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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역사--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 이래 유럽인들이 당한 최악의 패배

구름위 2013. 1. 29.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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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개요: 아즈텍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한 멕시코 침략자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는 당시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 풍요롭고 화려한 삶에 감탄을 한다. 그는 이 수상도시를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5세에게 통째로 바치기 위해 아즈텍 황제 몬테수마2세가 베라크루스 전초기지를 공격한 것에 항의하면서, 그를 -코르테스 일행이 머무는- 악사야카틀 궁전에 포로로 잡아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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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게 코르테스의 뜻대로 잘 돌아가는듯 하지만, 쿠바 총독 벨라스케스는 그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벨라스케스는 판필로 나르바에스(Panfilo de Narvaez)에게 900명의 에스파냐인, 500명의 흑인노예를 주어 코르테스 일행을 토벌하라 명한다.

 

베라크루스를 지키던 수비 대장 후안 데 에스칼란테(Juan de Escalante)가 전사하면서 코르테스는 이 일이 보통 문제가 아니라 판단, 자신은 부관 곤살로 데 산도발(Gonzalo de Sandoval)을 포함한 70명의 군대를 이끌고 나르바에스의 군대를 격파하기 위해 떠난다. 떠나기전에 코르테스는 그의 친구이자 유능한 부관이었던 알바라도(Pedro de Avalado)에게 100명의 군대를 남기고 테노치티틀란을 잠시 맡게 했다.

 

코르테스와 달리 알바라도는 성질 급하고 생각이 부족한 인물이었던것 같다. 그는 아즈텍귀족들이 우이칠로포치틀리 봄축제를 즐기고 있을때, 알바라도는 아즈텍인들이 반란을 꿈꾼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자비하게 1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는 봄축제를 즐기는 아즈텍귀족 1만명을 학살했다.

 

알바라도의 만행에 아즈텍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때마침 코르테스 일행이 나르바에스의 군대와 싸워 대승을 거둔뒤 6월 25일, 테노치티틀란으로 왔다. 코르테스는 아즈텍인들이 예전과 달리 자신을 반기지 않음을 눈치챘다. 그로부터 몇일이 지난뒤, 그는 자신의 일행이 테노치티틀란의 아즈텍인들에게 포위당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코르테스는 몬테수마2세의 남동생 쿠아틀리우악을 통해 반란군과 교섭을 시도했으나, 쿠아틀리우악은 그를 배신하고 오히려 반란군을 선동하고 있었다. 코르테스 일행은 절망적인 상황에 치닫는다. 둑길은 봉쇄되었고, 다리도 치워져 외부와의 통행이 불가능했다. 조선공 마르틴 로페스(Martin Lopez)가 텍스코코 호수에서 만들던 돛단배도 전부 불태워졌다.

 

코르테스는 이제 결단을 내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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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노치티틀란                                                                                          코르테스 일행

 

 

 

사령관: 쿠아틀리우악 외 코르테스에게 반감을 품은 귀족들                           사령관: 에르난 코르테스

 

                                                                                     병력

     

 20~30만명(테노치티틀란 시민)                                                                  에스파냐인: 1300명

 

                                                                                                                틀락스칼라인:6000명

                        

                                                                                                                군마60~70여기

 

                                                                                                                 대포 26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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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관 알바라도(Pedro de Alvarado)와 합류한 코르테스는 그에게 좌초지종을 묻는다. 코르테스는 알바라도에게 테노치티틀란을 맡긴 자신을 후회하며 포위망을 뜷을 방도를 모색한다.

 

2. 코르테스는 부관 오르다스(Diego de Ordaz)에게 400명의 군대를 주어 아즈텍인들의 포위망을 뜷어 볼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아즈텍인들의 저항은 거셌고 수적으로도 엄청났다. 오르다스의 군대는 포위망을 뜷는데 실패했다. 이 공격으로 에스파냐인들은 46명이 부상당했고, 20명이 죽었다. 아즈텍인들은 충격과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 전사한 에스파냐인들의 머리를 장대위에 꼿아두고 전시했다.

