 받아 고향으로 떠났다.

- 각자 고향에서 무기를 들 만한 나이가 된 남자를 되도록 많이 징집할 것.

- 지금까지 이룩한 공적을 상기시키고, 만약 구원하러 오지 않으면 베르킨게토릭스를 잔인한 적의 손에 넘겨주게 되며, 8만 명의 전사들도 운명을 함께하리라는 점을 강조할 것.

- 알레시아에 비축되어 있는 군량은 30일분이지만, 아껴 쓰면 좀더 오래 버틸 수 있으리라는 것.


알레시아를 포위한 카이사르는 인내심을 가지고 도시 주위에 포위망을 구축한다. 알레시아는 원래부터 주위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틀어박힌 베르킨게토릭스는 게르고비아에서 거둔 성공을 염두에 두고, 강에 면한 절벽 부분만 제외하고는 언덕 기슭에도 빙 둘러 방책을 쌓았다.



이렇게 되면 누구나 포위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스스로 '미끼'가 될 작정인 카이사르는 통상적인 포위전은 생각지 않았다.

알레시아에 대한 포위망 구축은 공격당하는 쪽인 베르킨게토릭스와 8만 명의 갈리아군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격하는 로마군이 가둬지는 형세가 되었다. 이러한 정세에 의해서, 포위망은 동시에 방어망이어야 했다.

안쪽 (알레시아에 농성중인 갈리아군)의 반격과 바깥쪽(외부에도 도착할 지원군)의 공격에 각각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안쪽 진지는 전체 길이가 11 로마 마일(16.5킬로미터), 바깥쪽 진지는 주변 고지대의 능선을 전략적인 관점에서 활용했기 때문에 길이가 14 로마 마일(21킬로미터)이었다. 안팎 양쪽이 방어진지로 둘러싸인 중간지대는 폭이 120미터에 이르렀다.

여기에 로마군이 틀어박히는 것인데, 폭이 120미터나 되는 이유를 카이사르는 다음 두 가지로설명하고 있다.

첫째, 휘하 병력에 비해 방어선이 길어서 모든 방어선에 병력을 배치할 수 없는 실정이기 때문에, 천막을 칠 장소와 비상시에 병사들이 쉽게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

둘째, 설령 알레시아 쪽이 진지 구축 작업을 방해하더라도 화살의 사정거리 밖에서 병사들이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으려면 그 정도의 폭이 필요했다는 것.



안전지대 양쪽에 구축된 진지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건설되었다. 안쪽 진지부터 살펴보면,

1, 알레시아와 가장 가까운 쪽에는 6미터 너비의 U자형 참호를 판다. 통상적인 로마식 참호는 바닥이 뾰죽한 V자형인데, 그것을 U자로 변형한 것은 측면을 비스듬한 경사가 아니라 수직으로 하여 적병이 기어오르기 어렵게 하기 위해서였다.

2. 알레시아와 로마군의 안전지대 사이에서 안전지대와 가장 가까운 쪽에는 너비와 깊이가 모두 4.5미터인 참호 두 개를 나란히 판다. 둘 가운데 알레시아 쪽 참호에는 공사가 끝난 뒤에 강물을 끌어들여 채운다.

3. 여기까지 공사를 진행한 다음 방벽 건설에 착수한다. 흙둔덕 위에 방책을 덧붙인 구조로, 3.6미터 높이로 세운 방벽 위는 흉간 성벽(중세시대의 성벽도 이것을 그대로 답습했다)으로 보강한다. 또한 흙둔덕과 방책의 이음매 바깥쪽에는 적병이 기어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사슴뿔 모양의 나무뿌리를 더욱 뾰족하게 깎아서 묻는다. 이렇게 쌓은 방벽 곳곳에 감시와 방어를 위한 망루를 세운다. 망루 사이의 거리는 평균 24미터였다.


여기까지만 해도 상당한 방어시설인데, 카이사르는 이것을 더욱 강화하는 방안을 생각했다.

로마군은 건설용 자재와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병사들을 멀리까지 보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작업하는 동안 자주 공격해오는 갈리아 병사들을 잔여 병력으로 막아내야 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소규모 병력으로도 방어할 수 있도록 방어시설 강화책을 수립한 것이다.


