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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그 최후의 전투.

구름위 2012. 12. 3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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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korean.visitkorea.or.kr/cms/resource/02/156102_image2_1.jpg



현재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사적 5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병자호란 당시 10만의 청군에게 포위되어 농성하던 인조가 45일만에 항복,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곳으로 유명합니다. 당시 산성을 수비하고 있던 조선군의 수는 대략 1만 5천이었는데, 군량의 부족으로 인한 사기저하에다 구원군의 잇다른 패배로 인한 고립감으로 인해 항복하고 맙니다. 게다가 백업으로 생각했던 강화도가 이미 함락되어 인조를 제외한 왕실 구성원 전부가 포로로 잡혔다는 것도 주요한 요인의 하나가 되었지요.

사실 이때의 항복은 여러 모로 아쉬운 것이, 구원군이 패배했건 강화도가 함락되었건 식량만 있었다면 남한산성 자체는 훨씬 오래 농성하면서 버틸 수 있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하지만 돌대가리 중신들은 "운반을 맡은 백성들에게 폐가 된다"는 이유로 일부 지각있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산성의 주요 군량창고를 산성 안이 아니라 산 밑 골짜기에다 지어버렸고, 여기 저장해둔 곡식들은 산성으로 옮길 틈도 없이 몽땅 청군에게 노획당했습니다.

한편 청군 쪽의 사정은 어땠을까요?

이쪽도 시간을 끌면 난처해지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애초에 청군은 신속한 기습을 위해 치중부대 따위는 동반하지 않고 쳐들어왔기 때문에, 침공시 동반했던 물자 이외에는 거의 전적으로 약탈로 보급을 충당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서울과 남한산성 일대에서 조달할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고, 보다 넓은 범위로 약탈부대를 내보내다가는 분산된 소규모 부대가 조선 관군이나 의병에게 각개격파당할 위험성도 있었습니다. 즉 남한산성의 조선군이 한두 달 정도 더 버텼다면, 청군은 자기 발로 포위를 풀고 철수해야 하거나 아니면 전국에서 모여든 조선 지원군에게 역포위, 섬멸당할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죠. 물론 절대적인 가능성은 아니지만.....전자의 경우라면 이미 잡은 왕실 가족들을 인질로 끌고 갔을 텐데, 제가 아는 인조의 성격이라면 중전과 세자가 인질로 잡혀 있다고 해도 눈도 깜짝 안 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하여간 이로 인해, 남한산성에서는 최후의 전투가 1636년 1월에.......벌어졌을까요?

천만에요,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낚이신 겁니다 ^ㅠ^
남한산성 최후의 전투는 병자호란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언제냐고요?

남한삼성 최후의 전투는 정확하게 말입니다.

병자호란(1636)으로부터 260년 뒤인 1896년 3월 21일입니다^^

저때는 무슨 사건이 있었을까요?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1895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요. 바로 을미사변이 있었고 그에 이은 을미의병의 봉기가 있었거든요. 이때 을미의병의 일부가 남한산성을 점거하고 농성전을 벌였습니다. 이때의 전투가 남한산성 최후의 전투가 되었지요^^

