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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전투의 분수령(3) - 203고지를 점령하라

구름위 2013. 1. 6.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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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전투의 분수령 - 203고지를 점령하라

여순전투는 1904년 2월 8일, 차가운 겨울 바람 속에 불타올랐다.

 

일본 해군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연합함대가 여순항 안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함대를 향해 돌연 어뢰 공격을 감행했다. 밤의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폭발한 전투였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마다 늘 그래왔듯, 이번에도 선전포고 없는 갑작스러운 기습 공격이었다.

 

러시아 함대는 큰 손상을 입지는 않았다. 이튿날 일본 연합함대는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으나, 러시아측 해안 포대의 사격이 워낙 위력적이라 상당한 손상을 입고 포탄이 미치지 못하는 큰 바다로 물러갔다. 러시아 군대가 진치고 있던 여순 외곽의 남산을 일본 군대가 공격함으로써 육지에서도 첫 교전이 일어났다.

 

양측 모두 이미 각오하고 있던 전쟁이었다. 부동항을 원하는 러시아나, 중국 대륙 진출로를 확보해야 하는 일본이 여순에서 충돌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양국 군대의 증원군이 여순의 전장으로 계속 몰려들었다. 일본군 보병의 대부대가 여순반도에 상륙하여 여순과 북쪽으로 연결된 철도를 절단하여 외부 연결 통로를 폐쇄했다. 여순항도 봉쇄했다

러시아의 보병 역시 대련과 여순 사이에 두 개의 외곽 방어선을 구축하고 방어에 들어갔다. 양군의 한치 양보도 없는  대치 속에서 7월의 대석교 전투, 8월에 양국 해군이 여순항 밖에서 접전한 황해 전투 등 접전이 잇달았다. 여순에서 싸우고 있는 러시아군은 발틱함대가 올 때 까지 방어해 내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일본군으로서는 발틱함대가 오기전에 여순을 장악해야만 됐다.

 

외곽전도 치열했다. 8월 말 벌어진 요양(遼陽) 전투는 세계 전사(戰史)에서 ‘20세기의 대전투 중 최초의 전투’로 기록되는 처참한 싸움이었다. 일본군을 지휘한 것은 육군사령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장군으로, 사상자 2만 이상의 손실을 낸 격전 끝에 패전보다 별로 나을 것 없는 승전을 거두었다.

 

 그런 힘겨운 대치 상태를 깨뜨린 것이 유명한 여순항 서부지역의 ‘203고지 쟁탈전’이다. 여순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인 후석산 산정은 해발 203m의 고지. 여순항 전체가 손바닥처럼 내려다보이는 이 중요한 전략 지점엔 이미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9월 중순이 되자 일본군은 돌연 전략을 바꾸어 공격의 주력을 후석산정으로 돌려 고지 쟁탈전을 시작했다.



 12월 5일 일본군이 고지를 점령하기까지 피아간에 막대한 사상자가 나왔다. 11월 28일 하루 동안 일본군은 8000명의 사상자를 냈을 정도였다.

 하지만 고지를 점령한 일본군은 봉쇄된 항구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에 대해 정밀한 포격을 할 수 있었다.

불과 이틀 동안 계속된 포격으로 러시아의 전함과 순양함 50척이 모두 침몰했고, 여순은 일본의 손에 떨어졌다. 1905년 1월 2일에 러시아군의 항복 사자가 일본군 사령관 노기 장군에게 갔다.

 

여순 함락의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 열도는 온통 환희에 불타 올랐다. 국제적 파장도 엄청났다. 일본의 승전 가능성을 확신하게 되어 전쟁 경비 조달을 위한 일본 정부의 국채 모집이 매우 수월해진 반면, 러시아는 국제적인 위신의 추락은 물론 국내의 국민 통치에까지 막심한 그늘을 만들었기에 뒷날 레닌이 “여순의 항복은 차르 체제 항복의 서막이었다”고 토로했을 정도였다.

 

 승자가 패자보다 훨씬 더 막심한 상처를 입었던 이상한 전투, 여순 전투의 승리는 러일전쟁 전체의 승패를 갈랐다. 온 유럽을 떨게 한 저 위력적인 발트함대의 운명에도 막심한 영향을 미쳤다. 전투의 후일담도 유별나다.

 여순 전투를 지휘했던 일본군 사령관 노기 장군의 두 아들은 모두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엄청난 사상자를 낸 것도 두고두고 그의 경력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 귀국 후 노기는 메이지 천황에게 사죄의 자살을 하겠다고 청했다가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허락하지 않는다는 대꾸를 들었는데, 7년 뒤에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자 노기 부부는 천황의 장례식날 나란히 할복자살, 여순 전투의 기이한 마침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