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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 (10) - 항복받아내기

구름위 2013. 1. 3.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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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 (10) - 항복 받아내기

지난 이야기에서, 프랑스군은 성벽을 무너뜨리고 난입한 영국군에게 식량과 무기창고를 내주고 본채에 틀어박혀 최후의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영국군은 중장갑 보병을 앞세워 마지막 저항을 무너뜨릴 수도 있고, 그저 포위망만 좁힌 채 프랑스군이 굶주려 스스로 문을 열 때를 기다릴 수도 있다. 프랑스 왕의 본대는 구원군을 보내지 않기 때문에 본채 함락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영국군 지휘관은 궁지에 몰린 적을 일부러 공격하느라 불필요한 희생을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적이 스스로 문을 열고 항복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영국군은 탑을 만들거나, 궁수를 세우거나, 땅을 팔 필요없이 그저 자리만 지키면 그만이었다.

지휘관은 오히려 이 마지막 순간을 더 조심할 필요가 있다. 승리를 눈 앞에 둔 부하와 용병들이 규율을 지키지 않고 문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군 진영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규율

"병사들이 포도주로 이미 충분히 취했음에도 술통을 마구 부숴 포도주로 목욕을 했다. 그리고는 마을을 약탈하기 시작하더니 침구, 옷 등을 가져가는 것만으로 부족해 여자들을 괴롭혔다..."

장미전쟁 중 루들로(Ludlaw, 영국의 한 지방)에서 있었던 랭커스터 군대의 만행을 기록한 내용 중 일부다.

 

그림 설명: 모든 전쟁에서 그랬듯이, 술, 창녀, 도박은 항상 따라다녔습니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황에서 급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지고 IE 환경에서 설명과 제대로 연결됩니다.

 

원정을 떠나기 전에 엄격한 규율을 공표하고 전투 중에도 지키게 하는데, 보통은 교회, 여성, 아이들을 보호하는 내용이며 일반 시민과 개인재산을 보호하고 징발하는 식량은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포로를 잘 대우하며 전리품을 공평하게 나눈다는 내용이 포함되는 경우도 많다.

탈영, 명령불복종, 비겁한 행위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처벌이 내려지며 상황이 악화될 경우 더 강한 처벌이 내려진다. 그렇지만 중세까지만 해도 지휘관이 모르는 척 눈감아주는 경우가 많았다. 병사들도 급여가 지급되지 않으면 전투에 나서지 않거나, 형벌의 감형을 요구하거나 처우를 개선해 줄 것을 단체로 요구하곤 했다.

군대를 한 지방에서 모병한 경우, 형벌을 내리지 않고 벌금을 매기거나 군복무를 해제하곤 했다. 군복무 해제가 반가울 것 같지만, 해제되는 순간 급여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적의 영토 안에서 해제되기라도 한다면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헨리 5세가 1417년에 프랑스로 원정을 떠날 때에, 부대 안에서 창녀가 한 명이라도 발견되면 그 부대의 모든 병사의 팔을 부러뜨리겠다는 매우 엄격한 규율을 공표하기도 했고 다른 지휘관은 병사들에게 도박을 하거나 창녀촌을 방문하면 저주를 내리겠다고 했다. 

부대의 규율을 위해 엄격하게 금지한 지휘관도 있었지만 보통은 원정 준비물에 창녀가 포함되는 일도 많았다. 심지어 기사, 귀족, 영주까지도 창녀를 즐겨 이용했다. 로마, 나폴리, 베니스에는 무려 11,000명의 창녀가 있었고 몇몇 포주는 고위층까지 진출했다고 한다. 

 

공성전에서의 여성의 역할

무기와 갑옷이 여성에게도 지급되었다는 기록이 많다. 1472년 프랑스, 보베(Beauvais) 공성전의 경우, 브루고뉴 군은 25일 간 포위를 하며 성벽의 1/4를 무너뜨리고 난입하려고 시도했지만 정규군, 일반 남성과 여성의 필사적인 저항에 부딪쳐 도시를 점령하지 못했다. 잔 다르크의 영향을 받은 쟌 하세트(Jeanne Hachette Laisne)은 도끼로 무장한 여자들을 이끌고 적을 몰아냈을 뿐만 아니라 브루고뉴 깃발까지 빼앗았고 결국 브루고뉴 군이 포위망을 풀고 철수하게 만들었다.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어낸 여성들은 원하는 옷을 마음대로 입을 수 있는 권리와 남성과 축제에서 남자 앞에서 행진할 수 있는 명예를 얻었다.  

