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마오로 불리우는 장칭은 마오쩌둥의 네 번째 아내이다.
그녀는 1937년에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후 몸을 피신하고 있던 옌안의 한 군사 캠프에서
21살 연상의 마오쩌둥을 만나 그를 동지이자 연인으로 사랑하였다.
중국 공산당의 본부로 쓰이던 외딴 동굴은 마오가 이끌던 반란군의 활동 무대이기도 했는데,
당시 마오는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과 일시적인 동맹을 맺고 있었다.
마오는 배우출신의 그녀에게 매료되었는데, 그녀도 마오를 존경하며 따랐다.
한편, 마오에게는 그의 열정적인 동지인 세 번째 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1934년부터 시작된 역사적인 대장정을 2년동안 함께 하였다.
그녀는 나약해진 동지들을 화나게 하면서까지 지루한 행군을 무사히 잘 견뎌내며
마오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 주었지만, 매력적인 장칭에게 쫒겨나게 된다.
마오는 아내를 쫒아낸 장칭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시에 나오는 표현을 인용해서 ‘남빛 강물’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반란군은 임신 상태였던 그녀와 마오의 결혼을 승낙하는 조건으로
그녀에게 정치 활동에 일체 참여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 후 두 사람은 남편과 아내로서 한 번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내연의 처로 전락했고, 이때부터 그녀는 복수의 칼을 갈았다.
장칭은 어머니에게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를 보면서 혼란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15세에 집을 떠난 그녀는 산둥성에서 연기 수업을 시작하며 인생에 불을 붙였다.
그 후 영화계로 진출한 그녀는 영화계에 작은 파장을 불러올 정도로 연기력을 인정 받았다.
육감적이면서도 남자를 유혹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던 그녀는
자유분방한 좌파 세력들과 화려한 상하이 생활을 하면서 한층 더 매력을 발산하게 됐다.
그녀의 삶은 남편과 애인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등 점차 희극적 요소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일본군의 침략으로 어쩔 수 없이 상하이를 떠나야했다.
아니 자신이 저지르고 다니던 향락적 소문이 더 큰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장칭은 마오쩌둥과 결혼 이후 정치에 나서지 않겠다는 약속을 25년 동안 지켜왔지만,
배우로 활동한 경력 때문에 문화행사에 관여하면서 마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드디어 1963년, 마오는 그녀에게 중국문화가 이념적으로 더 정확하게
노선을 지향할 수 있도록 개혁하라는 자유로운 지도권을 부여했다.
그녀는 중국의 전통극과 오페라, 그리고 발레의 낭만주의적 사고를 철폐함으로써
새로운 예술양식을 창조해냈다. 그리고 갈아두었던 칼을 빼냈다.
그녀의 지도 아래 깜짝 놀랄만큼 새로운 예술이 등장했는데,
그것은 제복을 입은 발레리나가 총을 들고 있는 노동자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몇 년뒤 그녀는 무대 뒤에서 걸어 나와 금기를 깨고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문화혁명의 지도적 위치를 이용해 마오의 홍위병까지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복수심에 불탔던 그녀는 10여년 동안 사상적 불순분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당연히 그녀의 나이 든 정적들을 박해하는데 제일 먼저 이용되었다.
특히, 마오와의 결혼을 반대했던 이들은 단호히 숙청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들과 함께 악명높은 4인방을 이끌었다.
그리고 문화혁명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수 만명에 달하는 무고한 인민들이 고통을 겪었다.
고문과 추방, 감금과 함께 심지어는 굶겨 죽이는 일까지 서슴치 않았다.
무려 10년 동안 홍위병들은 그녀의 비호 아래 중국을 호령했으며
중국의 지식인뿐만 아니라 개혁세력, 그리고 의심스러운 사람까지 가차없이 숙청되었다.
이것은 마오의 목표였던 농촌개혁, 지방분권, 젊은피 수혈이라는 3대 원칙을 달성시켜 주었지만,
이 시기는 중국 현대사에 있어 가장 처참한 순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마오가 사망한 지 한달도 못되어 창백한 얼굴의 장칭은 국가의 적으로 체포되었다.
그녀는 마오가 죽어가고 있는 동안 자신의 비밀동맹을 이용해 정부를 전복하고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반대 세력을 불법으로 처형한 죄로 기소되었다.
또한 그녀의 4인방 역시 3만 5천명이 넘는 희생자들을 살육하고
70만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죄로 고발되었다.
오만한 66세의 미망인은 노기를 드러내며 빈정거리는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추호도 인정하지 않은채 절대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반역자이며 파시스트다!”라고 고함을 치면서
새로 지명된 당 지도자 중 최고의 권력자를 비난했다.
재판은 교묘하게 조작되었고 전 과정이 자세하게 뉴스에 보도되었다.
재판을 하는 내내 철저히 자신의 죄를 부정했던 장칭은 자신의 죄가
그녀의 온 인생을 바쳐 헌신했던 한 남자의 정책과 무관하지 않음을 강조했다.
그녀는 “나는 마오 주석의 충견이었다”라고 주장했으며
“그가 짖으라고 하면 나는 짖었다.”라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녀는 사형선고에서 종신형으로 감형되는 순간에도 자제력을 잃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사형을 언도한 적들을 주눅 들게 만들기 충분했으며,
사형 대신 종신형을 선고하여 만족감을 얻으려던 그들의 속셈은 예상을 빗나갔다.
수 년동안 계속된 투옥과 단식투쟁, 암으로 인한 투병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린 장칭은 마침내 감방 침대의 기둥에 목을 매달아 생을 마쳤다.
온갖 음모를 통해 공산당 내에서 출세가도를 달렸던 장칭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마침내 함께 음모를 꾸몄던 바로 그 동지들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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