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틀빅혼 전투
1876년, 인디언 학살자 커스터 중령과 인디언이 벌인 전투다.
수족이 신성시 여기는 다코타 지역을 미 정부가 보호해주기로 했지만
금을 찾아 이곳으로 들어온 백인들을 묵인해주는 바람에 갈등이 시작되었다.
마침내 미 정부가 커스터 중령을 파견하여 인디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에 수족과 샤이엔족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미군의 진입로를 막았다.
그러자 미군이 작전을 변경하여 우회하면서 수족의 본거지를 포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인디언들의 공격력에 압도당한 미군은 거의 궤멸 당하고 만다.
이 승리로 수족의 영웅 시팅불의 강력한 전투력이 아메리카 전체에 알려졌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물러난 미군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더 강력한 군대를 보냈다.
결국 인디언의 마지막 저항은 더 비극적인 운명으로 끝을 맺었다.
▶ 운디드니 학살
1890년 수족 인디언의 예언자 와보카가 인디언의 부활의식을 제창했다.
이것은 급진파인 키킹베어에 의해 수족 전체에 인디언 운동으로 확산되었는데
이를 지원했던 수족의 대추장 시팅불이 미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지도자를 잃은 수족이 뿔뿔이 흩어졌고, 그중 한 무리의 일가가 교회를 습격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11명의 백인을 인질로 잡고 미 정부와 협상을 벌였다.
미군의 거짓 약속으로 백인들은 풀려났고, 이들은 며칠후 현장에서 투항했다.
미 기병대 700명에게 포위된 인디언 300명은 아녀자와 어린이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무장해제를 요구당한 인디언 중 한 젊은이가 끝내 총을 내려 놓지 않았다.
백인들이 이 총을 뺏으려고 달려들었고 몸 싸움 와중에 백인 한 명이 총을 발사했다.
이것을 신호로 언덕 위에서 기관총 세례가 퍼부어졌고 인디언 150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희생자들 속에는 어린이와 여자들이 대다수 섞여 있었다.
▶ 비탄의 길 고행
1828년 체로키족 마을에서 꼬마가 금덩어리를 가지고 노는 것을 백인이 발견했다.
이후 백인들은 이곳에 금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들을 쫓아내기로 했다.
이들의 땅을 지키고자 법적투쟁을 전개했던 백인 변호사는 강제로 투옥되었고
체로키족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려준 대법원장 존 마샬도 정부에 의해 무시되었다.
1838년, 백인의 총부리 앞에서 체로키족 1만 6천 명은 수천km의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추위와 질병에 죽어간 사람들은 무려 4천여명에 이르렀고 시신은 눈물의 길에 묻혔다.
험난한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도착한 곳은 오클라호마의 인디언 보후구역이었다.
눈물과 피로 범벅된 이 비탄의 길을 호송한 백인 출신의 한 장교는 이렇게 회고했다.
"난 그들의 눈물과 죽음을 옆에서 지켜봤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엔 절대 웃지 않을 것이다."
체로키족의 한 지도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백인들이 한 짓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 학살에서 살아남은 인디언 여성의 절규
“우리는 도망치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들소라도 되는 것처럼 무조건 쏘아 댔다.
미군들은 비열한 자들이었다. 아녀자에게 총을 쏘아 대다니!
인디언 전사라면 백인 어린이들에게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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