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시마 해전미카사호 선상에서 Z기를 게양할 것을 지시하는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도고 헤이하치로(일본어: 東郷平八郎, 1848년 1월 27일 - 1934년 5월 30일)는 일본의 해군 제독이다. 그는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순수한 군인 생활로 인생을 마감했다. 일본인들은 그를 '군신'으로 여기며, 또 다른 별명으로 '동양의 넬슨(The Nelson of the East -영어위키 참조)'이 있다. 생애도고는 일본의 가고시마 현의 '가노야'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13세기부터 무사 집안이었으며, 이러한 전통의 영향으로 도고도 무술을 좋아했다. 그러나 이웃 사람들로부터 '반항아'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반항이 잦았다. 그는 그 후 자신의 능력을 더이상 반항으로 낭비하지 않고, 발휘하기 위해 대포를 다루는 기술을 배워서 '사쓰마' 지역의 다이묘의 휘하 사무라이가 되었다. 그러던 중 1863년 어느 날, 그는 "앞으로 있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국 일본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먼저 막강한 해군력을 육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헤이하치로는 이순신을 존경하였다. 업적그가 처음으로 참가한 전쟁은 1894년에 일어난 청일 전쟁이었다. 그 후, 일본이 승리하게 되자 대만은 일본의 영토가 된다. 두 번째로 참가한 전쟁은 러일 전쟁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발틱 함대를 보유한 해군 강국이었고, 일본조차도 패배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러시아 해군에게는 심각한 흠이 있었다. 러시아 해군은 함장과 해군 제독들의 무능과 일부 관료들의 예산 횡령이 잦았고, 제독들이 귀족 출신에다 힘든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러시아 해군은 발틱함대을 보유했다는 장점이 있었음에도 제독들의 무능, 낮은 도덕성,민중인 병(兵)들과의 계급적인 대립,미숙한 군사능력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부패하지 않았던 사람은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가 유일했다. 그는 황제의 허락으로 발틱 함대를 이끌고 일본과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대함거포주의(大艦巨砲主義)' 즉, '거대한 대포를 가진 큰 몸집의 전함으로 해상의 표적을 일소한다'는 생각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일만 여톤의 거대한 몸체를 지닌 전함들과 전함보다는 작지만 속도가 빠른 순양함을 건조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도고 헤이하치로는 생각을 달리 했다.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제국들이 포탄 개량에 있어서 포탄이 적의 전함의 장갑을 뚫고 들어가는 데 중점을 두었던 것과는 달리 일본은 포탄의 폭발력 및 화재를 일으키는 능력을 중심으로 하여 '시모세'라는 화약을 개발하였고, 이 포탄은 두께는 작지만 속에 화약을 많이 넣었기 때문에 폭발력이 강하여, 러시아 군함에 쓰던 부식 방지용 페인트는 '시모세' 한 대 맞고 쉽게 화염에 타올랐다고 할 정도로 적을 무력화시키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더구나 해로를 너무 길게 잡아서 병력이 지키게 한 러시아 해군의 실수도 패배의 한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대마도 해전, The Battle of Tsushima, 일본 측 명칭 : ?馬海?(tsushima-kaisen), 러시아 측 명칭 : Цусимское сражение), 동해 해전이라고 불린다.(안타깝지만 국제적으로는 Sea of Japan Naval Battle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역사상 마지막 함대결전으로 1904~1905 러일전쟁의 결말을 낸 해전으로 1905.05.27~28 동안 쓰시마 해협에서 이루어졌으며 (쓰시마 섬을 기준으로 대한해협 쪽이 아닌 일본측 해협)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일본의 연합함대가 지노브이 로젠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의 발틱함대의 2/3을 격파했다. 이 해전은 pre-Dreadnought 전함 시대의 마지막 해전으로 에드문드 모리스 같은 이는 트라팔가르 해전 이후 가장 위대한 해전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러일 전쟁 이전, 각국은 6인치(150mm), 8인치(203mm), 10인치(254mm), 12인치(305mm)포를 골고루 전함에 장착하였으며 이런 전함들이 전열을 이루어 함대운동을 구성하는 것을 기초 전법으로 하고 있었으나 이 대규모 해전에서 305mm의 거포들 만이 실전에서 유효한 화력이라는 사실과, 다양한 구경의 포를 조합하여 각자 포격하는 것보다 함교가 일괄적으로 포격을 지시하여 일제사격을 행하는 것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었다. 영국은 이 해전의 전훈을 받아들여 1905년 10월, HMS Dreadnought라는 신조함을 건조하였으며 이 전함이 선보인 "단일 거포함"이라는 개념이 워낙 획기적이었기에 그 이전의 전함과 이후의 전함을 완전히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다.
