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Canada)의 시련(試練)
1. 프랑스 령 캐나다
1492년 이른 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래 라틴아메리카와 앵글로아메리카의 성립
그리고 미국의 독립 및 영토팽창과 연관된 캐나다와의 관계는 앞글 곳곳에서간헐적으로 밝힌 바 있으나 이를 캐나다의 입장과 상식전인 수준에서 정리해 보고자한다.
캐나다라는 명칭은 이로쿼이족(Iroquois - 族) 인디언의 언어(言語)인 카나타(Kanata)에서유래되었다고 하는데 그 뜻은 "마을 혹은 부락(部落)"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북미대륙의40%를 찾이하고 있는 캐나다의 국토면적은 9,970,610㎢, 세계에서 러시아 다음의 넓은 영토는 중국보다 크지만 인구는 고작 30,626,000 명(1999년 기준)에 불과하고 인구밀도 역시 ㎢ 당 약 3.3명으로 매우 낮은 편이다.
이것은 기후 등의 자연조건이 인간생활의 거주환경을 결정한다는 이른 바 외쿠메네(?umene- 거주가능 공간)가 매우 적은 반면 사람이 살지 못하는 아뇌쿠메네(거주불가 공간)가 널리 분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지금의 캐나다에서도 북위 49도에서 55도 사이의 약 120만㎢ 지역에 전인구의 90%가 밀집되어 있다. 이중에서도 강수량이 많은 동쪽의 평야지역에 3/4이 살고있고 나머지 1/4은 산이 많고 건조한 서부에 분포되어 있으며 지형적인 영향으로 다섯 개의 인구밀집 지역이 형성되어있다.
다시 말하면 전국토의 12%에 불과한 지역에 대다수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미국의 대도시와 연결된 남쪽 국경지역에 동서로 염주알 처럼 연결된 곳곳에 사람들이 모여있고 나머지 국토는 툰드라 등의 불모의 땅이라는 것이다. 이런 곳에 기록상 유럽인들이 들어온 것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근의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하면 캐벗 이전에도 바이킹(Viking)들이 이곳을 찾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유럽인으로서 공식적인 기록을 남긴 것은 영국이고 뒤이어 프랑스인들이 들어왔다.
1497년에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항해가 조반니 카보토(Caboto, Giovanni / 1450~1498)가 영국으로 건너가 존 캐벗(John Cabot)이란 이름으로 귀화, 당시의 영국왕 헨리 7세의 허락을 받고 아시아와의 통상로를 개척하기 위해서 브리스틀항을 떠나 52일간의 항해 끝에 케이프 브레던섬(Cape Breton I)을 발견하여 콜럼버스에 앞서 아메리카대륙에 도달한 최초의 유럽인이되었다.
그 이듬해인 1498년에는 두 번째 항해를 떠나 그린란드의 동·서해안을 탐험, 배핀섬과 뉴펀들랜드섬에 도달하여 북위 38 °선까지 남하하면서 아메리카대륙 해안을 탐험하였다. 하지만 그 자신은 이곳이 신대륙인지는 전혀 몰랐고 원주민과의 접촉도 없었다. 캐벗 자신은 인도와 중국,그리고 일본으로 가는 중간 어디쯤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16세기에 들어와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조반니 다 베라차노(Verrazzano,Giovanni da / 1485~1528)라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출신의 항해가를 후원하여 신대륙을 탐험케 하였는데 베라차노는 1523년 원정대를 조직,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뉴펀들랜드에 이르는 북미 연안을 탐험하였으며 24년 뉴욕만(灣)·내러갠셋만(灣) 등을 발견하고 그해 7월 프랑스로 돌아와, 신대륙에 대한 소유권을 프랑수아 1세에게 바쳤고 29년 베라차노가 이곳의 지도를 작성하면서 갈리아노바(Gallia nova - 뉴프랑스를 뜻함)라는 지명을 처음으로 부쳤으며 이것이 뉴프랑스의 출발이다.
