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우리 역사 이야기

러일전쟁과 조선의 식민지화(上)

구름위 2013. 1. 6.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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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가 이겼다! 아시아에 아주 잠시 꿈을
 

《청일 전쟁 후, 러시아는 중국 동북부(구 만주)로의 지배를 강화함과 동시에, 조선에도 진출하려 하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의 독점 지배를 노리고, 대 러시아 전쟁을 준비했다. 세계에서도 유수한 군사 대국을 이긴 일본. 그 승리는 동아시아에 무엇을 가져왔는가.》

 

“오랜만에 온 일본인데, 어디에 갈까”

내가 잘 아는 사람으로, 금년 77세가 되는 군일 출신의 한국인 이 씨가 불쑥 도쿄로 찾아 온 것은, 올해 6월의 일이었다. 일본에서 자라 전후에 한국군에 들어가, 1950년 발발한 한국 전쟁에서는 육군 소위로서 전선에서 싸웠다. 원래 나는 취재를 통해서 이 씨의 아들과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이 씨와도 친해졌다.

 

◆러일 전쟁

1904~05년,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과 중국 동북부(만주 지역)의 지배를 둘러싸고 벌인 전쟁으로,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 측 사망자는 약 8만 4천명으로、청일 전쟁 시(약 1만3천명)의 6•5배나 된다. 러시아 측은 약 5만 명이다.

청일 전쟁 후, 러시아는 조선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는 한편, 극동의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1898년 청으로부터 뤼순(), 다롄()을 조차하여 철도 부설을 진행하였다. 모스크바 대학의 아이라페트프 조교수에 의하면, 러시아 대외 정책의 기본은 대양 진출이라는 해양 전략으로, 황제 니코라이 2세는 이 전략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고 한다.

1900년, 러시아는 의화단과의 일전을 위해 청나라로 출병하여, 진압 후에도 만주에 눌러 앉았다. 일본은 러시아와 교섭을 하면서 전쟁을 준비하였다. 교섭은 결렬되었고, 1904년 2월, 일본군은 뤼순()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 개시하였고, 현재 한국의 인천에도 상륙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12월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뤼순항()이 내려다보이는 203 고지를 점령하였고, 다음 해 1월에는 뤼순()의 요새를 함락하였다. 일본의 연합 함대가 5월, 일본해(한국에서는 동해라고 부르고 있으나, 일본에서 일본해로 표기하므로 일본어 표기로 함)해전에서 발틱 함대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자, 미국의 테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강화를 알선하였다. 러시아 국내에서는 혁명 운동이 확산되어 혼란에 빠져있었고, 일본도 전쟁 비용 조달이 한계에 달하고 있던 때이어서 강화에 응했다.

 

가이드북을 읽은 이 씨가 고른 곳은,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물리치고 영웅이 된 도고 헤이하치로()를 모시는 도쿄() 하라주쿠(宿)의 도고() 신사였다. “일본의 전술은 많은 참고가 된다. 도고() 원수를 존경 한다”

경내에 장식된 일본해(한국에서는 동해라고 부르고 있으나, 일본에서 일본해로 표기하므로 일본어 표기로 함) 해전의 그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어 주자 만족하는 것 같았다.

 

전 외무성 직원으로 메이지 시대의 외교를 연구하고 있는 마쓰무라 마사요시() 러일 전쟁 연구회 회장은 “아시아의 신흥국이 유럽의 일대 강국에 도전한 전쟁으로, 국제적인 관심을 부르지 않을 수 없는 대 사건이었다”라고 설명한다. 외국 기자로부터 종군 취재를 하고 싶다는 문의가 쇄도했다고 한다.

1905년 5월, 도고()가 지휘하는 연합 함대는 대마도에서 가까운 일본해에서 발틱 함대와 싸워 대 승리를 거두었다.

 


뉴욕 타임즈는 ‘도고(), 러시아 함대를 격멸’(사진)이라고 1면 톱기사 취급으로 보도를 했으며, 그 뉴스는 1면의 거의 반 정도를 차지했다. 영국의 타임즈도 “발틱 함대, 사실상 전멸이라는 도쿄 발 정보에 전 세계가 놀랐다”라고 썼다.

