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경과
(1) 개전(開戰)
1861년 2월,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7개주가 아메리카연방(United States of America)을 탈퇴하고 아메리카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결성함에 따라 여러면에서 혼선이 일기 시작했고 해결하기 어려운 수많은 문제들이 현실로 불거졌다. 그 중 섬터요새가 당장 해결해야할 현안으로 등장하였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항에 자리잡은 섬터요새(Sumter Port)는 미국이 남북으로 갈라지는 바람에 위치적으로 아메리카연합(남부연합)의 관할이 되었다. 그러나 이곳은 연방정부(미국)의 전략상 요충지로서 포기할 수 없는 곳이다.
당연히 남부측으로서는 눈에 가시처럼 버티고 있는 북부(연방)군의 철수를 요구했고, 북부로서는 이런 요구에 순순히 응할 수가 없었다. 1861년 2월 28일, 궁지에 몰린 섬터요새(Sumter Port)의 수비대장 앤드슨(Robert Anderson) 소령은 이런 사실과 함께 2만명의 증원군과 필요한 식량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워싱턴(북부)에 보냈다.
3월 4일, 링컨은 대통령 취임식과 함께 16대 미국 대통령으로서의 공식업무가 시작되고, 다음날인 3월 5일에는 앤더슨 소령의 이런 요청이 그에게 전달되었다. 앤드슨의 보고를 받은 링컨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부연합의 핵심지대에 증원군과 식량을 보내면 남부측과의 충돌은 불을보듯 뻔하고 그렇게 되면 전쟁이 일어나고 링컨으로서는 전쟁을 도발했다는 책임까지 뒤집어 써야 한다. 그렇다고 보내지 않는다면 연방정부 및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는 실추되고 남부연합을 승인하는 모양새가 될뿐 아니라 그를 대통령으로 밀었던 공화당내의 강경파들은 등을 돌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 어려운 문제를 두고 링컨정부의 각료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찬반으로 팽팽하게 맞섰다. 물러설 것인가? 아니면 밀고 나갈 것인가? 양단간에 대통령으로서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4월 6일, 고심끝에 링컨은 증원군의 출동을 명령하고 동시에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주지사(州知事)에게는 이렇게 통보했다. "섬터요새에는 식량만을 보낼 것이다. 식량 수송에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사전 통고없이 병력이나 무기를 보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섬터요새를 구하는 동시에 연방정부의 위신도 세우고 전쟁도 피하겠다는 것이 링컨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남부의 생각은 달랐다. 섬터요새를 내놓으라는 자신들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절하는 동시에 이를 부인하면 무력사용도 불사하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남부의 데이비스정부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틀간의 격론끝에 내린 결론은 섬터요새를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전쟁을 도발했다는 비난을 받는다고 해도 북군이 지키고 있는 섬터요새를 그냥 보고 넘어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4월 10일, 남부군은 섬터요새에 주둔하고 있던 연방군에게 항복을 권고했고, 이를 거부하자 12일에는 포격을 개시, 13일에는 완전히 점령해 버렸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남북문제는 전쟁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연출되었다.
섬터요새의 함락으로 링컨정부는 전쟁을 결의하고 즉각 의용군 모집에 들어갔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노예주인 버지니아, 아칸소, 그리고 노스캐롤라이나와 테네시는 연방에서 탈퇴하고 남부연합에 합류했으며, 같은 노예주이면서도 켄터키, 메릴랜드, 미주리는 연방에 남았다. 그리고 이해관계를 달리했던 버지니아의 서쪽은 1863년 동쪽과 분리하여 웨스터버지니아로 연방에 합류했다.
이렇게 해서 산술적인 전세가 결정되었다. 북부는 23개 주, 남부는 11개 주, 북부 23개 주 가운데 노예주로서 연방에 남았던 켄터키와 메릴랜드, 미주리와 웨스터버지니아는 지리적으로 자유주와의 경계지점에 있었고 중립적인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뒷날 이들 4개주는 경계주(境界州 : border states)로 분류했다.
