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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와 파키스탄의 집안이야기

구름위 2013. 3. 21.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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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카슈미르는 하나의 나라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종교와 정치적인 이해가 복잡하게 얽힌 나머지 콩가루 집안이 되어 버렸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시간을 되돌려 1940년대로 가보겠다.

 

1. 분가를 선언한 파키스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준비하는 인도는 꿈에 부풀었다.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카슈미르와 함께 대가족이 탄생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장남 파키스탄이 따로 살림을 차리겠다고 선언했다.

자기들은 애초에 이슬람권이니까 힌두교를 믿는 인도와는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인도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고, 파키스탄은 폭동을 일으켰다.

이 후 양국의 통합을 주장했던 간디가 암살당하자 상황은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인도와 파키스탄은 1947년 8월에 분리 독립하였고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양측에 섞여 살던 수 많은 무슬림과 힌두교도인이 강제 이주를 당했던 것이다.

 

독립을 선언한 파키스탄은 인도 동쪽에 있는 방글라데시와 한 국가가 되었다.

서로 지역적으로 떨어져 있었지만 종교적인 동질감으로 인해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이다.

이로써 인도를 사이에 둔 양 쪽은 신혼의 단꿈에 빠졌다.

 

2. 파키스탄의 뒤통수를 친 카슈미르

 

한편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지역엔 카슈미르가 있었다.

원래 이곳은 대다수 주민들이 무슬림이라 파키스탄과 통합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이 지역의 통치자가 소수의 힌두교도였다는게 문제였다.

 

카슈미르 지도자는 적당한 때를 기다리다가 그해 10월, 인도 편입을 결정했다.

그러자 대다수 주민들이 이에 반발하며 폭동을 일으켰고

파키스탄도 기다렸다는 듯이 반군에게 무장 지원을 해주었다.

이에 인도의 정부군이 투입되었고, 양측은 1차 분쟁에 돌입했다.

 

1년 후 양측은 UN의 중재하에 6대 4의 비율로 카슈미르를 분할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적게 분할받은 파키스탄은 여기에 불만을 가졌고

또한 국경선도 명확하지 않아 분쟁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1964년, 파키스탄의 도발로 2차 분쟁이 벌어졌고

우위를 점하던 인도는 중국이 파키스탄의 편을 들어주자 당황하게 되었다.

중국과 인도는 그 이전에 두 차례 국경분쟁을 벌인 바 있었다.

결국 UN의 중재로 양측은 정전협상을 맺었고 UN의 감시단이 파견되었다.

 

3. 이혼을 요구한 방글라데시

 

한편, 파키스탄 내부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방글라데시에 대한 파키스탄의 차별정책이 고쳐지지 않자

1971년,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에 전격 이혼을 선언한 것이다.

 

이를 간과할 수 없었던 파키스탄은 곧바로 방글라데시와 전쟁에 들어갔고

인도는 방글라데시의 편을 들어주며 카슈미르에서 제3차 분쟁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방글라데시가 독립에 성공하였고 양측은 핵 군비경쟁으로 치달았다.

 

4. 찬물을 끼얹은 소련

 

인도와 파키스탄이 핵무기 경쟁에 돌입한 사이 아프간에서 사고가 터졌다.

1979년 12월, 소련군이 10만 병력을 이끌고 아프간을 점령해버린 것이다. 

그러자 소련의 남진에 위협을 느낀 인도와 파키스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야~ 우리 그만 싸우자. 이러다가 소련에게 당할라!"

 

그렇게 위기를 공유한 양측은 카슈미르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작은 충돌이 끊이지 않았지만, 아무튼 양측은 최선을 다했다.

결국, 소련의 아프간 침공으로 인해 인도와 파키스탄은 분쟁을 멈추게 되었다.

 

5. 불씨를 살리는 카슈미르

 

한편, 파키스탄과 분쟁을 마무리한 인도에게는 여전히 골칫거리가 남아 있었다.

파키스탄은 점령지역민들이 모두 이슬람교도였기 때문에 걱정이 없었지만,

63%의 카슈미르를 차지하고 있었던 인도는 이슬람 반군에 시달려야 했다.

 

이들이 더욱 과격해진 이유는 파키스탄이 인도와 우호적으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상황이 굳어진다면 인도령 이슬람인들에게 희망은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더욱 이를 악물고 인도의 본토까지도 테러의 목표로 삼았다.

결국, 물과 기름같이 양립할 수 없는 두 종교는 지금도 카슈미르를 피로 물들이고 있다.

 

6. 다시 훑어보는 콩가루 집안사

 

할아버지(인도)가 영국의 전셋집에서 나와 내 집을 마련하고자 했으나

아빠(파키스탄)와 엄마(방글라데시)가 분가를 선언했다.

이 와중에 눈치를 보던 카슈미르가 할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이때부터 할아버지와 아빠는 카슈미르의 영유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고

아빠의 편을 들어준 중국집 아저씨 때문에 할아버지의 혈압은 더욱 올라갔다.

이 후 막걸리를 사온 동네 이장(UN)에 의해 카슈미르는 분할되었다.

 

24년 후, 주말부부로 지내던 엄마가 아빠에게 각방을 쓰자고 요구했고

이를 지지하던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엄마는 이혼에 성공하여 방글라데시를 세웠다.

이 때문에 할아버지와 아빠의 사이는 더욱 험악해졌고 핵 농사에 들어갔다.

(방글라데시는 벵골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그러다가 시베리아 불곰이 아프간을 덮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를 계기로 할아버지와 아빠는 화해를 하게 되었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카슈미르가 할아버지에게 반항하기 시작했다.

결국 콩가루 집안의 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