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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과 일본해군의확장(1)|

구름위 2013. 1. 4.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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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의 강화조약이 성립하여 ,러시아,독일,프랑스에의한 삼국간섭에 일본이 굴복하여 요동반도의 영유를 포기한후인 1895년7월 해군대신 사이고 다데미치는 해군확장계획의 수정안을 각의에 제출했다.그 수정안은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메이지유신이후로 처음으로 근대해군의 창설에 착수한 일본에서 해군이 대형전함건조를 그 장래의 계획안에 받아들인것은 1895년이었다.모델이 된전함은 "예를 들면 영국이 새로 건조한 임플렉시블호 같은것은 배수량 1만1천8백톤 ,갑철의두께는 16인치내지 24인치"이다.
당시 세계는 12인치포 4문탑재,1만2천톤급의 중장갑의 전함시대로 들어서서,그때까지의 주력함이었던 1만톤이하의 전함은 완전히 구식화되었다.
1897년,영국의 빅토리아여왕의 즉위60주년 기념식전의 관함식에 전함50척을 포함한 함정173척이 스피트헤드에 집결했다고하는데 ,그 대부분이 구식함이었다.1894년 현재 건조중인것을 포함한 보유 전함의 45척 가운데 1만톤이상의 1등전함이 22척,129척의 순양함가운데 6천톤이상의 1등장갑순양함은 31척에 지나지않았다.
한척의 2등순양함 조차 갖지않은 당시의 일본의 경제력으로는 이 장래 계획안을 구체화하는 것이 불가능했다.해군이 전함건조계획을 처음으로 각의에 제출한것은 1890년9월 ,9천톤급의 2등전함 2척의 건조계획이었으나 재원의 전망이 서지를 않아서 그 현실화는 연기되었다.1892년 10월에 이르러 해군은 1만1천톤급의 1등전함4척 ,5,200톤급의 순양함4척의 이른바 44함대 계획을 정해서 그중 전함2척의 건조예산을 요구하고 12월개회의 제4의회에 그 예산안을 제출하였다.그러나 그 이듬해1월 제4의회는 예산안중에서 군함건조비를 삭감하였다.
2월10일 천황은 소칙을 내려 궁정비를 절약해서 6년간 매년 30만엔을 하사하고,문무관료도 그간의 봉급의1할을 헌납하여 군함 건조비에 쓰도록했다.이소칙의 압력에 굴복한의회는 군함건조비의 부활에 응하여 일본해군은 처음으로 세계에서 최신수준의 1등전함2척의 건조에 착수하였다.그러나 그것의 완성은 청일전쟁후의 일이었다.
청일전쟁의 최대성과는 청국으로부터의 거액의 배상금을 획득한것이었다.일본이 금화로 받은 전비배상금과 요동반도의 환부에따르는 배상금의 합계액은 37,836,127파운드로 일본의 엔으로 환산해서 365,529,067엔(운용이자를 포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