전황의 전개
러일전쟁이 개시되던 시점에서 러시아는 상트 페테르스부르크를 모항으로 하는 발틱함대, 세바스토폴을 모항으로 하는 흑해 함대, 여순(Port Arthur)을 모항으로 하는 극동함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여순함대의 존재는 보급을 해상수송에 의존해야 하는 일본으로서는 연합함대의 전력을 총 동원하여 여순 항을 봉쇄하는 동시에, 육군에게 여순 항을 점령해 줄 것을 요청했다. 여순 함대 사령관 마카로프 제독이 일본이 설치한 기뢰에 의하여 전사하고 무리하게 봉쇄망을 돌파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려던 여순함대가 일본 연합함대에게 패하자 러시아 본국에서는 발틱함대와 흑해함대에서 증원전력을 극동에 파견하여 극동함대와 함께 일본해군을 제압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에, 의견을 제시했던 로젠스트벤스키 소장이 중장으로 진급하고 본국에서 보로디노 타입 전함을 비롯한 신예전함들을 중심으로 북해에서 아프리카를 돌아 여순 항구까지 향한다는 대 장정이 시작되었다. 이 대항해는 처음부터 난황을 거듭했고 신경이 예민해진 수병들의 실수로 공해인 북해의 도거뱅크에서 민간 어선에게 포격을 가하는 사건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으며 이로 인하여 영국해군에게 항해 내내 방해를 받으며 역사상 석탄에 보급되는 함대로는 가장 먼 대규모 항해를 시작했다. 한편, 노기 마레스케가 지휘하는 일본 제3군은 막대한 희생을 치른 끝에 203고지를 점령하여 항내의 전함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되자 육상 포를 이용하여 포격을 통해서 러시아 극동함대를 모두 제거하고 1904.08.10, 여순요새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발틱함대는 초기에 출발하던 시기와는 전략적인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버리게 되었고, 돌아가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육상전에서의 부진한 전황도 연관되어 결국, 재차 본국에서 증원함대를 파견하여 어떻게든 일본 연합함대 보다 강한 전력으로 상대를 격파하고, 일본의 해상수송을 교란시킨다는 목적을 실행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다시 항해를 이어갔다. 발틱함대 접근 당시 이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논쟁이 되었으며 만약 일부라도 러시아 함대가 전력을 보존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할 경우, 울산해전과 같은 난감한 교전을 몇번이나 반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뜩이나 늘어나는 전비와 보급선 문제로 전쟁수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본에게 부과된 과제는 반드시 발틱함대를 전멸 시켜야 한다는 난감한 과제였다. 일본 연합함대의 참모들은 일단 그 계절에 기후 문제로 항해가 곤란한 쓰가루 해협을 발틱함대와 같은 대함대가 통과할 리는 없다는 가정하에서 쓰시마로 올것이라는 가정하에 다단계 작전을 세워두고 있었지만 만에 하나라도 쓰가루 해협으로 접근할 경우에 대비하여 함상에 대규모로 석탄을 집적해 둔채 발틱함대를 대기했다. 일본의 대본영에서도 특별히 어민들의 협조를 얻어 광범위한 경계망을 구축하고 쓰가루 해협 일대에 비밀리에 기뢰를 장치해두었다. 반면, 발틱함대로서는 지구의 반바퀴를 돌다시피하는 33,000km의 대 원정으로 이미 지칠대로 지친 상황이었다. 도거뱅크에서 영국어선들에게 오인사격을 가했던 관계로 이미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은 항해 내내 외교적인 항의를 반복했고 발틱함대는 프랑스와 독일의 도움으로 어렵게 회항하고 있었기에 익숙치 않은 기후와 장기간 해상 운항으로 인한 함체 부식 등 갖은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해전 1단계. 러시아 함대의 앞을 가로지르는 형태로 U회두를 한 후, 병행전진. 쓰시마 해전. 2열 종대로 전진하던 러시아 함대와 접촉하는 장면. 전통적인 해전의 교전거리보다 훨씬 먼거리에서 접전이 시작되었으나 연합함대쪽이 점점 기습의 이점을 살리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해군이 개발한 일제사격방법에 따라 일본해군도 함교가 함포의 사격을 일괄 통제하는 방법이 주효하여 일본측은 우세한 명중율을 보였으며 시모세 화약으로 알려진 고 폭발성 화약또한 함선의 상부 구조물 파괴에 높은 효율을 보였다. 