1534년4월 프랑수아 1세(Francois I / 1515 ~ 47)는 자크 카르티에(Cartier, Jacques / 1491 ~ 1557)에게 2척의배와 60명의 선원을 주어 생말로를 출범케 하였고 그해 10월 10일 카르티에는 뉴펀들랜드(Newfoundland)에 상륙, 벨아일 해협을 항해하여 마그달렌 및 프린스에드위드의 2개 섬을 발견하였다.
또한 영국의 캐벗이 1497년에 발견한 캐나다 해안에 상륙하여 십자가를 세우고 프랑스왕령이라선언하고 황금을 찾아 나섰으나 혹독한 캐나다의 겨울 추위를 감당할 수 없어서 인디언 두명을 사로잡아 곧 귀국해 버렸다.
프랑수아 1세가 카르티에를 보낸 것은 소문으로만 나돌던 아시아 어디에 무진장으로 있다는 황금과 향료를 찾기 위해서였는데, 카르티에가 데리고 온 인디언 두명으로부터 금과 은 구리 등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에 매혹되고 말았다.
호기심과 기대에 부풀었던 프랑수아 1세는 1535년 세척의 배와 120명의 선원을주어 카르티에를 다시 캐나다로 보냈다. 대서양을 횡단한 카르티에는 세인트로렌스강(Saint Lawrence R.)을 따라 퀘벡에 이르러 어느 인디언 마을 근처에 기지(基地)를 정하고 9월에는 소규모 탐험대를 조직하여 몬트리올 섬까지 전진, 급류를 만나자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부근의 인디언 마을에 잠시 들렸다가 기지로 돌아와 겨울을 보냈다.
그해 겨울을 보내는 동안 25명이 괴혈병으로 죽었고, 강물이 녹기를 기다렸으나 인디언 풍속을 잘 몰랐던 프랑스의 탐험대는 원주민들로부터 미움을 샀다. 그리하여 막상 5월이 되어 얼어붙었던 강물은 풀렸지만 더 이상의 탐험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카르티에는 이로쿼이족의 몇몇 추장을 사로잡아 프랑스로 돌아왔고 그로서는 내륙 깊숙한 곳 어디에는 금과 은 등의 풍부한 재화가 있으며, 길이가 약 3,200㎞에 이르는 커다란 강이 아시아로 통하는 것 같다는 것밖에 보고할 수가 없었다.
천성이 명랑하고 호방한 무인의 기질을 가졌으면서도 예술적인 감각과 기지가 뛰어나 프랑스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불렸던 프랑수아 1세로서는 이런 카르티에의 보고에 만족할 수 없었고 황금과 신대륙에 대한 꿈 또한 지울 수가 없었다.
루아르 강변에 르네상스 풍의 성관(城館)을 세우고 많은 여자들을 사랑했던 그로서는 많은재화가 필요했던 것도 신대륙에 대한 집념을 접을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가 되었기때문이다.
그런데 당시의 유럽역사는 프랑수아 1세와 스페인왕으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자리까지 찾이하고 있었던 카를 5세와의 싸움으로 일관되고 있었다.
스페인이 신대륙에 대한일체의 권리를 주장하자 이번에는 카를 5세의 그 스페인의 권리주장에 대항하기 위해 로베르발 경(卿) 장 프랑수아 드 라 로크라는 귀족에게 카르티에가 발견한 곳에식민지를 세우라고 명령했고 카르티에를 부관으로 임명했다. 카를 5세에 대한 적대감이 다시 신대륙에 대한 관심으로 모아졌던 것이다.