승리에 흥분한 것은 일본인만이 아니었다.

후에 인도 초대의 수상이 되는 네루는 1930년대에 옥중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아시아의 일국인 일본의 승리는, 아시아의 모든 나라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나는 소년 시절, 그 일에 얼마나 감격했었던가를 너에게 자주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오오야마 사토시 () 번역,『아버지가 자식에게 들려주는 세계 역사』, 미스즈서방(みすず)

중국의 혁명가 쑨원()은, 일본의 승리가 아시아뿐만이 아니라 이집트와 터키, 아프가니스탄 등의 독립 운동에 자극을 준 것을 지적하고 있다. 구미 대국에 억압받는 유색 인종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흑인 지식인들도 ‘노란 사람들’의 활약을 기렸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어떤 한 인물을 떠올렸다. 프랑스로부터 베트남 독립 운동을 이끌고 있던 판 보이 쩌우()=사진은 초상화=(1867~1940)다. 쩌우는 러일 전쟁 소식을 들은 후, 1905년 봄, 비밀리에 출국하여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일본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한 것일까. 베트남을 방문했다.



‘동문동종()’인데… / 베트남 격렬한 분노

 

하노이의 사회과학원 역사 연구소에서 오랜 세월, 쩌우를 연구해 온 츄온 타우 교수(72)가 쩌우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응접실에서 맞이해 주었다.

“일본은 일찍이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진행시키고, 입헌주의를 도입해 대국 러시아를 이겼다. ‘동문동종()’인 일본의 모습은, 열강의 침략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 많은 베트남인들이 일본을 주시했습니다.” 동문이라는 것은 같은 한자 문화권, 동종이라는 것은 황색 인종을 의미한다.

 


일본에 도착한 쩌우는 요코하마에 망명 중이던 중국의 입헌 사상가 량치차오()=사진=를 방문했다. 량치차오는 청조 말기, 국정 개혁에 실패하여 일본으로 탈출했다. 쩌우는 베트남에서 량치차오의 저작을 읽고, 책 말미에 적혀 있던 주소만을 의지하여 방문했던 것이었다. 유생의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중국 고전을 즐겨 읽은 쩌우는 중국인, 일본인과 한자로 필담을 나눌 수가 있었다.

쩌우의 일본 방문 목적은, 프랑스와 싸우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무기와 병력 등의 원조를 얻는 것이었다. 쩌우는 량치차오의 소개로 당시 유력한 정치가였던 오쿠마 시게노부(), 이누카이 쓰요시() 등을 만난다. 그러나 오쿠마 등은 군사 원조가 일본과 프랑스 사이의 외교 문제가 된다는 등의 이유로 거절하고, 우선은 인재육성에 힘을 쓰도록 설득한다.

 

쩌우는 일본의 유지들에게 자금도 얻었으며 유학 처도 소개를 받아, 베트남의 젊은이를 부르는 돈즈() 운동을 전개하였다. 유학생은 한때 200명이나 되었지만, ‘안주의 땅’ 일본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는 않았다.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1907년 6월, 인도차이나와 조선의 지배를 사실상 서로 인정한 일불 협약을 맺는다. 프랑스 정부가 일본에 요구한 것은, 베트남 독립 운동의 단속이었다. “일본 정부는 프랑스 식민지 정권과 결탁해, 베트남 유학생을 비롯하여 판 보이 쩌우까지도 추방했다. 동유()운동은 분쇄되었다.” 하노이에서 구입한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쩌우는 1909년 3월, 4년 동안 살아온 일본에서 쫓겨났다. 도쿄의 외무성 외교 사료관에, 고무라 주타로(寿) 외상 앞으로 보내온 쩌우의 직필 편지가 남아있다. 쩌우는 외상이 “아시아의 황색 인종을 얕잡아 보고, 죄의 유무를 불문하고 쫓아내고 있다”며, 일본이 구미 열강과 손잡은 것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B4용지 크기의 종이를 반으로 접은 크기의 얇은 편지지에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하게 쓰여 진 편지를 손에 들자, 그의 격렬한 분노가 전해져 오는 듯하다.