당시 러시아 측이 사용하던 철갑탄은 아직 야금기술의 발달 부족으로 그 거리에서는 관통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점차 일본은 러시아 함대에 대해 일방적인 수준의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해군의 프랑스제 보로디노 타입 pre dreadnought 전함은 일본측의 영국제 pre dreadnought 미카사 급 보다 신예전함이었지만 디자인 개념이 뒤쳐져 있었고(특히 복원력에 관한 부분) 장기간의 항해로 정비상태가 불량해져 있었기에 항행 속도가 대단히 낮았다. 일본 함대가 16노트에 가까운 속도를 기록하고 있었던데 반해 러시아 함대의 속도는 8노트에 그치고 있었으므로 이런 속도차를 잘 활용하여 토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상대함열의 머리쪽을 누르는 T전법(Crossing the T)을 계속 성공시킬 수 있었다. 해전 제 2단계. 일본측 진형이 흐트러졌다.발틱함대의 로젠스트벤스키 제독은 두부에 포탄파편으로 부상을 입었고 결국 5월 27일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는 전함 오스슬라비야, 알렉상드르 3세호, 보로디노, 수바로프를 잃어 주력이 와해되는 대패를 겪었다. 일본함대의 피해는 예상외로 경미해서 대부분의 타격이 미카사 호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저녁이 되자 발틱함대의 지휘권은 제3전대의 네보가토프 소장에게 넘겨졌다. 야간 전투. 침몰된 지점들이 표시되어 있다. 지멋대로 울릉도가 마쓰시마가 되고 독도는 리앙쿠르 락이 되어 있는 점과 동해는 일본해가 되어 있는 부분은 양해 바람. 일본해군은 야간이 되자 예정된 대로 구축함과 어뢰정을 이용하여 분산된 러시아 함대에게 파상 공세를 퍼부어 구형 전함 나바린을 침몰시키고 전함 시소이 벨리키, 장갑순양함 아드미랄 나히모프,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호에게 타격을 입혀 아침에 자침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시간진행 1905. 05. 27 일본시간 04:45 일본의 시나노마루 호가 러시아 발틱함대를 발견하고 전보를 보냄05:05 일본 연합함대가 대기중이던 진해만을 출항하여 대본영으로 전보를 보냄. 내용은 Today's weather is fine but waves are high. (Japanese: 금일 날씨 맑으나 파도가 높다) - 날씨가 맑아야 발틱함대를 관찰할 수 있고 파도가 높아야 방어대 아래의 취약한 부분에 명중탄을 날려서 침몰시키기 쉬워짐. 13:39 일본 연합함대가 발틱함대를 육안으로 포착하고 전투기를 게양함. 13:55 거리 : 12,000 m. 일본함대 기함 미카사 호에 Z기가 게양됨.(내용 자체는 넬슨이 트라팔가르 해전때 사용한 것과 유사함.) 14:05 거리 : 8,000 m. 일본함대 U턴 개시. 14:07 거리 : 7,000 m. 미카사 호가 선회를 완료하는 시점에서 발틱함대가 최초 사격개시. 14:10 거리 : 6,400 m. 일본 함대 전체가 선회를 완료. 14:12 거리 : 5,500 m. 미카사 호에 첫번째 명중탄. 14:16 거리 : 4,600 m. 일본연합함대 발틱함대 기함 수바로프 호에 일제사격. 14:43 2전대 기함 오스슬라비야와 발틱함대 기함 스바로프 호가 극심한 피해로 전열을 이탈. 14:50 알렉산드르 3세호가 전열을 벗어나기 위해 북쪽으로 선회 15:10 오스슬라비야호 침몰. 수바로프 호 도주. 연합함대 주력은 상대측 기함 수바로프호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잘못 이동했으며 제3전대장 가미무라 히코노조가 독단적으로 장갑순양함 전대를 이끌고 발틱함대 주력에 대응. 18:00 거리 : 6,300m. 주력함대가 장갑순양함 전대와 합류 다시 교전에 들어감 19:03 알렉산드르 3세 호 침몰. 19:20 수바로프, 보로디노, 시소이 벨리키 침몰. 1905. 05. 28 일본시간 09:30 일본함대가 울릉도 근해에서 다시 발틱함대 잔존세력과 교전 해전의 결과 네보가토프 소장의 지휘로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하여 항해를 지속하고 있던 신예전함 오렐, 구형전함 니콜라이 1세호, 연안용 함정 아프라신, 아드미랄 세냐빈 호는 연합함대에게 포착되어 항복했으며 5월 28일 저녁까지 모든 러시아 군함들은 일본해군에게 추격당했다. 