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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 전쟁의 원인

구름위 2013. 1. 19.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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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전쟁의 원인

 

(1) 남(南)과 북(北)

 

1861년 4월에서 65년 4월까지 햇수로는 5년간 실제로 전투에 임한 것은 만 4년간,같이 살림을 꾸렸던 합중국이라는 이주자들이 세운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고말았다.

 

같이 살림을 꾸리기는 꾸렸지만 처음부터 자연환경과 생활 여건이 달랐고 이것이세월이 지나면서 이해관계가 복잡해 지고 여기에 감정까지 겹치게 되자 먼저 남쪽에서사우스캐롤라이나를 시작으로·미시시피·플로리다·앨라배마·조지아·루이지애나·텍사스·버지니아·아칸소·테네시·노스캐롤라이나등 여러 주(州-State)가 줄줄이 연방에서 탈퇴하고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함으로써결국 전쟁으로 까지 이어지고 말았다.

 

전쟁(戰爭)이라면 주권(主權)을 가진 국가(國家) 사이에 여러 원인에 따라 무력(武力)으로승부(勝負)를 판가름하고 강자가 약자를 굴복시키는 것이 통상적인 사례인데 미국의남북전쟁의 경우 합중국(United States)이라는 한지붕 식구들 끼리 뜻이 맞지 않아마치 부부(夫婦)가 이혼을 하듯 갈라 서자고 한것이 이른 바 남북전쟁의 시작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남쪽과 북쪽이 편을 가르고 싸웠다고 해서 남북전쟁(南北戰爭)이라고하지만 당사자들인 미국에서는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북부에서는 시민전쟁(Civil War)이라 하고 남부에서는주(州)들간의 싸움(War between the States)이라고도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전쟁이 아니라 일종의 반란을 일으킨일단의 무리들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다시 옛 상태(연방정부)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북부측의 주장이고 반면 각주가 가지고 있는 주의 권리(州權)를 지키고자 했다는것이 남측의 주장이다.

 

전쟁이든 반란이든 만 4년간 서로간에 총부리를 겨눈결과 북부는 200만 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36여만 명의 전사자를 냈고, 남부는 60∼70만 명이동원되어 25만 8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전비에 소요된 47억 5천만 달러의 손실과그 밖의 간접적인 비용까지 합치면 무려 10억 달러 이상의 비용이 들어간, 제 1차세계대전 이전까지 인류가 겪은 최대의 전쟁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모든 전쟁이 그러하듯이 미국의 남북전쟁 역시 원인을한두가지로 파악하기란 어렵다. 다만 노예문제가 전쟁의 불씨를 당겼다는 점과 남북간의경제적 이해관계와 거기에 수반된 상승작용이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에 대해서는모든 사람들이 수긍하는 것 같다.

 

이런 차이는 1776년 7월 13개 주가 모여 독립을 선언했을당시부터 남북간의 현격한 쟁점으로 부상되어 있었고 영국으로 부터의 독립자체를반대했던 사람들도 많았으며 독립후에는 연방파와 비연방파로 다시 나뉘었다가 어렵게합중국이 탄생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여러차례 언급한 것과 같다.

 

이것이 독립 세대를 지나 그 후손들로 이어지면서골이 메워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깊게 파고 들어 1820년대부터는 더욱 심각한 상태로들어서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 시기가 되면 남부와 북부에 이어 서부(西部)라는 새로운영역이 등장하게 되었고 영국의 산업혁명이 또 다른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

 

남부에서는 담배 대신에 면화(棉花 - Cotton)가 새로운상품작물로서 각광를 받게 되자 농장주(農場主)인 플랜터들은 다투어 목화농장을확대 하였고 북부에서는 목화를 원료로 하는 직물공업이 발달하고 등달아 제철과기계공업이 일어나 날로 번창하고 있었다. 여기에 새로이 개척된 서부의 아이오아와캔사스 등지에서는 밀과 옥수수가 대량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크게 보면 북부와 남부에 이어 서부라는새로운 영역(section)이 하나 더 추가되고 경제조건이 서로 다른 이들 지역간에는사사건건 의견대립은 날로 심각했다.

