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러일 ..·청일 .전쟁

러일전쟁-쓰시마해전

구름위 2013. 1. 6.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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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 해전

미카사호 선상에서 Z기를 게양할 것을 지시하는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

도고 헤이하치로

도고 헤이하치로(일본어: 東郷平八郎, 1848년 1월 27일 - 1934년 5월 30일)는 일본의 해군 제독이다. 그는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순수한 군인 생활로 인생을 마감했다. 일본인들은 그를 '군신'으로 여기며, 또 다른 별명으로 '동양의 넬슨(The Nelson of the East -영어위키 참조)'이 있다.

생애

도고는 일본가고시마 현의 '가노야'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13세기부터 무사 집안이었으며, 이러한 전통의 영향으로 도고도 무술을 좋아했다. 그러나 이웃 사람들로부터 '반항아'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반항이 잦았다.

그는 그 후 자신의 능력을 더이상 반항으로 낭비하지 않고, 발휘하기 위해 대포를 다루는 기술을 배워서 '사쓰마' 지역의 다이묘의 휘하 사무라이가 되었다. 그러던 중 1863년 어느 날, 그는 "앞으로 있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국 일본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먼저 막강한 해군력을 육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헤이하치로는 이순신을 존경하였다.

업적

도고 헤이하치로(1877年)

그가 처음으로 참가한 전쟁은 1894년에 일어난 청일 전쟁이었다. 그 후, 일본이 승리하게 되자 대만은 일본의 영토가 된다.

두 번째로 참가한 전쟁은 러일 전쟁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발틱 함대를 보유한 해군 강국이었고, 일본조차도 패배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러시아 해군에게는 심각한 흠이 있었다.

러시아 해군은 함장과 해군 제독들의 무능과 일부 관료들의 예산 횡령이 잦았고, 제독들이 귀족 출신에다 힘든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러시아 해군은 발틱함대을 보유했다는 장점이 있었음에도 제독들의 무능, 낮은 도덕성,민중인 병(兵)들과의 계급적인 대립,미숙한 군사능력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부패하지 않았던 사람은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가 유일했다. 그는 황제의 허락으로 발틱 함대를 이끌고 일본과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대함거포주의(大艦巨砲主義)' 즉, '거대한 대포를 가진 큰 몸집의 전함으로 해상의 표적을 일소한다'는 생각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일만 여톤의 거대한 몸체를 지닌 전함들과 전함보다는 작지만 속도가 빠른 순양함을 건조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도고 헤이하치로는 생각을 달리 했다.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제국들이 포탄 개량에 있어서 포탄이 적의 전함의 장갑을 뚫고 들어가는 데 중점을 두었던 것과는 달리 일본은 포탄의 폭발력 및 화재를 일으키는 능력을 중심으로 하여 '시모세'라는 화약을 개발하였고, 이 포탄은 두께는 작지만 속에 화약을 많이 넣었기 때문에 폭발력이 강하여, 러시아 군함에 쓰던 부식 방지용 페인트는 '시모세' 한 대 맞고 쉽게 화염에 타올랐다고 할 정도로 을 무력화시키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더구나 해로를 너무 길게 잡아서 병력이 지키게 한 러시아 해군의 실수도 패배의 한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대마도 해전, The Battle of Tsushima, 일본 측 명칭 : ?馬海?(tsushima-kaisen), 러시아 측 명칭 : Цусимское сражение), 동해 해전이라고 불린다.(안타깝지만 국제적으로는 Sea of Japan Naval Battle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역사상 마지막 함대결전으로 1904~1905 러일전쟁의 결말을 낸 해전으로 1905.05.27~28 동안 쓰시마 해협에서 이루어졌으며 (쓰시마 섬을 기준으로 대한해협 쪽이 아닌 일본측 해협)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일본의 연합함대가 지노브이 로젠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의 발틱함대의 2/3을 격파했다. 이 해전은 pre-Dreadnought 전함 시대의 마지막 해전으로 에드문드 모리스 같은 이는 트라팔가르 해전 이후 가장 위대한 해전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러일 전쟁 이전, 각국은 6인치(150mm), 8인치(203mm), 10인치(254mm), 12인치(305mm)포를 골고루 전함에 장착하였으며 이런 전함들이 전열을 이루어 함대운동을 구성하는 것을 기초 전법으로 하고 있었으나 이 대규모 해전에서 305mm의 거포들 만이 실전에서 유효한 화력이라는 사실과, 다양한 구경의 포를 조합하여 각자 포격하는 것보다 함교가 일괄적으로 포격을 지시하여 일제사격을 행하는 것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었다.

 영국은 이 해전의 전훈을 받아들여 1905 10, HMS Dreadnought라는 신조함을 건조하였으며 이 전함이 선보인 "단일 거포함"이라는 개념이 워낙 획기적이었기에 그 이전의 전함과 이후의 전함을 완전히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다.

 

 전황의 전개

 

 러일전쟁이 개시되던 시점에서 러시아는 상트 페테르스부르크를 모항으로 하는 발틱함대, 세바스토폴을 모항으로 하는 흑해 함대, 여순(Port Arthur)을 모항으로 하는 극동함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여순함대의 존재는 보급을 해상수송에 의존해야 하는 일본으로서는 연합함대의 전력을 총 동원하여 여순 항을 봉쇄하는 동시에, 육군에게 여순 항을 점령해 줄 것을 요청했다. 여순 함대 사령관 마카로프 제독이 일본이 설치한 기뢰에 의하여 전사하고 무리하게 봉쇄망을 돌파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려던 여순함대가 일본 연합함대에게 패하자 러시아 본국에서는 발틱함대와 흑해함대에서 증원전력을 극동에 파견하여 극동함대와 함께 일본해군을 제압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에, 의견을 제시했던 로젠스트벤스키 소장이 중장으로 진급하고 본국에서 보로디노 타입 전함을 비롯한 신예전함들을 중심으로 북해에서 아프리카를 돌아 여순 항구까지 향한다는 대 장정이 시작되었다.

 이 대항해는 처음부터 난황을 거듭했고 신경이 예민해진 수병들의 실수로 공해인 북해의 도거뱅크에서 민간 어선에게 포격을 가하는 사건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으며 이로 인하여 영국해군에게 항해 내내 방해를 받으며 역사상 석탄에 보급되는 함대로는 가장 먼 대규모 항해를 시작했다. 한편, 노기 마레스케가 지휘하는 일본 제3군은 막대한 희생을 치른 끝에 203고지를 점령하여 항내의 전함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되자 육상 포를 이용하여 포격을 통해서 러시아 극동함대를 모두 제거하고 1904.08.10, 여순요새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발틱함대는 초기에 출발하던 시기와는 전략적인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버리게 되었고, 돌아가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육상전에서의 부진한 전황도 연관되어 결국, 재차 본국에서 증원함대를 파견하여 어떻게든 일본 연합함대 보다 강한 전력으로 상대를 격파하고, 일본의 해상수송을 교란시킨다는 목적을 실행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다시 항해를 이어갔다.

 발틱함대 접근


러시아 함대의 접근 시 함대 진형도.  2열 종대로 전진하고 있다. 이상한 진형으로 교전하게 된 이유는 불분명.
유럽에서 출발하여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까지 회항하고 있던 러시아의 발틱함대는(네보가토프 소장 지휘하의 제3함대는 수에즈를 통과했음) 쓰시마 섬을 지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고 있었으며 북해에서 부터 기나긴 여행을 거쳐온 발틱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쯔가루 해협을 통과하는 루트와 쓰시마를 통과하는 두 루트 중 로젠스트벤스키 제독의 결정으로 쓰시마 통과를 선택했다.

