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아들 로버트 링컨
역설(逆說)같이 들릴는지 모르나 유명한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사실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다. 아무도 그 아들이 똑똑해서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간다고 해도 세상 사람들은 아버지 덕분에 하는 출세라고 잘못 생각하기가 일쑤이고 또 대개는 아버지의 압도작인 그림자에 눌려서 아들 자신의 능력은 과소 평가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 눈에 비치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크고 높으면 높을수록 아들의 이미지는 조그마해지고 초라해진다는 것이 부자간의 묘한 함수 관계일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좋은 예를 제16대 미국 대통령 ‘에이브라햄 링컨’과 그의 외아들 ‘로버트 링컨’과의 관계에서 엿볼 수가 있다.
로보트는
하지만 미국 사회는 그에게 아버지의 척도가 적용되지 않는 아들이라고 하여 여러 가지 부당한 형벌을 가해왔다. 그가 왕왕 사람들로부터 받던 비난의 대부분, 즉 그가 어머니에게 불효를 하였다느니, 아버지의 암살(暗殺)에 관계되는 문서를 고의로 파괴하였다느니, 흑인 사환에게 생활비도 주지 않는 깍쟁이였다느니, 또 각료직(閣僚職)을 이용해서 사리(私利)를 도모하였다느니 하는 따위의 비난은 그 대부분이 사실이 아니었으나 당시의 미국 사람들은 널리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캐논’하원의장을 비롯해서 그의 절친한 친구 몇 사람들만이 진짜 사실을 알고 <로버트 링컨이야말로 지금 미국에서 가장 오해 받고 있는 사람>이라고 개탄 했을 뿐이었다.
로버트는 16살 때 일리노이주의 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바드 대학에 응시했다. 고등학교 때의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지만 시골 고등학교 졸업생의 학력을 가지고서는 명문 하바드를 뚫을 수가 없었다. 로버트는 한 해 동안 재수(再修)를 한 뒤 다음 해에야 겨우 하바드에 입학을 했다.
그 해 즉 1861년은 로버트의 아버지 ‘에이브라햄 링컨’이 제 16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해이기도 했다. 그러나 로버트는 아버지를 찾아와서 공직을 요구하거나 이권 운동을 하는 정상배들이 보기 싫어 집에도 백악관에도 별로 돌아오지를 않았다. 1864년에 백악관으로 가다가 그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워싱턴 정거장에 도착한 로버트가 링컨 대통령의 아들인 것을 알자 사람들이 밀려와서 서로 싸인 해 줄 것을 요구하는 통에 그는 그만 플랫포옴과 떠나는 기차 사이에 떨어져 버렸던 것이다. 다행히 한 남자가 억센 팔로 곧 그를 끌어 내었기에 망정이지 로버트는 그날 영낙 없이 황천객(黃泉客)이 될 뻔했다. 그런데 그날 로버트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후일 그의 아버지 링컨 대통령을 암살한 ‘죤 윌크스 부우스’의 형 ‘에드윈 부우스’였다.
▲ 한명은 아버지의 암살범(사진 좌측 존 윌크스 부스)으로 한명은 아들의 목숨을
구한 은인(사진 우측 에드윈 부스)으로 링컨가와 기고한 운명을 맺은 부스 형제
링컨 대통령이 암살되었을 때 로버트는 21세였고 운명의 그날 로버트는 처음에는 부모와 함께 ‘포오드’극장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로버트는 가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그 결과 링컨 대통령 일행이 앉았던 특별석에는 뒤에 공석이 하나 생기게 되었다. 그날 밤 암살자 ‘죤 윌크스 부우스’가 쏜 총알은 바로 그 공석을 지나 링컨 대통령에게 가 맞았던 것이다. 이 사건은 두고두고 로버트를 괴롭혔다.
아버지가 암살된 후 로버트는 시카고로 가서 법률공부를 했으며 1867년에는 이리노이주의 변호사가 되었고, 그 이듬 해에 상원의원의 딸인 ‘매리 하알런’양과 화촉을 밝혔다. 둘 사이에 딸 둘, 아들 하나가 태어났으나 그 아들 ‘에이브라햄 링컨2세’가 16살 때 요절하였으므로 미국의 명문 ‘링컨가’는 그 이후 단절되고 말았다.
