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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 (11) - 화약시대와 성의 변화

구름위 2013. 1. 3.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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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 (11) - 화약의 시대와 성의 변화

 

화약무기를 가장 먼저 사용한 지역은 중국으로 알려져있다. 10세기에 중국은 화약을 터뜨려 화살을 날려보내는 로켓탄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1295년에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마법의 가루를 가져오면서 유럽이 화약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 이전부터 유럽은 화약을 실험하고 있었다. 1200년 경에 수도사가 스페인의 이슬람 화학자에게서 화약에 대해 배웠고, 그가 쓴 Libre Igneum (불의 책)을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가 찾아내 영국에 전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마그누스에게서 화약에 대해 배운 영국의 로저 베이컨(Roger Bacon)은 1249년에 모든 실험기록을 암호화해서 숨겼다. 그러나 유럽 곳곳에서 이미 화약에 대한 연구와 실험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304년 스털링 성에 갱도를 파고 처음으로 화약을 사용했고 같은 해에 브레친(Brechin) 전투에서 일종의 지뢰로 화약을 사용했다.

 

대포의 발전 과정은 상당히 불분명하다. 그리스 불을 동력으로 로켓화살을 쏘려는 실험이 수 백년 동안 계속되었지만 그리스 불은 충분한 폭발력이 없었다. 1300년 정도부터 유럽 최초의 대포가 발사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일반 공성무기와 대포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혼동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헨리 3세는 "대포와 다른 무기를 동원해 도시를 쉴 새 없이 포격했다"라고 말했는데, 그 때는 베이컨이 화약실험을 한지 불과 20년도 지나지 않은 때라 대포 자체가 등장할 수 없는 시기였다. 아마도 공성무기를 그렇게 표현했거나 현대어로 번역하면서 실수한 것이 틀림없다.

1326년 플로랑스가 주문해 메쯔(Metz) 공성전에 사용한 대포가 기록상으로는 최초의 대포로 보인다. 1340년에는 3문의 '천둥 튜브'의 비용을 프랑스 무기상에게 지불했다는 분명한 기록이 남아있다. 

 

초기 대포는 주물을 다루는 종 공장에서 만들어졌고 종 장인은 금속을 잘 다룬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포수로 고용되었다. 초기 대포의 품질이 워낙 조악했기 때문에 훈련된 포수가 아니라 금속 지식을 가진 장인이 필요했을 것이다. 초기 대포가 적에게 공포감을 안겨준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운이 좋아야 적을 맞출 정도로 부정확했다. 전용 포대가 없어서 탁자, 널판지, 흙더미 위에 놓고 쐈기 때문에 발사순간에 크게 흔들렸고 탄은 목표물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 

화약도 대포만큼이나 문제였다. 화약원료는 각각 따로 보관하다가 발사직전에야 혼합했기 때문에 발사속도는 고사하고 심지어 혼합하는 과정에 폭발하기도 했다. 초기의 화약 공식대로 실험해보면 25% 정도가 불발될 정도였다.

 

그림 설명: 모든 그림은 IE로 보셔야 설명과 제대로 연결되고, 클릭하면 상당히 커집니다. 윗 그림은 초기 대포의 모습입니다. 종 공장에서 종을 약간 변형시킨 주조형태였고 신뢰성이나 정확도가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대포의 모습이 보이는 약간 더 발전된 형태이지만 여전히 포대없이 탁자에 묶어서 사용했기 때문에 제대로 겨냥할 수가 없었습니다.

 

포수는 아군 병사들의 환영을 받지 못하고 가장 천한 존재로 취급을 받았다. 그럴만 한 것이, 대포는 전장에 끔찍한 소음, 매캐한 연기, 숨막히는 유황냄새를 아군에게 뿌려댔기 때문이다. 심지어 포수를 악마와 함께 살아가는 주술사와 동급으로 쳤다.

대포가 범용적으로 사용되면서, 포수는 일반죄수가 맡게 되었다. 감옥에서 끌고 온 죄수에게 대포를 다루는 간단한 훈련을 시킨 후에 사슬로 대포에 묶어 놓고 전투가 끝난 다음에 풀어줬다. 불안정한 대포는 언제라도 터질 수 있었고, 적이 포대를 점령했을 경우 사슬에 묶인 포수를 포로로 데려갈 수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죽이는 것이 보통이어서 포수는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매우 위험한 보직이었다.

포로가 된다고 해도 마찬가지 신세였다. 1439년 볼로네제군은 포수를 대거 동원했는데, 승리한 베네치아 기사들은 저급한 무기로 자신들을 괴롭힌 볼로네제 포수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기사들은 포로로 잡힌 볼로네제군에서 포수들만 골라서 처형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영국은 대포를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이 없었다. 에드워드 2세는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6문의 대포를 사용했다. 보병의 측면에 배치해서 지원사격 정도로만 사용했는데 그 당시의 성능을 생각하면 당연한 배치였다. 당시 기록을 보면 대포는 '대단한 소음을 내고 작은 돌을 퍼부어 프랑스군의 말을 놀라게 만들었다'라고 하는데 포도탄을 쐈을 리는 없고 전장의 과장된 기록으로 보인다.