당시 이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논쟁이 되었으며 만약 일부라도 러시아 함대가 전력을 보존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할 경우, 울산해전과 같은 난감한 교전을 몇번이나 반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뜩이나 늘어나는 전비와 보급선 문제로 전쟁수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본에게 부과된 과제는 반드시 발틱함대를 전멸 시켜야 한다는 난감한 과제였다.

일본 연합함대의 참모들은 일단 그 계절에 기후 문제로 항해가 곤란한 쓰가루 해협을 발틱함대와 같은 대함대가 통과할 리는 없다는 가정하에서 쓰시마로 올것이라는 가정하에 다단계 작전을 세워두고 있었지만 만에 하나라도 쓰가루 해협으로 접근할 경우에 대비하여 함상에 대규모로 석탄을 집적해 둔채 발틱함대를 대기했다. 일본의 대본영에서도 특별히 어민들의 협조를 얻어 광범위한 경계망을 구축하고 쓰가루 해협 일대에 비밀리에 기뢰를 장치해두었다.

 반면, 발틱함대로서는 지구의 반바퀴를 돌다시피하는 33,000km의 대 원정으로 이미 지칠대로 지친 상황이었다. 도거뱅크에서 영국어선들에게 오인사격을 가했던 관계로 이미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은 항해 내내 외교적인 항의를 반복했고 발틱함대는 프랑스와 독일의 도움으로 어렵게 회항하고 있었기에 익숙치 않은 기후와 장기간 해상 운항으로 인한 함체 부식 등 갖은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해전 1단계. 러시아 함대의 앞을 가로지르는 형태로 U회두를 한 후, 병행전진.
대한해협에 자욱한 바다 안개 속에서 일본해군의 순양전대에게 박틱함대의 병원선이 발견되면서(병원선이 있다는 것은 곧 대규모 함대가 있다는 의미와 같다) -일 양측 함대는 서로에 대한 결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남남서에서 북북동으로 항해중이던 러시아 함대와 서에서 북동쪽으로 이동중이던 일본함대가 접근하는 시점에서 일본연합함대의 토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함대를 일제 회두하여 러시아 함대와 같은 방향을 향하도록 명령했다.  위험한 U턴은(일본에서는 보통 α회두 라고 부르는 편) 주력함대를 러시아 함대의 포화에 일방적으로 노출시키는 위험부담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성공하여 6200미터 거리에서 양측 주력전대는 맹렬한 포화를 교환했다.

 쓰시마 해전. 2열 종대로 전진하던 러시아 함대와 접촉하는 장면.

 전통적인 해전의 교전거리보다 훨씬 먼거리에서 접전이 시작되었으나 연합함대쪽이 점점 기습의 이점을 살리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해군이 개발한 일제사격방법에 따라 일본해군도 함교가 함포의 사격을 일괄 통제하는 방법이 주효하여 일본측은 우세한 명중율을 보였으며 시모세 화약으로 알려진 고 폭발성 화약또한 함선의 상부 구조물 파괴에 높은 효율을 보였다.

 당시 러시아 측이 사용하던 철갑탄은 아직 야금기술의 발달 부족으로 그 거리에서는 관통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점차 일본은 러시아 함대에 대해 일방적인 수준의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해군의 프랑스제 보로디노 타입 pre dreadnought 전함은 일본측의 영국제 pre dreadnought 미카사 급 보다 신예전함이었지만 디자인 개념이 뒤쳐져 있었고(특히 복원력에 관한 부분) 장기간의 항해로 정비상태가 불량해져 있었기에 항행 속도가 대단히 낮았다. 일본 함대가 16노트에 가까운 속도를 기록하고 있었던데 반해 러시아 함대의 속도는 8노트에 그치고 있었으므로 이런 속도차를 잘 활용하여 토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상대함열의 머리쪽을 누르는 T전법(Crossing the T)을 계속 성공시킬 수 있었다.



해전 제 2단계. 일본측 진형이 흐트러졌다.
발틱함대의 로젠스트벤스키  제독은 두부에 포탄파편으로 부상을 입었고 결국 5 27일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는 전함 오스슬라비야, 알렉상드르 3세호, 보로디노, 수바로프를 잃어 주력이 와해되는 대패를 겪었다. 일본함대의 피해는 예상외로 경미해서 대부분의 타격이 미카사 호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저녁이 되자 발틱함대의 지휘권은 제3전대의 네보가토프 소장에게 넘겨졌다
.



야간 전투. 침몰된 지점들이 표시되어 있다. 지멋대로 울릉도가 마쓰시마가 되고 독도는 리앙쿠르 락이 되어 있는 점과 동해는 일본해가 되어 있는 부분은 양해 바람
.
일본해군은 야간이 되자 예정된 대로 구축함과 어뢰정을 이용하여 분산된 러시아 함대에게 파상 공세를 퍼부어 구형 전함 나바린을 침몰시키고 전함 시소이 벨리키, 장갑순양함 아드미랄 나히모프,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호에게 타격을 입혀 아침에 자침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시간진행

1905. 05. 27 일본시간

04:45 일본의 시나노마루 호가 러시아 발틱함대를 발견하고 전보를 보냄
05:05
일본 연합함대가 대기중이던 진해만을 출항하여 대본영으로 전보를 보냄. 내용은 Today's weather is fine but waves are high. (Japanese: 금일 날씨 맑으나 파도가 높다) - 날씨가 맑아야 발틱함대를 관찰할 수 있고 파도가 높아야 방어대 아래의 취약한 부분에 명중탄을 날려서 침몰시키기 쉬워짐.
13:39
일본 연합함대가 발틱함대를 육안으로 포착하고 전투기를 게양함
.
13:55
거리 : 12,000 m. 일본함대 기함 미카사 호에 Z기가 게양됨.(내용 자체는 넬슨이 트라팔가르 해전때 사용한 것과 유사함
.)
14:05
거리 : 8,000 m. 일본함대 U턴 개시
.
14:07
거리 : 7,000 m. 미카사 호가 선회를 완료하는 시점에서 발틱함대가 최초 사격개시
.
14:10
거리 : 6,400 m. 일본 함대 전체가 선회를 완료
.
14:12
거리 : 5,500 m. 미카사 호에 첫번째 명중탄
.
14:16
거리 : 4,600 m. 일본연합함대 발틱함대 기함 수바로프 호에 일제사격
.
14:43 2
전대 기함 오스슬라비야와 발틱함대 기함 스바로프 호가 극심한 피해로 전열을 이탈
.
14:50
알렉산드르 3세호가 전열을 벗어나기 위해 북쪽으로 선회

15:10
오스슬라비야호 침몰. 수바로프 호 도주. 연합함대 주력은 상대측 기함 수바로프호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잘못 이동했으며 제3전대장 가미무라 히코노조가 독단적으로 장갑순양함 전대를 이끌고 발틱함대 주력에 대응.
18:00
거리 : 6,300m. 주력함대가 장갑순양함 전대와 합류 다시 교전에 들어감

19:03
알렉산드르 3세 호 침몰.
19:20
수바로프, 보로디노, 시소이 벨리키 침몰
.
1905. 05. 28 일본시간

09:30 일본함대가 울릉도 근해에서 다시 발틱함대 잔존세력과 교전
10:34
러시아 함대, XGE기를 게양하여 항복의사를 밝힘 . 그러나 여전히 항해 중이라서 계속 교전이 진행되었음.
10:53
네보가토프 소장 지휘하의 러시아 함대 정선. 일본함대 항복 수락

해전의 결과

 네보가토프 소장의 지휘로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하여 항해를 지속하고 있던 신예전함 오렐, 구형전함 니콜라이 1세호, 연안용 함정 아프라신, 아드미랄 세냐빈 호는 연합함대에게 포착되어 항복했으며 5 28일 저녁까지 모든 러시아 군함들은 일본해군에게 추격당했다.