 

이를태면 공업이 발달된 북부에서는 보호관세와중앙은행의 운영 그리고 내륙교통의 개선과 원활한 공업노동시장의 확보를위해 노예제도의 폐지를 주장했고, 반대로 플랜터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남부에서는 공산품을값싸게 살 수 있는 자유무역과 농장노동에 필요한 노동력을 헐값에 원활히 공급 받을 수있는 노예제도의 계속적인 유지와 노예무역의 재개를 요구했다. 그리고 새로이 구성된 서부는 토지거래의 자유로운 정책을 원했다.이런 것들이 대체적인 쟁점의 윤곽이다.

 

이렇게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두고 남부와 북부 그리고서부라는 세 개의 영역이 대립되는 가운데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뚜렸한 명분이 있어야 되고 그 초점이 미국의 최대 약점인 노예문제로 집중하게 되었다.그렇다면 노예문제,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데려다가 비인도적인 노예로 삼은 것이 도덕적으로비난 받는다는 것을 남부의 플랜터 역시 모를리는 없다. 다만 다른 대안이 없었을뿐이었고 아킬레스 건(腱)과 같은 이런 남부의 약점을 북부에서는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목화농장과 흑인노예

 

1619년 네덜란드 상인들이 서인도제도에서 흑인 20명을 버지니아로 싣고 간 것을 시작으로 많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앵글로아메리카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면화(棉花)가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일라이 휘트니(Whitney, Eli - 1765 ~ 1825)가 목화씨를 제거하는 씨아 또는 쐐기라고도 부르는 조면기(繰綿機)를 발명한 1793년 이후부터라고 한다.

 

우리들이 연상하는 불쌍한 흑인노예들, 이들테면 쇠사슬에 묶어 잔혹한 감독자의 채찍을 맞으며 짐승처럼 일하는 그런 노예는 면화가 새로운 상품작물로 각광 받기 시작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 남부의 목화농장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고 그 전 까지는 대접이 그렇게 혹독하지는 않았다.

 

먹고 살기가 막막했던 초기 이주민들은 동냥하다시피 인디언마을에서 옥수수를 구하기도 했고 척박한 토양을 일구어 식량을 얻어야 될 형편이라 살기에 고심했던 일부 이주자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기도 했고 이주자들을모아 식민 사업을 벌렸던 버지니아 런던 회사는 더 이상의 적자를 감당하기 어려워 문을 닫아야만 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때 식민자들에게 숨통을 열어준 것이 담배재배, 남부 어디에서나 잡초처럼 잘 자라는 담배가 유럽으로 들어가 흡연인구를 늘리면서 수입이 배가되자 약삭빠른 영국상인들은 담배재배 농가에 자금을 대부해 주어 담배농장이 단일 작물을 생산하는 큰 농장으로 바뀌었고 이를 경영하는 농장주(農場主) 즉 플랜터(planter)가 등장하면서 흑인노예의 수요도 늘어났다. 그러나 이때 까지만 해도 담배농장의 노동력은 주로 인덴셔 서번트(Indentured servent)라고 불렀던 연기계약봉직자(年期契約奉職者)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갈 비용조차 없었던 단순노동자, 도제, 직인, 농민들을 비롯해서 일부중산 층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신대륙으로 건너가 대략 7년간 부자유스러운 상태에서 회사에 노동을 제공해 주고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얼마간의 토지를 얻어 이를 개간하고 가꾸는 프리홀더(Free hold)라고 불렀던 자영농민이 되었고, 자영업을 경영하여 많은 돈을 모으기도 했다. 필그림파더스(Pilgrim father) 역시 이런 연기계약봉직자들이었다.

 

네덜란드상인들이 싣고 온 흑인들 역시 이런 계약노동을 하기 위해 버지니아에 들어왔고 실제로 이들은 계약이 만료됨과 동시에 땅을 얻고 자유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민 초기의 아프리카 흑인들이 모두 노예는 아니었고 노예라고 해서 모두 흑인들은 아니었다. 전쟁에서 포로가 된 인디언이 노예가 되기도 했었다.

 

수요(需要)가 있으면 공급(供給)이 있게 마련이다. 노동수요가 늘어나자 이를 충당하기 위해서 아프리카흑인들이 노예상인들에 의해서 대량으로 앵글로아메리카로 들어갔고 별다른 기술이나 연고가 없었던 이들은 농장주에 고용되어 노예노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런 노예제도를 확장시킨 것은 1676년 베이컨반란(Bacon's Rebellion)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발란의 주모자 나사니얼 베이컨(Nathaniel Bacon - 1647 ~1676)이 흑인은 아니고 이런 저런 좋지 못한 사정으로 새로운 꿈을 찾아 앵글로아메리카로 건너간 영국인이다.