 

그림 설명: 브루고뉴 군을 몰아내고 있는 쟌 하세트입니다. 이 그림은 상당히 여성스럽게 묘사되었지만, 다른 그림과 동상은 도끼를 휘두르는 전사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일본 전국시대에도 여성이 활약했다는 기록이 많은데, 프랑스도 여성이 활약한 기록이 많습니다.

 

1447년 독일의 수스트(Soest)가 공격을 받자, 무장한 남성들이 성벽으로 달려가고 여성들은 물을 끓이고 생석회를 날랐다. 적이 사다리로 성벽을 오르려고 했지만 너무 짧아 성벽을 넘지 못하자, 끓인 물과 송진을 부어 사다리에 매달려 있는 많은 병사를 떨어뜨렸다는 기록이 있다. 

 

원정에는 상당히 많은 여성이 동원되기도 했는데, 후방지원을 하거나 남성과 함께 전장에서 칼을 휘두르기도 했다. 부르고뉴 진영의 여성 4,000명은 라인 강 전선을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382년에는 플랑드르 전투에서 플레밍스 깃발을 지키던 여성 병사가 전사했고 1396년에는 온 몸을 푸른 색으로 치장한 프레시아(Fresia) 여병사가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전투에 져서 후퇴를 할 때에 갑옷을 입은 여성들이 많이 죽임을 당했는데, 일부러 가슴을 드러내서 여성임을 밝히고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여성이 전투에서 귀중한 전력이기도 했지만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1474년 독일 노이스(Neuss) 공성전에서는, 하녀를 둘러싸고 영국 용병들 간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브루고뉴 공작이 달려가 싸움을 말리자 그들이 공작에게 화살을 쏴댔고 브루고뉴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나서 내전이 벌어질 뻔한 경우도 있었다. 

중세 군대에 얼마나 많은 여성, 소년과 인부가 포함되었는지에 대해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많은 경우에는 병사들만큼의 숫자였던 것은 분명하다. 


숙소

보통은 천으로 된 텐트를 설치하지만, 샤를(Charles the Bold)공과 헨리 8세는 미리 목재주택을 만들어서 원정길에 가지고 다녔다. 샤를은 자신의 목재주택 양쪽을 거대한 텐트로 연결하고 식사를 하거나 회의를 했다. 

블로뉴(Boulogne)에서의 필립공작(Philip the Good) 텐트는 이동식 궁전으로 식당, 침실은 물론이고 작은 예배당까지 있었다. 

반면에 헨리 8세의 군대는 설치와 제거에 많은 시간이 걸리거나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텐트는 금지시켰었다. 

1476년 1월, 브루고뉴군은 '600개의 작은 텐트와 파빌리온, 100개의 정사각 파빌리온, 2개의 목재주택, 130개의 정사각 tentelletes(무슨 용어인지...), 50개의 다른 파빌리온, 6개의 큰 텐트와 6개의 정사각 파빌리온, 그리고 한 채의 목재주택'을 지급했다고 하는데, 이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텐트와 야영장비는 매우 중요한 원정장비였고 총 원정비용의 20%까지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림 설명: 보급창고 텐트입니다. 마굿간 텐트도 있었는데, 유랑 서커스단이 공연하기 위해 펼쳤던 텐트의 크기를 상상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겁니다. 몽고군은 칸이 머물 거대한 텐트를 아예 통째로 들고다니기도 했습니다.

 

에드워드 3세가 칼레(Calais) 공성전에 돌입했을 때의 기록을 보자. 

'영국왕이 칼레 성문 앞에 도착하자 마자, 그는 공성전 준비에 돌입했다. 마을, 강, 다리 곳곳에 진짜 집을 짓고 마치 몇 십년 동안 살 것처럼 제대로 된 길도 냈다. 칼레가 성문을 열 때까지 얼마나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들던 상관하지 않고 겨울과 여름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가 새로 만든 마을은 군대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생산했는데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시장이 열렸다. 

잡화상인, 푸줏간, 의류상점, 빵가게 등이 생겼고 왕은 병력과 화약을 아낄 생각으로 어떤 공격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했다. 그는 시간이 얼마가 걸리던 적을 굶어죽게 만들겠다고 말했다.'


식량배급

어느 정도의 식량을 얼마나 자주 배급했는 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며 심지어 병사들이 자신의 식량을 알아서 조달하거나 급여에서 식대를 빼는 일도 있었다. 

중세시대의 보급과 회계체계는 상당히 부실해서 약간의 문제만 발생해도 완전히 와해되었다. 패배, 늘어진 공성전, 아군부대의 행방불명 등의 일이 벌어지면 배급이 부실해질 수 밖에 없고 병이 발생해 많은 병사들이 희생되었다. 굶주린 병사들은 자국 영토 내에서도 문제를 일으켰고 국가관이 희박한 용병의 심각한 약탈을 일삼았다. 

