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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전쟁 (2)- 제물포 해전

구름위 2013. 1. 6.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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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전쟁 - 제물포 해전

 러일전쟁의 공식적인 개시일은 일본이 아무런 선전포고 없이 여순항에 정박중이던 러시아 함대에게 포격을 가하던 1904년 2월 9일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2월 8일 우리나라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와 일본간의 치열한 해전이 벌어졌다. 
  당시  국제중립항이었지만 러시아 무장 군함이 정박해 있었다.  1894년 벌어졌던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동북아 패권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러시아는 일본의 대륙진출을 저지하기 위해서 인천항구를 점령하고 있었으며, 일본으로서는 러시아 함대를 반드시 격파해야지만 그 이후의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전쟁 개시전에 이미 1만 2000명의 병력을 마산포를 통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육지에 상륙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물론 대한제국 정부는 당시 일본을 제지할만한 군사적 외교적 능력이 없었던 상태였는데, 러시아 역시 일본의 이러한 행동을 방관한 이유는, 38도선을 경계로 양국간에 묵시적인 분할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본이 대규모로 해상작전을 전개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러시아는 28척이나 되는 태평양 함대의 주력을 여순항에서 빼 해상훈련을 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은 2월 4일 즉각적인 천황주재 어전회의를 소집, 對러전쟁을 결의하게 되었다. 2월 5일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역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석인 소식을 접하긴 하였지만 일본군의 구체적인 움직임을 전혀 포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일본군은  해군중장 도고제독은  6척의 전함과 14척의 순양함 35척의 어뢰정을 구성하여 서해상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첫째 목표는 팔미도에 정박중이던 러시아 순양함 두척, 러시아군은 전혀 무방비 상태로 압도적으로 많은 일본함대를 상대해야만 했다.

 
일본의 연합함대는 러시아의 두 순양함 바략 호와 카레이츠(Korietz ships )호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제물포 해전은 시작되었다.

 서해상 제물포항에 정박중이던 러시아의 순양함은 각각 바략 호와 '고려인'이란 뜻을 지닌 카레예츠 호였다. 카레예츠 함에 우리민족을 뜻하는 이름이 붙여진 것에 대해서는 아직 여러 의견이 있는데, 당시 제국주의였던 러시아 사정으로 볼 때 우리민족의 우수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마산포항을 개항한 것을 기념해서 붙인 이름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즉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을 기정사실화 함으로서, 그 상징적인 선전물로 카레예츠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2월 7일, 도고중장 휘하 우리우 소장은 5척의 순양함과 8척의 어뢰정으로 구성된 선단을 이끌고 제물포에 정박중이던 순양함 차오다오와 합류하였다.
 러시아 순양함 바략호와  카레예츠 호가  2열 종대로 항해하던 일본선단을 발견한 것은  2월 8일 오후 4시경 인천 인근의 팔미도 이미 늦었다. 더구나 2대 14의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때까지도 일본해군이 러시아 해군을 격침할 목적으로 진격해 오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카레이츠 호 선장 발라예프 중령은 통상적인 경외신호만을 보냈다. 하지만 카레예츠호가 일본군 진영으로 완전히 들어오자, 일본 주력함선인 아사마함이 진로를 막아섰다.

일본 함선에 포위당한 바략호'

카레이츠 함은 공해상으로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아사마함이 진로를 막음으로써 무산되었고, 두척이 어뢰정이 양옆에서 압박해 옴에 따라 다시 제물포 항으로 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시 대한제국은 중립국을 선포하였고, 제물포항은 러시아를 비롯한 영국 프랑스등의 여러나라의 군함이 정박하고 있는 국제 중립항이었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어느 국가이던 다른 국가 함대에 대해 선제공격할 권리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는 일본에 대해 선제 공격을 중단할 것을 요구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러시아 함대는 2월 8일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2월 9일이 되자 일본은 러시아 함대가 제물포항을 떠나지 않을경우 공격을 강행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영국, 프랑스 대사들은 일본군의 중립위반을 항의 하였지만, 이미 양국간의 적대관계 성립은 돌이킬 수 없었다.