포함 아드미랄 우샤코프는 항복을 거부하고 일본의 장갑 순양함과 포격전끝에 침몰했으며 구형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6척의 일본 순양함과 사투를 벌이며 다음날까지 교전한 끝에 침몰했다.

러시아의 장갑순양함 오로라, 쳄셩, 올레그는 마닐라의 미국해군기지로 도주하여 그곳에서 억류되었으며 2등 순양함으로 분류된 무장 요트 알마즈 호와 2척의 구축함만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할 수 있었다.

 50여척에 달했던 러시아의 발틱함대 대부분이 이 해전으로 침몰한 반면, 일본군은 겨우 3척의 어뢰정을 상실했다.(Nos. 34.35.69)

Image:Oleg-cruiser.jpg
 

마닐라에 도착한 올레그 호의 피탄 모습. 시모세 화약의 효과로 상부 구조물 대부분이 녹아내리다 시피했다.

 

  일본 연합함대 기함, 미카사 호. 승전 기념연 다음날 원인불명의 폭발사고로 침몰했다. 지금 있는 것은 복원함.

 이 해전의 충격적인 대패배로, 러시아는 극동지역에서의 해상력을 모두 상실했고 당대의 전략병기인 전함의 대부분을 상실했으며 국가의 위신이 많이 상실되어 국내 여론에 밀려서 아직 충분한 지상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강화조약을 맺게 되었다. HMS Dreadnought의 개발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장갑순양함이 해전에서 유효한 전력임을 입증하여 이를 개선한 순양전함이 대대적으로 건조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4. 러일전쟁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기 전부터 러시아의 상황을 주의깊게 살펴보던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래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 막강한 러시아 제국과의 일전을 준비했고, 전쟁의 시기가 1904년이 된 것은 이미 한계에 달해가는 막대한 군사비 지출과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이전에 결판을 내야 한다는 사이에서 도출된 시점으로, 일본의 국가적 흥망이 이 전쟁에 달려있는 상황이었다.

이 전쟁의 승패는 한반도 주변해역에서의 해상권 확보가 관건으로, 러시아의 해군은 크게 태평양 함대, 발틱함대, 흑해 함대로 구성되었다.
태평양 함대는 러시아 해군 중에서도 정예로 그것만으로도 일본의 전해군세력 70~80%에 달하는데, 전쟁이 시작된다면 본국에서 증원함대를 파견해서 이것이 여순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태평양 함대와 합류할 경우, 세력비는 2:1로 완전히 압도될 상황이었다.

일본 해군이 격파당해 해상권을 상실하면 만주에 전개될 일본육군은 그렇지 않아도 강대한 러시아 육군에게 압사될 것인데다가, 이겼다 하더라도 빈약한 일본의 재정사정으로는 압승을 거둘 수 없다면 국제여론상 전비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될 상황. 따라서, 일본은 총력을 기울여 선전포고 없이 기습공격을 가하고, 상대방에게 선수를 이어나가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예정대로 몇배의 전력을 투입해서 계속 승승장구 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여순에 도사린 태평양 함대의 동향이었다. 전쟁 이전에 일본해군의 초기 전략은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이 산티아고 항을 봉쇄(시도)한 것처럼 여순 항의 좁은 입구를 낡은 증기선 등을 가라앉혀서 막아버리고, 소수의 경계병력을 남겨두어 요새병력의 진출을 막아버린다는 것이었지만 결과가 신통지 못하자, 결국 해군은 여순항을 봉쇄한채로 요새 육군에게 부탁하여 노기 마레스케의 지휘하에 제 3군을 편성 요새 공략에 나섰다.



노기 마레스케. 군신으로 유명한데 전투 지휘는 서툴다. 나름대로 (일본관점에서는) 훌륭한 인격자.
메이지 일왕이 죽자 자신도 따라 죽었다. 군인의 재능보다는 시인쪽에 재능이 있었던 듯.
여기에서 기관총 앞에 보병을 닥돌시키는 무모한 전술을 반복하여 시체의 산을 쌓아나간 노기와 함께, 또 한명의 일본군이 전후에 군신으로 추앙받게 되니 그 이름, 히로세 다케오.




이 사람... 근성의 황제.
그는 자원해서 여순항 폐쇄 작전을 지휘하여 2차례에 걸쳐서 위험한 작전에 나섰으나 부하가 행방불명되자 그것을 찾으러 갔다가 실종되었다.

유도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강도관에서 유도를 배웠고 강도간의 홍백 대항전에서 최초로 5명을 연속으로 격파하고 6명째와 비기는 기록을 세운 호남아였다. 또 강직한 인품이나 러시아 유학 시절의 애인과 결혼이 약속되어 있었다던지 하는 드라마틱한 부분이 히로세 다케오 본인에게 있었던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이 두 사람이 군신으로 추앙된 것은 전후 일본의 프로퍼겐더의 하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래로 만들어져서 업적이 칭송되고 동상이 되셨다.






마카로프 제독. 발틱함대 사령관 로젠스트벤스키랑은 연적관계. 일개 수병으로 시작해서 제독까지 올라갔다. 은영전에서 나오는 뷰코크의 모델이 아닐까 생각하는 중.
아무튼, 폐쇄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러시아 최고의 제독으로 이름이 높던 마카로프 제독은 함대를 온존시키되 항구 밖으로 진출, 일본 함대를 도발하는 함대기동을 하여 휘하 함대의 사기를 높이고 기동 훈련을 반복하고 있었으나, 이를 역이용한 일본군이 정해진 기동로에 기뢰를 설치하여 마침내 기함 페트로파블로스크와 함께 마카로프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여, 기뢰의 유용성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번에는 일본해군이 기뢰의 유용성을 입증하게 된다.


러시아 해군이 보복으로 항구 외해에 설치한 기뢰에 걸려 주력인 미카사 급 전함을 포함해서 전함 2척을 상실하는 대 피해를 입는다.


야시마.
이로서 해전의 주전력이 되는 전함전력의 1/3이 상실되는 대 피해를 입은데다가, 육군의 항구 공략은 계속 늦어지고 피해만 늘어나는 데다가 장기간의 항구봉쇄로 함대의 기동력이 저하되는 등, 초조한 상황에 일본해군은 몰리고 있었다. 그러나 요새 내의 러시아 군도 보급로가 차단된 상황에서 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로의 탈출을 시도하게 된다.

일본군의 의표를 찔러 거의 성공한 듯 보였으며 만약 성공했다면 일본군의 작전 수행은 엄청난 지장을 겪었겠지만, 러시아 측에는 대단히 불행하게도 비트게프트 소장이 탑승한 기함 레트위잔의 사령탑에 12인치 주포가 명중, 함대 사령부가 전멸하고, 통솔체계가 엉망에 빠지면서 탈출은 무위로 돌아갔다.




레트위잔. 미제. 사령탑에 크리 맞고 작살남.


체사레비치. 프랑스제. 발틱함대의 보로디노 타입은 이것의 발전형.
이 해전은 압록강 해전 이후 10년만의 본격적인 대 해전이었던 관계로 각국의 무관들이 관심을 갖고 조사를 나섰으며 그들은 피해를 입은 러시아 측의 선박들을 조사하여 전훈을 도출하려고 했다. 그리고, 단 한척도 포격에 의해 침몰된 적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이것은 아직 동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의 노시베에서 본국의 훈령을 기다리고 있는 발틱함대에게는 어떤 의미로는 희망을 줄 수 있는 사건이었다.

발틱함대의 주력전함중 보로디노 타입 4척의 전함은 태평양 함대의 어떤 전함보다도 신형이었기에 다시 일본함대와 교전을 벌이더라도 최소한 침몰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비록 침몰되지는 않더라도 태평양 함대의 각 함정들은 일본해군의 포격에 의하여 상부구조물이 완전히 무력화되고 기동성이 최소화된 상태로 간신히 피해나왔다는 점이었다.