굶주린 부대의 행로에 있는 운나쁜 마을은 그 해 겨울을 나지 못하고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오래 전에 설명했듯이 수비군은 적이 도착하기 전에 모든 것을 불태우기 때문에 식량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1097년 10월, 십자군이 안티오크(Antioch)를 포위했을 때의 일이다. 안티오크는 이슬람이 자랑하는 요새도시로 식량과 수비군이 부족하지 않았고 셀주크의 야미르(지방영주) 야기 시얀이 직접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공략하기가 쉽지 않았다. 공성전이 9개월이나 계속되고 겨울이 다가오자 십자군은 탈영이 심심치 않게 벌어질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많은 병사가 굶주려 죽거나 약해진 체력으로 병으로 죽어나갔다. 십자군의 포위망은 심각할 정도로 얇아졌고 기록에 따르면 '썩은 고기와 풀입, 혓바닥을 찌르는 씨앗, 말린 말 가죽 심지어 비료를 뒤져 곡식 알갱이를 먹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식량을 조달할 수 있을 때에도 가격이 너무 높았다. '포도주는 아예 구입이 불가능한 가격이었고, 혀가 없는 말 머리는 2~3실링, 염소 내

 

장은 5실링, 암탉은 15실링, 달걀은 2실링, 호두 한 알은 1페니까지 치솟았다...' 황폐한 지역에서 식량을 구할 수 없었던 십자군은 사라센 시체를 먹는 일까지 벌어졌고 한 때 70,000마리까지 있었던 말과 당나귀는 5개월 만에 2,000마리 밖에 남지 않았다. 유례없는 폭우까지 쏟아져 진영은 진창으로 변했고 텐트는 썩어 무너져내렸다. 

 

(우에스기 왈: 안티오크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었던 거성으로 이슬람에서는 보기 드문 방어력을 가진 성이었습니다. 전초전에서 패한 야기 시얀은 주변을 초토화시켰고 식량을 구하지 못한 십자군은 7명 중 한 명이 죽거나 탈영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당시 이슬람의 정치상황도 분열된 상태여서 십자군을 일부 지역을 약탈하는 서방의 군대 정도로만 생각하다가 뒤늦게 구원군을 보내는데, 다마스커스에서 보낸 구원군을 12월 31일에 격파하고 2월 9일에는 알레포에서 보낸 구원군도 격파합니다. 

결국 6월 3일 본채를 제외한 도시 대부분을 점령하지만 모술에서 보낸 구원군에게 배후를 포위당하면서 앞뒤로 적을 두게 됩니다. 십자군이 성문을 나서 구원군을 물리치자 본채에서 농성하던 이슬람군은 항복을 합니다. 

십자군의 전투력과 지휘관의 역량이 상대적으로 뛰어난 것도 있지만 이슬람 구원군의 전략/전술이 너무 모자란 전투였습니다.

그림은 안티오크 성을 포위하고 있는 십자군입니다. 안티오크 성은 비잔틴 왕국이 재건축했기 때문에 이슬람에서는 보기 드문 성벽을 자랑했습니다. 그림은 평지처럼 묘사했지만 실제 성은 산 위에 있었습니다.) 

 

굶주려 죽는 일은 중세 공성전에서 흔한 일이었지만 칼레 공성전은 유례가 없는 비극을 남겼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가 1346년에 칼레 성을 1년 동안 포위했는데, 칼레 성은 프랑스에서 방어력이 가장 우수한 성(항구도시)이었기 때문에 700척의 배를 동원해 바다를 막고 육지는 영국군으로 물샐 틈없이 막고 프랑스군이 스스로 성문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그는 아예 영국군 진영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기도 했다.

칼레의 지휘관 존은 식량을 아끼기 위해 전투에 필요없는 시민 2,000명을 밖으로 내보냈고 에드워드 3세도 처음에는 관용을 베풀어 시민에게 음식과 돈을 주고 후방으로 보냈다. 그러나 7개월 후에 다시 500명의 시민을 밖으로 내보내자, 인내심이 사라진 에드워드는 성으로 다시 밀어냈고 오도 가도 못한 500명은 성벽 아래에서 굶주려 죽어갔다.

구원군도 패배하자 칼레는 1347년 8월 4일 결국 영국 국기를 성벽에 걸고 만다. 칼레 공성전에서 죽은 사람은 양쪽 모두를 합쳐 굶어죽은 불쌍한 500명이 전부였다. 