4. 우선 나무줄기와 나뭇가지를 많이 모아서, 그 끝을 뾰족하게 깎아 준비한다. 이어서 참호 바깥쪽을 따라 1.5미터 깊이로 구덩이를 판다. 그 구덩이 속에 뾰족한 끝을 위로 하여 나무줄기와 나뭇가지를 묻는데, 잡아당겨도 쉽게 빠지지 않도록 나무줄기와 나뭇가지를 서로 단단히 묶는다. 이 뾰족한 방책은 방어선 전체를 다섯 겹으로 둘러쌌다. 적이 거기에 발을 디디면 날카로운 꼬챙이에 찔릴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은 여기에 묘비라는 별명을 붙였다. 물론 적병의 묘비다.

5. 카이사르는 다시 그 바깥쪽에 깊이 90센티미터의 구덩이를 여러개 파게 했다. 이것은 늑대를 잡는 함정과 비슷한데, 바닥으로 내려갈수록 좁아드는 형태를 하고 있다. 이 구덩이 속에는 끝을 뾰족하게 깎고 불에 그을려서 단단하게 한 말뚝을 묻고, 땅 위에는 두 뼘 기리만 남겨둔다. 구덩이 깊이의 3분의 1까지는 흙으로 채우지만, 그 위에는 함정임을 숨기기 위해 작은 나뭇가지나 섶나무를 덮는다. 함정 배치는 주사위(주사위는고대 로마 시대에도 존재했다)의 5점 모양과 똑같고, 각 점의 간격은 90센티미터였다. 그것이 서로 엇갈리면서 무려 여덟 겹으로 배치되었다. 다시 말하면 8줄이나 되는 '주사위의 5점'이 포위망 전체를 둘러싸고 흩어져 있는 것이다. 병사들은 이것을 모양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백합'이라고 불렀다.

6. 카이사르는 그 바깥쪽에도 또 한 가지 방책을 설치했다. 30센티미터 길이의 말뚝 끝에 쇠갈고랑이를 박아넣은 것이다. 이것을 지상에는 쇠갈고랑이만 얼굴을 내밀도록 묻었는데, 한두 개가 아니라 사방에 어지럽게 흩어놓았다. 이 쇠갈고랑이가 정육점에서고기를 대말 때 쓰는 갈고리와 비슷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여기에도 별명을 붙여 '살꽂이'라고 불렀다. 물론 갈고리에 꽂히는 것이 적병의 살이기를 기대하고 붙인 별명이다.

바깥쪽 진지에도 안쪽과 같은 일곱 겹의 방책 공사가 같은 순서로 되풀이되었다. 


재현된 로마군의 방책


전대미문의 이 포위망은 완성되기까지 한달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계획대로 한달여에 걸쳐 포위망을 완성한 후, 카이사르는 병사들에게 휴식을 허락한다. 그는 다시 한달 이내에 승부가 결정되리라 예상하고, 30일분 식량과 말의 사료를 비축해두라고 명령한 후 대기상태에 돌입한다.

알레시아에 틀어박힌 갈리아인들은 여유롭게 대기할 형편이 아니었다. 베르킨게토릭스가 배급제를 시행했는데도 식량은 벌써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마군의 봉쇄가 완벽하여, 외부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8만 명의 병사에 주민들까지 먹여야만 했다. 그러나 구원병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봉쇄된 알레시아에서는 척후병조차 내보낼 수 없었다. 구원군이 조직되었는지 어떤지도 베르킨게토릭스는 알 도리가 없었다.

외부에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기병 대부분을 내보낸 것도 너무 경솔한 짓이었다. 기병이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봉쇄망을 뚫고 결사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러 가려면 적어도 기병 몇 기는 필요하고, 게다가 로마군에게 붙잡힐 위험을 고려하면 몇 차례로 나누어 보낼 필요가 있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많은 점에서 남다른 재능을 보였지만, 정보를 차단당했을 때의 불리함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모양이다. 외부 사정을 전혀 알 수 없는 채 농성중인 갈리아인들은, 비축된 식량이 줄어들수록 불안은 그에 반비례하여 날로 늘어나고 있었다.

베르킨게토릭스가 소집한 회의에서는 항복할 것이냐, 죽음을 각오하고 나가 싸울 것이냐를 놓고 참석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라졌다. 그래도 결국은 구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참고 견디기로 결론이 내려갔다.

그렇지만 식량이 거의다 떨어진다. 결국 해결책으로  알레시아 주민들을 모두 성 밖으로 내보내게 되었다.