포함 아드미랄 우샤코프는 항복을 거부하고 일본의 장갑 순양함과 포격전끝에 침몰했으며 구형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6척의 일본 순양함과 사투를 벌이며 다음날까지 교전한 끝에 침몰했다. 러시아의 장갑순양함 오로라, 쳄셩, 올레그는 마닐라의 미국해군기지로 도주하여 그곳에서 억류되었으며 2등 순양함으로 분류된 무장 요트 알마즈 호와 2척의 구축함만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할 수 있었다. 50여척에 달했던 러시아의 발틱함대 대부분이 이 해전으로 침몰한 반면, 일본군은 겨우 3척의 어뢰정을 상실했다.(Nos. 34.35.69) 마닐라에 도착한 올레그 호의 피탄 모습. 시모세 화약의 효과로 상부 구조물 대부분이 녹아내리다 시피했다.
일본 연합함대 기함, 미카사 호. 승전 기념연 다음날 원인불명의 폭발사고로 침몰했다. 지금 있는 것은 복원함. 이 해전의 충격적인 대패배로, 러시아는 극동지역에서의 해상력을 모두 상실했고 당대의 전략병기인 전함의 대부분을 상실했으며 국가의 위신이 많이 상실되어 국내 여론에 밀려서 아직 충분한 지상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강화조약을 맺게 되었다. HMS Dreadnought의 개발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장갑순양함이 해전에서 유효한 전력임을 입증하여 이를 개선한 순양전함이 대대적으로 건조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4. 러일전쟁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기 전부터 러시아의 상황을 주의깊게 살펴보던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래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 막강한 러시아 제국과의 일전을 준비했고, 전쟁의 시기가 1904년이 된 것은 이미 한계에 달해가는 막대한 군사비 지출과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이전에 결판을 내야 한다는 사이에서 도출된 시점으로, 일본의 국가적 흥망이 이 전쟁에 달려있는 상황이었다. 이 전쟁의 승패는 한반도 주변해역에서의 해상권 확보가 관건으로, 러시아의 해군은 크게 태평양 함대, 발틱함대, 흑해 함대로 구성되었다. 일본 해군이 격파당해 해상권을 상실하면 만주에 전개될 일본육군은 그렇지 않아도 강대한 러시아 육군에게 압사될 것인데다가, 이겼다 하더라도 빈약한 일본의 재정사정으로는 압승을 거둘 수 없다면 국제여론상 전비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될 상황. 따라서, 일본은 총력을 기울여 선전포고 없이 기습공격을 가하고, 상대방에게 선수를 이어나가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예정대로 몇배의 전력을 투입해서 계속 승승장구 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여순에 도사린 태평양 함대의 동향이었다. 전쟁 이전에 일본해군의 초기 전략은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이 산티아고 항을 봉쇄(시도)한 것처럼 여순 항의 좁은 입구를 낡은 증기선 등을 가라앉혀서 막아버리고, 소수의 경계병력을 남겨두어 요새병력의 진출을 막아버린다는 것이었지만 결과가 신통지 못하자, 결국 해군은 여순항을 봉쇄한채로 요새 육군에게 부탁하여 노기 마레스케의 지휘하에 제 3군을 편성 요새 공략에 나섰다. 유도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강도관에서 유도를 배웠고 강도간의 홍백 대항전에서 최초로 5명을 연속으로 격파하고 6명째와 비기는 기록을 세운 호남아였다. 또 강직한 인품이나 러시아 유학 시절의 애인과 결혼이 약속되어 있었다던지 하는 드라마틱한 부분이 히로세 다케오 본인에게 있었던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이 두 사람이 군신으로 추앙된 것은 전후 일본의 프로퍼겐더의 하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군의 의표를 찔러 거의 성공한 듯 보였으며 만약 성공했다면 일본군의 작전 수행은 엄청난 지장을 겪었겠지만, 러시아 측에는 대단히 불행하게도 비트게프트 소장이 탑승한 기함 레트위잔의 사령탑에 12인치 주포가 명중, 함대 사령부가 전멸하고, 통솔체계가 엉망에 빠지면서 탈출은 무위로 돌아갔다.