어찌되었건 러시아 해군은 아직 최후의 카드를 남겨두고 있었다.

이후, 여순 공략전 최대의 격전지 203고지를 점령한 일본육군의 포격으로 항내의 태평양 함대가 괴멸되면서,
일본해군은 마침내 멀리 희망봉을 돌아오는 발틱함대를 만전의 태세로 기다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해군 전술 -3

5. 보내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니콜라스 2세. 비운의 황제이며 러시아 정교의 성인.
1904년 10월,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는 심기가 편치 않았다.
거대한 러시아를 어떻게 유럽의 질서에서 자리를 잡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역대의 로마노프 왕가가 고민하고 항상 바래온 부동항의 획득과 동쪽으로의 진출. 그 완결에 가까운 부분에 있어서 몇가지 사소한 장애가 남아있고 그것이 골치였다.

 

베조라조프. 선제의 총신 비데의 위치에 올라선, 니콜라이 2세의 총신이 열변을 가지고 만주와 요동을 거쳐 조선까지 점령해야 한다. - 그러기 위해서 전쟁은 필요없고 국책 회사를 진출시켜서 산업 시설과 도시 시설을 건설하고 철도, 항만을 건설해 러시아 자본을 넉넉히 주입함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일본을 축출한다 - 는 계획에,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제국의 국가의 완성과 그 정점에 오를 수 있다는 데에 혹했던 것이 실수였을까?

 

감히 맞서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일본이 계속 선전을 거듭하고 있고, 어찌된 일인지 태평양 함대는 패배, 여순 요새가 함락되었고 블라디보스토크의 분대도 패배했다.
시종무관 - 그리고 총애하는 로젠스트벤스키의 진언을 돌이켜 보았다 "본국의 발틱 함대에서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제2태평양 함대를 편성, 극동으로 향하는 원대한 대 원정을 감행하여 태평양 함대와 합류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본 해군을 격멸하는 계획입니다." 구상은 나쁘지 않다... 라고 생각했다. 원대하고 중후장대한. 지극히 러시아인 다운 호쾌한, 그런 계획이었다. 하지만 -  과연 실행해야할 것인가. 실행상의 어려움은 없는가. 유럽에 주둔하는 러시아 군을 대거 이동할 경우 유럽에서의 세력균형은 유지될 수 있는가.
원숭이들.
머리가 아팠다. 문득 25살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가 태자였을 무렵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철도 기공식이 거행되는 중에 그리스의 조지 태자- 그의 조카뻘 -와 함께 일본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진짜로 좀 즐겼던 것 같다. 등에다가 문신을 그려넣었다고 한다.
게다가 일본 전통예술에도 흥미를 보여 머리핀을 사서 게이샤한테 주기도 했다는데, 설마 칼침맞을 줄은 몰랐겠지. 1891년의 그 방문에서 그는 한가로운 기분으로 이국적인 나라에 대한 젊은이 다운 호기심을 갖고, 비와 호 등의 명승지를 구경하고 떠들석한 잔치도 즐기고 한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질서를 유지하던 경관중 하나가 칼을 뽑아 황태자인 자신에게 두번이나 내리친 것이다. 상대는 검술에도 능했고 거리가 있어서 본능적으로 피했지만 오른쪽 관자놀이와 후두부를 노리고 내리친 검은 그에게 평생의 상처를 남겼다. 게다가 범인인 츠다 산조는 사형당한 것도 아니었다.




츠다 산조. 좀 돌았다.
쓰다 산조는 법정에서 감히 일왕을 먼저 배알하고 예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베었다 라는, 터무니 없는 말을 한 것까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머리를 다쳤기 때문에 피도 엄청나게 나왔지만, 더 불쾌한 것은 그 뒤의 터무니 없는 소란이었다.  온갖 협회, 시회, 학교, 회사 등등에서 문병 전보와 서신이 그가 치료를 받고 있는 도키와 호텔과 러시아 공관에 밀려와 그 수가 1만통이 넘었다.이것은 시작에 불과했고, 27세의 한 일본 여성은 츠다 산조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데 사죄를 한다며 교토의 부청 앞에서 자결했다. 일본의 모든 불교 사찰이 건강회복 대기도회를 열었고 도호쿠의 마을에서는 "앞으로 태어나는 모든 아이에게는 '산조'라는 이름을 지어서는 안된다"라고 결의했다. 이해하기 힘든 일들 뿐인 이 나라에서 불쾌한 기억을 갖고 떠난 이후, 그는 일본인을 원숭이라 여기고 있었다. 어떻게 원숭이들이 이렇게 발악 하고 있는 것인가? 그 배후에는 필시, 사촌형의 나라 - 영국이 버티고 있다. 일본이 발행한 막대한 전시공채를 사들이는 것은 물론이고, 함선의 건조와 인도 등, 영일동맹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동진에 대한 진출을 막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꺼림직한 기분이었지만 총애하는 로젠스트벤스키의 발언을 돌이켜보았다.
"이 대 원정은 크나큰 곤란을 수반하게 되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명하신다면, 저는 기꺼이 이 함대를 이끌고 일본과의 전투에 임할 것입니다."
군령부장의 호언장담이 아닌가. 그렇다. "로젠스트벤스키라면 틀림없이 승전할 것이다."


1904년 10월, 러시아의 해군 군령부장 로젠스트벤스키 소장은 심기가 편치 않았다. 러시아의 귀족사회에서 평민출신으로 여러번 고난을 겪으면서도, 단정한 용모의 소유자이며 세련된 교양으로 지금껏 승승장구해왔고, 다행하게도 니콜라이 2세의 호감을 얻어 시종무관으로 군령부장으로 승진해왔다. 자신의 관료적 취향도 의전직을 수행하는 데는 적합했고 해전에 있어서는 포술의 권위자로 논문이 어느 정도 인정을 받는 위치지만, 자신은 소장. 상급자가 얼마든지 있으니 누구라도 보내겠지 라고 방심한 것이 화근이었다. 수십척의 증기선을 이끌고 변변한 보급항도 없는 지역을 3만km이상이나 항해를 해야 한다. 범선이라도 힘들만한 거리를, 함대로서 유지하면서 그런 장기항해를 할 수 있을까? 게다가 도착하고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가야할 필요는 확실한 것인가. 실행에 옮기게 되면 끝도없이 귀찮은 문제들이 생겨날 이 계획에 대하여, 군령부장으로서 원론적인 이야기를 꺼냈다가 쓸데없는 크리티컬을 맞게 된 것이다.


발틱함대의 여정. 좀 길다.
그에게는 발트해의 크론슈타트를 출항하여, 도거뱅크를 거쳐 스페인의 비고를 지나, 케이프타운을 돌아 노시베를 들리고, 인도양을 건너 인도차이나의 캄란만에서 마지막으로 쉬고, 여순 또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해야 하는 기나긴 여행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와중에 어느 시점에서 일본이나 영국에게 방해를 받게될지는 알 수 없었다. 바로 그렇게, 로젠스트벤스키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6. 쓰시마 해전




도고 헤이하치로. 영국에서 좀 놀던 시절.


호비트 족의 용자.
1905년 5월 27일 14시 3분. 일본해군 연합함대의 기함 미카사. 발틱함대와 거리가 1.1km 내로 접근하자 포술장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에게 "어느 쪽에서 전투를 하십니까?"라고 큰소리로 속삭였다.
도고는 이에 왼쪽으로 크게 틀을 것을 지시했다. 적전 회두의 시작이었다.