 

 3. 코르테스 일행은 일단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우물을 파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포위되어있는 신전의 들보와 지붕목재를 뜯어낸 뒤 그의 부하들이 숨어서 안전하게 사격할수 있는 이동용 전차를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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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동용 전차를 통해 코르테스 일행은 몬테수마2세가 거처하는 악사카야틀 궁전을 제압할수 있었다. 코르테스는 몬테수마2세를 통해 아즈텍 반란군을 무마시킬려고 하지만, 성난 군중들은 오히려 몬테수마2세에게 화살과 돌을 던졌다.(일설에는 몬테수마2세가 나르바에스와 함께 코르테스를 몰아낼려는 사실이 발각되자, 코르테스가 그를 죽여버렸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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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몬테수마를 통한 교섭이 실패로 끝나자,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을 완전히 포기하고 -지난달엔 천국이었지만 이제는 지옥으로 변한- 도시에서 탈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후 그는 악사카야틀 궁전 근처에 위치한 요피코 신전을 급습하여 사제를 학살하였고, 우상을 때려 부셨다. 코르테스는 신전을 오르면서 전투를 벌이다가, 전에 다쳤던 손을 또 다쳐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다.아즈텍 정복당시 로델레로이자, 훗날 역사가인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Bernal Diaz del Castillo)는 요피코 신전에서 벌였던 전투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 아! 얼마나 맹렬한 전투였는가! 우리편은 모두 상처를 입어 피를 흘렸고, 적은 모두 죽은 대단한 혈전이었다.』

 

이 전투로 에스파냐인 20명이 큰 부상으로 죽었다.

 

6. 1520년 6월 30일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찰흑같이 어두운 밤, 코르테스는 타쿠바와 차풀테펙으로 통하는 다리를 통해 테노치티틀란에서 빠져나가기로 결심한다. 코르테스가 신임하는 용감한 부관 산도발(Gonzalo de Sandoval)이 지휘하는 200명의 에스파냐인을 선두로, 중앙엔 코르테스, 후방엔 이 대참사의 주범이라 할수있는 알바라도(Pedro de Alvarado)와 벨라스케스 데 레온(Juan Velazquez de Leon)이 100명의 군대를 지휘했다.

 

틀락스칼라인들은 이들 사이 사이에 끼어 있었다. 코르테스는 떠나기 전에 자신이 모아두었던 황금을 부하들에게 마음껏 가지라 명했다. 하지만, 황금이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아갈지 병사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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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코르테스 일행은 최대한 조용히 빠져나갈려고 했었다. 나팔은 당연히 금지 였고, 말 발굽을 가죽으로 감쌌다. 모든 명령은 속삭임으로 전달되었다. 코르테스 일행이 톨레카 운하(현재 타쿠바 거리에 있는 우체국 자리)를 지나가는 도중, 밤 늦게 물을 길러온 여자가 코르테스 일행을 발견하고서는 소리를 질렸다. 그들은 재빨리 그 여자를 처리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수많은-복수심에 불탄- 아즈텍 전사들이 카누를 타고 코르테스 일행을 사방으로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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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톨레카 운하에서 엄청난 육박전이 벌여졌다. 에스파냐인들은 아즈텍인들과 맞써 싸우거나 도망을 쳤다. 몇몇 이들은 물속으로 뛰어 들기 까지 했다. 코르테스도 이 육박전에 휘말려, 머리에 돌을 맞고 기절을 했다. 기절한 코르테스는 아즈텍 전사들에게 끌려갈 뻔했지만 부관 올레아(Cristobal de Olea)가 가까스로 구출해 냈다. 물속으로 뛰어든 에스파냐인들은 갑옷에 쑤셔박았던 황금의 무게때문에 가라앉았고, 허우적 거리는 병사는 아즈텍 카누부대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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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코르테스와 그가 속해있는 중앙 부대는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겨우 탈출할수 있었다. 후방을 맡은 알바라도와 레온이 도착했을 무렵, 다리는 끊어져 있었으며, 주변엔 시체가 가득했다. 후방 부대도 아즈텍 전사들의 손아귀를 빠져 나갈수 없었다. 100명밖에 안되는 후방 부대는 쪽수로 부터 밀리기 시작하여 거의 전멸에 가까웠다. 알바라도는 아즈텍 전사들과 전투를 벌이다, 그의 말이 죽자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다리는 끊어져 있었다. 그는 이판사판으로 자신의 창으로 장대높이 뛰기를 하여 가까스로 반대편 다리로 갈수 있었다.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에 따르면, "그 사이는 인간으로선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곳이었지만, 알바라도는 해냈다." 현재 멕시코시티 외곽을 지나는 도로의 일부분을 '알바라도의 도약대'라 한다. 혹시 여러분이 멕시코시티에 놀려갈 일 있으면 알바라도의 도약대를 확인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10. 코르테스는 살아남은 부하들을 대략적으로 확인해 보았다. 6월 30일~7월 1일 동안 벌여졌던 후퇴는 코르테스에게 뼈아픈 손실을 가져다 주었다. 그의 부하들도 테노치티틀란에 가기를 다시는 꺼려했고, 서둘러 쿠바로 돌아가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뼈아픈 손실을 겪었으나 권토중래를 꿈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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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테스의 피해