 

그림 설명: 소형 대포는 이렇게 초기 화승총으로도 진화합니다. 발사속도나 신뢰성은 말할 필요도 없었겠죠? 그리고 이 정도의 화약연기는 아군이 싫어할 만도 하겠습니다.

 

 

그림 설명: 중세시대 대표적인 화승총병의 모습입니다.

 

1300년대 후반에는 성벽이나 요새도시를 상대로 대포가 동원되기 시작했지만 크기나 기동력이 워낙 떨어져서 전투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에나 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뉘른베르크(Nurenbrug)가 보유한 공성용 대포는 2.7톤이나 나가 말 12마리가 간신히 끌 수 있었다. 포대는 훨씬 더 크고 무거워서 16마리가 끌었고 화약과 기타 장비는 9대의 마차가 동원되었다. 이 대포가 전장에 나가려면 최소한 말 46마리 이상이 필요했다.

 

이렇게 거추장스러운 대포는 야전에서 큰 도움이 안되었지만 성을 상대로는 전투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거대한 공성용 대포가 쏘아대는 포탄(돌)은 성벽을 부수며 성안으로 떨어지는 돌 파편이 2차 피해를, 성밖으로 떨어지는 파편은 해자를 메우는 2차 효과를 주곤 했다. 그리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며 파성추를 끌고 성문에 다가서지 않고도 성문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1377년 브루고뉴의 대포가 오드루이크(Odruik) 성벽에 큰 구멍을 냈다는 첫 번째 기록이 있으며, 15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세력확장을 꿈꾸는 군주는 화약무기를 창고에 쌓아두기 시작했고, 대포의 집중포화로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한 영국대포 제작자는 1382~1388년 6년 동안 73문의 대포를 영국왕에게 공급했다. 심지어 교황의 군대조차 대포를 배치할 정도였다.

 

헨리 5세가 1415년에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그는 기존의 공성무기와 함께 대포를 가져갔고 65명의 전문포수도 동반했다.

그는 아르플뢰르(Harfleur)를 포위한 후에 10,000개의 돌을 쏴서 거의 모든 건물을 부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대포를 가장 먼저 받아들였던 영국답게 초대형 공성포(Monster Culvern)와 구포(Siege Mortar)를 투입했다는 것이다.

 

그림 설명: 구포 이미지를 찾다보니 이상하게 째리는 인간이 나오는 사진이군요. 초기 구포와 그나마 비슷해서 옮겨옵니다. 구포의 위력은 '라스트 모히칸'의 공성전에서 공포스럽게 나오죠.

 

(우에스기 왈: 영국이 대포를 가장 먼저 받아들여 개발을 한 덕분에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이길 수 있지 않았나 합니다. 영국 대포 발달사에 대한 원서도 가지고 있고, '대포, 범선, 제국'이라는 국내도서도 가지고 있는데... 읽어야 할 책은 많고 게으름은 여전합니다.

스페인 무적함대를 이긴 원동력은 스페인의 육박전식 구태의연한 전술, 영국해군의 뛰어난 역량도 있지만 원거리에서 치명타를 날릴 수 있었던 캘버린 포가 한 몫을 했습니다.

혹시 틀리면 지적해주세요. 워낙 오래 전에 읽었던 내용이라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대포 제작 방식이 발전하고 전문 공장에서 제작하면서 이런 대형 포가 등장할 수 있었다. 대포를 종 공장에서 주조(형틀에 부어 통째로 만드는 것)로 만들 때에는 파손되기 쉬웠고 초대형 대포를 만들 수 없었는데, 전문 공장에서 단조(두들기며 연결해 만드는 것)로 만들면서 크기와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대포의 몸통을 Barrel(어원은 맥주통)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1449년 브루고뉴의 필립이 만든 몬즈메그(Mons Meg)는 포대를 빼고도 7톤의 무게였고 매드 마고(Mad Margot)는 16톤의 무게로 590kg의 돌을 쐈다.

 

그림 설명: 에딘버러 성에 전시되어있는 몬즈메그 포입니다. 이 민폐인간은 당연히 제가 아닙니다. 보통 포신 안에 들어가 있는 사진이 많은 것을 보면 막지 않는 모양입니다.

 

1470년, 루이 11세의 공성포를 움직이려면 말 41마리가 필요했다고 한다. 이 정도의 크기와 무게를 생각하면 장전 후 발사까지 걸리는 시간이 상당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몬즈메그는 믿을 수 없는 속도인 6.5분에 한 발을 발사할 수 있었다.  