성에서 내쫓긴 1만여 명의 남녀노소는 로마군 진지로 찾아와, 노예가 될 테니까 먹을 것을 주고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그러나 결전을 앞두고 있는 카이사르로서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는 수비병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게 했다.

양쪽에서 거부당한 난민들은 강을 건너 산과 들로 흩어져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계절은 여름이라, 난민들도 그리 비참한 말로를 맞지는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농성군은 몰랐지만, 그동안 구원군 편성 작업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기병들을 각자 고향으로 보내면서 싸울 수 있는 갈리아인은 전부 모으라고 명령했지만, 이것은 부족장들의 판단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병력이 많을수록 군량을 확보하기도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구원군 참가를 결정한 부족의 수는 50개에 달했고, 부족별로 할당된 병력의 합계는 보병이 15만에 기병도 8천기에 이르렀다.

아퀴타니아 지방을 제외하면, 갈리아 전체가 카이사르에 대항하여 일어난 셈이다.

갈리아 전쟁 첫해에 카이사르에게 패한 헬베티족조차도 8천 명을 제공했다. 3년 전의 제1차 브리타니아 원정 때 카이사르가 외교사절로 파견할 만큼 신뢰했고, 그 공로로 로마군에 대한 군량제공 의무까지 면제받은 콤미우스까지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갈리아인의 민족의식을 자극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베르킨게토릭스의 기본 전략은 멋지게 성공한 것이다.

25만 보병과 8천기의 기병은 네 명의 사령관이 나누어 지휘했다.

가장 많은 3만 5천 명의 병력을 제공한 하이두이족에서 두 명, 역시 3만 5천 명의 병력을 제공한 아르베르니족이 한 명, 여기에 아트레바테스 족장 콤미우스를 합하여 모두 네명이다. 하이두이족 사령관의 이름은 비리도마루스와 에포레도릭스, 아르베르니족 사령관은 베르킨게토릭스의 사촌인 베르카시벨라우누스였다. 아트레바테스족은 4천의 병력밖에 제공하지 않았는데도 족장 콤미우스가 네 명 가운데 들어간 것은 그가 카이사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하이두이족의 땅에 집결한 구원군은 이 네 장군의 인솔을 받아, 중부 갈리아의 산야를 뒤덮을 듯한 기세로 알레시아를 향해 달려갔다.

기원전 52년 9월 20일, 구원군은 마침내 알레시아가 눈앞에 보이는 지점에 도착했다. 카이사르가 달력을 제정하기 전이기 때문에, 9월이라해도 사실상의 계절은 아직 여름이었다. 지휘관들이 포진한 고지대는 알레시아와 같은 높이여서, 알레시아에 틀어박힌 농성군도 재빨리 알아차렸다.

구원군이 도착하자 8만 명의 농성군은 미칠 듯이 기뻐했다.

카이사르는 5만 명도 안되는 병력으로 안팎을 합하여 34만에 달하는 적과 싸우게 되었다. 30일 남짓한 준비기간을 가진 알레시아 공방전은 사실상 사흘 동안의 싸움으로 승부가 결정되었다.



갈리아 구원군은 카이사르가 구축한 진지에서 1.5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고지대에 본영을 설치했다. 고지대에서 평원으로 내려가는 능선에는 보병을 배치했다. 그리고 궁병의 보조를 받는 기병 전체를 평원으로 내보냈다.

카이사르도 당장 기병을 내보냈다. 보병은 여차할 때 진지를 방어할 수 있도록 미리 정해둔 포위망 요소요소에 배치했다.

이리하여 카이사르와 갈리아 전체의 첫 대결은 기병전으로 시작되었다.


양군의 보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병전은 정오부터 해질녘가지 계속되었다. 갈리아 기병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탓도 있어서, 자신의 명예를 걸고 선전했다. 하지만 카이사르 휘하의 게르만 기병대는 수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했는데도 그 활약이 눈부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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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 기병 - 알레시아 공방전의 최대 공로자


전황이 진전됨에 따라 우선 궁병들이 포위되어 죽었다. 기병조차도 죽고 싶지 않으면 아군 진영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알레시아에서 기세좋게 몰려나온 보병들도 로마군 진지에는 접근하지도 못했고, 무모하게 접근을 시도한 자들은 방벽 너머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아 모조리 죽었다. 그들은 바깥쪽 기병이 퇴각한 것을 알자마자 알레시아 안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첫 대결은 로마군의 우세로 끝났다.이튿날에는 해가 떠 있는 동안은 갈리아가 싸움을 걸어오지 않았다. 사다리나 갈고리 같은 공성기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된 뒤, 한밤중에 평원 쪽에서 로마군 진지를 향해 쳐들어왔다.