북부로서는 2천 3백만의 인구와 전쟁에 필요한 무기, 탄약, 의복 등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는 제조능력과 노예해방이라는 명분이 있었고, 남부는 9백만의 인구와 상품작물인 면화가 있었다. 남부 9백만의 인구 가운데 4백만은 흑인들이고 그 충성심 또한 의심스럽지만 플랜트라는 돈 많은 부자들이 많았고 영국과 프랑스 등의 지원도 기대할 수 있었다.
양측 모두 자신감을 앞세우고 속전속결로 일찍 전쟁을 끝내고자 했지만 이런 속사정과는 달리 전쟁은 만 4년동안 계속되었고 결과는 남부의 참담한 패배와 북부의 힘겨운 승리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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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스 <bes365@daum.net> 13.01.17 22:35 주소추가 수신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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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1월 17일 목요일, 22시 35분 38초 +09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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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스 <bes365@daum.net> 13.01.17 22:35 주소추가 수신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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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쟁의 영웅들
북군은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를 점령하고 새로이 결성된 연합정부(Confederate States of America)를 무너뜨리는 것이 최상의 전략이다.
아메리카합중국에서 분가를 선언한 남부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은 북군의 침입을 저지하고 국제적인 승인을 받은 동시에 북부와의 협상으로 승인을 받으면 끝이다.
전쟁의 양상은 북군은 공세적인 자세로 남군은 수비적인 형태로 진행되었지만 당장에 큰 이변은 없었기에 서둘 것도 없었다.
그런데 워싱턴 정가의 급진적인 세력들은 하루빨리 남부연합을 공격하라는 압력을 링컨정부에 가했다.
이에 링컨 정부에서는 준비도 덜된 상태에서 어빈 맥도웰에게 3만 5천의 병력을 주어 리치먼드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래서 1861년 7월 21일, 워싱턴의 서남방 30 마일 지점에 위치한 버지니아 주 머내서스 근처 불런 강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제 1차 불런전투(Battles of Bull Run) 혹은 머내서스 전투라고 부르는 이 첫 전투에서 북군은 토마스 잭슨(Thomas Jonathan Jackson /별칭은 Stonewall Jackson. /1824 ~ 1863)과 P.G.T 보러가드(P(ierre) G(ustave) T(outant) Beauregard / 1818 ~ 1893)의 수비군에 막혀 고전 중 조지프 E 존스턴 장군이 이끌었던 증원군 까지 가세하자 남군에게 패배하고 워싱턴 D C로 물러났다. 남군도 더 이상의 병력 손실을 막기 위해 북군을 추격하지는 않았다.
이 전투에서 3만 5천 여명이 참가한 북군에서는 약 3천명의 사상자를 냈고 3만 7천명이 참가한 남군에서는 약 2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 결과는 수비를 했던 남군의 승리로 끝났다. 불런 강은 강이라기 보다는 크리크(creek)에 가깝고 머내서스는 철도 교차점으로 전략상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첫 전투에서 어이없게 패배한 북군에서는 다시 50만 명의 신병 모집에 착수하고 훈련을 조지. B.매클랜런(George Brinton McClellan / 1826 ~ 1885) 에게 맡겼다. 이때부터 동부지방의 북군을 포토맥 군이라 불렀고, 남군은 통상 버지니아군단이라 불렀다.
포토맥군을 지휘했던 매클렌런은 매우 신중해서 선듯 리치먼드를 공격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워싱턴 정부에 첫 승전보는 서부에서 활약했던 그랜트가 보내왔다.
남북전쟁이 일어날 당시 일리노이주 걸리나에 있었던 그랜트(Grant, Ulysses Simpson / 1822 ~ 1885)는 1862년 2월 테네시 서부에 있는 남부연합의 요충지 테네시 강의 헨리 요새와 컴벌랜드강의 도넬슨 요새를 점령해서 북군에게 첫 승리를 안겨 주었던 것이다.