먼저 남한산성을 점거한 것은 심진원의 광주의병입니다. 이들이 1896년 2월중에 먼저 남한산성에 입성했고, 이달 말에 김하락의 이천의병이 합류합니다. 김하락은 을미의병에서 가장 분투한 의병장 중 한사람으로, 조정의 설득에도 의병을 해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몇 안 되는 의병장입니다. 이 당시 김하락은 이미 1차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두 차례(이천의 백현, 광주의 장항) 격파하기는 했으나 결국 패한 후, 진영을 재결집한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민승천의 안성의병, 심상희의 여주의병 등이 참가하여 이들의 규모는 2천명까지 늘어나지요. 여기에 광주산성 별패진의 군관 김순삼이 3백명의 포수를 데리고 참가하여 이천의병의 규모는 더 막강해지는데, 사실 이 김순삼은 을미의병에 참가한 몇 안 되는 현직 관리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전훈으로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데다가 유사시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요. 때문에 수어청도 있었고, "도총섭"이라는 승병 지휘관도 두어 전시방어책임을 맡겼습니다. 게다가 병자호란의 전훈도 있고 해서, 남한산성에는 대량의 군수품이 비축되어 있기도 했지만 평시에 대규모 수비병력이 주둔하거나 하지는 않았지요. 고로, 빈털터리인 의병들의 입장에서는 "털어먹기 딱 좋은" 곳이기도 했다는 거지요. 의병들이 남한산성을 점령한 다음 비축된 군수품을 보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다음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산성은 사면이 깎아세운 산악으로 성첩이 견고하여 참으로 '일부당관 만부막개(一夫當關 萬夫莫開,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만사람이라도 열지 못 한다)'의 요새이다. 성안을 두루 살펴보니, 군량미가 산처럼 쌓여 있고 소금이 수백 석이 있으며 군수물자가 풍족히 비축되어 있었다. 대완구(大碗口), 불랑기(佛狼機), 천자포(天字砲), 황자포(黃字砲), 지자포(地字砲) 등이 각기 수십 문이 있었다. 천보총(千步銃)도 수백 정이 있었고, 그 나머지 조총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으며, 화약 탄환 또한 산더미같아 여러 장수들이 군수물자가 넉넉함을 기뻐하였고, 또 성곽이 견고함을 좋아하였다.<정토일록, 20p>



남한산성에 들어간 의병들은 아래와 같이 책임자를 정해 진용을 정비하고 관군의 진압에 대비합니다.



중앙 : 구연영(중군장)
동문 : 김귀성(좌익장)
서문 : 김경성(우익장)
남문 : 김태원(선봉장)
북문 : 신용희(후군장)



한편 조정에서는 의병들로부터 남한산성을 되찾기 위하여 서울의 친위대와 강화도의 진위대로 혼성 편성한 1개 대대 병력을 참령 장기렴의 지휘하에 파견, 산성을 포위했습니다(이 장기렴은 김하락 뿐 아니라 후에 유인석의 제천의병까지 격파한 을미의병 진압의 최고 수훈자(...)입니다).
하지만 김하락은 이런 관군과의 싸움을 별로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들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나, 왜적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병정이므로 어쩔 수 없이 적으로 간주하고"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죠.

진압에 나선 관군은 남문 밖 매착동에 지휘소를 설치하여 1개 중대를 배치하고, 동문 밖 불당골과 북문 밖 향교리에 공략의 주력부대로서 각 1개 중대씩을 배치했습니다. 또한 성 안으로 들어가는 교통로의 차단을 위해 동문 밖 엄현리와 서문 밖 석회당에 1개 소대씩이 배치되었지요. 하지만 전투는 지지부진했고, 관군이 온갖 작전을 구상했으나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견고한 성채에 의존한 의병들은 무기가 좀 빈약하다 해도 충분히 관군에 맞서 싸울 수 있었거든요. 관군은 성에 근접조차 할 수 없었고, 도리어 의병들이 수시로 성을 나가 관군을 역습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관군에게 안 좋은 소식이 들어옵니다. 안성 방면에서 수백의 의병이 다가오고 있고, 춘천에서도 3천에 달하는 의병들이 진군해오고 있다는 소식을 받았던 거죠. 결국 관군은 정공법 대신 보다 효과적인 기책을 쓰기로 합니다. 바로 매수-_-죠.

사실 그 이전에도 관군은 의병들에게 설득공작을 편 적이 있습니다. 성 안의 의병들이 한번 동문을 나와 엄현리의 관군을 공격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관군은 일본군 지원부대의 후원을 받아 의병들의 공격을 격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동문을 담당하고 있던 좌익장 김귀성이 관군에 포로로 잡혀 전향, 항복을 권유합니다만 의병들은 당연히 이를 거부합니다(이상은 독립운동사1권(보훈처, 1971)의 기록이며, 정토일록에 의하면 2월 9일자(음력)로 정탐을 위해 출성했다가 3일 뒤에 귀환했으나 그 이튿날 관군과의 내통이 발각나 탈출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도리어 김귀성의 배신과 관군의 매국적인 행위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답장을 보냅니다.