그들이 내지르는 함성은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는 동시에, 알레시아에 틀어박힌 동포들에게 전투 개시를 알리려는 목적도 있었다. 베르킨게토릭스도 성벽을 넘어 보병대를 내보냈다. 그러나 로마군은 한밤중에도 허를 찔리지 않았다. 졸병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수비 지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휘관이 명령하지 않아도 모두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미리 배치해둔 투석기에 달라붙었다. 돌멩이나 납덩어리나 말뚝을 적에게 쏘아대는 것이다.

갈리아군은 방벽쪽을 몇 겹씩 둘러싸고 있는 장애물 때문에 접근하지는 못했지만, 안전한 지대에서 화살을 퍼붓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워낙 수가 많기 때문에 화살도 비오듯 쏟아진다. 로마군은 어둠 속이라 적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도 (갈리아 전쟁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위험보다 보이지 않는 위험에 더 마음이 흐트러지기 쉬운 법이라고. 그래도 카이사르 휘하에서 전투 경험을 쌓은 군단장들은 총사령관의 명령이 없어도 독자적으로 판단하여, 지원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곳에 유격대를 보냈다.

아직 30세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조차 야간 기습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지원병을 파견해야 할 지점을 정확히 판단했다. 결국 갈리아군은 바깥쪽에서도 안쪽에서도 로마군 진지를 돌파하지 못했다. 새벽이 다가오자 그들은 전사자를 남겨놓고 부상자를 질질 끌면서 진영으로 물러났다. 로마군의 손실에 비해 갈리아군의 손실은 엄청났다. 베르킨게토릭스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는 두 차례에 걸친 안팎의 협공을 두 번 다 물리친 셈이다.

바깥쪽 갈리아군의 수뇌진은 공격이 두 번이나 실패하자, 다른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작전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비로소 그들은 알레시아 주변 지형을 알아야 할 필요성을 깨달은 모양이다. 그들은 현지 주민을 불러서 지형과 로마군 진지의 상태 따위를 캐물었다. 그 결과, 완벽해 보이는 로마군의 포위망에도 딱 한 군데 허술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알레시아의 북쪽을 흐르는 강 건너편, 즉 알레시아의 배후에 있는 언덕이었다.

그 언덕은 포위망으로 둘러싸기에는 너무 넓어서, 카이사르도 어쩔 수 없이 전략적으로 불리한 언덕 중턱에 보루를 쌓아 지키고 있었다. 갈리아군은 카이사르의 '아킬레스 힘줄'인 그 부분에 제3차 공격을 집중시키기로 결정했다.

카이사르도 그 부분이 약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2개 군단 1만 명의 병력, 즉 그가 가진 전체 병력의 5분의 1이나 되는 전력을 이곳에 집중 배치해놓고 있었다. 적은 정예병력 6만을 여기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지휘는 베르킨게토릭스의 사촌인 베르카시벨라우누스가 맡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전쟁터가 된 남쪽과 동쪽의 평원에서는 나머지 병력이 동시에 공세를 편다. 또한 알레시아에서도 8만 명이 공세로 나올 게 분명하니까, 갈리아군은 이튿날 정오에 세 방향에서 동시에 로마군을 공격하는 작전을 펴게 되었다.

6만의 정예부대를 지휘하게 된 베르카시벨라우누스는 밤 9시에 몰래 진영을 나와, 로마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먼 길을 우회하여 북쪽으로 돌아갔다. 예정지에 도착한 것은 이튿날 동이 트기 전이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정오가 될 때까지 휴식을 취하면서 대기하라고 명령했다.

정오, 알레시아 공방전 최대의 격전이 세 군데에서 동시에 막을 올렸다.

이날의 중대함을 재빨리 알아차린 카이사르는 세 방향을 모두 시야에 넣을 수 있는 망루 위로 올라가 총 지휘를 했다. 카이사르는 결전을 총지휘할 때면 늘 그렇듯이 진홍빛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적의 눈길을 끌 위험은 있지만, 지금과 같은 경우에는 아군 병사들이 언제 어디서나 총사령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카이사르의 진홍빛 망토가 바람에 펄럭이기 시작하면 그의 부하들에게는 결전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였다.