1541년·8월 카르티에는 다시 캐나다에 도착, 퀘벡 위쪽에 기지를 세우고 그해 겨울을 보냈는데 엄격한 규율을 내렸으나 그 부하들의 방종한 태도는 다시 원주민들의 반감을 사게되어 본국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44년에 다시 탐험대를 보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프랑수아 1세의 신대륙에 대한꿈은 훗날 프랑스가 캐나다를 통치 소유하게 되는 기초만을 닦았을 뿐 별다른 소득없이 1547년 3월 그의 죽음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약 1세기 반동안 프랑스로서는 국내정치의 복잡한 사정으로 신대륙에 대한관심은 뒤로 미루다가 부르봉왕조를 연 앙리 4세 때에 이르러 다시 북미대륙에 진출하기 시작,1604년 프랑스인 사뮤엘 드 샹플랭(Champlain, Samuel de / 1567? ~ 1635.12.25)이 아카디아(노바스코샤)를 건설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평민출신인 샹플랭은 프랑스에서 신구교도간의 오랜 싸움인 위그노전쟁(HuguenotsWars / 1562 ~ 68)에 참가 공을 세운 것이 부르봉왕조를 연 앙리 4세(Henri IV /1589∼1610)와 인연이 되어 1603년 왕명으로 캐나다 강(현재의 세인트로렌스강)의 탐험에 나섰고 1604년에는 신대륙 최초의 프랑스 식민지 아카디아(Acadia)를 1608년에는 퀘벡을 건설하여 뉴프랑스의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같은 시기 영국에서도 버지니아에 식민지를 세웠고 매사시추세츠를 중심으로 뉴잉글랜드가 건설되고 있었다. 당시의 영국에서는 소위 제 1차 인콜로저운동이 광범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이로 인해 토지를 잃은 스코틀랜드계의 농민들이 이곳으로 몰려오면서 아카디아는 1621년 노바스코샤(Nova Scotia)로 이름이 바뀌었다. 노바스코샤란 명칭은 새로운 스코틀랜드(New Scotland)라는 뜻의 라틴어라고 한다.
아카디아건 노바스코샤건 이것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 지방의 영유권을 두고 분쟁이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613년 샹플랭은 오타와 강을 거슬러 올라가 휴런호(L,Huron. 湖)를 발견했고 내륙 깊숙이 진출할 계획을 세웠다가 영국의 개입으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1629년 루이 13세의 총신 리슐리외(Richelieu, Armand-Jean du Plessis, cardinal et duc de / 1585 ~ 1642)가 뉴프랑스회사(Company of New France)를 세우면서 다시 활기를 띄었다.
일백회원사(Compagnie des Cent-Associés)로 더 잘 알려진 뉴프랑스회사는 세인트로렌스강 유역의 지배권 및 모피(毛皮)무역의 독점권을 얻었으나 같은 해 영국군의 침입으로 퀘벡이 점령되고 프랑스의 식민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는 듯 하다가 1632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체결된 생제르맹앙레 조약(Treaty of Saint-Germain-en-Laye)에 의해 영토는 프랑스에 반환되고 프랑스의 식민사는 계속 되었다.
그러나 비버(beaver)의 가죽이 유일한 상품이었던 뉴프랑스회사로서는 적자를 면할 수가 없었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회사에 더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투자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모피상인과 선교사를 제외한 프랑스인들의 생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로 말미암아 프랑스의 캐나다 정책은 일시 정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1661년 프랑스의 재상 마자랭(Mazarin, Jules / 1602 ~ 1661)이 죽었고 루이 14세의 친정(親政)이 시작되면서 중상주의(重商主義)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콜베르(Colbert,Jean-Baptiste / 1619 ~ 1683)가 사실상 재무총감의 자리에 오르면서 아메리카 프랑스의 식민지 사정도 급변하기 시작했다.
1663년 콜베르는 뉴프랑스회사의 특허를 취소하고 65년에는 프랑스 국왕이 임명한 총독(總督-intendant)을 현지에 파견하여 개발과 전도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하였으며 1666년에는 1개 연대병력을 파견하여 이곳의 터줏대감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이로쿼이 인디언족을 물리치고 강제력을 동원해 그들과 억지강화를 맺었다.
부연하면 뉴프랑스를 본국프랑스의 직할식민지로 만들고 국왕이 파견한 총독이 형식상·군사상의 수반이 되게했으며 식민지의 자립도를 높이고 자치능력을 키우고자 했던 것이다.