 

당시의 버지니아총독 윌리엄 버클리(Sir William Berkeley / 1606 ~ 1677)의 아내가 베이컨의 4촌누이었고 본국의 부친으로부터 자금을 지원 받아 많은 땅을 사서 농장주가 되어 명사가 되었으나 그의 욕심을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많은 땅을 얻기 위해 서쪽의 인디언 땅을 넘보게 되었다.

 

그러나 인디언과의 마찰을 싫어했던 총독의 미진한 정책에 반발해서 정치권력에 구애받기 싫어하는 일부 플랜터 및 다수의 프리홀더와 손잡고 버지니아의 주도 제임스타운을 점령하고 버지니아 전역을 장악하여 의회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개혁입법을 요구, 그러나 갑작스럽게 그가 죽음으로써 반란은 곧 끝났다.

 

그런데 이 반란 과정에서 자유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계약노동자나 한때 계약노동자였다가 자유스런 프리홀더가 된 소농민 등은 뿔뿔이 흩어졌으나 흑인노예들은 주인인 플랜터를 끝까지 따라 다녔다. 도망갈 곳도 숨을 곳도 없었던 이들 흑인노예가 훨씬 안전하다는 것을 플랜터들은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다.

 

1680년대가 되어서는 중부의 팬실베이니아가 건설되고 이곳으로 노동인구의 이동이 심화되면서 사우스캐롤라이나와 같은 남부에서는 안전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흑인노예제도가 본격적으로 확대되어 그 숫자가 급격히 늘어났고 이들 흑인노예들의 광범한 노동으로 남부를 중심으로 아메리카 식민지는 자본주의가 급속히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근대적인 자본주의와 전근대적인 노예제도가 병존할 수는 없다. 이때부터 미국의 노예제도는 미국인들에 의해서 비판받기 시작했고 1780년 매사추세츠州를 시작으로 노예제도의 전면 폐지를 선언하는 자유주(自由州- Free State)가 북부를 중심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발달에 노예제도는 그 자체가 저해요인이 된다는 것을 이미 미국인들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독립과 함께 담배산업이 사양화 되면서 노예의 수요 또한 감소되어 노예제도는 스스로 붕괴될 조짐을 보였다. 그런데 이때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휘트니가 발명한 조면기가 보급되고 새로운 상품작물로 목화가 각광을 받으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남부의 플랜터들은 목화농장을 확대하게 되고 더 많은 흑인노예들을 사역(使役)하게 되면서 노예문제는 단순한 사회문제를 떠나 정치적인 주요 쟁점이 되었다.

 

그렇다면 목화란 무엇인가? 지금은 거의 볼 수 없지만 195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널리 재배되고 있었던 주요 작물이고 다래라는 미성숙된 목화열매의 맛을 보았던 남부지방의 시골에서 자란 60대 이상의 연령층이면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타올과 내의 등 면직물의 소재인 천연섬유의 원료가 목화다. 이런 목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363년, 문익점(文益漸 / 1331 ~ 1400)이 사신(使臣)의 일원으로 원(元)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붓대롱 속에 씨앗을 숨겨온 것을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이 재배에 성공하여 널리 보급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붓대롱속에 숨겨왔다는 것은 당시의 중국에는 목화가 널리 재배되고 있었으나 해외반출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것을 문익점이 몰래 가져올 수 있었다는 것은 중국의 사정이 많이 달라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중국에서는 기원전 600년 경 인도로부터 불교의 전래와 함께 목화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중국에 목화가 들어오고 나서 근 2천년이 지나서야  우리나라에도 전래되었다는 것이고 그 동안 중국의 역대 왕조는 이를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고 해외유출을 철저하게 통제했다는 것이된다.