그랜트는 1846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21등/39명)하고 멕시코 전쟁에 참전하여 대위로 진급했다가 제대, 농사와 부동산에 손을 댔으나 실패하고 그의 형제들이 아버지의 유업인 가죽제품을 만들고 있는 고향 일리노이주 걸리나로 돌아가 형제들에게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이곳 주정부에서 행한 신병 모집과 훈련에 참여했다가 부대와 함께 링컨의 정치적 교향이며 일리노이주 주도인 스프링필드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주지사의 배려로 일리노이 주 민병대의 연대장에 임명되고 전투도 하기 전에 걸리나 출신의 하원의원의 도움으로 준장계급장을 달고 남서부지역의 지휘관이 되었다.
1862년 1월, 그랜트는 서부지역의 최고사령관 핼럭(Henry W(ager) Halleck / 1815 ~ 1872)의 허락을 받고 남부의 헨리 요새와 도넬슨요새를 점령하여 북군에게 최초의 승전보를 보내게 되었다.
그랜트는 다음 공격 목표를 멤피스와 찰스턴 철로를 삼고 테네시 강 유역 피츠버그 선창에 진을 쳤다. 이때 서부에서 남군 지휘를 맡은 것은 A.S.존스턴(Albert Sidney Johnston / 1803 ~ 1862). 장군과 P.G.T.보러가드 장군, 이들은 최근에 당한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병력을 모으고 있었다.
피츠버그 선창에 진을 친 그랜트는 공세를 취할 계획이었으므로 진지를 요새화해두지 않았다. 이런 약점을 간파한 남군의 존스턴 장군은 1862년 4월 6일,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그랜트의 진지를 선제 공격했다. 그러나 경험 없는 병사들이 숲 속에서 치룬 첫째날 전투에서 남군은 북군의 진지를 빼았지만 그 날 오후 남군의 대장 알버트 존스턴 장군은 치명상을 입고 전사했다.
전투 이튿날인 4월 7일, 북군은 흩어진 군대를 다시 모으고 남군은 보러가드 장군의 지휘로 전력을 강화, 양측이 교전끝에 북군은 전날 빼앗긴 진지를 되찾았고 남군은 미시시피 강의 코린스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전투는 끝이 났다. 이것을 샤일로 전투라고 한다.
이 샤일로전투는 남북전쟁 발발 후 2번째로 치런 큰 전투로서, 양측 모두 얻은 것 없이 큰 손실만 당한 실패한 전투였지만 양측은 한결같이 자기들이 승리 했다고 주장했다. 남군은 공격에 실패했고 북군은 방어에 성공했기에 사실상 남군이 패배했던 전투라는 것이 지금의 판단이다.
어쨌든 이 전투에서 양측은 각각 1만 여 명의 심각한 인명손실을 입었고 그 영향으로 양측 군은 그 다음 3주 동안 기동할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은 컸었다.
같은 무렵, 동부에서는 포토맥군을 맡은 신중했던 매클럴린이 10만 병력을 버지니아의 먼로요새에 배치하고 요크 강과 제임스 강 사이의 반도를 지나 남부연합의 수도 리치먼드를 점령하는 전략을 세우고 링컨의 승인을 받아 군대를 이동하고 있었다.
1862년 5월 31일, 리치먼드 동쪽 10 킬로미터 지점에서 남군의 선제 공격으로 이른 바 반도회전(Peninsular Campaign)의 첫 막이 올랐다. 다음날인 6월 1일 까지 이틀간 치룬 이 전투에서 북군은 5천 여명, 남군은 6천 여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여기서도 사실상 남군이 패배했고 남군의 사령관 조지프 E 존스턴 장군은 전투 첫 날 큰 부상을 입었다. 이것이 세븐 파인스 전투(Battle of Seven Pines 혹은 Battle of Fair Oaks라고도 함)라는 것이다.