발틱함대의 주력전함중 보로디노 타입 4척의 전함은 태평양 함대의 어떤 전함보다도 신형이었기에 다시 일본함대와 교전을 벌이더라도 최소한 침몰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비록 침몰되지는 않더라도 태평양 함대의 각 함정들은 일본해군의 포격에 의하여 상부구조물이 완전히 무력화되고 기동성이 최소화된 상태로 간신히 피해나왔다는 점이었다. 어찌되었건 러시아 해군은 아직 최후의 카드를 남겨두고 있었다. 이후, 여순 공략전 최대의 격전지 203고지를 점령한 일본육군의 포격으로 항내의 태평양 함대가 괴멸되면서, 5. 보내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니콜라스 2세. 비운의 황제이며 러시아 정교의 성인. 1904년 10월,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는 심기가 편치 않았다. 거대한 러시아를 어떻게 유럽의 질서에서 자리를 잡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역대의 로마노프 왕가가 고민하고 항상 바래온 부동항의 획득과 동쪽으로의 진출. 그 완결에 가까운 부분에 있어서 몇가지 사소한 장애가 남아있고 그것이 골치였다. 베조라조프. 선제의 총신 비데의 위치에 올라선, 니콜라이 2세의 총신이 열변을 가지고 만주와 요동을 거쳐 조선까지 점령해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 전쟁은 필요없고 국책 회사를 진출시켜서 산업 시설과 도시 시설을 건설하고 철도, 항만을 건설해 러시아 자본을 넉넉히 주입함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일본을 축출한다 - 는 계획에,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제국의 국가의 완성과 그 정점에 오를 수 있다는 데에 혹했던 것이 실수였을까? 감히 맞서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일본이 계속 선전을 거듭하고 있고, 어찌된 일인지 태평양 함대는 패배, 여순 요새가 함락되었고 블라디보스토크의 분대도 패배했다. 시종무관 - 그리고 총애하는 로젠스트벤스키의 진언을 돌이켜 보았다 "본국의 발틱 함대에서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제2태평양 함대를 편성, 극동으로 향하는 원대한 대 원정을 감행하여 태평양 함대와 합류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본 해군을 격멸하는 계획입니다." 구상은 나쁘지 않다... 라고 생각했다. 원대하고 중후장대한. 지극히 러시아인 다운 호쾌한, 그런 계획이었다. 하지만 - 과연 실행해야할 것인가. 실행상의 어려움은 없는가. 유럽에 주둔하는 러시아 군을 대거 이동할 경우 유럽에서의 세력균형은 유지될 수 있는가. 원숭이들. 머리가 아팠다. 문득 25살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가 태자였을 무렵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철도 기공식이 거행되는 중에 그리스의 조지 태자- 그의 조카뻘 -와 함께 일본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진짜로 좀 즐겼던 것 같다. 등에다가 문신을 그려넣었다고 한다. 게다가 일본 전통예술에도 흥미를 보여 머리핀을 사서 게이샤한테 주기도 했다는데, 설마 칼침맞을 줄은 몰랐겠지. 1891년의 그 방문에서 그는 한가로운 기분으로 이국적인 나라에 대한 젊은이 다운 호기심을 갖고, 비와 호 등의 명승지를 구경하고 떠들석한 잔치도 즐기고 한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질서를 유지하던 경관중 하나가 칼을 뽑아 황태자인 자신에게 두번이나 내리친 것이다. 상대는 검술에도 능했고 거리가 있어서 본능적으로 피했지만 오른쪽 관자놀이와 후두부를 노리고 내리친 검은 그에게 평생의 상처를 남겼다. 게다가 범인인 츠다 산조는 사형당한 것도 아니었다. 츠다 산조. 좀 돌았다. 쓰다 산조는 법정에서 감히 일왕을 먼저 배알하고 예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베었다 라는, 터무니 없는 말을 한 것까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머리를 다쳤기 때문에 피도 엄청나게 나왔지만, 더 불쾌한 것은 그 뒤의 터무니 없는 소란이었다. 온갖 협회, 시회, 학교, 회사 등등에서 문병 전보와 서신이 그가 치료를 받고 있는 도키와 호텔과 러시아 공관에 밀려와 그 수가 1만통이 넘었다.이것은 시작에 불과했고, 27세의 한 일본 여성은 츠다 산조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데 사죄를 한다며 교토의 부청 앞에서 자결했다. 