 

원(1271 ~ 1368)이라는 나라는 몽고족이 세운 나라다. 그들이 중국을 지배하면서 지나친 종속적 차별주의는 중국인들의 저항을 가져와 1340년대부터 소위 홍건적이라고 부르는 반원(反元) 세력이 중국을 휩쓸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중국의 치안공백이 극도로 문란해진 틈새에서 목화가 우리나라에 들어 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미국의 목화산업은 영국의 산업혁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영국의 산업혁명은 면직물공업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목화는 열대성 작물로서 일부 온대지방에서도 재배가 가능하나 무상기일(無霜期日) 210일 이상이라는 까다로운 기상조건에 맞아야 한다. 따라서 영국에서는 목화재배가 불가능하고 처음에는 인도에서 19세기부터는 미국으로부터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미국에서는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위시해서 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등으로 이어지는 목화지대(Cotton belt)가  형성되었고 남부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 된 동시에 전미국 수출액의 절반 이상을 목화씨를 제거한 원면(原綿)이 차지하게 되어 미국경제를 좌우하게 되었다. 이것은 곧 미국의 중심은 계속 남부에 머물 수 있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목화라는 단일작물의 재배는 많은 부작용을 불러 일으켰다. 연작(連作)에 따르는 피해가 속출해서 해마다 그 생산량이 현저하게 줄었다. 화학비료나 농약의 보급이 일반화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같은 작물을 계속 재배하게 되자 각종 병충해가 발생하고 토지의 비옥도가 떨어진 것이 그 원인이다.

 

그런가 하면 흑인노예들의 노동생산성은 매우 낮을 수밖에 없었고 다른 대체 인력을 구하기도 힘들었다. 왜냐하면 목화농장의 일은 흑인노예들이나 하는 천한 일거리가 되어 가난뱅이 백인들까지도 이를 기피하는 현상이 사회전반에 팽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흑인노예 값은 오르고 구하기도 힘들지게 되자 플랜터들은 연작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새로운 땅을 찾아 서부로 눈독을 들이게 되었고 금지된 노예수입의 재개를 주장하는 동시에 감독의 채찍은 사정없이 노예들의 등줄기를 후려쳤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들 플랜터들은 새로운 토지와 더많은 노예를 구해야만 했고 그 영역은 남서부로 점점 확장되어 갔다. 남부가 커지면(노예주가 확대되면) 상대적으로 북부는 위축될 수밖에 없고 세력균형도 깨어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북부에서는 노예제 폐지운동, 즉 애버레셔니즘(abolitionism)이 등장하고 많은 노예폐지론자(abolitionist)들이 나타나 미국사회가 크게 둘로 갈라져 첨예한 대립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남북의 대립

 

19세기 전반(前半) 미국경제의 주춧돌이자 남부농장주들의 절대적인 수입원인 면화는 그 재배에서부터 수확, 그리고 솜을 만들기까지의 모든 작업이 꾀나 복잡하고 많은 인력이 필요한 작물이다.

 

목화를 수확해서 씨를 제거한 부드러운 솜을 원면(原綿)이라 하며 그 씨를 짜서 얻는 기름을 면실유(綿實油)라 하여 그 용도 역시 매우 다양하다. 1793년 일라이 휘트니(Whitney, Eli / 1765.12.8~1825.1.8)가 발명했다는 간단한 조면기(繰綿機)에 2마력(馬力-horse power)의 수력(水力-물레방아)을 이용하면 1천명 이상 사람들의 작업량을 능가했고 이로 인해서 목화에 대한 인식은 날로 새로워졌다.

 

