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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Canada)의 시련(試練)|-2

구름위 2013. 2. 1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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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영제국 최초의 자치령 캐나다 연방의 성립                                             

 

 (1) 캐나다의 분열

 

1763년 체결된 파리조약으로 프랑스 식민지 캐나다가 영국의 식민지로 바뀌었을당시 퀘벡 등지에는 약 7만의 프랑스계 주민이 살고 있었다.

 

이에 비해 영국계는 불과 수백명, 영국으로서는 숫적인 열세(劣勢)를 극복하고 효과적으로 이를지배하기위해서는 절대다수의 프랑스계 주민들을 달래지 않고서는 불가능 했고 자칫하면 13개식민지(미국)의 재판이 될 위험도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파리조약 체결 직후인 1763년에는 왕령으로 13개 주(州) 주민(미국인)들의출입을 금지시켰고 1774년 6월 영국의회는 퀘벡법(Quebec Act)을 만들어 퀘벡(캐나다)의영역을 오하이오 강과 미시시피 강까지 확대하여 사실상 13개주의식민지인(미국인)들의 서방진출을 억제하고 캐나다를 13개 식민지로부터 분리코자했다.

 

다시 말하면 13개 주가 영국의 식민지라고는 하지만 이미 로드아일랜드나 코넷트컷과같은 자치식민지나 1774년 이전의 매사추세츠와 같은 반자치 식민지에서는 자주독립의기운이 감돌고 있었고 이런 기류가 새로이 얻은 땅 캐나다에 이식되는 것을 어떻게든영국으로서는 막아야만 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의 캐나다에는 프랑스계 주민이 절대다수를 찾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식의 문화와 제도만으로 통치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퀘벡법에서는과거의 프랑스식민지 시대에 이식된 영주제를 그대로 두고 가톨릭 신앙과 10분의1세 징수를 허용하고 프랑스 주민에게는 프랑스의 언어와 민법의 적용을 확인해 주었다.외견상 프랑스의 지배시대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형법만은 영국의 것을 따르게 했을뿐이다.

 

그리고 5대호와 오하이호 강과 미시시피 강으로 애워싸인 삼각지대를 퀘벡에 편입시킨것도 프랑스계모피업자들은 위한 인디언 보류지로 남겨 두기 위해서다. 이런 조치가 앨리게니산맥 서쪽으로 진출을 바라고 있던 13개 식민지인들에게는치명적이었고 이에 반발해서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미국의 독립전쟁에서밝힌 것과 같다.

 

1775년 미국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났을 때 당시 미국의 대표적인 공식기구인 대륙회의는 캐나다의 지원을 요청했지만그 반응은 신통치 못했다. 이에 미국의 독립파가 캐나다를 해방시키기 위해 북쪽을 진격, 몬트리올을 점령했지만 곧 영국군에게 패한 뒤 미국의 캐나다 해방은일단 중단되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했던 이른 바 왕당파가 대거 캐나다로 망명, 그 수가 6만을 넘었고 이들 망명자들은 1783년 파리조약으로 미국의 독립이 승인되자 그 이듬해인1784년 뉴브런즈윅을 세우는 등 일시적인 망명이 아니라 영구적인 터전을 캐나다로 삼아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계 주민에 이어 영국계 미국인들이 대거몰려와 새로운 터전을 잡고 독립된 미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계속해서 머물러살겠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언뜻보기에는 매우 단순한 것 같지만 중요한 매듭 하나가 다시 불거지게되었다. 이들 영국계 미국인들은 당연히 그들의 관습대로 미국과 같은 종교의 자유와 대의정치를 요구했고 프랑스식의 총독제도 및 카톨릭을 거부했다.

 

영국정부로서는 문화가 다른 이들 주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점진적인 통합을 추진하기 위해서 1791년 헌법조례를 만들어 오타와 강을 경계로 영국계가 많이 살고있었던 지금의 온타리오 주 일대를 어프캐나다(Up Canada), 프랑스계가 많았던 퀘벡 일대를 로어캐나다(Low Canada)로 분리, 각기 다른 체제를 만들어 분할 통치함으로서 양측의 불만을 해소코자 했다.

