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세유럽

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 (9) - 성벽 넘기

구름위 2013. 1. 3.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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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 (9) - 성벽 넘기


우리 이야기의 영국군 지휘관은 갱도로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겠지만 일시에 난입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과 시간여유가 생길 것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갱도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성벽 위로도 공격을 하기로 했다. 사다리로 성의 이곳 저곳을 동시에 공격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성전의 최후수단인 공성탑도 동원하기로 했다. 만약 수비군이 성벽 위로 다가서는 영국군에게 모든 병력을 집중시킨다면 갱도 지점은 완전히 무방비상태로 비게 되고 영국군은 성 안으로 난입해 충분한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영국군 공병들이 지난 일주일 동안 공성탑을 만들고 있었다. 

 

중세 공성전에서 다른 모든 수단이 실패를 하면, 마지막으로 동원하는 공성무기가 공성탑이었다. 1147년 리스본에서 만들어진 공성탑은 25m가 넘었고, 십자군이 티레나 아크레에서 만든 공성탑은 12~20m 정도였다. 

Gesta Francorum은 1099년 예루살렘 공성전에 동원한 공성탑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림 설명: 큰 공성탑은 다양한 기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꼭대기 층은 보통 궁수가 수비군을 내려다보며 엄호를 했고 성벽 위나 수평으로 내려진 다리로 중장갑 보병이 난입합니다. 겉의 가죽은 그리스 불을 막기 위해 삭힌 오줌으로 절였다는 것은 지난 이야기에서 설명했었죠?

 

우리 지휘관은 공성무기로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지에 들어갈 수 있게 준비했다. 우리는 2개의 목재 공성탑과 수 많은 공성무기를 만들었다. 뷔용(Bouillon)의 고프리(Godfrey)는 장치가 달린 공성탑을 만들었고 레몽(Raymond)도 공성탑을 따로 만들었다. 공성탑에 쓰인 목재는 상당히 멀리서 가져와야만 했다. 

도시 안에 있던 사라센인은 공성탑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성벽을 보강했고 밤새 성탑을 높였다. 우리는 성벽 어디가 취약한지를 먼저 알아낸 후, 밤에 공성탑을 동쪽 성벽 가져가서 새벽에 세우고 3일 동안 작업을 했다. 


이 기록을 보면  엄청난 자금과 인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왕이나 귀족쯤 되어야 공성탑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공성탑은 성벽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이가 되어야 큰 도움이 되는데, 14세기에 들어서면서 성벽의 높이가 크게 높아져서 공성탑으로는 성벽을 넘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워윅(Warwick) 성의 경우, 기(Guy) 성탑은 40m 정도이고, 케사르(Caesar) 성탑은 더 높아서 45m에 가까웠다. 


그림 설명: 영국 워윅 성의 모습입니다. 다른 블로거의 사진을 인용했습니다. 오른쪽이 케사르 성탑으로 보이는데, 성벽 기초부분이 경사져있어서 사다리나 공성탑 공격은 불가능해보입니다. 워윅성에 대한 자세한 사진은 http://blog.daum.net/ssysokong/8900235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지고 IE에서 설명과 제대로 연결됩니다. 


그 이전까지는 공성탑은 땅굴과 함께 가장 위협적인 공성무기였고 14세기 이후에도 작은 성에 대해서는 흔하게 사용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1224년 베드포드(Bedford) 공성전에서는 헨리 3세의 공성탑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는지, 수비군은 잠잘 때조차도 갑옷을 벗지 못했다고 한다. 


공성탑 제작 기술자가 따로 없는 경우에는 목재를 잘 다루는 선원이 공성탑 제작을 지휘하기도 했다 1차 십자군 원정 당시 니케아(Nicaea)를 공략하던 십자군은 선원들에게 공성무기 제작을 맡겼고 이들은 나무를 베는 것부터 공성탑 제작까지 목수와 맞먹는 속도를 보였다고 한다. 

1224년 에스토니아 도르파트(Dorpat) 공성전에 만들어진 탑은 성벽만큼이나 큰 나무를 베어 사용했기 때문에 8일 만에 제작되었다. 그리고 아라곤의 제임스 1세도 일주일만에 공성탑을 완성했었고 1453년 투르크군은 아침이 되자 공성탑을 끌고나와 수비군을 경악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단 하루 만에 공성탑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고, 아마도 여러 개로 나누어서 제작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조립했기 때문에 하루 만에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어쨌든 공성탑 제작까지 한 달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던 수비군이 얼마나 놀랐을 지는 상상이 간다. 

이렇게 부품으로 나누었다가 조립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었고 아크레를 공략하던 리차드 1세처럼 아예 다른 곳에서 제작하고 운반하는 경우도 많았다. 

