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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꼭대기의 성채를 공격하기 위해 로마군

구름위 2012. 12. 31.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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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 논쟁에서 "안시성이 산 위에 있는 성이기 때문에 거기 맞추려면 토산을 크게 쌓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주장을 들고 나오는 분"들"이 있더군요.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이런 거겠죠?



정말 저렇게 높은 산 위에 적의 성이 있다면, 저런 식으로 흙을 쌓아올리는 건 유용한 공격법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안시성에 대해 저렇게 다루는 게 이해가 안 가더군요. 왜냐하면, 안시성은 성벽 전체가 산등성이 위에 있는 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기로 안시성은 성벽 일부가 평지에 접해 있거든요. 위에서 본 형상으로 그리자면 대충 이렇게 생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 성을 공격하기 위해 토산을 쌓는다고 할 때, 1번 위치에 쌓으시겠습니까, 2번 위치에 쌓으시겠습니까?

혹시 시간과 자원이 남아도는 분이라면 1번을 선택하실지 모르지만 저라면 서슴없이 2번을 선택하겠습니다. 훨씬 규모도 작아 힘도 덜 들고, 필요한 작업시간도 짧으니까요. 아닌말로 1번 위치에 저만한 크기의 인공산을 만들 능력이 있다면, 저걸 1번 위치가 아닌 2번 위치에 쌓아서 성문을 아예 묻어버리는 게 더 쉽지 않을까요? 그러면 그냥 넘어서 우~~하고 밀고 내려가면 되잖습니까?^^

다만 요새 전체가 정말로 저런 산꼭대기에 있다면 산을 쌓는 걸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정말 깎아지른 것 같은 저런 절벽 위에 자리한 요새가 있었습니다. 바로 사해 서쪽에 있는 이스라엘의 마사다 요새지요.


 

(사진출처 : http://www.jibe-edu.org/clientimages/28237/photos-travel/masadaaerialfromsetbq010703.jpg)



마사다 요새는 보시다시피 깎아지른듯한 바위산 위에 자리잡은 요새로, 정상부의 면적은 9ha 정도입니다. 성벽의 길이는 1377m에 높이는 6m, 두께는3.7m, 24m 높이의 성루가 38개에 방이 70개나 있었다고 해요. 이름인 마사다라는 단어의 뜻은 히브리어로 "요새(fortress)"라고 하네요. 그리고 이 요새는 사해의 수면을 기준으로 해서 무려 400m 정도 되는 엄청난 높이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다만 워낙 주변 토지의 기복이 심해서 주변 지표면과의 실제 높이 차이는 90m 정도 되는 부분도 있다고 하네요.

이 요새는 성서에도 나온 헤롯 대왕이 건설한 것으로, 서기 66년에 일어난 유대반란에서 최후의 보루들 중에서도 마지막 성채였습니다. 헤롯은 마사다 외에도 헤로디온, 마쉐론테, 마카이로스, 키프로스(혹시 요새 이름이 틀렸다면 지적 바랍니다) 등의 요새를 지었다고 하는데 그중 최후까지 함락되지 않고 남은 것이 마사다였죠. 또한 이곳은 반란이 시작된 곳이기도 했습니다. 66년에 열심당(시카리 또는 질럿)의 특공대가 여기 주둔하던 로마군 수비대를 기습한 것이 본격적인 반란의 시작이었거든요.

하지만 로마군의 반격은 철저했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포함한 전 유대 땅이 로마군의 통제하에 들어가고 이 요새 하나만이 남았습니다. 유대 제압에 투입되었던 여러 로마 군단들 중 제10군단이 마사다 공략을 맡게 되었고, 본격적인 공성전 준비는 서기 72년에 시작되었습니다. 유대 총독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실바는 산꼭대기에 자리잡은 반란자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어떻게 했을까요? 산 높이가 400m고 성벽의 높이도 있으니까, 500m짜리 산을 쌓았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실바는 그런 황당한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마사다 공략을 위한 로마군의 1단계 조치는 먼저 담을 쌓아 요새를 완전히 둘러싸는 포위선을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도 요새를 출입할 수 없게 한 이 작업이 완료된 것이 73년 초입니다.

물론 요새를 둘러싸고만 있어서는 함락될 날을 기약할 수 없으니, 직접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군대가 올라가자면 성벽을 부술 필요가 있지요. 따라서 봉쇄망이 완성된 뒤 로마군이 한 것은 포격이었습니다. 아직 대포가 없는 시대니 투석기를 사용해서 돌덩어리를 날렸지요. 이 당시 로마군이 사용한 투석기는 50kg 짜리 돌을 400m 정도 날릴 수 있었습니다.

헌데 산 밑에서 위에 돌을 던지면 위력이 떨어집니다. 그렇죠?