전쟁터를 시야에 모두 넣으면 전투의 성격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다. 갈리아군은 안에서도 밖에서도 카이사르의 포위망 돌파를 노리고 있다. 그러나 로마군은 너희들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면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다. 승부는 누가 먼저 목표를 관철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카이사르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곳에 유격대를 잇따라 내보냈다. 유격대는 대대(코호르스) 단위(1개 대대는 약 500명)로 편성되고, 군단장(레가투스)급 장교들이 몇 개 대대를 이끌고 달겨간다.


하지만 최대의 격전지가 북쪽 언덕이라는 것은 공격 개시와 동시에 분명해졌다. 그곳을 공격하는 갈리아군은 구릉의 높은 곳에서 치고 내려온다. 이와는 반대로 로마군은 낮은 곳에 설치할 수밖에 없었던 보루나 참호에서 진지를 지키는 상태가 되었다.

6만 명의 갈리아 정예 병력은 일제히 돌을 쏘아 로마군의 기를 꺽어놓고, 방패를 나란히 늘어 세운 거북등 대형으로 쳐들어왔다. 6만 명을 한꺼번에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전력을 차례로 투입하는 파상공격이 되풀이되었다. 1만 명이 채 못되는 로마군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병사들은 담당 지점에 계속 달라붙은 채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군 쪽에서도 화살도 투창도 거의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이 최대 격전지에 부장 라비에누스가 이끄는 6개 대대를 보냈다. 라비에누스는 도저히 지킬 수 없을 것 같으면 병사들을 보루나 참호에서 내보내 반격으로 나가되, 다른 길이 없다고 판단될 경우에만 최후의 수단으로 그 방법을 택하라는 카이사르의 엄명을 받았다.

이제 전쟁터를 한눈에 바라다볼 수 있는 장소에서 총지휘를 맡을 단계는 지났다.

망루에서 내려온 카이사르는 말에 올라타고 전쟁터를 뛰어다니며, 방어에 열심인 병사들을 독려했다. 총사령관은 지금까지 치른 그 모든 전투의 성과가 오늘의 이 한판 싸움에 달려 있다고 큰 소리로 격려했다.

베르킨게토릭스가 이끄는 알레시아 농성군의 반격도 그날은 맹렬하기 짝이 없었다.

늑대를 잡는 함정은 이미 시체로 메워져 있었다. 바깥쪽 갈리아군의 공격도 격렬함에서는 지난번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여름 태양 밑에서의 전투다. 북적거리는 대군은 카이사르가 몇 겹으로 둘러친 장애물을 돌파하여, 던지는 갈고리를 방책에 걸고 잡아 당겼다. 그래서 방책이 쓰러지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일곱 겹의 장애물을 둘러친 포위망은 로마군 병사의 수를 고려하면 경이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잘 버텨냈다.

카이사르는 고전하고 있는 곳에 차례로 지원군을 보냈다. 데키우스 브루투스가 몇개 대대와 함게 파견되었다. 다른 곳에는 군단장 파비우스가 역시 몇 개 대대를 이끌고 지원하러 갔다. 카이사르 자신도 휘하 병사를 이끌고 지원하러 달려갔다. 파견할 수 있는 군단장과 대대도 이제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절하고 신속하게 유격대를 파견한 덕분에, 고전하고 있던 아군 병사들도 기운을 되찾았다. 위태로워 보인 곳에서도 로마군이 적을 물리치는 추세로 바뀌었다.

카이사르는 이제 자신도 라비에누스를 파견해둔 최대 격전지로 갈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신선한 전력을 투입하여 이 격전지에서 단번에 승부를 결정짓기로 결심한 그는 가까운 진지를 지키고 있던 4개 대대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명령했다. 또한 기병대를 양분하여, 절반은 그가 이끌고, 나머지 절반은 포위망 밖으로 나가서 갈리아 정예부대를 배후에서 공격하라는 명령과 함께 북쪽 전선으로 보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아비에누스가 보낸 전령이 달려왔다. 부장 라비에누스는 더 이상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공격하러 나가겠다는 결심을 알려온 것이다. 라비에누스를 지원하려면 이제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카이사르의 진홍빛 망토 때문에, 6만 명의 갈리아 병사들도, 그들을 지휘하는 베르카시벨라우스도 당장 카이사르가 도착한 것을 알았다. 전투는 카이사르의 도착으로 더한층 치열해졌다. 적군과 아군이 지르는 함성은 하늘을 지르고, 반격으로 돌아선 로마군 병사들은 창을 버리고 칼로 싸웠다. 카이사르를 따라온 4개 대대도 당장 전선에 투입되었다. 백병전이 한창 전개되고 있을 때, 카이사르가 배후에서 공격하도록 내보낸 로마군 기병대가 적의 배후에 모습을 나타냈다.