큰소리로 속삭였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지만 무례하지는 않게 물으면서도 조바심이 났다는 뜻인 것 같다.
당시, 러일전쟁의 전황은 육지에서건 바다에서건 일본이 승승장구하는 것 처럼 보였으나, 그 현실은 일본으로서는 패망하기 직전이었다고도 볼 수 있었다.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비롯한 자금책들이 영국과 미국을 발벗고 뛰어다니며 어떻게든 전비를 조달해 왔으나 이대로는 전비에 짓눌려 쓰러질 판이었고, 봉천으로, 최종적으로는 하얼빈까지 전장이 길어지면서 계속 러시아 육군의 주력을 제압하지 못한다면 이미 정예전력이 대다수 소모된 일본군의 피로는 한계를 넘을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발틱함대를 상대로, 이기더라도 불과 주력함 2~3척이라도 놓치게 된다면 그 경우에는 동해상의 일본의 해상권이 위협되고, 연합함대는 다시 장기간의 봉쇄에 돌입할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를 포위하고 점령할 새로운 군을 편성할 여유같은 것은 없고, 결국 무슨 일이 있더라도, 상대를 "격멸"해야 했다. 당시 해군에 있어서 전함은 침몰되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바다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함대를 포착해서 교전에 돌입하는 것도 어렵거니와, 교전을 시작해도 기관이 어디까지 전력으로 움직여 줄 것인지도 문제고, 결정적으로는 아직 철갑탄이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베이 강을 주요부위에 두르고 있는 전함의 방어력을 공격력이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든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는, 최대의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단종진을 형성해서 우세한 함대속도를 최대한 활용, 계속 상대방의 함열 앞을 가로지르며 블라디보스토크 방향으로 도주할 수 없게 하면서, 모든 배를 침몰시켜야만 했고 그런 이유로, 전술적인 면에서는 대단히 위험하게도, 적의 포격 사정범위 내에서 줄줄이 선회를 한다는 위험천만한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양측 함대의 비교
주력함 - 러시아
 전함명  숫자(척)  속도(노트)  함포(구경, 수)

 152mm이상

 장갑 면적

 152mm 이하

 장갑 면적

 비장갑비율
 제 1전대            
 보로디노   4   17.8

 305(4)

 152(12)

 75(20)

 17%  31%   52%
 제 2전대            
 오스슬라비야   1  18

 254(4)

 152(9)

 75(20)

 15%  29%  56%
 시소이베리키  1  16

 305(4)

 152(6)

 20%  16%  54%
 나바린  1  15.8

 305(4)

 152(8)

 42%  20%  38%

 아드미랄

 나히모프

 1  17

 203(8)

 152(10)

 16%  9%  75%
 제3전대            
 니콜라이 1세  1  15.5

 305(2)

 229(4)

 152(8)

 8%  23%  69%

 아드미랄

 셰나빈

 1  16

 254(4)

 120(4)

 13%  16%  71%


주력함 - 일본

 전함명  숫자(척)  속도(노트)  함포(구경, 수)

 152mm이상

 장갑 면적

 152mm이하

 장갑면적

 비장갑비율
  제1전대            
 후지  1  18  305(4)

 152(10)

 40%  18%  42%
 미카사  3  18

 305(4)

 152(14)

 75(20)

 29%  40%  31%

 닛신

(장갑순양함)

 1  20

 203(4)

 152(14)

 75(10)

 31%  34%  35%

 가스가

(장갑순양함)

 1  20

 203(2)

 152(14)

 75(10)

 31%  34%  35%
 제2전대            
   6  20

 203(4)

 152(12)

 75(12)

 19%  40%  41%
함포의 파괴력 비교
203mm이상 주포의 비교

 지표  일본  러시아  비율
 총보유  60  42  1.43:1
 분당 발사속도  1.0  0.33  3.0:1
 분당 총 발사량  60  14  4.29:1
 분당 금속 투사량  9,500  3,686  2.51
 분당 화약 소모량  1,330  92  14.45:1

152mm~120mm 중구경 포의 비교

 지표  일본  러시아  비율
 총보유  150  83  1.8:1
 분당 발사속도  2.0  1.5  1.33:1
 분당 총 발사량  300  125  2.4:1
 분당 금속 투사량  12,499  4,504  2.76:1
 분당 화약 소모량  1,740  113  15.37:1


 지표  일본  러시아  비율
 총보유  210  125  1.7:1
 분당 발사속도  2.0  1.5  1.33:1
 분당 총 발사량  210  125  2.66:1
 분당 금속 투사량  21,949  8,190  1.96:1
 분당 화약 소모량  3,070  205

관통력 비교

 함대

 포탄중량

(kg)

 포구 초속

(m/sec)

 관통력(mm)

1해리에서

 관통력(mm)

2해리에서

 관통력(mm)

3해리에서

 관통력(mm)

4해리에서

 관통력(mm)

5해리에서

 관통력(mm)

6해리에서

 관통력(mm)

7해리에서

 12인치
 러시아  331.7  792.5  381  311  251  201  159  131  92
 일본  385.4  762  369  306  254  218  170  140  104
 8인치                  
 러시아  87.9  899.1  252  182  126  88  64  50  46
 일본  113.4  756  206  176  136  97  71  56  56


러시아 함대의 우세한 조건.
- 보로디노 타입 4척은 당시의 최신예 함으로 일본해군의 주력함에는 없는 신기술(원거리 거리측정기)가 도입되어 있기도 하다.
- 전함 전력의 숫자(러시아가 8척 일본은 4척)와 12인치 주포의 숫자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다.
- 여순함대와 일본함대의 교전결과를 검토해 볼때, 실제로 침몰된 함은 없었다. 러시아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도착하기만 하면 일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침몰되지 않는다면 유리하다고도 볼 수 있다.(실제로는 일본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수리시설이 미비하므로 좋은 조건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공작함을 대동하고 있으므로 도착한다면 응급수리 정도는 할 수 있다.)
일본 함대의 우세한 조건
- 전체 함대가 일정한 건함 방침에 의하여 구입, 건조되었기 때문에 함대가 통일된 운동성을 가지고 있다.
- 발틱함대는 굴뚝을 전부 시인성이 좋은 노란색과 검은색의 조합으로 하고 있다. 왜 이렇게 해야 했는지 이유는 불분명하다.
- 장기간 원양항해를 거치면서 수중생물들이 달라붙어있어 제 속도를 내지 못하는 발틱함대에 반해 일본측은 전 함정을 여순항 봉쇄가 끝난 이후 도크에서 수리를 완비했기 때문에 최대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
- 러시아 측의 함선은 블라디보스토크로의 항해를 해야 했기 때문에 석탄을 과적한 상태로, 이 때문에 함선의 무게중심이 높아진 상태가 되었음.




보로디노 타입. 이것은 오렐이다. 이 패전으로 사상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의외로 재평가 되는 부분도 있다.
- 결전 당일 전투 해역의 파고가 높으면서도 맑은 상태가 되었으며 이 것이 보로디노 타입의 약점으로 지적된 부분, 수평방어는 충분히 고려되어 있으나 그외 부분에 대한 방어가 약하고 상부구조물의 무게가 무거운 이유로 메타센터가 높아진 것을 보조하기 위한 선체 하부구조의 문제로 발생한 복원력 문제가 드러남.
- 영일동맹의 혜택으로 전세계에 펼쳐져 있는 영국의 방대한 통신, 첩보망을 통해 발틱함대의 항로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입수할 수 있었고, 영국의 최신사격통제 시스템, 무전기기 등을 제공받음.
- 프랑스가 개발한 피크린산을 이용한 메리닛트 화약을 카피 생산한 시모세 화약의 위력으로 단위 투사량을 대폭 증가시킬 수 있었음. 종래의 흑색화약에 비교해서 엄청난 폭발력으로 고온을 발하는 까닭에 관통되지는 않으나 철과 반응해서 유독가스를 내는 등 파괴효과가 뛰어난 화약. 이 화약은 불안정하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사용하지 않았으나 이주인 고로 기사가 옻나무 수액을 바르면 철과 피크린산의 반응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음을 확인하여 일본은 이를 채용, 실용화 할 수 있었으나 전후에도 미카사 호의 폭발 침몰사고를 비롯하여 다수의 사고를 내고 있기 때문에 결국 주류가 되지는 못함.