 

이로부터 1840년 통합법에 의해서 상(上), 하(下) 캐나다가 다시 하나의 캐나다로 통합될 때 까지 약 반세기 동안 분열시대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양측간의 교류가 단절되거나 적대감으로 일관되는 그런 분열이 아니라 서로간 다른 문화적인 갈등을 억지로 묶기 보다는 서로가 마음 편하게 살아 가는 그런 것이기에 우리들이 해방후 지금까지 겪고 있는 분단현상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두 개의 캐나다로 분열된 후에도 어프캐나다에서는 영국본토의 입헌왕정제도가 그대로 이식되고 있었고 로어캐나다에서도 여전히 퀘벡법에 따라 프랑스계 주민들이 그전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791년의 헌법조례가 영국계와 프랑스계주민들의 화합을 위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양측의 대립을 격화시켜 잇달아 반란이 일어났다.

 

(2) 파피노와 매켄지의 반란

 

1812년에 일어난 미영전쟁(War of 1812 - 1812년 전쟁)은 캐나다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13개 합중국)은 다시 캐나다를 합병하기 위해서 캐나다에 침입했다.

 

캐나다로서는 본국인 영국보다는 이웃 미국이 더욱 두려웠다. 프랑스계 주민들은그들의 언어와 종교 등의 권리가 뺏기지나 않을까 해서 두려워했고 영국계 주민들은 애써 만든 정착지를 다시 잃을까 해서 두려워했다.

 

따라서 미국이 침입했을 때 어프캐나다건 로어캐나다건 주민들이 일치단결, 캐나다적인 나름대로의 내셔널리즘(국가주의)을 발휘해서 미국의 침입을 저지할 수 있었다.

 

전쟁이란 무서운 재앙만을 안겨다 주는 것은 아니다. 소위 전쟁특수라는 것이 생기고 이로 인해서 경제는 한단계 도약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전쟁으로 노바스코샤나 뉴브린즈윅 등을 중심으로 군수경기(軍需景氣)가 활기를 띄게 되고 이에 덩달아 공업과 농업부문에서도 변화가 일어나 유럽으로의 수출품도 모피를 대신해서 곡물이나 목재가 주를 이루었다.

 

이에 따라 내륙기반시설의 확대로 운하와 도로의 건설이 잇달아 진척되고 경제의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경제규모가 커지고 생활수준이 높아지면 주민들의 불만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다. 캐나다의 경제발전을 앞질러 주민들의 불만이 과거 어느때 보다 더 높아졌다.

 

운하나 도로의 건설 등이 일부 상인들이나 정책 담당자들만 이롭게 할 뿐 일반주민들에게는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불만의 이유였다. 이런 처지에 1837년에는 경제적인 불황까지 닥치자 프랑스계가 많이 모인 로어캐나다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1834년 프랑스계 주민을 이끌었던 파피노(Louis Joseph Papineau /1786 ~1871)는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요구와 불만에 대한 92개 항의 결의안을 의회에 제출하여 통과시켰다. 그러나1837년 캐나다 총독은 이런요구사항을 거부하고 식민지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을 의회의 동의 없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게되자 파피노는 선동적인 연설로 이에항의했다.

 

1837년 11월 파피노의 선동에 마침내 로어캐나다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사전에 준비없이 중구난방으로 일어난 것이기에 대다수 주민들이 외면했고 반란은 실패, 파피노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어프캐나다에서도 매켄지(William Lyon Mackenzie / 1795 ~1861)라는 저널리스트 출신의 정치가(政治家)가 소위 가족맹약(Family Compact)이라는 이름으로 몇 사람이 정치를 지배했던 과두(寡頭)지배와 경제적 불황을 계기로 토론토 주변에 800명의 추종자들을 집결시켜 총독을 체포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미비한 조직과 통제력으로 인해거사는 실패하고 파피노와 마찬가지로 매켄지 역시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 두 반란의 소식이 전해지자 휘그당을 이끌고 있었던 당시의 영국수상 그레이(Charles Grey, 2nd Earl Grey/ 1764 ~1845)는 더럼(Durham, 1st Earl of/Lambton, John George / 1792 ~1840)을보내어 사태의 진상을 파악케 했다.