일본의 모든 불교 사찰이 건강회복 대기도회를 열었고 도호쿠의 마을에서는 "앞으로 태어나는 모든 아이에게는 '산조'라는 이름을 지어서는 안된다"라고 결의했다. 이해하기 힘든 일들 뿐인 이 나라에서 불쾌한 기억을 갖고 떠난 이후, 그는 일본인을 원숭이라 여기고 있었다. 어떻게 원숭이들이 이렇게 발악 하고 있는 것인가? 그 배후에는 필시, 사촌형의 나라 - 영국이 버티고 있다. 일본이 발행한 막대한 전시공채를 사들이는 것은 물론이고, 함선의 건조와 인도 등, 영일동맹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동진에 대한 진출을 막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꺼림직한 기분이었지만 총애하는 로젠스트벤스키의 발언을 돌이켜보았다. "이 대 원정은 크나큰 곤란을 수반하게 되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명하신다면, 저는 기꺼이 이 함대를 이끌고 일본과의 전투에 임할 것입니다." 군령부장의 호언장담이 아닌가. 그렇다. "로젠스트벤스키라면 틀림없이 승전할 것이다." 1904년 10월, 러시아의 해군 군령부장 로젠스트벤스키 소장은 심기가 편치 않았다. 러시아의 귀족사회에서 평민출신으로 여러번 고난을 겪으면서도, 단정한 용모의 소유자이며 세련된 교양으로 지금껏 승승장구해왔고, 다행하게도 니콜라이 2세의 호감을 얻어 시종무관으로 군령부장으로 승진해왔다. 자신의 관료적 취향도 의전직을 수행하는 데는 적합했고 해전에 있어서는 포술의 권위자로 논문이 어느 정도 인정을 받는 위치지만, 자신은 소장. 상급자가 얼마든지 있으니 누구라도 보내겠지 라고 방심한 것이 화근이었다. 수십척의 증기선을 이끌고 변변한 보급항도 없는 지역을 3만km이상이나 항해를 해야 한다. 범선이라도 힘들만한 거리를, 함대로서 유지하면서 그런 장기항해를 할 수 있을까? 게다가 도착하고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가야할 필요는 확실한 것인가. 실행에 옮기게 되면 끝도없이 귀찮은 문제들이 생겨날 이 계획에 대하여, 군령부장으로서 원론적인 이야기를 꺼냈다가 쓸데없는 크리티컬을 맞게 된 것이다. 발틱함대의 여정. 좀 길다. 그에게는 발트해의 크론슈타트를 출항하여, 도거뱅크를 거쳐 스페인의 비고를 지나, 케이프타운을 돌아 노시베를 들리고, 인도양을 건너 인도차이나의 캄란만에서 마지막으로 쉬고, 여순 또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해야 하는 기나긴 여행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와중에 어느 시점에서 일본이나 영국에게 방해를 받게될지는 알 수 없었다. 바로 그렇게, 로젠스트벤스키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6. 쓰시마 해전 도고 헤이하치로. 영국에서 좀 놀던 시절. 호비트 족의 용자. 1905년 5월 27일 14시 3분. 일본해군 연합함대의 기함 미카사. 발틱함대와 거리가 1.1km 내로 접근하자 포술장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에게 "어느 쪽에서 전투를 하십니까?"라고 큰소리로 속삭였다. 도고는 이에 왼쪽으로 크게 틀을 것을 지시했다. 적전 회두의 시작이었다. 큰소리로 속삭였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지만 무례하지는 않게 물으면서도 조바심이 났다는 뜻인 것 같다. 당시, 러일전쟁의 전황은 육지에서건 바다에서건 일본이 승승장구하는 것 처럼 보였으나, 그 현실은 일본으로서는 패망하기 직전이었다고도 볼 수 있었다.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비롯한 자금책들이 영국과 미국을 발벗고 뛰어다니며 어떻게든 전비를 조달해 왔으나 이대로는 전비에 짓눌려 쓰러질 판이었고, 봉천으로, 최종적으로는 하얼빈까지 전장이 길어지면서 계속 러시아 육군의 주력을 제압하지 못한다면 이미 정예전력이 대다수 소모된 일본군의 피로는 한계를 넘을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발틱함대를 상대로, 이기더라도 불과 주력함 2~3척이라도 놓치게 된다면 그 경우에는 동해상의 일본의 해상권이 위협되고, 연합함대는 다시 장기간의 봉쇄에 돌입할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를 포위하고 점령할 새로운 군을 편성할 여유같은 것은 없고, 결국 무슨 일이 있더라도, 상대를 "격멸"해야 했다. 