 

일본을 배우는 청나라 학생 /단속 규칙으로 경계, 반감

 

당시, 일본에는 청나라에서 온 유학생이 더 많이 있었다. 청나라는 청일 전쟁 직후인 1896년에 유학생 파견을 시작하여 1905년에는 그 수가 약 1만 명에 달했다.

청 말기 유학생의 사정을 잘 아는 리시스오() 난카이()대학 교수를 만나러 중국 텐진()을 방문했다. 리 교수는 “청일 전쟁에서 왜 일본에게 졌는가. 그 이유를 알고자 일본으로의 유학과 시찰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구미에서 근대 사상과 제도를 처음부터 배우기보다는, 일본의 경험에서 배우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구미보다 가까워 비용도 적게 든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1905년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일본이 새로운 공부의 장으로 여겨진 것도 큰 이유였다고 설명했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청나라에서는 ‘전제’ 러시아에 대한 ‘입헌’ 일본의 승리라는 견해가 대세를 이루며, 일본에 대한 관심이 한층 높아졌다. 중국 출신으로 야마나시 ()학원대학의 슝타윈() 교수는 “일본의 승리는 중국 국민의 눈을 뜨게 하여, 입헌제 도입 움직임을 앞당겼다”고 보고 있다. 1906년, 청나라 정부는 뒤늦게나마 입헌정치의 실시를 약속했다.

 


그러던 중, 유학생에게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일본 정부는 1905년 11월, ‘청나라 유학생 단속 규칙’을 공포했다. 유학생들이 혁명 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두려워 한 청의 정부가 일본 정부에 단속을 의뢰했던 것이다. 유학생들은 이 조치에 대해, 수업을 보이콧하며 반발하였다. 당시, 아사히신문은 이를 ‘청국인의 방종 비열’이라 비판하였고, 그것을 읽은 유학생이자 혁명파 활동가였던 첸티엔화()=사진=는 항의하여 도쿄 바다에 투신자살했다.

“아시아의 강국인 일본에서 배우긴 했지만, 조선과 중국 동북부의 지배를 강화하는 일본에 대한 경계와 반감. 유학생의 마음은 모순으로 고민스러웠다.”고 이 교수는 설명한다.

지금, 일본의 헌법 개정 움직임이나 역사 문제 등, 중국 측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문제도 있다. 이 교수의 제자인 대학원생 리시스와() 씨(25)는 이렇게 덧붙였다.

“일본에게 배우고자 하는 마음과 경계감. 일본을 보는 눈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습니다.”

 

중국 ‘피해를 준 침략’ / 일본 ‘식민지에 꿈을’

 

한편, 현재 중국에서는 러일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격전의 땅인 뤼순()을 찾았다.

뤼순항()은 지금도 중국 해군의 중요한 거점으로, 일부 관광지를 제외하고는 외국인이 자유롭게 거닐 수 없다. “뤼순(), 다롄()은 러일 쟁탈전의 장소였다. 일본의 승리는 중국 침략으로 향하는 발판이 되었다.” 뤼순()의 국방 교육 기지 “러일 전쟁 진열관”에서 본 중국어판 비디오다.

203 고지 기슭의 기념품 가게에서 일하는 한신유앙() 씨(82)는, 어린 시절 뤼순()에서 일본어를 배웠다고 한다. 유창한 일본어로 전쟁의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나는 “중국에 있어서 러일 전쟁이란” 질문을 했다. “피해를 준 침략전쟁입니다. 일본이 러시아를 내쫓아 중국을 도왔다는 사람도 있지만, 틀린 생각입니다. 일본은 전쟁이 끝나고도 눌러 앉아 뤼순()을 지배해 버렸습니다. 이윽고, 중국 전 국토로 쳐들어 왔습니다.” 온화하게 설득하는 듯 한 말솜씨였다.

 

그럼, 일본에서는 어떨까.

종전기념일인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의 유취관()을 방문했다. 러일 전쟁 코너에서는 군함 행진곡이 크게 울려 퍼지며, 일본의 승리를 전하는 영상이 흐르고,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동양의 소국이었던 일본이 대국 러시아에 이겼을 때, 러시아와 유럽의 지배하에 있던 식민지 사람들에게도 큰 꿈과 희망을 품게 하였던 것이었다.” 자랑스러워하는 내레이션이었다.