 

둘 중 어느 쪽이 더 세게 맞겠습니까?



때문에 로마군은 성벽을 부술 투석기를 올려놓기 위해 길이 194m, 높이 60m의 구름다리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포위용 성벽처럼 성벽 전체를 두들기기 위한 건 아니었어요. 때려야 할 포인트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바로 평지와 연결할 수 있는 돌출부였지요.
어떤 요새건, 최종적인 점령은 성벽을 부수고 병력을 들여보내야만 가능합니다. 때문에 로마군은 산을 쌓는 게 아니라 단지 병력과 성벽을 부술 공성장비를 올려보내기 위한 비탈길(ramp)을 건설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걸 만들었다는 거죠.



그럼 그 공격용 비탈길의 크기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아주 컸을까요? 그렇지 않답니다.


 

위 사진과는 반대편에서 본 마사다.
(사진출처 : http://s1.hubimg.com/u/427812_f520.jpg)



가는 선으로 표시된 비탈길 보이시죠? 저기가 로마군이 만들었던 공격용 비탈길이 있던 자리입니다. 지금은 세월의 힘 때문에 풍화되어 원형 그대로는 아니지만, 애초에 수백 미터 크기의 거대한 구조물은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죠. 게다가 로마군은 그 자리에 원래 있었던 천연 암반의 덕을 크게 보았습니다. 비탈길이 완성되자 투석기 뿐 아니라 파성추까지 공격에 가담하면서 73년 5월 2일 전야에 마침내 성벽이 무너졌고, 로마군은 다음날 아침에 성내로 돌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요새 안에 남아있던 유대인 열심당원들은 적의 손에 죽거나 잡혀서 노예가 되는 치욕을 당하느니 스스로 자살하기로 마음먹고 그날 밤 집단자살을 결행하게 되지요. 전투원 뿐 아니라 아녀자까지 합쳐 960명의 유대인들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이날 밤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루자면 아예 별도의 포스팅 거리가 되니 생략.

이 포스팅의 요점은 "높은 산꼭대기 요새에 올라앉은" 적을 제압하기 위하여 고대의 다른 나라 군대는 어떤 전술을 썼는가 하는 겁니다. 물론 마사다 전투는 안시성 전투와 다른 사항이 많아요. 정말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군은 이렇게 했는데 당나라군은~~"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시면 절대 안 됩니다.

일단 전술적인 면에서만 보겠습니다. 마사다는 공격군의 규모도 작고, 수비군의 규모도 작습니다. 마사다 공방전 당시 로마 10군단의 병력 충원율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1개 군단이 통채로 동원되고 보조병이 붙었다고 해도 최대 1만 내외였을 것이고, 토목작업을 유대인 노예들이 했다고 해도 그 수가 수천 이상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부대에 따라붙은 종군 상인들을 지원인력으로 친다고 해도 2만을 넘을 수는 없겠죠. 이에 반해 당태종은 문헌으로 검증된 것만 최소한 10만, 아마도 30만은 밑돌지 않을 병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비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안시성의 고구려 수비군이 아무리 줄여 잡아도 수천 단위의 정규 전투병력을 가지고 있었던 데 반해서 마사다에는 천 명도 안 되는 숫자의 인원이 남아있었습니다. 1년 동안 벌어진 포위전에서 사상자가 일부 발생하긴 했겠지만, 농성군이 공성작업을 방해하기 위한 성외출격 등의 작전활동을 아예 하지 않았다는 걸 감안하면 그 수는 많을 수가 없어요. 그걸 감안해도 너무 적은 숫자죠.
게다가 저 중에서 상당수가 여자와 아이들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투가 가능한 남자는 절반 이하, 아니 최저한으로 잡을 경우 1/3도 안 됐을지도 모릅니다. 성 안에 있는 남자의 절반이 가족을 거느리고 있고 평균 가족 숫자가 3명이라고만 가정해도 전체 구성원 중 성인 남자의 비율은 40%, 400명 정도밖에 안 되니까요. 제가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를 가지고 있으면 그 숫자가 확인이 될 수 있겠는데 안 가지고 있으니 추정할 수밖에 없네요. 이 부분은 원문을 확인할 수 있으신 분들이 수정해 주시면 추가로 부기하겠습니다.
문제는 숫자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마사다를 지키던 열심당원들은 좋게 봐줘야 민병대일 뿐 무기와 장비를 제대로 갖춘 정규군이 아니었고, 원거리 공격무기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해요. 이 점에서 고구려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안시성의 고구려군은 당군의 화살에는 화살로, 투석기에는 투석기로 대응하여 당당하게 맞아 싸울 역량이 있었으니까요. 마사다의 열심당원들은 로마군이 쏘면 쏘는대로 그냥 두드려 맞고만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였던 마사다를 안시성과 1:1로 비교한다는 건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전략적인 차이도 마찬가지로 큽니다. 안시성이 고구려 국경에서 평양으로 가는 길목, 내부로 전진하기 위해서 돌파해야만 하는 난관이었던데 반해서, 마사다는 이제 그것만 쳐부수면 되는 최후의 저항거점이었습니다. 당태종으로서는 만약 당군이 안시성을 신속하게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재편성된 고구려 구원군이 자신의 배후를 공격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했던 반면, 율리우스 플라비우스 실바는 유대인들의 배후 공격 따위를 걱정하지 않고 느긋하게 마사다를 공략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유대 전역은 제압되어 마사다에 틀어박힌 소수 이외에 저항하는 자들은 남아있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가정을 해 볼 수 있겠죠. 마사다 수비대가 안시성 수비군처럼, 공격군만큼 잘 훈련되고 동등한 수준의 무장을 갖춘 대병력이었다면 어땠을까?

