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세유럽

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 (8) - 성벽 허물기

구름위 2013. 1. 3.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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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 (8) - 성벽 허물기

 

대형 공성무기덕분에 성벽 일부와 수비탑의 수비군을 몰아내고 안전하게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프랑스군은 항복할 생각이 전혀 없지만 그래도 영국군에게는 이제 더 많은 선택이 주어졌다. 이제 영국군은 어떤 공성무기로 어디를 어떻게 공격할까? 벽을 넘을 것인가? 벽 아래를 통과할 것인가? 벽을 뚫을 것인가? 

공성무기로 성벽을 어느 정도 흔들어놨기 때문에 이제는 성벽을 직접 공격해 뚫어볼 차례다. 영국군은 프랑스군을 몰아낸 성벽과 탑 아래에 구멍을 내기로 결정했다. 

 

파성추(Ramming)

 

특수부대가 문을 부수고 들어갈 때에 사용하는 쇠망치는 작은 성문이나 장애물을 부술 때에나 도움이 되고 성벽을 부수는데에는 성벽에 충격을 가하는 파성추가 사용된다.파성추에는 돌을 쪼는 정처럼 앞에 뾰족한 철을 씌우고 한 두 사람이 흔들며 성벽의 돌을 한개씩 부수는 파성추(Bore)와, 큰 통나무를 매달아 수십명이 앞뒤로 흔들며 보다 넓은 범위에 충격을 주는 파성추(Ram)가 있다.

파성추가 가장 확실하고 직접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곳은 성문이지만 성문은 가장 강력하고 많은 수비군이 몰려있기 때문에, 성벽 중 가장 취약해 보이는 곳을 골라내 공격을 한다. 우리의 이야기에서는, 영국군이 이미 공성무기로 일부 성벽의 방벽(누벽, Rampart)을 부수고 프랑스군을 몰아냈기 때문에, 그 부분이 파성추로 공격하기 가장 알맞은 목표물이 된다.

 

그림 설명: 성 안의 지휘관이 공성전에 이골이 난 사람이라면 별의 별 방법을 다 동원할 것입니다. 이런 장면을 보면 당나라의 엄청난 병력이 고구려의 성 하나를 넘지 못했던 것이 이해가 됩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커지고 IE에서 보셔야 설명과 제대로 연결됩니다.

그렇다고 영국군이 승리를 눈앞에 두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성벽은 여전히 강력한 장애물이고, 수비군의 방해없이 파성추로 성벽을 부순다고 해도 프랑스군이 포위되기 전에 성벽을 제대로 보수했다면 가시적인 성과를 얻기까지 몇 주가 걸릴 수도 있는 지리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림 설명: 역사기록이라고 해서 무조건 믿어서는 안되는 한 예입니다. 이런 파성추도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성벽에 거의 효과가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사용되었을리 없다는 것이 후대의 평가입니다.

 

프랑스군도 영국군이 성벽을 허무는데 지켜보고만 있을 리 없다. 프랑스군은 작업을 교체하기 위해 오가는 인부들에게 화살을 쏟아붓고, 파성추가 부딪치는 곳에 통나무, 가죽, 두꺼운 천 등을 내려뜨려 충격을 흡수하거나 심지어 밧줄로 파성추 머리를 낚아채기도 한다.

14세기에 들어서면서 파성추는 서서히 모습을 감추게 되었고 지하터널을 통한, 시간과 인력이 더 많이 들어가지만 효과는 확실한 전술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그림 설명: 성문을 두들기고 있는 영국군입니다. 이 정도의 파성추로는, 보수가 안된 성문이나 운좋게 부숴질 뿐, 거의 대부분의 성문에는 며칠을 두들겨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운이 좋아서 성문이 흔들린다고 해도 수비군이 안에서 버팀목 등으로 보강을 하기 때문에 수비군의 준비상태를 시험하는 정도로만 사용되었습니다.