에드워드 1세는 보쓰웰(Bothwell)로 공성탑을 옮겨온 후에 30대의 수레에 실어 스털링(Stirling)으로 운반했었다. 그는 1287년 웰시(Welsh)를 공략하면서 60마리의 황소와 450명의 보병을 동원해 공성탑을 옮기기도 했다. 백년전쟁에서  오를래앙(Orleans) 공성전에 사용된 공성탑은 26대의 수레로 옮겨졌고 프랑스의 루이 왕은 1242년에 원정을 떠나는데 1,600대의 수레가 동원되었고 그 길이가 4km 넘게 늘어졌다고 한다. 

3차 십자군원정에서 아크레를 공략하던 리차드 1세는 키프러스에서 여러 개의 공성탑을 제작한 후에 옮겨왔는데, 무슬림들은 3개의 공성탑이 모두 18m가 넘었고 워낙 방어기능이 좋아서 불붙이지도 못했다. 무슬림의 반격이 실패하자, 십자군은 탑 꼭대기에서 춤을 추고  그들을 비웃어댔다. 그러나 그리스 불에는 탑의 방어기능도 소용이 없어서 3개가 모두 불탔고 십자군은 지옥을 경험했다고 무슬림의 기록은 전하고 있다.


공성전에 대포가 사용되면서 공성탑은 그 가치를 잃게 되었다. 공성무기의 자리를 대포가 대신한 것도 큰 이유이지만 성을 향해 아주 천천히 접근하는 거대한 공성탑은 너무나도 쉬운 목표물이었다. 

1565년 말타 공성전이 좋은 예다. 맡타 수비군은 성벽의 벽돌을 파내고 투르크군에게 보이는 가장 바깥쪽 벽돌만 그대로 두었다가 공성탑이 다가오자 그 구멍으로 대포를 밀어넣고 공성탑을 향해 사슬탄(Chain Shot)을 쏘았다. 보통은 함선의 돛을 자르는데 사용되는 사슬탄은 공성탑을 정확하게 맞추고 땅에 쓰러뜨렸다. 


그림 설명: 포탄을 반으로 갈라 사슬로 연결시킨 사슬탄입니다. 회오리치면서 날아가기 때문에 점으로 타격하는 일반포탄과 달리 상당히 넓은 범위를 타격하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근거리 목표물에만 사용할 수 있는 분명한 단점이 있었습니다. 

수비군은 공성탑 외에도 성문으로 난입하는 적을 향해 발사했고 직선으로 늘어설 수 밖에 없는 공격군에게는 치명적인 무기였습니다.  


공성탑도 진화를 거듭해서 성벽으로 건너가는 다리뿐만 아니라 투석기와 대형석궁을 장착하기도 했다. 십자군의 공성탑은 다양한 투석기를 무장한 것으로 유명했다. 공성탑의 아래 부분도 파성추를 매달고 성벽을 공격하기도 했고, 성벽 아래를 파내는 인부들의 엄호시설로 공성탑을 사용하기도 했다. 

공성탑을 가장 어이없는 용도로 사용한 사람은 사자왕 리처드로, 그는 성지원정 도중 메시나에서 공성탑 안에서 저녁식사를 했다고 한다. 


공성탑은 당시로서는 큰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실수도 많았고 사고도 많았다. 오도(Odo) 1세가 Montboyau (프랑스 발음 좀 알려주세요)를 포위하면서 거대한 공성탑을 동원했지만 어설프게 만들어진 탓에 무너지면서 안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오도가 낙담한 나머지 포위를 풀자, 시민들이 몰려나와 쓰러진 공성탑을 불태웠다. 

발트해 지역의 소드브라더스(Swordbrothers)가 사용한 공성탑은 거센 북풍에 그냥 쓰러져버렸고 니케아 공성탑 하나는 수비군이 던진 돌이 쌓여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서 병사들이 모두 죽는 일도 있었다. 


공성탑이 아무리 튼튼하게 제작되어도 성벽까지 가져가는 것은 또 다른 프로젝트였다. 성벽까지 가려면 도랑이나 해자를 건너야 하고 길을 굴곡이 없이 평평하게 다져서 공성탑의 무게를 견디게 만들어야 했다. 

1150년, 앙주(Anjou)의 조프리(Geoffrey) 5세는 소무르(Saumur) 근처 축제에 나온 사람들을 모두 강제징집해서 도랑 메우는 노동을 시켰다. 십자군 원정 당시 레몽과 다른 귀족은 지역 주민들이 도랑에 돌을 3개 던져넣을 때마다 1 페니를 지급했고 아크레에서는 도랑을 메우다 다쳐 죽는 사람의 시체까지도 도랑에 던져 넣었다. 