 

 

15세기가 되면서 금속 주조기술이 발전하면서 대포도 단조에서 합금을 사용한 주조로 다시 되돌아간다. 훨씬 가벼워진 포신, 그리고 함께 발전한 바퀴달린 포대 덕분에 기동력, 사거리와 고도, 발사속도, 신뢰성 모두 크게 향상되어 야전에서도 대포의 비중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 특히 작은 대포는 전진하는 부대와 함께 전진하며 지원사격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림 설명: 역사재현 축제이기 때문에 대포가 시대에 맞지 않는 발전된 형태가 나왔습니다만, 바퀴를 달아 기동력이 생기고 고도를 조절할 수 있는 장치로 정확성이 크게 높아지면서 야전에도 대포가 전면 배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군의 대포 사용에 자극을 받은 프랑스도 대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대포를 동원하면서 백년이나 이어진 전쟁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샤를(Charles) 8세는 영국군이 지배하던 노르망디 지역의 성들을 공략하는데 대포를 동원했고 1년 만에 40개의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만약 기존의 공성무기를 사용했다면 최소한 20년은 걸렸을 것이다.

 

그림 설명: 중세시대 대형 공성포의 최종 진화형인 러시아의 짜르 대포입니다. 1586년에 제작되어 6m에 달하는 크기를 자랑하며 포대의 아름다운 문양이 특징입니다.

 

1453년에 백년전쟁을 끝낸 그는 대포로 이탈리아의 나폴리를 공략했다. 프랑스군의 대포와 포수의 위력은 대단해서 원정로에 있던 성들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다른 전쟁에서 7년 동안이나 성문을 열지 않았던 산 지오바니(San Giovanni) 요새는 겨우 8시간 만에 항복해왔다.

 

유럽을 화약시대로 안내해주었던 이슬람은 어느 정도로 발전했을까? 예상과 달리, 이슬람은 유럽에 비해 대포 사용이 많이 뒤처져있었다. 투르크가 14세기 말에 대포를 처음으로 노획하자, 그 성능에 너무 당황한 영주가 다른 영주들이 대포에 대해 알지 못하도록 바다에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전세계 모든 지역에서 대포가 등장했듯이, 이슬람도 대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1453년, 마흐메트(Mehmet) 술탄은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69문의 초대형 공성포와 258,000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그림 설명: 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직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다르단넬레스(Dardanelles)포입니다. 5m의 길이, 17톤의 무게로 300kg의 돌을 1.6km나 날려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루에 겨우 15발만 발사할 수 있었다고 하는군요.

이 대포는 독특하게도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있다가 소켓을 맞추는 방식으로 조립되었습니다. 지금은 영국 넬슨 요새의 왕립 무기창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역사를 끝낸 그는 로도스 섬을 공격해 단 며칠 만에 강력한 로도스 기사단의 성을 흙먼지로 만들었다. 

 

(우에스기 왈: 화약시대를 맞아 전쟁의 양상은 성을 중심으로한 지리한 공성전에서 야전을 중심으로한 기동전으로 바뀌게 됩니다. 14세기 이전에 지어진 성은 주로 리모델링으로 대포에 대응합니다. 활을 쏘는 총안(Arrow Loop)는 포구 위치에 맞춰 넓혀졌고 성벽이나 탑에도 포대 위치가 마련되었으며 성벽이나 성문에도 다가오는 적을 향해 수평발사할 수 있는 포구가 만들어졌습니다. 성문 앞에는 흙토대를 쌓아 올려 직격판을 맞지 않게 보강했다. 1429년 오를레앙(Orleans)의 두 번째 공성전에서는, 성벽 밖에 포대를 파고 포를 배치한 후에 성 주변지역을 평평하게 다져서 공격해오는 영국군이 대포에 그대로 노출되게 만들었습니다.

15세기 전후로 지어진 성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높은 성벽과 탑은 대포에 오히려 취약하기 때문에 그림의 네덜란드 성처럼 낮지만 훨씬 두터운 별 모양의 성이 유행합니다. 성벽이 낮아 보병의 사다리 공격에 약점을 가지기 때문에 흙이나 돌

을 다진 얕은 언덕 위에 성을 지었습니다. 얕지만 경사가 가파르기 때문에 언덕을 오르는 보병은 수비군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됩니다.

어차피 성의 역할이 크게 위축되었기 때문에 성벽이 없는 주거용, 그리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성으로 바뀌게 됩니다.

 

옆의 그림은 기존 성을 대포에 맞게 리모델링한 모습입니다. 화살을 쏘는 총구 아래는 포구가 배치될 수 있도록 넓혔고 기존의 총구로는 화살을 쏠 수 있게 했습니다.)

 

공성전에서 구포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 '라스트 모히칸'의 한 장면입니다. 중간까지는 러브스토리이니까 중간까지 제끼고 소리 높여서 프랑스군의 구포 공격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SCZDC_HM-dY&feature=relmfu

 

 

수비군의 액션 장면은 무술영화급으로 좀 우스운데, 공성전 묘사는 아주 잘 되어 있는 영화 1612입니다. 시간이 좀 길지만 소리 높여서 여유있게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무기와 복장 묘사는 감탄하게 만듭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lpLcTKdFF5E&feature=rel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