혁명이전 프랑스의 구제도하에서 국왕이 각주(州)에 파견했던 일종의 행정장관을 앵탕당(intendant)이라하고 우리들은 총독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1665년 재무총감 콜베르는 바티스트 탈롱(Jean-Baptiste Talon -Comte d'Orsainville라고도 함./1665 ~ 68, 1670~72)이라는 귀족을 뉴프랑스의 앵탕당으로 임명하여 현지에 파견,이런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게 했다.
앵탕당 탈롱은 식민지 건설과 산업을 장려하고 먼 서부지역의 개척을 강행하기도 했으며 정착지를 조성하고 경제구조를 다각화함으로써 이민과 인구 증가를 장려했고 경제를 다각화하면 산업화가 촉진되고 캐나다와 서인도제도 및 프랑스 사이에서 삼각무역 체제를 확립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결혼적령기의 처녀들을 포함, 3,000명 이상의 이주민들이 뉴프랑스로 건너갔고 그후에는 거의 이주민들이 오지 않았으나 자연증가로 인구는 급속도로 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 부족과 본국의 원조 결여 때문에 탈롱의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실망한 탈롱은 1668년에 프랑스로 돌아갔지만, 정부의 설득을 받아들여 1670년에 다시 캐나다로 돌아가 그곳에서 식민지의 세계적 위치와 영국인들의 위협에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영국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그는 탐험을 장려했고 미지의 땅을 탐험하면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의 권리를 더욱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고, 세인트로렌스 식민지를 프랑스 식민 활동의 중심 거점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때문이다. 그러나교회와 독점 기업들은 그의 노력에 저항했고, 그가 1672년에 캐나다를 떠난 뒤 그가 착수한 일들은 대부분 중단되고말았다.
탈롱의 뒤를 이어 캐나다의 앵탕당이 된 프롱트나크 백작 루이 드 뷔마드(Louis de Buade, comte de Palluau et deFrontenac / 1622 ~ 1698)라는 인물은 세례를 받을 때 루이 13세가 대부(代父)가되었을 만큼 명문가에서 태어났고 30년 전쟁에도 참전했으며 21살이 되었을 때 노르망디연대장이 되었을 정도로 권세와 출세를 아울러 달성했던 역전의 용사였지만 지나친 낭비벽으로 늘 돈이 부족했던 그런 인물었다.
이때 활약한 것이 예수회 소속의 신부 자크 마르케트(Jacques Marquette /1637 ~ 1675)와 상인 루이 졸리에(Louis Jolliet / 1645~ 1700), 그리고 탐험가 라 살(La Salle, Robert Cavelier de / 1643 ~ 1687) 등이었는데 마르케트와 졸리에는 미시간호에서 미시시피강 상류까지의 수로인 폭스강(FoxR)을 발견했고, 라 살은 미시시피강을 탐험하고 드디어 1682년 4월 그 유역을 루이14세의 땅이라 선언하고 루이지애나(Louisiana)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 광대한 지역의 귀중한 자원인 모피의 독점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회소속의 선교사를 비롯한 많은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라 살은 그 해 12월 일리노이 강안(江岸)에 세인트루이스 성채를 축조하였으며,시카고에도 중계지를 두는 등 그의 행적은 매우 열성적이었으며 프랑스 정부에서도그의.공적을 인정하여 루이지애나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1684년 프랑스로부터 이민 희망자를 데리고 갔다가 이민계획에 실패하여 돌아오던 길에그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라 살은 피살되고 말았다.
이런 프랑스의 진출에 영국이 그냥 넘기고 지나갈리는 없었다. 이 무렵 영국인들은 이미 이보다 더 남쪽의 버지니아와 뉴잉글랜드 등에서 식민지를 개척하고 점차 북진하여 뉴펀들랜드를 차지하는 한편 허드슨만에서 내륙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누구 하나가 물러서거나 양보하지 않는한 양국의 충돌은 불을 보듯 뻔한 현실문제로 닥아오고 있었다.