다시 말하면 휘트니가 발명한 조면기는 목화제조공정의 1차관문인 씨를 제거하는데 획기적으로 기여하여 미국의 목화산업을 더욱 번창하게 만들었고 거기에 따라 재배지역도 더욱 확대되었는가 하면 원면에서 옷감이 만들어지기까지 그 높은 부가가치에 따라 영국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의 북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목화(원면) 덕분에 일자리를 얻어 가족을 먹여 살리고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면기를 발명한 휘트니는 1794년 특허까지 얻었으나 그 구조가 단순하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만들고 사용할 수 있어서 큰 재미를 보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남북간의 정치적인 혹은 지역적인 대립을 격화시키는데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보는 시각에 따라 많은 견해가 있겠으나 분명한 것은 일종의 주도권 싸움이다. 독립 이래 남부가 장악하고 있던 정치적 경제적 주도권이 북부로 이양되었다는 의미도 되고 남부의 농업생산력이 북부의 제조공업력을 당해내지 못했다는 의미도 된다. 어쨌거나 남북간의 이해관계에 노예문제는 약방의 감초처럼 따라 다녔고 이것이 급기야는 전쟁으로까지 이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노예문제가 그처럼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하게 되었는가? 물론 여기에는 퀘이커교도나 휴먼니스트와 같은 인류애에 호소하는 인간적인 양심도 있었고 반인륜적인 제도자체를 거부하는 일말의 회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깊은 심연(深淵)에는 한발짝도 물러설 수 없는 깊은 이해관계가 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흑인노예가 해방되면 이들에게 시민권이 주어지고 시민권이 주어지면 곧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이미 미국의 각주(各州-states)에서는 남자보통선거가 일반화 되어 있었고 주(州) 단위로 선거인단을 뽑아 대통령을 선출하는 미국의 특이한 선거방식은 흑인들의 향배에 따라 미국의 정치판도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면 구조적으로 많은 흑인노예를 거느릴 수밖에 없는 남부로서는 자존심 이전에 생사(生死)와 직결되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남부의 많은 학자들 까지도 노예제는 고대문화의 불가결한 조건이었다고 말하고 최고수준의 능력과 지식을 가진 인간이 열등한 인간을 지배하고 이용하는 것은 자연과 신의 명령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은 하늘의 뜻이고 지배관료가 일반백성들을 지배착취하는 것도 하늘의 뜻이라는 봉건적 지배체제하에서의 중국적인 사고(思考), 즉 천명(天命)사상이 미국의 남부인들이 흑인노예에 대한 변명아닌 변명으로 합리화 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농업생산만으로 제조공업을 당할 수도 없고 더더욱 전근대적인 노예노동으로 계속 번영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남부의 자본은 새로운 토지와 노예를 구입하는데 소진되고 제조업은 외면 했으며 값싼 노예만을 원했다. 남부가 이런 고집과 시대적인 착오에 빠져있을 때 북부에서는 제조업을 중심으로 날로 번창하고 있었다. 당연히 무게중심이 이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남북전쟁이다.

 

흑인노예가 북부에서는 가사일을 돕는 하인(下人) 정도로 취급한 반면, 남부에서는 말하는 짐승으로서의 노동력을 강요했다는 것이 노예를 취급하는 남북간의 차이, 결국 이런 차이는 북부에서는 이미 1810년대에 노예의 도망을 부추기고 이를 돕는 소위 지하철도(地下鐵道 - Underground Railroad) 운동을 시작으로 1850년대가 되면 절정에 도달한다.

 

정치적, 경제적 여러 이유로 노예문제가 쟁점으로 부각된 것은 미영전쟁(1812 ~ 14)후 새로이 얻은 땅 미주리가 연방에 가입신청을 낸 1817년부터 시작된다. 1819년 초, 이를 심의한 연방의회에서 뉴욕주 출신의 어느 하원의 의원이 미주리가 연방에 가입하되 노예의 유입을 금지하고 이미 있는 노예도 25세가 되면 해방시킨다는 수정안을 제출했다. 미주리가 노예주가 아니라 자유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격론끝에 북부출신이 많은 하원에서는 통과되었으나 남북이 같은 수자로 구성된 상원에서는 부결되었다.

 

같은 해 12월, 메인(Maine) 주가 연방에 가입을 신청하자 상원에서는 메인을 자유주로 미주리를 노예주로 하여 이를 통과시켰다. 공평하게 반반씩 가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일리노이 출신의 어느 상원의원이 미주리를 노예주로 받아들이되 북위 36° 30′ 이북의 루이지애나 매입지에서는 노예제를 금지시키는 수정안을 첨가시켰고 역시 격론 끝에 통과되었다.

 

그러나 미주리 주의회가 노예가 아닌 자유흑인과 물라토(흑백혼혈)에게 시민권을 제한하는 헌법을 만들자 연방의회가 다시 들고 일어났다. 결국 미주리 주의회는 연방의회에 굴복하고 1821년 메인은 23번째 주로, 미주리는 24번째 주로 각각 연방에 가입했다. 이것이 미주리 타협(Missouri Compromise)이다.

 

1831년 1월, 보스턴에서는 개리슨(Garrison, William Lloyd / 1805 ~ 1879)이라는 저널리스트가 해방자(The Liberator)라는 주간지를 발간, 남부에서 즉시 노예제를 폐지하라고 호소하고 애벌리셔니즘(abolitionisa - 노예제폐지운동)을 전개, 많은 동지들을 모았다. 그러나 그해 8월 이른 바 냇 터너(Nat Turner / 1800 ~ 1831)의 흑인노예 반란이 일어났다.

