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다르크
(영)Saint Joan of Arc. 별칭은 오를레앙의 처녀(La Pucelle d'Orléans).
1412경 프랑스 바르 동레미~1431. 5. 30 루앙.
1920년 5월 16일에 성인으로 추증되었으며 축일은 5월 30일.
백년전쟁(1337~1453) 때 조국을 위기에서 구한 프랑스의 국가영웅.
잔 다르크의 일생과 그녀의 잔인한 처형을 이야기할 때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사실 하나는 조지 버나드 쇼가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겉꾸밈'이라고 부른 과장된 꾸밈이다.
하지만 큰 물의를 일으킨 재판과 공개 처형을 포함한 잔 다르크의 최후는 적어도 그녀 인생의 다른 부분보다는 광범위하게 기록되어 있다.
가족들이 '자네트'라고 부르던 잔 다르크는 프랑스 바르 공국 동레미 지방의 유복한 농부의 다섯 아이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읽거나 쓸 줄도 몰랐으며 가정부나 양치기 소녀로 일하고 있었다. 신앙심과 애국심이 매우 깊었던 이 소녀는 고국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벌어지고 있던 백년 전쟁으로 매우 심란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가 열세 살 때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녀는 천사장 미가엘의 환영과 음성을 듣게 되는데, 미가엘은 기사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성 마가렛과 성 캐서린도 함께 나타났다. 이후 3년 동안 잔 다르크는 그들의 속삭임을 듣게 되었다.
Bussiere Gaston - Joan of Arc
당시 프랑스는 발루아 왕조의 왕 샤를 6세의 아들이며 왕위계승자인 왕세자 샤를과 랭커스터가 출신의 잉글랜드 왕 헨리 6세가 프랑스 왕위를 놓고 다투는 격전장이었다. 헨리의 군대는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선량공)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 북부의 거의 전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왕위 즉위식을 올리던 랭스가 계속 적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왕세자 샤를은 부왕 샤를 6세 사후 6년이 지난 1427년말에도 정식으로 왕관을 쓰지 않았고, 이 때문에 그의 왕위주장 명분은 거의 현실성이 없게 되었다. 왕세자 즉위식을 올리지 않은 한 프랑스 왕위주장의 정당성은 언제든지 도전받을 수 있었다.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세력과 샤를 세력의 접경에 있던 잔의 고향 동레미의 사람들은 부르고뉴의 위협 앞에 거의 자신들의 고향을 포기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잔은 1428년 5월 '음성'의 인도를 받아, 왕세자에게 충성하고 있는 가장 가까운 거점인 보쿨뢰르로 가서 그곳 사령관에게 왕세자 군대에 가담하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다. 처음에 사령관은 16세 소녀의 초월적 능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1429년 1월 재차 방문한 잔의 굳은 마음과 신앙심에 설득되어 왕세자가 있던 시농으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
같은 해 2월 13일 잔은 남자의 복장으로 6명의 무장한 군인의 호위를 받으며 출발했으며, 적의 영토를 가로질러 11일 뒤 시농에 도착했다. 잔은 도착 즉시 샤를이 머무르고 있는 성에 갔다. 샤를은 그녀를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를 확신하지 못했고 측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지만, 이틀 뒤 접견을 허락했다. 샤를은 신하들 속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었지만 잔은 그에게 곧바로 가서 자신이 잉글랜드군과 싸우기를 원하며 랭스에게 즉위식을 올리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황세자의 명령으로 즉시 교회당군에 의해 심문이 이루어졌다. 샤를의 친척인 알랑송 공작도 그 심문에 참석했는데 그는 잔에게 호의를 보였다. 3주 뒤에는 푸아티에에서도 저명한 신학자들의 질의문답이 있었다. 이러한 심문은 1417년 교회의 대분열이 막을 내린 뒤에도 여전히 존재했던 이단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잔은 성직자들에게 자신의 사명을 증명할 곳은 푸아티에가 아니라 오를레앙이라고 말하고 3월 22일에는 잉글랜드군에게 보내는 도전장을 받아쓰게 했다. 성직자들은 당시 잉글랜드군에게 수개월 간 포위되어 절망적인 상황에 있던 오를레앙의 구출에 그녀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을 올렸고 샤를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잔은 시농으로 돌아왔고 샤를은 4월중에 투르에서 잔에게 약간의 군속을 붙여주었다. 장 돌롱이 시종으로 따랐고, 오빠 장과 피에르도 그녀를 따랐다. 그녀는 심판일의 예수를 그린 기장과 예수의 이름이 새겨진 기를 들었다. 칼은 어디에서 구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녀는 생트카트린드피에르부아 교회에 있을 것이라고 답했고 실제로 그곳에서 칼이 발견되었다.