만약에 그랬다면 공격하는 로마군 역시 그에 걸맞는 수의 병력을 투입했을 겁니다. 사해 주변이 불모의 사막지대라는 점을 생각하면 대병력의 보급 문제가 심각하긴 했겠지만 최소한 수비군을 능가하는 정도의 병력이 없이는 공성전을 치를 수 없으니까요. 카이사르가 치른 아바리쿰 포위전이나 알레시아 포위전의 사례에서도 보듯, 요새를 포위하기 위해서라도 충분한 병력은 필요합니다. 게다가 보급문제는 공격측인 로마군보다 포위된 수비군 쪽이 더 취약하고요.

만약 시간이 넉넉하다면 그 상태에서 요새 내부의 인원들이 말라죽기를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속한 해결을 위해 강공책을 선택한다고 해도 결과에서 차이는 없었을 겁니다. 로마군은 역시 벽을 쌓아 요새를 봉쇄한 후 비탈길을 쌓아 공격에 나섰을 거고, 수비군이 적극적으로 방해한다고 해도 계속 밀어붙이면 그만이니까요. 최소한 구원군에 대한 희망이 어느 정도라도 있는 경우라면 모를까, 기술적으로 동등하고 병력과 물자를 비축하고 있다고 해도 정말로 완전히 고립된 요새를 의지와 실력을 갖춘 공격군이 함락시키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하고 공격했을 때 끝까지 버텨낸 경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동양에서는 삼국지에 나온 공손찬의 역경성을 들 수 있고 서양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함락된 티로스의 경우가 좋은 사례라고 봅니다.

강력한 요새도시였던 티로스는 본토가 아닌 바다 위의 섬에 자리잡고 있었고, 도시는 45m 높이에 달하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강력한 함대도 가지고 있는데다 기술적으로도 적인 마케도니아군과 같은 수준의 장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강력한 의지가 결국 승리했으며, 7개월의 공성전 끝에 티로스가 무너지자 알렉산드로스는 8천 명에 달하는 포로를 처형하고 3만 명 이상은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이때 마케도니아군은 빗발치는 티로스군의 돌과 화살 아래에서도 육지에서 도시의 성벽까지 이어지는 둑길을 만들어냈지요. 티로스는 섬에 있어서 경우가 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언덕 위에 자리잡은 도시인 가자도 5개월만에 함락시켰습니다.

당연히 안시성의 당군도 고구려군의 화살세례 밑에서 토산을 쌓을 수 있었을 것이며 마사다의 로마군도 유대인들의 돌과 화살을 맞으면서 요새로 올라가는 둑길을 쌓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로마군은 아바리쿰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고요(물론 아바리쿰의 성벽은 마사다의 절벽보다는 많이 낮았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마사다 수비군이 실제 역사보다 잘 무장되고 그 수가 수천 명쯤 되었다 하더라도 결말은 같았을 겁니다. 단지 공략에 걸리는 시간이 실제 역사보다 더 길어졌을 수 있고 로마군 사상자는 좀 더 많았겠지만, 결국 마사다는 함락되었겠지요.

마무리에서 약간 엇나간 감이 있는데, 이번 포스팅의 요점은 높은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공격측이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거대한 토산 이외에 다른 것도 있다는 정도로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또한 개개 전투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개별적인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특정 전투의 전훈을 다른 전투에 그대로 대입할 수 없다는 점도 양해해 주세요. 과거의 전투는 어디까지나 타 사례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참고"가 될 수 있을 뿐, 세부적인 부분을 100%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으니까요.



참고자료 :

서양 고대 전쟁사 박물관, 존 워리, 르네상스, 2006
성서속의 불가사의, 리더스 다이제스트, 동아출판사, 1991
세계상식백과, 리더스 다이제스트, 동아출판사, 1990
전쟁의 역사 vol.1, 버나드 로 몽고메리, 책세상,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