세븐파인스 전투에서 존스턴이 부상당하자 그 자리에 남부연합의 군사고문으로 있던 로버트 리(Lee, Robert Edward / 1807 ~ 1870)가 맡음으로서 리는 비로소 야전 사령관이 되어 그의 천부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되고 전쟁의 양상도 달라졌다.
그의 고향 버지니아 스트래트퍼드의 두 명문가, 리 가(Lee familly)를 친가로 카터가Carter f)를 외가로 둔 로버트 에드워드 리가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 사관학교를 택한 것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아버지 헨리 리 와 어머니 앤 힐 카터 사이에서 7 남매 중 넷째 아이로 리가 태어났으나 버지니아 주지사까지 지낸 그의 아버지가 이재에 밝지 못하고 낭비벽이 심해서 남긴 것 없이 일찍 돌아가고 집안 형편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에 사관학교를 택했다는 것이다. 1829년 웨스트포인트를 2등으로 졸업하고 공병장교에 임관되었다가 다시 기병장교가 되었다.
1847년 멕시코 전쟁 종군, 52년 웨스트포인트 교장, 56∼57년 택사스 수비대 연대장, 59년 버지니아주 하퍼스페리에서 발생한 J.브라운 반란 진압, 60∼61년에는 다시 텍사스 수비대의 연대장으로 근무하였으며, 1861년 2월 1일, 그가 주둔하고 있던 남부 제주(諸州) 가운데 텍사스가 7번째로 연방에서 탈퇴했다.
이 때 리는 텍사스 관하(管下) 부대에 있었으며, 나머지 연방군 부대와 함께 텍사스 주에서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예하(隸下) 부대를 두고 그의 조국 버지니아 주가 어찌할 것인가 지켜보기 위해 알링턴으로 돌아왔다. 4월 18일 워싱턴으로 소환되어, 탈퇴한 주들을 연방에 강제 복귀시키기 위해 새로 편성되는 군의 사령관직을 제의받았다.
리는 탈퇴에 반대했지만 전쟁에도 반대, '남부 제주(諸州) 공격'에 가담할 수 없었다. 한편 링컨 대통령은 버지니아 주에 대해 공격병력을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앞서 2대 1로 탈퇴 반대 결의를 했던 버지니아 주 대표자 협의회가 이번에는 2대 1로 공격군 제공을 거부하고 탈퇴하기로 결의했다. 결국 버지니아가 연방에서 탈퇴하고 남부연합에 가입하자 그는 '조국 방위'에 공헌하기 위해 36년간 몸담았던 군을 사퇴하고 남부에 합류하여 버지니아군 사령관이 되고 데이비스 정부의 군사고문이 되었다.
1862년 6월, 야전군 사령관이 된 리는 취임 3주만에 남부연합의 혼성군을 버지니아 군단이라는 이름의 강력한 군대로 편성하고 전열을 가다듬어 25일에는 북군을 공격하여 반도회전의 중요대목인 7일 전투(Seven days Battle)의 막을 올렸다. 6월 25일 ~ 7월 1일 까지 리치먼드의 동쪽 약 6킬로미터 지점에서 치런 이 전투에서 남군은 2만 여명, 북군은 1만 6천 여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결과적으로 버지이나에서 북군을 몰아내어 남군의 승리가 되었다.
리는 내친김에 전장터를 버지니아 밖으로 옮기기 위해 5만 6천의 병력을 이끌고 매릴랜드로 진격, 62년 8월 29일 ~ 30일 사이, 존 포프 장군이 이끄는 7만의 북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제 2 불런 전투라고 부르는 이 싸움에서 강을 지키고 있던 북군은 퇴각하여 수도 워싱턴 DC 방어에 급급하게 되었다. 결과는 남군의 승리.
