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즈버그전투(Gettysburg, Battle of)
1863년 7월의 시작과 함께 북군에게는 승리의 여신이 미소를 지었고 남군에게는 멸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한발 닥아서게 되었다.
챈설러즈벌전투에서 패배한 북군에서는 후커의 사임을 받아들이고
미드(George G(ordon) Meade / 1815 ~ 1872)장군에게 포토맥군의 지휘를 맡겼다.
포토맥강에 진을 치고 있는 미드가 이끄는 북군을 공격하기 위해 남군의 리 장군은 먼저 병력의 일부를 전략상 요충지인 게티즈버그로 보내어 그곳을 점령하기로 했다.
그러나 게티즈버그를 수비하고 있던 포토맥군의 저항이 워낙 완강해서 남군의 전략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결국 리가 이끄는 남군 7만 5천 명과 미드가 지휘하는 북군 8만 8천 명이 7월 1일부터 3일까지 게티즈버그에서 미국의 운명을 걸고 일대 혼전을 치렀는데,
전투 첫날인 7월 1일, 북군에서는 스펜스 기관총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좋은 성과를 올렸고, 전투 둘째날인 7월 2일은 이곳저곳의 고지와 능선과 계곡을 먼저 점령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이 치러졌다.
전투 3일 째인 7월 3일, 남군의 리장군은 총공격을 시도했지만 많은 사상자만 내고 실패하고 말았다. 7월 4일, 많은 전투력을 상실한 리는 북군이 공격해 올것으로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었으나 미드의 포토맥군은 공격해 오지 않았고, 그날 밤 폭우를 이용해서 리의 남군은 버지니아로 철수했고 미드는 철수하는 리를 공격하지 않았다.
게티즈버그에서 치런 3일간의 전투에서 북군은 약 2만 3천, 남군은 약 2만명의 사상자를 내어 남북전쟁기간 최대의 격전지가 되었다.
남군의 리는 철벽장군 잭슨을 잃은 후 이를 대신할 만한 유능한 장군을 얻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패전의 원인이었고, 포토맥군의 사령관 미드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뛰어난 전술을 인정 받았으나 후퇴하는 리의 남군을 도망갈 수 있도록 방치했다는 비난도 동시에 받았다.
(4) 빅스버그 회전(Vicksburg Campaign)
게티즈버그에서 폭우와 야음을 틈타 초라한 몰골로 남군이 후퇴했던 7월 4일,
북군의 장군 그랜트는 5개월 여의 긴 작전 끝에 미국의 남부 미시시피주 빅스버그에서 이곳을 수비하고 있던 남군의
펨버턴(John Clifford Pemberton / 1814 ~ 1881)장군과 그의 휘하 장병 약 3만 명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게티즈버그전투가 3일만에 끝난 것과는 달리
빅스버그 전투는 1863년 봄부터 산발적으로 양측이 팽팽히 맞서다가
그랜트의 치밀한 포위작전이 맞아 떨어저 결국 고립된 남군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항복함으로써 남북전쟁에서 또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전투에서 그랜트는 명성을 얻고 이듬해 북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헨리 요새와 도넬슨 요새를 잃은 남부에서는 미시시피강 연안도시 멤피스와 뉴올리언스 중간지점에 위치한 빅스버그에 포대를 만들어 함대 침입에 대비하고 일대의 농가를 징발하여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여 육전에 대비했지만 데이비스 정부와 일선 지휘관들간에 의사 소통이 원할치 못한 것 등이 원인이 되어 결국 이 중요한 요새를 잃고 말았다.
어쨌거나 이후에도 서로가 승리를 주장한 전투가 몇 차례 있었지만 1863년 7월 4일을 고비로 전세는 북군에게 유리해 졌고, 11월 19일에는 이른 바 링컨의 게티즈버그연설이 있었다. 64년 그랜트는 북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포토맥군을 지휘하게 되었고 리는 남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서남부의 군사까지 지휘하게 되었다.
그랜트의 북군은 리치먼도 외각 11킬리미터 지점까지 진격, 리의 방어벽에 부닺쳐 리치먼드 점령에 실패하고 전쟁은 다시 지구전으로 돌입했다가 1865년 4월 3일 그랜트의 포토맥군은 리치먼드를 점령하고, 퇴각로가 막힌 리는 4월 9일 애퍼매턱스 코트하우스 근처에서 그랜트에게 품위를 지키며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한편 남쪽에서는 북군의 장군 셔먼이 북쪽으로 이동하여 노스캐롤라이나 주까지 들어가 4월 26일 J.E. 존스턴장군의 항복을 받았다. 이로써 1861년 4월 12일 섬터요새의 포격으로 시작된 미국의 남북전쟁은 만 4년 12일 만에 끝났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후 처리라는 더 복잡한 문제들, 이를테면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제주를 다시 연방에 복귀시키는 일, 흑인노예의 해방과 그 처리문제, 전쟁으로 피폐된 국토의 재건 등등.....
(5) 게티즈버그연설(Gettysburg Address)
워싱턴 D C에 있는 링컨기념관에 들어서면
정면에 링컨의 좌상이 있고 왼편 벽면에 유명한 게티즈버그연설 전문이 새겨저 있다.
남북전쟁의 결정적인 전투(1863. 7. 1~3)가 벌어졌던 펜실베이니아 주 게티즈버그가 국립묘지로 지정되고
그 개소식이 1863. 11월 19일에 있었다.
개소식 행사는 2시간 정도 진행되었고 그 중 1시간 이상을 당대의 최고 웅변가로 알려진 에드워드 에버렛이 장황하게 연설했다.
아무리 최고의 웅변가라하지만 참석했던 사람들은 지루함을 느꼈다.
이어서 계속된 링컨의 연설이 매우 길고 지루할 것으로 여겼던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2분 정도의 짤막한 연설로 끝나자 사람들은 우선 많은 박수를 보냈다.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할 것으로 여겼던 이 연설이 그뒤 민주주의의 표상으로 널리 인용되고 산문시의 걸작으로 찬사받게 되리라고는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몰랐다.
링컨의 이 연설문은 기차를 타고 행사장에 가는 동안 봉투 겉봉에 서둘러 썼다는 통설이 있으나 사실과는 다르고 링컨이 심사숙고하여 작성하였으며 거듭 수정함에 따라 5개의 사본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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