1429년 4월 27일 블루아에서 수백 명의 군대가 소집되어 오를레앙으로 향했다. 오를레앙은 1428년 10월 12일 이래로 잉글랜드 요새에 의해 완전 포위되어 있었다. 4월 29일 잔과 프랑스군 사령관 라 이르가 보급품을 가지고 갔을 때 잔은 증원군이 올 때까지 행동을 자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를레앙 포위전). 5월 4일 저녁 잔은 쉬고 있다가 영감을 받은 듯 갑자기 벌떡 일어나 잉글랜드군을 공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무장을 갖춘 뒤 도시의 동쪽에 있는 잉글랜드군 요새로 서둘러 향했다. 당시 그곳에는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그녀는 그 사실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 잔의 도착은 프랑스군의 사기를 높여주었고 마침내 프랑스군은 요새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날 잔은 또다른 도전장을 잉글랜드군에게 보냈다. 5월 6일 아침 그녀는 강의 남쪽 둑으로 건너가 다른 요새를 향해 진격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그 근방의 더 강력한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철수했다. 그러나 잔과 라 이르는 잉글랜드군을 공격해 그 요새마저 삽시간에 빼앗았다. 5월 7일 새벽 프랑스군은 레투렐 요새로 진군했다. 잔은 부상을 입었지만 곧바로 전투에 복귀했고, 그녀의 이러한 본보기에 자극되어 프랑스 지휘관들은 쉬지 않는 공격을 퍼부어 마침내 잉글랜드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다음날 잉글랜드군은 퇴각하려는 듯 보였지만 일요일이기 때문에 잔은 추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5월 9일 잔은 오를레앙을 떠나 투르에서 샤를을 만났다. 그녀는 왕세자에게 랭스로 서둘러 가서 대관식을 올릴 것을 촉구했다. 보다 신중한 태도를 취한 샤를의 참모 몇몇은 이와는 달리 노르망디의 정복을 조언했다. 샤를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은 잔의 끈질긴 요구에 기울었다. 그러나 우선 루아르 강변의 여러 마을에 있는 잉글랜드군을 소탕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잔은 프랑스군 중장인 그녀의 친구 알랑송 공작을 만났고, 함께 이동해 도시 하나와 중요한 다리 하나를 손에 넣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보장시를 공격했다. 잉글랜드군은 공격을 받고 성 안으로 후퇴했다. 이어 잔은 샤를 및 그 측근 조르주 드 라 트레무아유의 반대와, 알랑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궁정에서 의심을 받고 있던 프랑스 사령관 리슈몽을 받아들였다. 잔은 충성서약을 하게 한 뒤 그의 도움을 받았으며 얼마 후 프랑스군은 보장시 성을 함락하는 데 성공했다.