시모세 화약으로 두들겨 맞으면 배가 움직이기는 하는데 상부구조물은 걸래가 된다.
- 이쥬인 신관이라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민감한 신관을 독자 개발했다.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기 때문에 불발탄은 별로 나오지 않더라도 관통력은 낮아지는 결과를 낳았지만 시모세 화약과 잘 어울려서 상대 함선의 함상 건조물을 파괴해서 무력화 한다는 전술 목표 달성에 크게 기여했다. 다만, 지나치게 예민한 점이 문제가 되어 포강 내부에서 자폭하는 사고가 가끔 발생했다.
-36식 무전기를 전 함정에 도입하여 사령탑이 일제히 전 함대의 예하 함선을 통제할 수 있도록 했다. 러시아 측에서는 이보다 더 강력한 무전설비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내내 사용하지 않았음.
- 일제사격통제 방식을 최초로 도입했다. 기존에는 각 포대가 독자적인 방법으로 거리를 측정하던 것을 바꾸어 함교가 각 포대 전체를 통제해서 오차를 식별하고 명중탄을 내는 식으로 일괄 통제했으며 당시 세계에서 이를 도입한 것은 영국해군과 일본해군 뿐이었다. 이후 이것이 드레드노트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 야마모토 곤노효에의 주도로 실력위주로 해군을 개편하고 통일된 교육을 받은 이들을 참모로 삼아 전체적인 지휘체계가 일관되도록 구성함. 지휘관-참모의 체계가 원활하게 기능하였고 일본이 이후로도 이상적인 체계로 삼게되는 구조, 듬직한 지휘관과 명민한 참모가 콤비를 이루면서 참모는 최선을 다해 계획을 작성하고 지휘관은 한번 신뢰한 참모를 끝까지 믿으며 결과에 책임을 주는 형식의 모범을 보였다. 여기서 아키야마 사네유키, 사토 데츠타로, 시마무라 하야오,가토 도모자부로 등의 명참모들을 기용하여 전체의 함대가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 있었음.
반면에 발틱함대의 경우 제2태평양 함대 부사령관으로 2전대의 사령관을 담당해야할 페리케르잠 제독이 항해 도중 병사했음에도 그것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사령관 로젠스트벤스키가 지휘권을 상실했을 경우 제3서열인 네보가토프 소장에게로 지휘권이 위임되지 않고 지휘권의 공백이 생겨날 위험이 있었음.
- 블라디보스토크로 도주하느냐 싸우느냐를 놓고 목적이 통일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정쩡하게 해전해역에 돌입한 발틱함대에 비해 목적이 다일화 되어 있었다.(마한의 분석)



일본함대의 초계망. 대한해협쪽으로 이동할 것을 예측하고 전지역에 초계망을 깔아둠.
진주만의 암호가 도도도도 였다면 여기서는 타타타타
- 전함 전력에서 열세인데 반해서 장갑순양함을 비롯한 순양함 전력, 즉 고속 타격부대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유하고 있다. 초기에는 각국에서 이상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전후에는 이것의 유효성이 확실히 드러났다. 특히 해전 도중에 제1함대가 수바로프의 파손으로 인한 침로 이탈을 러시아 함대 전체의 침로 변경으로 오인하여 해전해역에서 떨어져 버린 상황에서 장갑순양함 전대가 기민하게 상대의 앞을 가로막고 나옴으로써 그 위력을 입증하고 결과적으로는 전체를 포위하는 형태를 만들어 내었다. 이 유효성을 바탕으로 순양전함이 개발되었음.
- 전체적으로는 다단계의 요격계획을 세우고, 제1, 제2 전대를 비롯한 주력함대의 교전과 이를 서포트하는 제3~6함대의 구형전함들이 결전을 담당하고, 다시 구축함을 비롯한 구축함대가 어뢰공격을 실시하는 것과 초계임무 등을 짜임새 있게 미리 작성하여 그 시간계획에 따라서 명확히 행동하여 전체적인 목표가 조화를 이루고 있음.
발틱함대와 일본연합함대의 첫교전 3시간만에 발틱함대는 함대의 통일성을 상실하고 시종일관 주도권을 상실한채 난타당했다. 일본함대가 적전회두에 들어간 상황에서 40여발의 명중탄을 내며 선전하기는 했으나 회두를 완료한 다음에는 러시아 측의 함대는 선두의 4~6척만이 실제로 교전을 벌이는 데 반해 일본측은 전화력을 활용함으로써 주력함의 거의 모두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러시아 측도 장기간의 항해와 훈련이 부족한 것을 고려한다면 분투했다고는 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세계 해전에 길이남을 기록적인 대패가 되었다.



발틱함대의 마지막 항로.
주력함 중 5척은 함포에 침몰, 1척은 어뢰에 침몰, 2척은 나포되었고 그 외에도 거의 모든 함선이 침몰, 자침, 억류, 항복하여 결과적으로는 50척이 넘는 대 함대가 동해상에서 눈녹듯이 녹아버렸고, 이 충격으로 러시아는 국내사정이 악화된 것과 함께해서 종전협정에 조인하게 된다.




 7. 쓰시마 해전의 난자 전법
전체적인 결전에 있어서는 7단계로 나뉘어서 다단계에 걸쳐서 발틱함대를 철저히 분쇄할 것이 목표이고, 약 10번에 걸쳐서 크고 작은 교전이 있었으나 핵심은 처음 맞부딪힌 순간의 3시간에 결정된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일본측의 이른바 "정자전법"은 오랫동안 군사학계에서 연구되었으며, Crossing the T라고 불리우며 함대함 포격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겨졌다.
먼저 이것이 어떻게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자.
전법의 개념도.
군함은 고속을 내면서 최대한의 화력을 확보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유선형의 함체에 포를 길게 늘어놓아야 한다.
전열함 시대에는 양 현측에 대포를 늘어놓을 뿐이었지만 근대 장갑함 시대로 오면서 주포의 대구경화 대형화가 이루어지자, 양쪽에 배치하는 것으로는 무게균형을 맞추기가 어려워지고 대형의 함포를 선회포탑으로, 중앙선쪽에 배치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점차 일반화되었다.
이것이 최대의 화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림처럼 현측으로 사격을 하는 것이 적합하다.
전방으로도 포격을 할 수는 있지만 그런 식으로 사격을 하면 후폭풍에 의하여 함상 구조물의 예민한 부분들이 파괴될 우려가 있으며 사각이 제한될 수 있으므로 가능하면 현측으로 사격한다.
하지만, 이것이 이상적이라 해도 양측 모두가 이 진형의 위험성을 알고 있고 서로가 고속으로 기동하고 있는 중인데다가, 이 상태가 유지되다가는 접근하는 쪽이 함열을 돌파해서 오히려 함열을 분단시켜버릴 수 있으므로, 현실적으로는 이처럼 형성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개념이T나 丁인 것이고, 실제로는 필기체 대문자 T나 イ 처럼 되는 것이다.
정자의 편모운동을 살펴보자.