당시 해군에 있어서 전함은 침몰되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바다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함대를 포착해서 교전에 돌입하는 것도 어렵거니와, 교전을 시작해도 기관이 어디까지 전력으로 움직여 줄 것인지도 문제고, 결정적으로는 아직 철갑탄이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베이 강을 주요부위에 두르고 있는 전함의 방어력을 공격력이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든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는, 최대의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단종진을 형성해서 우세한 함대속도를 최대한 활용, 계속 상대방의 함열 앞을 가로지르며 블라디보스토크 방향으로 도주할 수 없게 하면서, 모든 배를 침몰시켜야만 했고 그런 이유로, 전술적인 면에서는 대단히 위험하게도, 적의 포격 사정범위 내에서 줄줄이 선회를 한다는 위험천만한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양측 함대의 비교 주력함 - 러시아
203mm이상 주포의 비교
152mm~120mm 중구경 포의 비교
계 관통력 비교
'아르헨 해군, 대마도 주위를 대한해협으로 표기'
아르헨티나가 일본에 군함을 판매하게 된 건 당시 아르헨의 해군력 증강에 불만을 품은 칠레와 브라질 등 남미국가들이 해군력을 축소하라는 강한 항의에 따른 것이었다. 아르헨 정부가 남미화합 차원에서 다른 남미국가들과 해군 전함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2척의 전함을 급히 일본에 매각한 것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칠레와 브라질, 그리고 아르헨티나가 일본을 간접적으로 도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셈이다.
참고로 당시 가르시아 제독은 일본으로부터 국빈에 가까운 VIP대접을 받았고 동해의 격전지를 마음대로 다닐 수 있었으며 천황을 만나는 등 수시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작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가르시아 제독의 독도표시는 일본의 정통한 정보에 의해 정확하게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대마도가 한국영토였을 가능성은 '한국인들'이라는 제하의 1858년 4월24일자 '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에도 보도가 되어있다. 영국의 시사주간뉴스인 '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는 영국의 상업선단이 일본과 대마도, 부산을 방문했던 것을 기초로 하여 동양기행문을 특집으로 다루면서 그 당시 일본과 부산을 여행한 동양의 전문 탐험가 캠퍼페르(KAEMPFER: 네델란드 출신 탐험가, 1651-1716)가 신문사 기자일행과 함께 일본까지 여행, 한국과 일본의 모습을 영국에 알린 것이다.
아르헨 해군 100년 전에 한국 방문하기도 이야기가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가르시아 제독이 쓴 러일간의 동해 해전 기록은 다음해인 1906년 아르헨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한국의 부산항을 방문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아르헨 해군사관학교 학생들이 세계최대의 해전 격전지의 현장에서 실전 훈련을 해보는 실습장으로 부산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아르헨 해군 박물관 관계자의 설명이다.
1906년 2월 8일 아돌포 마누엘 디아스(Adolfo Manuel Diaz)함장이 이끈 30여명의 해군 사관 생도들은 증기기관 범선인 '쁘라가따 사르미엔또'호를 타고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출항, 뿐타 아레나를 거처 호놀룰루, 상하이, 여순 항을 항해하고 그 해 5월 29일 부산항에 도착, 6월 17일까지 부산에 머문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한 해군 전속사진사는 부산항을 유일하게 파노라마 형식으로 촬영 항구 전체 모습을 3장의 사진에 담아 아르헨 해군이 부산항에 보이는 관심도를 반영했다. 아르헨티나 해군 전속사진사가 남긴 부산시내 전경사진은 부산항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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