 

돌파내기와 갱도(Sapping/Mining)

공격측에서 시간에 상관없이 공성전을 지속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성을 함락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땅굴을 파는 것이다. 어떤 성이고 가장 취약한 부분은 성벽 아래의 기초부분이다. 바위 산 위에 성을 짓지 않았다면 성벽 중 일부는 땅굴에 약점을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많은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땅굴은 성공하면 가장 결정적인 효과를 낸다.

땅굴은 멀리서 수비군에게 들키지 않고 안전하게 파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오래 걸리는 작업이다. 성 부근에 마을이나 집들이 흩어져 있다면 입구를 만들기 안성맞춤이다. 인부들은 세심하게 버팀목과 널판지로 천정과 벽을 받치면서 작업을 해야 갱도가 무너지지 않을 뿐 아니라 땅이 움푹 꺼져서 수비군에게 땅굴의 정확한 진로를 알려주는 실수도 막을 수 있다.

 

땅굴 통로가 성벽 바로 아래까지 연결되면, 그 지점에 작은 방 크기의 공간을 만든다. 이 공간은 특별히 동물기름과 송진으로 적신 버팀목을 세우고 나무가지, 덤불, 헝겊, 기름, 돼지시체 등 인화성이 높은 것으로 가득채운다. 인부들이 모두 피신한 후에 부싯돌통에 불을 붙이면 버팀목이 불타고 돼지시체가 부풀어올라 터지면서 성벽이 아래로 주저 앉으며 무너지거나 큰 균열이 생기게 된다.

성벽에 큰 구멍이 나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공격군이 연기와 돌덩이를 뚫고 들어가 수비군과 백병전을 벌이는데 폭발과 화재의 충격으로 그 일대의 수비군은 대부분 죽거나 다쳤기 때문에 공격군은 큰 어려움없이 성 안으로 진입할 수 있다.

 

그림 설명: 중세의 생화학무기인 생석회를 뿌리는 장면입니다. 눈이나 호흡기에 들어가면 치명적이고 피부에 닿아도 화상을 입는 수비군에게는 좋은 방어수단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프루이사르(Froissart)의 연대기 중 헤올르(Reole) 공성전 (1345) 기록을 보자.


백작은 마을에 들어서자 공성무기를 성에 가능한 한 붙이고 밤낮으로 성벽을 두들겼지만, 큰 돌로 만들어진 성벽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 성은 오래 전에 사라센인이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라센인은 요즘과 비교해도 훨씬 튼튼한 성을 지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공성무기가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을 본 백작은 공격을 중지하고 인부들을 불러모아 벽 아래로 땅굴을 파기로 했다. 물론 이 작업은 금방되는 작업이 아니었고, 11주가 지났는데도 성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인부들이 성벽 아래까지 땅굴을 파들어가는데 성공했지만 암벽 위에 세워진 본채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그러나 성의 외벽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고, 본채에서 충분히 버틸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수비군은 전투를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휴전협상을 하기 시작했다. 협상은 신사적으로 진행되어 수비군의 제의가 받아들여졌고 성을 내준 수비군은 무사히 떠날 수 있었다. 보통은 이렇게 평화적으로 끝나지 않고 대학살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땅굴인부들의 작업은 힘들고 고되지만, 기사는 물론이고 궁수와 다른 공병들에게서 멸시를 당했다. 울타리 아래에 구멍을 파는 개와 같이 명예롭지 않은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야기에서, 이미 성벽 아래를 장악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영국군 인부들은 방어막의 보호를 받으며 성벽을 허무는 충각기와 함께 작업을 한다. 이들처럼 지상에서는 일하는 사람을 공병(Sapper)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망치, 정, 쇠지렛대를 가지고 성벽에서 돌을 하나씩 걷어내는 작업을 한다.


그림 설명: 가장 많이 사용된 성벽 무너뜨리는 전술입니다. 1번은 우리 이야기에서 영국군이 사용하는 노골적인 성벽 파내기이고, 2번은 폭파시켜 성벽을 무너뜨리기, 3번은 성벽은 그대로 두고 아예 안으로 진입하기, 4번은 수비군의 대응땅굴파기입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수비군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대형 공성무기도 아니고 무수한 궁병이 아니라 마치 개미처럼 성벽에 달라붙은 땅굴인부와 공병들이다. 공성무기의 충격은 성벽을 보수하며 점차 익숙해져가고 궁병의 공격은 틀어박혀 있으면 되지만 인부들의 작업은 마땅히 대응할 방법이 거의 없다.