 

버지니아 오지에서 농장주의 재산으로 태어난 흑인 노예 냇 터너는 몇차례 팔려 다니면서 주인이 바뀌었고, 그럴 때마다 더욱 종교에 심취해서 하느님이 그의 종족을 구하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흑인노예들을 부추겼다. 1831년 8월, 일식이 일어나자 이것이 곧 하느님의 공격신호라고 믿고 그가 신뢰하는 흑인노예 7명과 함께 잠자고 있는 주인을 살해한 뒤 밤낮 2일 동안 70여명의 흑인노예들이 60명의 백인을 무자비하게 살육하는 공포의 세계를 만들었다. 결국 3천명의 주민병대가 출동하여 반란은 진압되고 반란에 가담했던 흑인노예들은 처형되었으며 주동자 터너 역시 6주동안 피해 다녔지만 결국은 잡혀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노예들이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고 있거나 비굴한 노예근성 때문에 무장봉기란 상상할 수 없다는 남부 백인들의 신화는 깨어졌고 보다 엄격한 통제가 강화되었다. 문제의 남부에서는 주로 플랜터(대농장주)들의 압력에 의해 우편물을 철저히 검열하여 애벌리셔리즘의 전파를 차단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누구도 애벌리션운동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함구령(緘口令 - Gag rule)를 제정하고, 남부의 애벌리션리스트(노예폐지론자)들에게는 공공연한 탄압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이미 양극화된 남북간의 모순과 차이는 이런 단속만으로는 효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남부에서 노예제폐지운동을 단속하는 만큼 노예폐지운동도 더욱 확대 되어 1832년 게리슨을 중심으로 뉴잉글랜드 노예제 반대협회(New England Antislavery Society)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날이 갈수록 확산되어 1840년대가 되면 2천 여개의 지부(支部)와 20만명의 회원이 확보되었다. 이 무렵부터 노예제폐지운동은 이론적이거나 청원하는 형태를 벗어나 정치적인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런 가운데 1846년부터 48년까지 계속된 멕시코전쟁(Mexican War)은 노예제에 대한 새로운 불씨를 당겼다. 전쟁의 결과 미국이 새롭게 얻은 땅 남서부에 노예제를 허용하게 되면 북부가 위축되고 폐지하게 되면 남부가 힘을 잃게 된다. 그런데 멕시코전쟁을 주도한 것은 남부측이었고 따라서 이들은 새로운 영토에 노예주를 건설코자했다.

 

이에 반발해서 펜실베이니아 출신 민주당 의원 데이비드 윌멋이 멕시코로부터 획득한 영토에서는 노예제를 금지해야 한다는 조항을 예산안에 추가할 것을 제안(1846. 8. 8) 했다. 지역간의 갈등이 고조된 상황에서 제시된 이 제안은 전국적으로 치열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이 윌멋단서(Wilmot Proviso)라는 것이고 남부의 속셈을 미리 간파하고 쐐기를 박아두고자 했던 것이다.

 

윌밋의 단서는 계속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상하 양원에서 통과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노예제 문제를 축소하거나 타협적으로 해결하려는 휘그당이 남북으로 분열되고 민주당도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라섰다. 여기에 1850년 캘리포니아의 연방가입문제가 불거졌을 때, 남북간의 대립을 더욱 첨예화 되고 말았다.

 

이때까지 자유주와 노예주는 각각 15개씩, 이런 남북간의 균형이 캘리포니아가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균형이 깨어지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캘리포니아가 자유주가 될 공산이 컸다. 이렇게 되자 사우스캐롤나이나를 위시한 남부에서는 만약 캘리포니아가 자유주가 되면 남부 15개주는 연방에서 탈퇴하겠다고 위협했다. 이것이 엄포가 아니라 사실로서 확인되었을 때 자칫 일이 잘못되면 연방이 깨질 수도 있다. 누구든 서둘러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만들어 낸 묘안이 이른 바 1850년의 타협(Compromise of 1850)이라는 것이며 그 주요 내용은 캘리포니아를 자유주로 해서 연방에 가입시키고, 서부의 새로운 영토에서는 노예제의 채택여부를 주민투표에 의해서 결정하고, 도망노예송환법(Fugitive Slave Acts)을 전국적으로 강화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했다. 도망노예의 취체법이 강화되자 북부에서는 공공연히 노예의 도망을 돕는 소위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 운동이 본격화 되어 어둠 속에서 변장한 노예폐지론자들이 노선이라는 이름의 여러 탈출로를 만들고, 중간대기장소를 역(驛)이라 불렸으며 탈출을 돕는 사람은 차장, 그들이 맡은 도망노예를 소포나 화물로 불렸다.