링컨 대통령이 사망하였을 때, 로버트의 어머니 ‘매리 토드’여사는 막대한 부채를 질머지고 있었다. 값비싼 보석, 모피, 옷가지를 사느라고 그녀가 남편 모르게 빌린 돈이었다. 링컨 대통령이 남긴 재산은 도합 11만 달라에 달했으나 이미 정신 이상 상태에 들어가 있던 ‘매리 토드’여사는 남편의 죽음과 함께 곧 자기가 거지 꼴이나 된 듯이 야단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그래서 부채를 갚기 위해 낡은 옷까지 팔게 되었다고 광고했던, ‘낡은 옷 추문’을 일으켰고 암살된 대통령의 유족들을 돌보지 않는다고 남편의 부하 장관들이었던 공화당(共和黨)인사들에 대해 공개 비난 성명까지 발표하는 망동을 부렸다.
▲ 매리 토드 여사
‘매리 토드’여사는 로버트의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 ‘태드’가 죽자 더욱더 심한 정신 이상을 일으켜 방치해 두면 무슨 짓을 할는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6명의 의사가 로버트에게 만일 그런 비극이 일어나면 그 책임은 로버트에게 있다고 경고를 했다. 하는 수 없이 로버트는 어머니를 법정에 제소하여 정신 이상자의 판결을 받게 하였다. 당시의 일리노이주 법률에 의하면 정신 이상자라도 배심원의 판결 없이 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박탈할 수는 없다고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옷을 입고 법정에 나와 그 재판을 받던 ‘매리 토드’여사는 자기에게 정신 이상자라는 판결이 내리자 아들을 돌아 보며, ‘오, 로버트, 네가 나한테 이런 짓을 하다니!’하고 조용히 꾸짖었다. 미국 각지의 모든 신문은 이 재판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으나 어느 신문은, ‘오, 로버트, 네가 나한테 이런 짓을 하다니!’하고 ‘매리 토드’여사의 말만을 대서특필했을 뿐, 증언대에 나가 울면서 증언하던 로버트에 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다. 로버트는 꼼짝 없이 천추만대에 용서받을 수 없는 불효자식이 되고 만 것이었다.
로버트는 정치를 싫어했으나 시카고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던 때에는 유력한 공화당 인사로 활약했고 또 1880년에 ‘제임스 A가아피일드’씨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 했을 때에는 그의 측근 선거참모로서 많은 활동을 했다. ‘가아피일드’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로버트는 국방장관에 임명되어 국사에 헌신적으로 이바지했다. 그가 유능한 장관이었다는 것은 가아피일드 대통령이 암살된 후 새로 대통령에 선출된 체스터 A아더’씨가 로버트에게만은 유임해 줄 것을 요청했던 사실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로버트는 이상하게도 대통령의 암살과는 인연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버지인 링컨 대통령의 암살은 별도로 하고라도 그는 ‘가아피일드’대통령이 암살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20년 후인 1901년에 ‘맥킨리’대통령이 암살되던 때에도 그 가까이에 서 있었다. 그는 ‘맥킨리’대통령이 암살된 다음부터는 백악관 초청을 일체 거부했다. 자기에게는 어떤 불길한 징크스가 있다고 느낀 때문이었다.
1889년에 로버트는 당시의 ‘해리슨’대통령의 요청을 받아 주영대사로 부임했다. 후일 ‘디오도어 루우즈벨트’대통령이 ‘미국의 주영대사치고 친영파(親英派)가 아니었던 사람은 로버트 링컨뿐이었다’고 술회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로버트가 미국의 이익을 잘 대표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1892년에 공화당은 로버트 링컨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려고 했다. 로버트 자신의 빛나는 경력과 ‘링컨’이라는 매력적인 이름이 공화당의 승리를 확보해 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허지만 로버트의 대답은 ‘노오!’였다.
그는 모든 공직을 버리고 ‘폴만’ 회사에 입사했다. 그리고 1897년에는 죽은 G.M. 폴만씨의 뒤를 이어 폴만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로버트 링컨이 J.P.모오간, 윌리엄 룩크펠러, W.K.밴더빌트 등과 더불어 미국 실업계의 거두로 불리우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러는 사이에 로버트는 점점 더 노인이 되어갔다. 그는 1911년에 폴만회사를 그만두고 부인과 함께 워싱턴 D.C의 한 고옥(古屋)으로 은퇴하여 조용한 여생을 보내다가 1926년 7월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83세의 생일을 맞기 바로 6일 전이었다.
자료 출처 :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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