"(전략)...관군을 거느린 제공은 왜적을 토벌하는 것인가, 의병을 토벌하는 것인가. (중략) 왜를 토벌한다면 관군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의병을 토벌한다면 왜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후략)"
-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明治 29년 3얼 27일 -



의병의 전체적인 설득에 실패한 관군은 이제 "부분와해공작"으로 전략을 바꿉니다. 대장을 맡고 있던 박준영에게 수원유수, 이미 투항한 김귀성에게는 광주유수의 직책을 제의해서 설득에 성공한 거죠. 결국 매수된 박준영은 3월 20일 저녁에 전군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 성대한 회식연을 엽니다. 설마 대장이 이런 꿍꿍이를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한 의병들은 포식한 후 푹 잠들었고, 보초를 서는 병사들조차 잔뜩 취해 있었습니다.
다음날 새벽, 박준영은 미리 짜둔 계획에 따라 서문과 북문을 열어 관군을 불러들였습니다. 성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관군의 함성을 들은 의병들은 그제야 놀라서 허겁지겁 일어났으나, 제대로 싸울 틈도 없이 흩어져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배신자인 박준영 3부자는 처단하고 흩어졌지요(...)

그래도 이 전투에서 관군이 가진 동족으로서의 정의에 대해 감동한 김하락은 이런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의병이) 급히 성 밖으로 쏟아져 나오니, 관군들은 도리어 의병을 호송하면서 "빨리 달아나라! 왜놈 만나면 정말 죽는다"라고 말하였다. 이들이 비록 부일당의 위세에 눌려 행동하고 있으나 그 양심은 아직 다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저 박적(朴賊-박준영을 지칭, 필자 주)같은 놈은 의병대장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군부(君父)와 민족의 위난을 돌보지 아니하고 극악대죄를 저질러 스스로 멸절의 화를 입었으니 천리(天理)를 속일 수 없다.<정토일록, pp.24~25>



이와 같이 의병은 남한산성에 입성한지 근 20일만에 빈몸으로 다시 쫓겨났고, 주장이던 김하락은 자신을 따라 나선 9개 소대 - 일부 웹자료에서는 무려 9개 연대 혹은 여단이라고 적고 있더군요-_-;; - 의 잔여병력을 이끌고 남하하여 이곳저곳의 의병과 합동으로 투쟁을 펼칩니다. 제천의병-안동의병과도 연합했었고, 심지어 6월 14일에는 경주성을 함락하는 대전과를 올리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 전투에서 대량의 탄약을 소모한 김하락 의병진은 엿새만에 시작된 관군의 반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곧 성을 내주고 맙니다.
이후에는 다시 북상하여 영덕의 신돌석, 안동의 유시연 등과 합세합니다만 3백여 명의 관군이 추격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영덕에서 맞서 싸우다가 패사합니다. 7월 13일의 1차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다음날 오후 동래에서 증원군이 도착하자 관군은 일대 총공세를 펼쳐 의병을 격파하고 말았습니다. 마침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는 것도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죠. 대개 화승총으로 무장했던 의병들은 비가 오면 총을 쏠 수 없었거든요. 이 싸움에서 양 어깨에 총을 맞는 중상을 입은 김하락은 "내 물고기 뱃속에 스스로를 장사지낼지언정 섬나라 도적놈들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고 외치며 폭우로 불어난 강물에 뛰어들어 41세의 나이로 자결하고 말았지요. 남아있던 몇몇 군졸들도 함께 뛰어들었고, 김하락의 시체는 하구에서 살던 사람이 건져 해안에 매장했다가 후에 후손들에게 인도했다고 하네요.





참고자료 :
독립운동사 교양총서 vol.02 - 한말 의병전쟁, 조동걸, 독립기념관, 1989
독립운동사 교양총서 vol.13 - 한말 의병장 열전, 윤병석, 독립기념관, 1991
민족운동총서 제1집 - 의병들의 항쟁, 조동걸, 민족문화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