불런전투에서 승리한 리의 남군은 연방의회를 점령하여 남부연합의 승인을 받기 위해 매릴랜드로 진격, 1862년 9월 17일, 앤티텀에서 새로이 편성된 매클렐런이 이끄는 포토맥 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양측 모두 1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이 치열한 전투에서 매클렐런은 리의 진격을 저지하여 워싱턴을 지켰고 리는 버지니아로 퇴각했다. 이때 매클렌런이 퇴각하는 리를 추격했으면 남군을 거의 섬멸시킬 수도 있었으나 매클렐런은 퇴각하는 리를 안전하게 후퇴하게 만들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의 의심과 빈축을 샀다. 이 전투는 북군 승리.
대통령 링컨은 매클렐런의 이런 태도에 몹시 화를 내고 매클렐런을 해임하고 번사이드에게 포토맥군의 지휘를 맡겼으며 앤티텀전투의 승리에 힘입어 1963년 1월 1일 까지 남부연합이 해체하지 않으면 노예를 해방하겠다는 이른 바 예비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퇴각한 리는 버지이나 군단을 재정비하고 전열을 가다듬고 있을 때 포토맥 군을 맡은 번사이드는 다시 리치먼드를 함락하기 위해 12만명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래퍼해넉 강을 넘었다. 이에 맞서 리의 버지니아 군단 약 7만 8천은 프레더릭스버그 뒤편의 고지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기다렸다가 1862년 12월 13일 포토맥군을 격퇴시켰다.
이것이 유명한 프레더릭스버그 전투(Battle of Fredericksburg)라는 것이며 북군의 사상자 약 1만 2천, 남군의 사상자 약 5천, 남군의 완전한 승리었다. 이 전투로 리치먼드는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되었고 전세가 불리해진 링컨은 약속이라기 보다는 전세를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1863년 1월 1일 노예해방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노예해방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 - 奴隸解放宣言)에 담겨 있는 내용은 어떤 것인가? 반란상태에 있는 여러 주의 노예를 전부 해방하며, 해방된 흑인은 폭력을 삼가고 적절한 임금으로 충실히 일할 것, 흑인에게 연방 군대에 참가할 기회를 줄 것 등...이것이 비록 법적인 구속력이 없는 선언적 의미지만 그 영향은 매우컸다.
서로간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시작된 남북전쟁이 마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한 십자군 전쟁으로 양상을 몰고가자 지금까지 관망하던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강국들이 남군을 지원할 명분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로서 남부연합은 고립되었다.
노예해방의 선언으로 18만 이상의 많은 흑인 노예들이 북군의 푸른 군복으로 갈아 입게 되어 전술면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번사이드에서 다시 조지프 후커장군에게 포토맥군의 지휘를 맡긴 워싱턴 정부에서는 다시 리치먼드를 함락하기 위해서 버지니아주의 라파하노크 강을 사이에 두고 챈설러즈빌 근처에 진을 치고, 1863년 5월 1일 ~ 5일 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렸다.
챈설러즈벌전투(Battle of Chancellorsville)라고 불리는 이 싸움에서 후커의 포토맥군은 대패하고 물러 났으며 승리한 남군측에서도 유명한 철벽(stonewall)장군 잭슨(Jackson, Thomas Jonathan / 1824~1863)을 잃었다. 잭슨은 전사라기 보다는 오발탄에 의한 상처로 왼쪽 팔을 절단 했다가 페렴이 걸려 1주일 만에 목숨을 거두었다.
잭슨을 잃은 것은 리에게는 오른 팔을 잃은 것과도 같았다. 여러가지 면에서 불리한 전황을 감지한 그는 다시 전쟁터를 버지니아 밖으로 몰아내고 하루 빨리 남부연합의 승인을 받아 전쟁을 끝내기 위해 워싱턴을 향해 다시 매릴랜드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펜실베어니아주 해리스버그 남서쪽 56킬로미터 지점 게티즈버그에서 1683년 7월 1일 ~ 3일 까지 치런 전투에서 패배하고 다시 버지니아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것이 남북전쟁의 전세를 바꾼 게티즈버그 전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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