이런 식으로 기동을 진행할 수 있는 것은 전체적인 함대 속도가 러시아 측보다 빠르기 때문이며, 조함능력이 대단히 뛰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더 중요한 것은 최초의 180도 선회(U턴, 알파 턴 등이라고 불린다)에서, 사정거리 내에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지는 위험을 감수 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당시에는 조준장비에 자이로 시스템이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동중인 함선에게 저 정도 위치에서 명중탄을 퍼붓기는 쉽지 않고, 철갑탄의 위력도 최대한 발휘되지는 않는다.
이를 알더라도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특히 선두에 서 있는 기함 미카사의 경우에는 명중탄이 집중되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이 성공했기 때문에 격멸이라는 중대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고 봐야한다. 이것이 이후 대함거포시대를 대표하는 전술로 자리를 잡게된다.
이런 식으로 고속기동이 가능해진 것은 동력선의 기술적인 발달과 함대가 통일된 운동을 할 수 있는 통신장비의 발달로 가능해 진 것이며 리사해전에서 최초로 선보인 이래, 쓰시마 해전, 엘리 해전, 유틀란트 해전, 자바해 해전, 에스페란스 곶 해전, 수리가오 해협 해전 등에서 계속 시도된다.
사상최대의 함대함 포격전이라고 할 유틀란트 해전에서도 영국함대는 두번이나 이 형태를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독일함대가 이를 파악했기 때문에 결정적인 승기를 잡지는 못했다.




또 한가지 쓰시마 해전의 전훈이 된 것은 함교가 전체 포탑의 사격을 통제하는 일괄통제방식을 취해서 명중도와 사정거리를 늘렸다는 것이다. 수km거리에서 명중탄을 내는 것은 그 이전에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것이고 이것이 가능해짐을 입증함으로써 All-big gun, 즉 대구경포를 통일해서 갖추는 것이 함교가 사격을 통제하기에 적합하다는 이론이 확인되었다. 그 이전에는 청일전쟁의 전훈으로 중구경 속사포를 중시하던 것을 탈피해서 각국이 단일거포함의 건조경쟁에 돌입했고 그 결과물이 영국에서 등장한 전함의 혁명, 드레드노트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이런 개념의 함을 연구했지만 기술부족으로 실패했고,영국이 성공함으로써 그 이전의 모든 군함은 프리드레드노트로 분류되어 전부 구식으로 되었다.
이후에도 단일거포함 경쟁은 박차를 가해서 전함의 주포구경은 12인치에서 나중에는 야마토의 18인치까지 확대되었고, 영국은 역설적으로 그때까지의 우위를 거의 상실한채 독일과 새로운 건함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장갑순양함으로 대표되는 고속타격부대의 유용성에 있다. 청일전쟁의 전훈으로 등장학 시작한 장갑순양함이 필요시에는 전함을 대체할 수 있으며,속도의 우위를 살려서 보다 다양한 방면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 영국의 피셔 경은, 이를 한단계 발전시킨 순양전함을 개발하게 된다.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 투입할 수 있고, 자신보다 대형함에게는 속도의 우위를 이용해서
싸울 공간을 결정할 수 있으며, 자신보다 소형함에게는 화력의 우위를 이용한다는 개념으로,
궁극의 군함이라고 칭송되었지만 유틀란트 해전에서 무더기로 떡실신 당했다.
이후 전함의 속도가 전체적으로 향상되자 이 개념은 고속전함 개념으로 옮겨졌고,
이제는 우주로 발을 옮겨 테란 연방의 최강함으로 가끔 얼굴을 내비치는 중이다. 

 

'아르헨 해군, 대마도 주위를 대한해협으로 표기'
  
  
동해의 외딴 돌섬인 독도를 놓고 한ㆍ일 양국이 해묵은 영유권논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일어났던 러일 전쟁 당시 아르헨티나 해군의 한 고위급 장교가 쓰시마(대마도)를 중심으로 펼쳐진 동해 앞바다 해전을 참관, 당시의 해전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아르헨티나 해군에 대한제국(Imperio de Corea)과 울릉도, 그리고 독도의 존재를 알린 전사기록이 발견되어 화제다.
  '러일전쟁의 군사작전과 해전'으로 명명된 이 기록은 1904년에서 1905년까지
러시아와 일본의 대마도 해전내용을 상세히 기록했으며 대마도 주위를 대한해협(Estrecho de Corea)으로 분명하게 표시를 해놓아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1900년대 초 아르헨티나와 국교를 맺은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앞두고 아르헨티나에 해군함정과 전술지원을 요청, 아르헨티나로부터 6척의 전함과 상당수의 해군병력을 지원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아르헨티나 해군은 도멕 가르시아(Domecq Garcia)제독을 6척의 군함과 함께 동해로
파견했다. 그러나 아르헨 해군은 전투에 직접적인 참여는 하지 않고 군함관리와 일본 도고 연합함대의 자문역할만을 수행했다.
  

 
러-일 전쟁사를 기록한 가르시아 제독의 515페이지에 달하는 기록의 표지. ⓒ김영길  


  러일전쟁의 현장에 제3자의 입장으로 참전한 가르시아 제독은 1905년까지 2년동안 치열했던 해전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5백12쪽에 달하는 이 전쟁 기록 속에는 아시아지역의 전략적인 요충지가 대한해협(쓰시마 섬 주변)에서 울릉도 앞바다로 이어지는 동해임을 지적하고 당시 해전상황을 지도로 표기하여 극동아시아에서 동해의 위치적인 중요함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이 기록은 책으로 인쇄한 것이 아닌 가르시아 제독이 직접 타이프로 치거나 친필로 그린 그림을 곁들인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책이어서 러일전쟁을 제3자가 객관적으로 서술한 귀중한 자료로 현지에서는 평가 받고 있다.
  
  가르시아 제독이 기술한 러일 전쟁 상황도에 따르면 대한해협의 대마도전쟁이 가장 치열했으며 울릉도 앞바다와 지금의 포항부근에는 러시아 로제스트 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발틱 함대가 진을 쳤고, 독도는 일본해군이 전쟁포로수용소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특별히 이 기록에는 울릉도는'마쓰시마'라는 일본식표기를 해놓았으나 독도는 '바위섬들'로 표기한 것이 필자의 관심을 끌었다.
  
  러시아가 막강한 발틱 함대를 동원하고도 일본의 도고 함대에 패한 원인에 대해 가르시아 제독은 "당시 발틱 함대는 유럽대륙을 거처 남아프리카 희망봉, 인도양, 그리고 동남아를 거처 남해를 지나는 동안 반죽음상태가 된 해군을 이끌고 전쟁을 수행하는 무리한 작전의 실책 때문"이었다고 분석했다. 또한 일본의 해군력을 과소평가한 무지한 전략이 패전을 자초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해군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아르헨티나로부터 2척의 군함을 구입하면서 4척의 보조함과 해군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일본의 지원요청을 받아들인 아르헨티나는 러일전쟁 당시 6척의 군함과 해군을 동해로 파병, 일본 해군의 전력을 급상승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아르헨 정부가 일본해군에 판매한 군함과 동종의 선박사진. ⓒ김영길

아르헨티나가 일본에 군함을 판매하게 된 건 당시 아르헨의 해군력 증강에 불만을 품은 칠레와 브라질 등 남미국가들이 해군력을 축소하라는 강한 항의에 따른 것이었다. 아르헨 정부가 남미화합 차원에서 다른 남미국가들과 해군 전함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2척의 전함을 급히 일본에 매각한 것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칠레와 브라질, 그리고 아르헨티나가 일본을 간접적으로 도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셈이다.
  가르시아 제독이 기록한 러일전쟁사에 따르면 일본은 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독도를 하나의 이름없는 돌섬으로 여겼으며 자신들의 영토개념이나 이름조차 없는 섬으로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려면 독도뿐만 아니라 울릉도와 진해항까지 일본영토라고 해야 할 판이다. 왜냐하면 당시 진해항 혹은 부산항은 도고 연합함대의 전진기지역할을 했으며 울릉도는 일본이 '마쓰시마' 섬으로 표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일본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던 당시 독도를 자기들의 영토로 편입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1906년까지 일본에 파견돼있다 아르헨티나로 귀국한 가르시아 제독의 동해 해전역사에는 일본이 독도를 그냥 이름없는 돌섬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일본의 주장이 허구임을 증명하고 있다.
  