이런 양국의 사정은 유럽대륙에서의 세력균형을 위한 왕조전쟁과 맞물려 식민지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토와 무역문제로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을때 유럽에서는 팔츠계승전쟁 혹은 아우구스부르크 동맹전쟁(1689 ~ 97)이라는 전쟁이일어났고 이 전쟁을 영국에서는 윌리엄 왕 전쟁이라 불렀으며 이후 나폴레옹이 몰락한 1815년까지 양국은 길고도 지루한 제 2의 백년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윌리엄 왕 전쟁기간 뉴잉글랜드 함대와 군대는 프랑스 령 아카디아를 점령하고 이어1690년 퀘벡으로 들어갔으나 프랑스 군대에의해 저지되었다. 그후 프랑스 군대는 뉴잉글랜드의 변경을 계속 습격해 마침내 이로쿼이족의 땅으로 진격해들어갔으며 허드슨 만을 정복하고 아카디아를 되찾고뉴펀들랜드를 공략했다. 이 전쟁은 라이스바이크 조약(Rijswijk, Treaty of)에 의해 종결되었다.
윌리엄왕 전쟁을 최종 마무리 짓기 위해 스웨덴의 중재로 1697년 9월과 10월 사이 네덜란드의 헤이그 근처에 있는 라이스바이크에서 전쟁의 당사국인 프랑스를 상대로 여러나라가 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에 따라 뉴프랑스는 허드슨 만(뉴펀들랜드는 제외)을 고수하고 원래의 소유지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1700년과 1701년에 이로쿼이족과 뉴프랑스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되었고, 이로쿼이족과 뉴프랑스의 인디언 동맹들 사이에도 평화조약이 이루어졌다. 더이상 이로쿼이족과의 전쟁은 없게 되었으며 이때가 뉴프랑스 번영의 절정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뉴프랑스는 갑자기 쇠퇴하기 시작했다. 영국인들과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13개영국 식민지의 주민들은 뉴프랑스 전체를 정복하려 했는데, 2단계에 걸쳐 정복이 이루어졌다. 첫단계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영국에서는 앤 여왕전쟁이라함 : 1701 ~ 14) 기간에 있었고 둘째 단계는 7년전쟁(영국에서는 프렌치-인디언전쟁이라 함 : 1756 ~ 63) 기간에 있었다.
스페인왕위계승전쟁 기간인 1710년 아카디아는 다시 영국인들의 손에넘어 갔다가 이듬해 허벤든 워커 경이 이끈 영국 원정대는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에서 심한 타격을 입고 돌아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투는 유럽에서 일어났고 유럽에서의 영국의 승리는 아메리카 식민지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1613년 위트레흐트 조약(Utrecht,Treaty of)에 의해 영국은 허드슨 만을 되찾고, 뉴펀들랜드에 대한프랑스의 권리를 제한시키며, 아카디아를 분할하고(케이프브레턴 섬 제외) 서부의 모피무역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1756년 유럽에서는 7년전쟁이 일어났다. 이 7년전쟁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뉴프랑스는사실상 해체단계에 들어갔다. 이 7년전쟁기간 아메리카에서는 프렌치-인디언 전쟁으로 이어저 처음에는 프랑스가 월등히 우세했으나 본국의 지원 부족으로 결국 영국에게 패배, 퀘벡과 몬트리올을 내주어야만했다. 북미대륙에서 절대우위권을 확보한 영국은 1763년 프랑스와 파리조약을 체결, 프랑스의 식민지 캐나다와 미시시피강 이동의 루이지애나를 손에 넣었다.
이로서 1763년 이후 캐나다에서는 프랑스 세력이 완전 소멸하고 반대로 영국은 제 1차 대영제국이 완성되었다. 이때 영국은 캐나다에 거주하는 프랑스인의 종교,언어, 풍속에 전혀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하지만 미국의 독립이라는새로운 변수가 등장하게 되고 영국의 캐나다 정책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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