 

 

에스파냐 병사: 600~1000여명이 전사

 

틀락스칼라인: 4000명 전사

 

군마: 40여마리를 잃음

 

화승총: 전부 다 잃음

 

대포: 전부 다 잃음

 

석궁: 3~4기 건지고 전부 다 잃음

 

벨라스케스 데 레온, 알론소 데 에스코바르(Alonso de Escobar), 코로나도, 프란시스코 모리아, 파블로 피사로(코르테스의 외가쪽 친척)등 신임하는 부관들이 죽었다.온전한 병사는 없었으며, 전부다 상처 하나씩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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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즈텍 정복에 참가한 종군 신부 프란시스코 데 아길라르(Francisco de Aguilar)는 코르테스가 후퇴하는 동안 벌여졌던 대참사에 이렇게 언급한다.

 『 밤 10시경, 공포에 젖은 한 무리의 여성들이 횃불을 들고 화로에 불을 붙이며 나타났다. 그들은 포르티코에 누워 있는 남편과 친척을 찾으러 온것이다. 그들은 또 몬테수마2세를 찾으러 왔다. 그리고 자기 남자의 시신을 확인하자, 엄청난 슬픔과 비탄에 젖어 어찌나 통곡을 해대던지 그곳이 공포로 가득 찰 정도였다. 그들은 슬픔에 겨워 시신 위에 몸을 내던진 채, 두려움으로 가득 차 흐느끼며 울부짖었다. 보초를 맡고 있던 나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이보다 더 심한 지옥과 눈물의 홍수를 본 적이 있나? 만약 본적 없다면, 아마도 여기서 볼 수 있을 걸세." 나는 진실로, 모든 전쟁에서 그리고 모든 공포에서 해쳐 나왔지만 이렇게 공포스러운 비탄의 소리를 들었을 때 처럼 두려웠던 적은 결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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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테스의 후퇴는 비록 대실패였지만, 그가 이러한 결단을 내렸기 때문에 그나마 병사들이 살아날수 있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코르테스가 만약 테노치티틀란에 그대로 남아서 항전했더라면 전부 몰살당할것이 분명하다.

 

그의 결단은 옮은 것이었지만, 뼈아픈 손실을 가져다 주었다. 7월1일 새벽, 코르테스는 남은 인원들을 확인해 보고는 케이폭나무 그루터기에서 앉아 혼자 슬프게 울었다. 지금도 코르테스가 그루터기에 앉아 슬피 울었던, 케이폭나무는 남아있다고 한다.

 

  


 
여성출신 정복자로 유명한 마리아 데 에스트라다(Maria de Estrada)는 후퇴중 자신은 그 어떤 사내들 못지 않게 검을 휘둘러 길을 막는 아즈텍 전사들을 베었다 한다. 그녀는 훗날 아즈텍 정복 이후, 원주민들의 인권을 존중해 주며 크리스트교 여신으로 불렸던 여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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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의의: 에스파냐 역사가들은 코르테스의 후퇴를 Noche Triste(슬픔의 밤)이라 썼다. 우리들에게도 이 사건은 슬픔의 밤이라 기억되고 있다. 코르테스는 3분의 2나 되는 병력을 잃고 동맹국 틀락스칼라까지 150마일이나 되는 지옥같은 후퇴를 해야되었다. 코르테스 일행은 그때까지 자신들이 아즈텍 제국을 정복할수 있는지 조차 꿈에도 생각 못했다. 슬픔의 밤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 유럽인들이 겪은 최악의 패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