그것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반도와 중국 등 일본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꿈과 희망’이 퇴색하는 스피드가 빠르지는 않았던가.

오에 시노부() 이바라키()대학 명예교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전쟁 직후,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 하여, 아시아인들의 희망은 실망으로 바뀌었다. 일본의 승리는 희망도 주었지만, 곧바로 실망도 안겨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쿠라이 이즈미 )

 

◆포츠머스 강화 조약


1905년 9월,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일본의 고무라 주타로(寿) 전권(외상)과 러시아의 위테 전권(전 재정부 장관) 등이 조인했다. ①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도 감독권을 인정한다. ②러시아가 청나라로부터 취득한 뤼순(), 다롄()의 조차권 양도, 창춘() 이남의 철도를 일본에 양도한다. ③러시아는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을 일본에 양도한다. ④연해주와 캄차카에서 일본의 어업권을 인정한다, 는 등의 내용이다. 거액의 배상금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일본 민중은, 강화 내용에 반발하여 도쿄에서 대 폭동을 일으켰다.

◆제 0차 세계대전

최근에 역사학자들이 러일 전쟁을 “제 0차 세계대전”으로 봐야 하지 않느냐는 견해를 제기하고 있다.

전쟁 종결로부터 100주년이 되는 2005년, 게이오 대학에서 국제회의가 열렸고, 이 전쟁을 “제 0차 세계대전”으로서 재평가하는 견해가 대두되었다. 회의 관계자인 요코테 신지() 게이오 대학 교수에 따르면, 제 1차 세계대전(1914~18)의 중요한 특징들을 러일 전쟁이 많은 점들에서 먼저 보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하나는, 러일 전쟁이 당시 국제 환경의 영향을 받아 구미 열강을 끌어들여 전개되었다는 점이다=그림 참조. 일본은 영국과, 러시아는 프랑스와 각각 동맹을 맺고 있었다. 예를 들면, 영국은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의 지배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어서, 일본과 동맹을 맺는 것이 유리했다. 미국은 러시아의 중국 동북부 점령을 반대하고 있던 관계로, 일본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하였다.

또 하나의 특징은 ‘총력전’이다. 무기가 발달하고 전쟁 규모가 확대되어, 모든 국력을 전쟁 수행에 쏟아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총력전’이라는 사고는 제 1차 대전 중에 확산되었지만, 러일 전쟁에서 이미 그러한 경향이 현저했다는 것이다. 또한, 모스크바 대학의 올레그 아이라페트프 조교수는 “러일 전쟁은 육지와 바다의 총력전이었다.”라고 한다. 육군과 해군의 효과적인 연계 작전을 펼치지 못하면 전쟁을 이길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이 국제화됨에 따라, 외국 여론을 아군에 유리하게 하는 ‘선전전’도 중요해 졌다. 일본은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한 귀족원 의원인 가네코 겐타로()를 미국에 파견해, 일본에 유리한 여론을 만들고자, 강연과 기자 회견을 통해 러일 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였다. 러시아도 일본이 선전포고 전에 러시아 군함을 공격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것 등을 구미 여론에 호소했다.

 

◆연표 / 당시의 동아시아

1895 조선의 명성황후, 일본군 등에 의해 살해당함

1896 조선 국왕 고종, 러시아 공사관으로 약 1년간 피난 : 아관파천()

1897 조선국,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개칭

1898 러시아, 청나라로부터 대련, 뤼순의 조차권과 남만주에서의 철도 부설권을 획득

1900 북경에서 의화단 사건(의화단의 난)이 일어남

1902 영일 동맹 조인

1904 러일 전쟁이 시작됨. 제 1차 한일 협약으로, 대한제국은 일본이 추천한 재정 및 외교 고문을 받아들임.

1905 포츠머스 강화 조약 조인. 제 2차 한일 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 보호국으로 만듦.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

1907 제 3차 한일 협약으로, 조선의 내정도 지배하에 놓임. 이 때의 각서로 군대가 해산 당함

1910 “한국 합방에 관한 조약”을 체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