 

더럼이 캐나다에 머문 기간은 5개월, 그 동안 본국에서는 수상이 그레이에서 자유당의 멜번으로 바뀌었고 더럼은 캐나다의 총리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 1839년 캐나다에 관한 더럼보고서(Durham Report - 정식 명칭은영국령 북아메리카의 정세에 관한 보고 Report on the Affairs of British NorthAmerica)를 제출하여 이후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더럼은 이 보고서에서 반란의 원인을 영국계 주민과 프랑스계 주민 간의 민족적 대립이라 지적하고, 영국계의 상(上)캐나다와 프랑스계의 하(下)캐나다를 병합하여 프랑스계 주민을 영국계 주민으로 동화시켜 내각책임제에 입각한 자치권을 부여하는것이 최선의 해결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의 캐나다 주민은 약 1백 50만으로 늘어났다. 이들 대부분은 센트로렌스 강주변에 모여 살고 있었지만 도로와 운하가 개설되고 철도가 등장하여 미국의 팽창과는관계없이 점차 서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어떤 형태로던 통치상의 개혁이 필요했고 이런 시대적 변화에 따라 1840년 영국의회는 통합법을 만들어 상, 하 캐나다에서동수(同數)의 대의원(代議員)을 선출, 통합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계주민을 영국계로 동화 시키려는 영국의 융화정책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캐나다의 팽창과 연방 결성

 

통합캐나다가 성립된 1840년부터 캐나다 연방이 결성된 1867년까지 30 수년간 캐나다에서도 인구가 늘어나고 서부로의 개척이 진전되는 등 현저한 변화가 일어났다.

 

캐나다에 인구가 늘어난 것은 인구의 자연증가도 있었지만 이 보다는 사회적 증가가 더 큰 몫을 담당했다. 1840년대 유럽에서는 대기근이 발생하여 아일랜드 주민들을 위시해서 많은 유럽인들이 캐나다로 몰려들었고 1858년에는 프레이저 강(Fraser R)바닥에서 사금이 발견되자 소위 골드러시가 이루어저 갑자기 서부개척이 활기를 띄게되었으며 인구도 배로 불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1846년 미국과 오리건 조약으로 북위 49도를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짓고 54년에는 호혜통상조약을 맺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했으며 일부 유력한 실업가들은 미국과의 합병까지 원하게 되었고 미국의 팽창주의자들은 캐나다와의 합병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를 즈음 1861년 미국에서는 남북전쟁(Civil war)이 일어났고 전쟁기간 미국은 영국에게 캐나다를 달라는 요구를 하였다. 그 이유는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영국이 만들어 준 함선이 남군(남부)에서 활약하면서 미국(북부)의 상선에 많은 피해를 주었으니 이를 배상하는 의미에서 캐나다를 달라는 것이다.

 

이런 터무늬 없는 미국측의 주장은 캐나다인들을 다시 하나로 뭉치는 계기를 만들었고 캐나다의 연방결성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캐나다에서 주도권을 행사했던 것은 연안 4개주라고 하는 캐나다(퀘벡과 온타리오), 노바스코샤 그리고 뉴브런즈윅 등이었다.

 

이 들 연해주는 현상유지만을 원하다가 철도개통 및 무역의 확대로 연방결성에 필요성을 느끼고 1864년 9월 프린스에드워드 섬(Prince Edward I.)의 샬럿타운(Charlottetown)에서 제 1차 회의를 열었다. 한달 후인 10월에 퀘벡에서 제 2차 회의를 열고 연방결성및 정부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을 포함한 퀘벡 결의문을 만들었다.

 

이 결의문은 곧 영국의회에 제출되었고 영국의회에서는 1867년 3월 영령 북아메리카조례(British North America Act)라는 이름으로 이를 통과시켰다. 이 조례에서 캐나다주(州)를 퀘벡과 온타리오로 나누고 전체 이름으로 캐나다를 사용하기로 했다. 이것이 대영제국의 최초의 자치령 캐나다연방(Dominion of Canada)의 출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