오히려 공성탑을 제작하는 일보다 공성탑을 제대로 성벽에 붙이는 일이 더 어렵고 결정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거만한 기사들까지도 공성탑 운반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라온(Laon)에서는 휴 카펫(Hugh Capet)이 솜씨좋은 장인을 고용해서 공성탑을 제작했지만, 성으로 이르는 경사로를 깎을 방법이 없어서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다. 다미에타(Damietta)에서는 십자군이 공성탑의 자리를 잘못 잡아서 가파른 경사에서 공성탑을 포기하기도 했다. 

경사가 없어도 땅이 너무 물러서 공성탑이 박히는 경우도 많았다. 칼라일(Carlisle) 공성전에서는 습지대를 건너기 위해 공성탑을 밧줄로 묶고 끌어냈다. 아라곤의 제임스는 공성탑 이동로에 미리 널판지로 도로를 만들었고 널판지 위를 기름칠해서 움직였지만, 중간에 땅이 꺼지면서 공성탑은 주저앉고 말았다. 수비군은 투석기로 장난삼아 맞추기 연습을 했고 공성탑은100 개가 넘는 돌을 두들겨 맞고도  간신히 제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공성탑은 공격군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1081년 디라키움(Dyrrachium)과 1169년 다미에타 전투에서는 수비군도 성벽 안에 공성탑을 지어 다가오는 공격군의 공성탑을 상대한 적이 있었다. 디라키움 전투에서는 공격군의 공성탑이 다리를 내리고 성벽 위로 뛰어내리려고 하자 수비군의 공성탑에서 장대를 끼워넣어 다리가 작동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1111년, 티레를 수비하던 무슬림군은 크레인이 장착된 공성탑을 성안에 세우고 십자군의 공성탑을 크레인으로 잡아챈 적도 있었다.

공성탑이 노리는 지점을 미리 알 수 있다면, 그 부근에 함정을 만들고 땅을 살짝 덮어서 공성탑이 주저앉아 꼼짝도 못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림 설명: 우리 시나리오에서 영국군이 무너진 성벽과 성문을 통해 난입하고 있습니다. 배경에서 설명했듯이 프랑스 정예병은 모두 프랑스왕의 부대에 차출되었기 때문에 수비군은 약간의 정규군과 징집병이 대부분입니다. 이렇게 성벽을 내주게 되면 중장갑의 영국군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이야기로 돌아가서, 영국군은 이제 마지막 총공격을 앞두고 있다. 땅굴을 무너뜨릴 준비도 되었고

사다리와 공성탑을 동원해 성벽에 오를 준비도 되었다. 세 방향으로 공격을 분산시키기에는 병력이 충

분하지 않지만 무너진 성벽으로 난입할 부대에 훨씬 많은 병력을 주었다.

프랑스 지휘관은 공성탑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고 이제 곧 성벽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리라

는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영국군이 공성탑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다고 예상하고 대부분의 병력을 공성탑에 집중시키기로 했다.


프랑스군의 기대와 달리, 엄청난 굉음이 울리면서 성벽 일부가 연기와 먼지 구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바로 그 순간에 영국군의 주력병력이 성안으로 난입하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던 얼마 안되는 프랑스군도 성벽 잔해를 헤치며 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보려고 했지만 영국군 기사와 중장갑보병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대부분의 수비군은 공성탑을 요격하는데 배치되어 있었고 마침 영국군이 무너뜨린 지역이 가장 취약한 부분이었다.

프랑스군은 무질서하게 본채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저항을 계속했지만 이미 사기는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본채만으로도 충분히 저항할 수 있는 훌륭한 방어시설이었지만 식량과 무기창고를 영국군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제 프랑스군이 전멸할 것인지 아니면 항복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림 설명: 시나리오의 무대가 되는 성입니다. 영국군의 땅굴 공격으로 성벽이 무너져야 하는데 실제 성이 좀 무너져 있습니다.


 

 

 

 

공성탑을 이동하는데 얼마나 많은 수고가 들어가는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 마사다의 한 장면입니다. 유대인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로마군이 투입되지만 언덕 위의 성을 공략하기 어려웠고 결국 경사진 도로를 만들어서 공성탑으로 성을 함락시킵니다.

마사다의 유대인은 로마군에게 잡혀 모욕을 당하기 보다 저항의 뜻으로 모두 자결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OZjr-Q38Evw&feature=related

 

어쩌다 보니 로마군 특집이 되는군요. 1966년 영화라 상당히 어설프지만 공성전을 잘 보여주니까 여유를 가지고 보시기 바랍니다. 루마니아가 공산주의국가일 때에 만들어진 것이라 사람은 엄청나게 동원했군요. 공성탑에 대해 아주 잘 보여주고 있기는 한데... 그 당시 성벽으로는 너무 엄청난 규모이군요 ㅡ.ㅡ

유투브 동영상이 가끔 버벅대는데 볼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꼭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루마니아 지방에 살던 트라키아와 로마 간에 벌어진 87~88년 전투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S6mF9ldKCds&feature=rel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