가르시아 제독이 기록한 동해 해전사 중 대마도 전투도,대마도 주변을 ‘대한 해협’으로 표기했으며 진해 혹은 부산이 도고 해군함대의 전진기지였음을 나타내고 있다.상황도내의 붉은 점은 일본함대,푸른 점은 소련함대의 침몰지점을 나타내고 있다. ⓒ김영길

참고로 당시 가르시아 제독은 일본으로부터 국빈에 가까운 VIP대접을 받았고 동해의 격전지를 마음대로 다닐 수 있었으며 천황을 만나는 등 수시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작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가르시아 제독의 독도표시는 일본의 정통한 정보에 의해 정확하게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더욱이 가르시아 제독은 이 기록에서 독도주변에 진을 친 일본 해군함정의 수효를 정확하게 그림으로 표시를 해놓아 독도현장 역시 직접 방문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1906년까지 일본은 공식적으로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하지 않았고 섬 이름 또한 공식적으로 표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가르시아 제독의 러일전쟁 해전상황도에 따르면 한국정부는 오히려 대한해협에 위치한 대마도영유권을 주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러일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가 대마도주변의 대한해협으로 표시해 놓은 가르시아 제독의 해전상황도를 우리 정부가 독도분쟁의 대비책으로 활용, 대마도가 우리영해 안에 있었다는 것을 주장하여 독도분쟁에 맞불을 놓았으면 싶다.
  

대마도 전투상황을 확대한 울릉도와 독도부분.울릉도를 마쓰시마로 표기해놓고 그 앞바다에서 소련 군함이 침몰한 것을 표시했다. 그리고 독도주변에 전쟁포로들을 실은 배가 정박하고 있음 나타냈고 독도는‘바위섬들’로 표기해 놓았다. ⓒ김영길
 '대마도는 한국영토?'
  대마도가 한국영토였을 가능성은 '한국인들'이라는 제하의 1858년 4월24일자 '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에도 보도가 되어있다. 영국의 시사주간뉴스인 '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는 영국의 상업선단이 일본과 대마도, 부산을 방문했던 것을 기초로 하여 동양기행문을 특집으로 다루면서 그 당시 일본과 부산을 여행한 동양의 전문 탐험가 캠퍼페르(KAEMPFER: 네델란드 출신 탐험가, 1651-1716)가 신문사 기자일행과 함께 일본까지 여행, 한국과 일본의 모습을 영국에 알린 것이다.
  

 
  가르시아 제독이 전사기록에 첨부해놓은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함대사령관의 사진과 친필서명.두 사람은 남다른 우정을 나눈 것으로 밝혀졌다. ⓒ김영길


  이들 일행은 일본과 대마도를 거처 부산항을 방문, 부산항의 모습과 그곳 주민들의 모습을 스케치로 남겼다. 그리고 부산 기사를 쓰면서 쓰시마 섬을 조산(chosan)으로 표기해놓았다.
  
  이들이 대마도를 방문했을 당시 이 섬은 분명히 일본영토가 아닌 조선영토로 보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인 해석은 한국과 일본의 역사 학자들의 몫으로 남긴다.
  
  다음은 '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의 부산항의 모습과 한국인들에 대한 기사내용;
  
  "부산성의 해안은 전면이 잘 다듬어진 검은 바윗돌로 돼있으며 선박의 정박지는 수심이 깊고 둥글게 자리잡고 있어 입항하는 선박들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박들이 풍랑에 안전하게 대피 할 수 있도록 돼 있는 항구였다.
  
  정면에 보이는 작은 동산은 가느다란 전나무들로 덮여 있었으며 항구 주위의 높지 않은 산들은 계단식으로 평평하게 만들어진 논, 밭이었다. 산 골짜기에서 흐르는 시냇물로 농작물을 경작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성내는 미끈한 긴 겉옷을 걸치고 윗부분이 아주 높은 이상한 검정색 모자를 쓰고 여유롭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이상한 모자는 대나무를 잘게 쪼게 마치 쇠줄처럼 엮어 만든 것처럼 보였다. 머리는 뒤로 꼬아 묶어 놓은 모습이었고 너무 높아 불안한 모자를 지탱하기 위해 끈으로 턱 밑을 묶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 비해 광주리처럼 생긴 아주 큰 모자(삿갓인 듯)를 쓴 사람도 있었다.
  

영국의 '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가 보도한 부산주민들의 스케치. ⓒ김영길
그들이 옷은 흰색이거나 표백처리를 하지 않은 삼배 옷이 대부분이었고 여자용 옷처럼 소매가 축 늘어지고 가장자리가 넓게 열려있었다. 허리에는 띠를 두르고 바지 아래는 발목을 묶었으며(대님) 면 스타킹(버선)을 신고 짚으로 엮은 이상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우아한 수레(가마인 듯)와 밝은 그들의 표정이 우리의 관심을 끌었으며 낯선 이방인 방문자들에게 완고하거나 배타성이 적어 보였다. 그러나 부산성을 방문해 보고 싶은 우리의 노력은 거친 돌로 막힌 방파제와 해변가의 군중들로 인해 한 발자국도 배 밖으로 내디딜 수 없었다. 우리가 내민 상륙허가 신청서를 받아 부산성 당국자들에게 전해 주는 것도 거절되었으며 심지어는 우리와 동행한 중국인 통역과의 대화하는 것도 기피했다."
  아르헨 해군 100년 전에 한국 방문하기도
  이야기가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가르시아 제독이 쓴 러일간의 동해 해전 기록은 다음해인 1906년 아르헨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한국의 부산항을 방문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아르헨 해군사관학교 학생들이 세계최대의 해전 격전지의 현장에서 실전 훈련을 해보는 실습장으로 부산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아르헨 해군 박물관 관계자의 설명이다.
  

부산항의 역사를 새로 쓰게 한 아르헨 해군이 찍은 부산항 전경 사진. ⓒ김영길

1906년 2월 8일 아돌포 마누엘 디아스(Adolfo Manuel Diaz)함장이 이끈 30여명의 해군 사관 생도들은 증기기관 범선인 '쁘라가따 사르미엔또'호를 타고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출항, 뿐타 아레나를 거처 호놀룰루, 상하이, 여순 항을 항해하고 그 해 5월 29일 부산항에 도착, 6월 17일까지 부산에 머문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나가사키, 요코하마, 시드니를 끝으로 같은 해 11월30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입항한 것으로 사르미엔또호의 항해일지는 기록하고 있다. 아르헨 해군의 최초 한반도 상륙의 기록인 셈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항에 정박중인 사르미엔또 호.이 배는 100년 전 한국을 방문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김영길  

그리고 그들과 동행한 해군 전속사진사는 부산항을 유일하게 파노라마 형식으로 촬영 항구 전체 모습을 3장의 사진에 담아 아르헨 해군이 부산항에 보이는 관심도를 반영했다. 아르헨티나 해군 전속사진사가 남긴 부산시내 전경사진은 부산항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하기도 했다.
  필자가 부산일보에 게재한 이 사진을 본 부산항 역사 전문가인 김영호 한국항만연구회 회장은 "그동안 학계에서는 부산항 목잔교가 1906년 12월 준공되었다는 설이 우세했으나 이 사진으로 부산항 역사를 새로 쓰게 됐다"면서 사진의 사료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또한 아르헨 해군이 100년 전에 부산항에 입항했던 사실 역시 부산 향토사 및 부산항사 연구자들 사이에도 알려지지 않고 있던 것으로서 부산항의 드러나지 않은 역사를 발굴해 낸 것으로 평가 받기도 했다. 그만큼 한국은 당시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않은 부산이나 동해, 독도 등의 역사기록이 부실했다는 반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