6만 명의 갈리아군은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로마군 기병대가 덤벼들었다. 앞뒤에서 협공당하게 된 갈리아군에게는 이제 더 이상 6만 명의 위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부장은 전사했고, 대장인 베르카시벨라우누스는 생포되었다. 6만 명의 갈리아군이 전멸했다. 극소수의 병사들만이 본영으로 달아날 수 있었을 뿐이다.

베르킨게토릭스가 이끄는 8만 명도 눈앞에서 벌어진 완패에 기가 꺾여, 사령관의 명령도 기다리지 않고 성 안으로 돌아가버렸다. 남쪽 평원에서 로마군의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격투를 벌이고 있던 갈리아군 본대도 북쪽 전선에서 완패한 것을 알자마자 진영으로 돌아가는 것도 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냉정을 기하는 것이 평소의 카이사르지만, 이때만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단언하고 있다.

만약 아군 병사들이 격투의 연속으로 기진맥진해 있지만 않았다면, 적군 전체를 완전히 격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한밤중이 지났을 때 기병대가 추격에 나섰다. 로마 기병대는 패주하는 적의 후미를 습격했다. 많은 병사가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그것을 모면한 갈리아 병사는 각자 고국으로 달아났다.

5만 명도 채 안되는 전력으로 안쪽 8만 명, 바깥쪽 26만 명을 합하면 34만 명이나 되는 적을 격파한 것이다. 수적 비례만으로도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맞먹는 승리였다.

하지만 앞 뒤 양쪽의 적에 대해 거둔 승리로는 전쟁 역사상 처음이었다. 이 의미를 누구보다도 이해한 것은 구원군의 패주를 직접 목격한 베르킨게토릭스였을 것이다. 이튿날 그는 회의를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베르킨게토릭스는 이렇게 말했다. 카이사르와 대결에 갈리아 전체를 끌어들인 것은 나 자신의 이익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갈리아인의 자유를 위해서였다고.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제안했다.

운명을 거역할 수는 없다. 나를 죽이거나 산채로 넘겨주고 다른 사람들의 구명을 카이사르에게 요구해라.


사절이 찾아와 항복의 뜻을 밝히자, 카이사르는 무기와 부족장들을 넘겨준다는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들였다. 싸움은 끝났지만 아직도 전투 흔적이 생생한 로마군 진지 앞에, 갈리아군 총사령관의 화려한 복장을 갖춘 베르킨게토릭스가 말을 타고 나타났다.


항복하는 베르킨게토릭스1


말에서 내린 베르킨게토릭스와 야전용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카이사르는 여기서 처음으로 얼굴을 맞댄 셈이다.


갈리아 전쟁기에서 그토록 공정하게 이 젊은 적장의 재능을 인정한 카이사르가 이 장면에 대해서는 다음 한 줄을 기록했을 뿐이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자진해서 포로의 몸이 되었다.

긍지 높은 갈리아인은 무기를 버리고, 로마의 승리자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항복하는 베르킨게토릭스2


키케로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젊은 시절의 자신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젊은이를 사랑했다고 한다. 이 젊은이는 아마 카이사르가 군단장으로 삼고 싶어할 만한 인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런 인재가 아군에는 하나도 없고 적에만 있었던 사례로 가득 차 있다.

알레시아 공방전에 참가한 갈리아 유력자들 가운데 포로 신세가 된 것은 베르킨게토릭스 한 사람뿐이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을 희생하여 동포를 구하려 한 베르킨게토릭스의 충정을 존중한 것이다. 물론 앞으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내린 판단이기도 했지만.

수도 로마로 압송된 베르킨게토릭스는 툴리아눔(Tullianum)의 감옥에 갇혔다. 그후 내전에서 폼페이우스를 물리친 카이사르의 개선식이 기원전 46년에 거행될때, 개선식에 전리품으로 참석된 뒤 사형에 처해졌다. 



카이사르의 개선식을 기념하여 발행된 화폐에 갈리아인이라고만 적힌 남자의 옆얼굴이 조각되어 있다.


항복하는 베르킨게토릭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