 이제 러시아 함대에게는 두가지 선택이 남았다. 최대한 빨리 탈출하여 여순항에 주둔하고 있는 본대와 합류하느냐, 아니면 최후까지 싸우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루든예프 대령의 선택은 단호한 것이었다. 그는
 "일본함대와 교전하며 공해로 나가보겟다. 어떠한 경우에도 항복은 없다."
고 말하였다. 이미 14척의 군함에 포위당해 있는 제물포 항구를 단 두척의 군함으로 빠져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결단은 제물포 사실상 최후를 각오한 결정이었다.



  바략함에 탑승한 루든예프 중령은 소형 포함인 카라예츠함을 앞세워 팔미도 지역으로 나갔다. 일본 지휘관 우리우는 항복을 권고하였지만 루든예프 중령은 이를 거부하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오전 1904년 2월 9일11시 45분 양국은 엄청난 함포전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우리우가 타고 있었던 아사마함은 바략함보다 월등한 화력과 속력을 자랑하고 있었고, 여덟척의 어뢰정이 러시아함을 포위한체 집중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사실상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전투였다.

 그런데 바략함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과하고 정확한 함포사격으로 아사함의 사령탑을 적중, 심대한 타격을 입혀 아사마함 함장이 즉사하였다. 이어 다카치함과 나비바함도 바략함이 쏜 정밀한 함포사격으로 인하여 작전을 수행할 수 없을정도의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여전히 중과부족, 아사마함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음에도 우리우가 이끄는 사령부는 건제하였다. 더구다 일본 해군은 8대의 어뢰정으로 바략함에 집중 포화를 쏟아 붇고 있었고, 아사마함 의 함포는 여전이 건제하였다.

 집중포화로 인해 타격을 받은 바략호는 좌측으로 기울져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루든예프 중령도 함포사격으로 인해 중상을 입고 말았다. 
 이때 카레예츠함이 퇴로를 만들어 바략함은 간신히 제물포 항으로  귀환할 수 있었고, 일본군도 다국적 함대가 주둔하고 있는 제물포항을 집적 공격하기엔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전검결과 바략함의 전사자는 34명, 중상자는 91명이다. 한편 일본측에선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부정하였지만 후일 러시아측의 보고에 의하면 사망자 30명에  부상자 200여명으로 양국이 거의 대등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되어 있다.  아무튼 이날의 격렬한 해전으로 인해 바략함은 더이상 전투수행이 불가능해 졌고, 루든예프 중령은 바략함이 일본군의 전리품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폭파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폭파할 경우 정박중이던 다른나라 함선에 영향이 갈 것을 우려하여, 급수용판을 열어 수장을 결정하였다.  이 바략함은 그 후 일본이 인양하긴 하였지만, 러일전쟁이 끝난 후  러시아로 반환되었다.

 이제 남은것은 소형포함인 카라이츠호, 비록 카라이츠호가 입은 타격은 심하지 않았지만 그 배 한척으로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은 무의미 하였다,\ 따라서 루든예프 중령은 카라이츠호를 폭파시켜 버리고비무장 여객선인 순가리호역시 소각시킨 후 생존자들과 함께 적십자기를 단 타국의 배에 무사히 옮겨 탔다.

 이렇게 하여 제물포 전투는 일본 해군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은 전쟁이 끝날 때 까지 해전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아래 러시아 군의 송환을 허락하였다. 이렇게 러시아 군을 송환한 이유는, 제물포 해전에 참여하여 중상을 입었던 러시아군중 8명이 사망하고, 나머지 군사도 열악한 의료환경으로 인해  생명을 보장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아무리 일본이 전쟁에서 우세를 점하였다고 해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등 강대국들의 이따른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러시아 군과 서울주재 러시아 공사관원들은 프랑스함 파스칼 호를 타고  제물포항을 떠났으며, 영국함선과 프랑스함선도 제물포항을 떠났다. 따라서 제물포항은  일본군이 단독으로 점유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대한제국은 사실상 중립국의 지위를 잃어버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