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우리 역사 이야기

러일 전쟁의 승패와 한국, 러시아, 일본이 얻은 대가

구름위 2013. 1. 6. 19:57
728x90

러일 전쟁의 승패와 한국, 러시아, 일본이 얻은 대가

 

 

 

러일전쟁은 세계 전쟁사에 있어서도 매우 특이한 전쟁이다.

 

대륙의 노제국과 아시아의 신생 제국이  만주와 한반도를 놓고 격렬하게 맞붙은

 

이 전쟁은 모든 전투가 제3국인 대한제국과 청나라 영토 안에서 벌어졌다.

 

자기 땅을 전장으로 내준 대한제국과 청나라 모두 이 전쟁에 대해 ‘국외중립’을

 

선언했다는 것도 희한한 일이다. 승전국이 차지한 전리품 역시 패전국의 영토가

 

아닌 제3국의 영토였다.

 

‘국외중립’을 선언했다지만, 사실상 국제 사회의 외톨이였던 대한제국과 청은 이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치열했던 전투였던 여순 전투. 하루 동안 일본군 사상자 8000명을 냈을 정도로 처참한 접전끝에 간신히 일본이 승리함으로서 러.일 전쟁의 승패가 갈라졌고,  일본 열도는 환희에 휩싸였다.

 

 

 

 

러.일 전쟁 풍자화

 

러시아군 사상자 : 27만명 (5만여명 사망)

 

일본군 사상자 : 27만명 (8만 6000명 사망)

 

 

 

엄청난 격전끝에 일본은 패전보다 별로 나을것이 없는 승전을 거두며 전쟁은

끝났다.

 

 

 

 

 

 

러일전쟁은 당시 전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던 대사건이었다. 일본이 유럽 중심의 세계 체제에 도전하는 국가로 성장할 것인가. 영국은 일본과의 동맹을 통해, 언제나 유럽의 잠재적 적국이던 러시아를 어떻게 제압할 것인가. 또 미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성장을 어디까지 지켜보고 지원할 것인가.

 

 

 

 

'이번 전쟁은 육해군 둘 다 성공할 가망이 없다. 처음 이겼을 때 러시아와 강화를

해야 한다. 오래 끌면 불리하다.' (이토 히로부미)

 

 

 

 

러시아는 국내 혁명의 발발로, 일본은 국력의 소진으로 피차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회담에 임했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주선 아래 강화조약이 열렸다. 강화에 응하는 러시아에게서는 도무지 패전국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일본은 승전국임을 내세웠으나 러시아는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포츠머스 회담의 핵심은 한국을 일본에 넘긴다는 것이었다. 조약은 제2조에서 명시적으로 “일본은 한국에 지배적인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남만주에 대한 권한을 일본에 대폭 양도했다.

 

포츠머스 조약에 앞서 이미 1905년 7월,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약을 통해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한국을 일본이 지배함을 승인한다”고 규정했다.

 

 

 

루스벨트 대통령(1858 ~ 1919)은 포츠머스 강화회담을 주선하고 중재하여

세계 평화를 이루었다고 1906년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전쟁의 영향

 

한국

 

 

러일전쟁의 결과는 세계 여러 나라에게는 전쟁의 종결이었지만, 한국에게는 험난한 운명의 시작을 의미했다. 일본군이 북상하는 길 일대에 사는 수많은 한국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의 군수품 운반에 동원되는 등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주민들의 피난으로 마을은 텅 비고 전쟁을 직접 치른 것 이상으로 황폐해졌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입은 피해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에 멈추지 않았다. 외교력도 군사력도 없이 자기 나라땅이 외국군대의 전장이 되었는데도 기껏해야 '국외중립'을 선언하며 우왕자좌왕하는 지도층의 모습이 서양 종군기자들의 보도를 통해 세계에 널리 알려지면서, 국제적 비웃음의 대상이 된 것이다. 주한 미국 공사로 활약했던 친한파 외교관 알렌은국가적 위기에 전혀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통치자 고종을 두고  “코리아는 국민들이 정부보다 낫다”고  탄식했다.

 

그토록 치명적인 치욕을 입고도 주변국의 도움은 커녕 국제사회에 의해 전리품 취급을 받으며 일본에 넘겨진 한국의 이미지는 두고두고 우리 민족의 운명에 가혹한 족쇄로 작용했다. 1910년의 한일병합, 1943년의 포츠담 선언, 거기서 비롯된 분단과 신탁통치 시비가 모두 1905년의 포츠머스 조약에 비극적 뿌리를 두고 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지구상 유일한 분단 국가로서 고통을 겪고 있는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러시아

 

 

일본의 승전은 온 유럽을 떨게 했던 위력적인 발트함대와 러시아의 국제적 위신의 추락은 물론 국내의 국민 통치에까지 막심한 그늘을 만들었다.  뒷날 레닌이 이렇게 토로했을 정도다.

 

 

“여순의 항복은 차르 체제 항복의 서막이었다” (레닌)

 

 

 

 

 

 

 

 

 

일본

 

 

러일 전쟁 승리의 대가가 한국과 남만주에 대한 세력 확보에 그친 것에 대한 일본내 여론은 비판적이었다. 국력의 대부분을 쏟고 막대한 인명을 희생시킨데 비해 결과가 터무니 없어 실망한 것이다. 특히 러시아로부터 배상금을 한 푼도 받을 수 없다는것에 일본 국민들은 분노했다. 이런 불만은 폭동으로 번져 계엄령이 선포될 정도였다.

 

1906년 일본은 전후 심각한 경제난과 기근에 시달렸다. 그러나 러일전쟁은 대재벌이 탄탄한 기반을 다지는데 크게 기여하여 일본은 이후 경제면에서 큰 발전을 이룬다.

 

 

 

 

무엇보다도 러일 전쟁으로 인해 대륙으로 향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은 확고한 실현의 첫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일본인에게 러일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방위전쟁으로 기억된다. 그 ‘기억’ 속에서 러일전쟁은 온 국민이 참여해 서구 열강에 승리를 거두고 20세기의 '문명국'으로 화려하게 등장한것이 부각되는 자부심 가득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