1429년 6월 18일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은 파테에서 전투를 벌였다. 잔은 병사들에게 샤를이 그날 최대의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약속했다. 잔의 말 그대로 완벽한 승리가 이루어졌다. 잉글랜드군은 패주했고 무적이라는 명성이 프랑스군에게 뒤따랐다. 잔과 사령관들은 여세를 몰아 대담한 파리 공격에 착수하는 대신 당시 라 트레무아유와 함께 쉴리쉬르루아르에 있던 샤를과 합류하기 위해 되돌아갔다. 잔은 다시 한번 샤를에게 랭스로 신속하게 진군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주저했다. 루아르 강을 따라 여러 도시를 지나는 동안 잔은 샤를을 수행하면서 시간을 끌 것을 주장하는 측근들의 조언과 그의 주저함을 물리치고 결단을 내릴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랭스 공격의 위험과 어려움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돌렸고, 마침내 샤를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군대가 집결하기 시작한 지앵에서 잔은 편지 2통을 썼는데, 하나는 샤를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있던 투르네 주민에게 보내는 권고이고, 다른 하나는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에 대한 도전장이었다. 6월 29일 그녀는 샤를과 함께 랭스로 출발했다. 트루아에 도착하기 전에 잔은 그 도시 주민에게 투항하면 용서해주겠다는 내용의 글을 보냈다. 그들은 잔을 탐색하기 위해 설교사인 수도승 리샤르를 보냈다. 그가 그녀의 사명에 깊은 감명을 받고 돌아왔지만 도시 주민들은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 편에 계속 남기로 결정했다. 샤를은 회의를 열었고 잔은 공격을 제의했다. 다음날 아침 잔은 공격을 개시했고 트루아는 곧바로 강화를 요구했다. 이어 샤를의 군대는 샬롱으로 진군했다. 샬롱의 주민들은 저항을 결의했지만 주교백작은 성문열쇠를 샤를에게 넘겨주었다. 7월 16일 프랑스군은 랭스에 도착했고, 랭스는 성문을 열었다. 1429년 7월 17일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잔은 제단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기를 들고 서서 행사를 참관했다. 식이 끝난 뒤 그녀는 샤를 앞에 무릎을 끓고 처음으로 자신의 주군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같은 날 그녀는 부르고뉴 공작 앞으로 강화와 국왕요새로부터의 철수를 권
하는 서한을 보냈다.
앵그르 - 샤를 7세 대관식의 잔 다르크
그로부터 하루 이틀 뒤 본재판이 시작되었는데 70가지에 달하는 죄목에 그녀가 답하는 데만 이틀이 걸렸다. 그 죄목들은 기본적으로 잔의 모든 태도와 행위가 신성모독의 혐의가 있다는 주장에서 나온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스스로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공표한 점, 미래를 예언한 점, 편지에 예수와 마리아라는 서명을 함으로써 예수의 이름이 가지는 신비한 마력을 지니려고 한 점, 구원의 사명을 띠고 있다고 자처한 점, 남자의 복장을 한 점 등이었다. 아마도 가장 무거운 죄목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았다고 하는 주장으로 이것은 하느님의 중계자를 자처하는 교회의 직능을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3월 31일 잔은 교회에 대한 복종문제 등 그녀가 회피했던 항목 몇 가지를 다시 질문받았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심문하고 있는 법정에 복종하는 여부는 분명 교회에 대한 복종과 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은 하나의 테스트가 되는 셈이었다. 잔은 지상의 그리스도 교회가 오류를 저지를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자신의 언행에 대해서는 오직 하느님과 성인만이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하며 함정을 피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심문은 계속되었고, 조목은 70가지에서 12가지로 줄어들어 루앙과 파리에 있는 저명한 여러 신학자의 검토를 받도록 했다.
Stilke Hermann Anton - Joan of Arc in Prayer
다음날인 1431년 5월 30일 아침 잔은 신앙고백을 하고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받았는데, 이것은 타락한 이단자에게는 이례적인 특혜였다. 그녀는 2명의 도미니쿠스파 수도사를 대동하고 비외마르셰 광장으로 인도되었다. 거기서 다시 한 차례의 설교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세속법정에 넘긴다는 판결, 즉 화형에 처한다는 판결이 담당 재판관과 주위의 많은 대중 앞에서 낭독되었다.
당일 아침 9시, 잔 다르크는 죄수 호송 수레를 타고 루앙의 시장으로 끌려�다. 광장은 군인, 고위 성직자, 귀족 그리고 마을 사람들로 꽉차 있었다. 형 집행자들은 그녀를 말뚝에 묶고 그녀의 머리에는 종교 재판의 주교관('이단자. 타락자. 배교자 . 우상숭배자'라는 말이 적혀 있는 일종의 머리띠)을 씌웠다. 도미니쿠스파 수도사 1명이 잔을 달래자 그녀는 그에게 십자가를 높이 들어 자신이 볼 수 있도록 해주고, 구원의 확신에 대한 소리를 크게 외쳐 화염 속에서도 들을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부탁했다. 잔은 최후까지 자신의 말은 하느님의 음성을 그대로 전한 것이며 하느님은 자기를 속이지 않았다는 믿음을 가졌다.