 

탈출로는 북부 14개 주와 도망노예 추적자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캐나다 전체에 걸쳐 사방으로 뻗어 있었으며, 도망노예가 속출하자 남부의 플랜터들은 이를 엄격히 감시하고 채찍은 더욱 무자비하게 흑인노예들의 등가죽을 후려쳤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된 1852년 해리엣 비처 스토 부인( Harriet Beecher Stowe / 1811 ~ 1896)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이 간행 되어 일약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그 파장은 일파만파로 번져갔다.

 

드디어 1854년, 일리노이 출신으로서 민주당의 지도자인 더글라서가 캔자스-네브래스카법(Kansas-Nebraska Act)을 의회에 제출, 그 내용은 이 두곳을 연방에 편입시킬 때 노예제의 취사선택은 주민투표에 의하자는 것인데 연방의회는 격론을 거듭하다가 겨우 통과되었다. 이를 기화로 북부에서는 남부에 대처하기 위해서 갑자기 미국 공화당이 만들어지고 남부건 북부건 이곳으로 위장전입이 도를 넘어서고, 급기야는 유혈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1856년 5월에는 노예제 확대를 반대했던 어떤 의원이 캔자스에 대한 범죄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감행, 남부출신들에게 욕설을 퍼붓자 이틀뒤 이를 괴씸하게 생각한 남부 출신의 한 의원이 의사당에서 그를 찾아가 욕설과 함께 지팡이로 내리쳐 무려 5년간 정양을 요하는 중상을 입히기도 했다. 의사당에서의 폭력과 욕설은 미국이라해서 다를 것이 없었다. 이런 폭력행위를 두고 남부 사람들은 마땅한 벌을 받았다고 찬양했고 북부사람들은 노예제가 낳은 야만행위라고 비난했다.

 

1857년 이색적인 소송에 대한 판결문이 발표되었다. 드래드 스콧 판결(Dred Scott decision)이라 부르는 이색적인 소송과 판결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 드래드 스콧이라는 흑인은 30년 전 미주리에서 노예로 있었다. 하지만 그의 주인이 그를 1834년 미주리(노예주)로부터 일리노이(자유주)를 거쳐 위스콘신 준주(미주리 타협안의 규정에 의하면 노예제도가 인정되지 않는 준주)로 데리고 갔다가 미주리로 다시 데리고 돌아왔다. 스콧은 1846년 노예제를 반대하는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미주리 주에 오기 전에 자유주와 자유준주에 살았음을 내세워 미주리 주법원에 자신이 자유신분임을 밝혀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던 것이다.

 

이 소송에서 1차적으로는 스콧이 승소, 그러나 미주리 주 대법원은 스콧을 자유신분으로 선언한 원심을 파기했으며, 그때부터 이 사건은 장기간 계류되었다가 마침내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갔다. 연방대법원은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은 이틀 후인 1857년 3월 6일 발표한 판결문에서 흑인은 미국 시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할 자격이 없으므로 연방법원에 제소(提訴)할 권리도 없고 백인이 흑인을 존중해 주어야 할 어떠한 권리도 없다고 판결했다.

 

결국 남부 세력이 강했던 연방대법원에서는 아무리 자유주에 가서 오래 살았다고 해서 노예가 자유인이 될 수 없으며 노예주(州)인 미주리로 돌아왔다면 다시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어느 특정한 지역의 재산소유권(노예제)을 금지하려 한 연방의 결의는 위헌(違憲)이라 선언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북부의 참담한 패배인 동시에 남부의 승리였다.

 

이런 판결을 뒤집기 위한 합법적인 방법은 단 하나, 대통령을 북부 출신으로 선출해서 연방대법원의 판사들을 갈아 치우고 문제의 위헌 판결을 다시 뒤집어야 한다. 이때 등장한 것이 링컨(Lincoln, Abraham / 1809 ~ 1865)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