헤로도투스는 기원전 5세기에 황동방패를 땅에 대고 진동을 잡아내 성 안에서 대응땅굴로 페르시아 인부들을 죽였다고 기록했다. 중세유럽에서는 식기에 물을 담아 성벽 부근에 놓고 잔 물결이 이는 것을 보고 땅굴을 잡아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적의 땅굴이 이미 성벽 안에 들어왔거나 아주 가까이 왔을 경우에나 도움이 되었다. 만약 적이 땅굴을 통해 침입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다행이지만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미 늦은 것이다.

이 경우 수비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성벽 안에 다시 또 하나의 벽을 급히 쌓거나 대응땅굴을 파서 적을 죽이고 돌덩이로 막는 것뿐이다. 적의 땅굴이 발견되면 한 사람이 겨우 움직일 수 있는 밀실에서 가장 원초적인 백병전이 벌어지고 땅굴은 먼저 시체로 메워지게 된다.

 

1546-47년에 있었던 세인트 앤드류스(Andrews) 공성전에서는 공격군이 150m 정도 밖에서 땅굴을 파기시작하자 수비군은 대응땅굴을 파 성벽에 오기도 전에 요격을 한 기록이 있다. 그런데 수비군이 얼마나 정확하게 예측을 했던지, 공격군의 땅굴이 예정 진로를 벗어났는데도 진로와 깊이 모두 거의 오차가 없었다고 한다.

 

그림 설명: 물을 채운 해자도 땅굴을 막지 못합니다. 땅굴이나 성벽 파내기가 예상되는 경우 수비군은 바로 안쪽에 또 하나의 성벽을 급하게 쌓아올려야 합니다.  


땅굴은 성공하기 보다 실패할 확률이 높았지만 수비군에게 주는 공포감은 대단해서 작업이 눈에 보이기도 전에 성을 무너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14세기, 프랑스 Cormicy 공성전에서 Burghersh 공이 땅굴작업을 시작하면서 엉뚱하게도 수비군의 지휘관을 초대한 적이 있었다. 땅굴작업을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질린 프랑스군은 즉시 휴전제의를 했고 Burghersh는 땅굴을 많이 파는 수고도 하지 않고 온전한 성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우리 이야기로 돌아가서, 영국군 지휘관은 성을 포위한 순간부터 인부를 동원해 성벽을 허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군이 성 주변에 포위진지를 만든 후에 바로 성벽을 향한 갱도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공성무기도 갱도가 만들어지는 방향의 수비군을 몰아내는데 집중했다.

이제 갱도가 완성되었고 성벽 아래의 공간에는 폭발물이 채워졌지만 의외로 성벽이 튼튼하다는 것이 발견되었고, 갱도를 무너뜨려 성벽을 허물더라도 영국군이 한꺼번에 진입할 정도의 틈은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지휘관은 일단 갱도는 그대로 두고 공성탑이라는 다른 공성전술을 사용해보기로 한다.

 

공성전의 땅굴과 돌파내기를 보여주는 영화 두 편입니다.

먼저 Cold Mountain에서 땅굴이 200% 효과를 내는 바람에 전황이 거꾸로 반전되는 황당한 영상입니다. 소리높여서 그리고 시간여유를 가지고 전체 영상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북군 번사이드 장군의 9군단은 땅굴 폭파로 남군의 1차 참호선을 뚫는데 성공했지만 너무 큰 구덩이가 파져서 사다리 등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밀려 들어간 15,000명이 마치 놀이공원의 사격연습 타겟처럼 서있다가 무려 3,800명이나 죽은 후에 후퇴했습니다. 이 황당한 작전실패로 번사이드 장군은 해임되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72vRMJUEf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