마침내 형 집행자들이 쌓아 놓은 장작더미 요소요소에 불을 놓자 불꽃이 날름거리며 그녀의 발 근처까지 올라갔다. 그녀는 연기 때문에 콜록거리며 기침을 해대더니 불길이 몸에 와닿자 비명을 질렀다. 떠들썩하던 군중들은 얼어붙었다. 그 순간부터 죽음과 같은 고요함이 광장을 덮었으며 나무가 타면서 내는 우지직 소리만이 간간이 들렸다. 그녀의 옷이 불길에 휩싸이자 잔 다르크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반쯤 애원하는 소리로, 또 반쯤 비명 지르는 소리로 외쳤다.
"예수님, 예수님!"
그녀의 옷은 완전히 연소되었으나 살은 아직 완전히 타지 않은 상태에서 형 집행자들은 불붙은 장작들을 확 치워버렸는데, 이는 형이 잘 집행되었다는 것을 구경꾼들에게 좀더 똑똑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보니 그녀는 완전히 알몸이 되어 여자의 은밀한 곳을 모두 드러내고 있었으며, 이러한 광경을 충분히 보여준 다음 형 집행자들은 남은 장작다발에 다시 불을 붙여 불쌍한 시체에 불길이 닿게 하였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전해지고 있다.
그녀의 유해는 센 강에 던져졌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 Joan of Arc
화형식이 있은 며칠 뒤 잉글랜드 국왕과 파리대학교는 잔의 처형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거의 20년이 지난 1450년 샤를 7세는 루앙을 방문하여 당시 재판의 검토를 명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추기경 사절 기욤 데스트르빌은 더욱 철저한 조사를 실시했다. 마침내 잔의 가족들의 탄원으로 교황 칼릭스투스 3세는 조사위원회의 설치를 명했다. 1455~56년에 진행된 이 조사의 결과로 1431년의 판결은 취소되었다. 1920년 교황 베네딕투스 15세는 잔을 성인으로 추증했고 축일이 정해졌다. 같은 해 6월 24일 프랑스 의회는 잔을 기리는 국가적 축제를 매년 5월의 2번째주 일요일에 거행하도록 하는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평결의 배후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 잔 다르크를 사면함으로써 그녀의 요청으로 신성화된 프랑스 왕위의 신성에 대한 의혹의 그림자가 제거되었다. 또한 잔 다르크의 죽음을 순교로 보는 카톨릭 신도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입장에서는 이 논쟁이 수세기 동안 미묘한 문제로 남아 있었다.1909년, 바티칸은 마침내 공식적으로 잔 다르크가 축성된 것으로 선언했고, 1920년에는 교황 베네딕트 15세가 그녀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붙어 있었다. 잔 다르크는 카톨릭 교회의 순교 성인은 아니며, 그 이유는 그녀의 사형이 합법적인 카톨릭 법정에 의해 선고되었기 때문이다. 즉 그 법정이 단지 실수를 했을 뿐이다.엄밀히 따져 볼 때, 교회가 실수로 사형을 언도할 수는 있는 일이나, 교회가 사형을 시켜 순교자로 만들 수는 없다. 교회는 순교를 공인하고 그 진가를 인정할 수는 있으나, 순교가 되려면 교회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저지른 사건에 의한 죽음이어야 하는 것이다.
피터 파울 루벤스 - Joan of Arc
1431년에 있었던 재판에서 잔 다르크는 법정 진술을 통하여 자신이 들은 음성에 대해 몇 가지 구체적인 이야기를 했는데 매우 흥미를 자아내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무언가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만 그 음성이 들렸다. 낮은 소리로 전하는 그들의 말을 그녀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세 번째 방문했을 때였으며, 그들이 모습을 보인 것도 바로 이 세번째 방문 때였다.
그녀는 집이나 마당이 시끄러울 때에는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신령들이 나타날 때마다 좋은 냄새가 났으며, 그들이 자아낸 두려움은 그녀로 하여금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기에 가장 진실에 가까운 사실을 그녀는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그 음성을 오른 쪽에서 들었으며 그 음성이 들릴 때는 거의 매번 밝은 빛이 보였는데 역시 오른 쪽에서 번쩍였다. 대체로 그 빛은 아주 밝았다."
그녀를 몇 주일 동안 관찰한 교도관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그녀가 광희나 황홀경에 빠질 때 발작적인 구토를 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이제 현대 의학이 제세하는 의견을 들어보자
잔 다르크는 사춘기 때 심한 귀울음을 간헐적으로 앓았을 가능성이 매우 큰데, 많은 환자들은 성가시게 윙윙거리는 귀울음 소리를 말로 해석한다.
잔 다르크의 구울음은 한쪽에만 생기는 일측성이었으며(오른쪽), 밝은 빛의 형태로 시각 교란을 수반했다고 하는데 이는 흔한 현상이다. 심한 경우에는 번쩍이는 빛으로 인해 방향 감각 상실과 메스꺼움, 그리고 구토가 일어나는데, 잔다르크는 이러한 증세를 모두 경험했다. 그녀의 귀울음은 또한 평형 감각을 통제하는 반고리관(달팽이관)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소리나 이미지들이 종종 그녀를 주저 앉게 만들거나 쓰러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이같은 평형장애를 메니에르병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 하나의 의학적 견해는 잔 다르크가 투베르쿨로마라는 특수한 유형의 뇌종양을 앓고 있엇다는 주장이다. 뇌에 생기는 이 종양은 자라면서 환청이나 환영의 증세를 일으킬 수 있다. 어떤 진단이 나오든간에 오늘날이었다면 잔 다르크는 입원 처리되었을 것이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 Joan of Arc
어쨌든 역사에서 잔 다르크가 차지하는 위치는 확고하다. 아마도 프랑스 정치·군사의 역사에서 보다 인간용기의 역사에서 잔은 더욱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외국과의 전쟁보다는 프랑스의 내란에서 희생양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를레앙의 구출은 분명 빛나는 승리이며 이로 인해 프랑스 북부의 일부가 샤를 7세 편에 섰다. 그러나 백년전쟁은 잔의 사후에도 22년간 더 진행되었으며, 발루아 왕조 재건의 기초가 된 것은 1435년 부르고뉴의 선량공 필리프가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샤를 7세와 강화를 맺은 사건이었다. 더구나 잔이 내세운 사명의 성격을 두고 역사가·신학자·심리학자 들은 계속 논란을 벌여왔다. 잔의 전투 행적, 그 지지자들과 적들의 동기와 행동 등 셀 수 없는 부분이 논란거리가 되어왔다. 예를 들면 잔이 보쿨뢰르·시농·푸아티에를 몇 번이나 방문했고 그 날짜는 각각 언제인가, 어떻게 그녀가 시농에서 가진 샤를과의 첫번째 만남에서 바로 그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는가, 랭스에서의 즉위식 뒤 있었던 샤를의 순회는 개선행진이었는가 아니면 자신 없는 과시용 시위였나, 그녀의 재판관들이 '종심금고형'이라 했을 때 그 의미는 무엇인가, 그녀가 신앙을 철회한 뒤 다시 남자복장을 한 것은 자신의 뜻이나 '음성'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나중에 나온 이야기처럼 잉글랜드인 간수의 강요에 의한 것인가 등이다.
뒤의 세대들은 잔의 사명이 가지는 의미를 당시의 복잡한 상황과 관련해 파악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종교적 입장에 따라 왜곡하는 경향이 있었다. 서유럽에서 일어난 교회 대분열(1378~1417)의 여파와 공의회 운동 기간(1409~49)에 일어난 교황권 실추로 인해 신앙문제에 독자적인 판단을 내리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종교재판의 판결은 정치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영향을 받기 쉬었으며, 당시 변론이 허용되지 않고 감금상태에서 심문을 받았던 피고는 잔 혼자만이 아니었다. 성인으로서 그녀가 차지하는 위치는 다소 의심의 여지가 있는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혹독한 심문에서 그녀가 보여준 영웅적인 용기와, 자신의 음성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따라서 자기 입장이 정당하다고 믿는 심오한 확신에 의해 결정되었다. 어떻든 잔은 거의 프랑스 북부 출신인 재판인단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은 프랑스 내부투쟁의 희생양으로서, 신조와 파벌을 초월해 국민 모두로부터 공감을 얻은 프랑스 국민의식의 상징이 되었다.
Ouless Walter William - St Joan oF Arc
발췌 문헌 1) 찰스 패너티,<그것은 이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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