에드워드는 성 안의 모든 사람을 처형하려고 했지만 지휘관들이 기사도 정신을 베풀라고 설득해 6명의 지도급 인사만 처형하겠다는 조건을 건다. 6명의 지도급 시민은 머리를 밀고 맨 발 차림으로 목에 건물의 열쇠를 걸고 무릎을 꿇고 에드워드 앞으로 기어갔고 여왕이 나서 간청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식량이 무기나 병력보다도 중요한 경우가 많지만, 중세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물자는 식수였다.  

 

식수 확보

영국왕 스테판(Stephen)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던 볼드윈(Baldwin)은 역사상 가장 복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엑서터(Exeter)에서 반락을 일으켰지만 1138년 여름은 유례없는 가뭄으로 모든 식수가 말라붙어 협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와이트(Wight) 섬으로 도망쳐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만 캐리스브룩(Carisbrooke) 성의 우물이 말라붙자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십자군 전쟁 중 살라딘은 초토화작전과 함께 모든 식수원을 오염시켜 십자군을 괴롭혔다.

'...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동안 식수가 모자라 황소의 몸통을 바느질한 물통을 가지고 10km나 떨어진 곳까지 물을 길러 나서야했다. 나쁜 냄새가 나는 물과 보리 빵으로 연명하던 우리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다. 사라센인은 샘물 근처에 매복해 있다가 우리 병사를 난도질하고 황소를 끌고 도망쳤다. 물 값은 이제 1페니를 주고도 목을 축일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았다....'

 

식수원을 빼앗긴 공성전에서는 말의 피를 마시거나 오줌을 걸러 마시거나 땅 밑으로 들어가 피부로 지하의 습기를 흡수하기도 했다.

독일 황제 프레드릭 바르바로사는 이탈리아 도시로 유입되는 식수원에 썩은 시체를 밀어 넣어 함락시키기도 했다. 시체도 많이 사용하지만 나중에 재사용하기 힘들기 때문에 유황을 푸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기사도정신에 어긋난다고 해서 비난을 많이 받기도 했다.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 공성전이 시작될 때에 양쪽이 승리나 패배를 인정하는 날짜를 미리 정하기도 했다. 항복하거나 철수하는 날짜를 미리 정하게 되면 함락 후의 잔인한 보복이나 아사와 같은 비극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에스기 왈: 식수원 차단은 몇 백 년 전의 전술이 아니고 2차 대전에도 빈번히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할 때에도 연합군이 항복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식수원 부킷 테이마 지역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일본군 전력이 압도적이고 영국/호주/현지인 부대가 오합지졸이어서 만신창이로 두들겨 맞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제 기억으로는 일본군 정찰부대가 상수원 시설에 수비부대가 없는 것을 보고 점령했다고 합니다.

싱가포르 인구가 당시 100만 명이 넘었고 연합군 병력이 8만 명이었기 때문에 일본군도 시가전을 벌이면 몇 개월 동안 엄청난 피해를 각오했어야 했는데, 연합군의 항복을 지연작전으로 의심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구 100만 명의 식수원을 빼앗긴 상태라 연합군도 더 이상 농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안에 몰렸다고 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직전까지 몰린 수비군이 극적인 반전을 이끌어낸 기록도 많다. 윈체스터 공작 로저(Roger)는 영국왕 헨리 3세 재임기간 중 골웨이(Galwey)에서 포위된 적이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적의 공격을 받아 충분한 물자를 비축하지 못한 그는 비참한 죽음보다는 전투에서 명예로운 전사를 선택하고 압도적인 적에게 출격했고 방심하고 있던 적은 무방비상태로 보고만 있다가 도망치는 로저를 잡지 못했다.

 

우리 이야기로 돌아가서, 프랑스군을 본채에 몰아 넣은 영국군은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승리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 양쪽에서 항복협상에 대한 전령이 오가는 동안, 영국군 본대에서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프랑스 왕이 야전에서 결전을 치르기 위해 본대를 이끌고 나섰으며 이 전투를 위해 공성전을 풀고 즉시 본대로 합류하라는 명령이었다.

영국군 지휘관은 이 명령을 잠시 뒤로 미루고 성을 함락시킬 수도 있겠지만 만약 프랑스군이 승리를 거둔다면 성을 버리고 철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은 헛수고를 한 셈이 된다. 영국군은 본채의 수비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밤에 성을 빠져나와 공성무기를 모두 불태우고 본대로 출발하기로 한다.

 

영국군의 프랑스 성이 배후의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무용지물로 만드는데 성공했고 프랑스 수비대는 성을 내주지 않고 비정규군만으로 영국 별동대의 발을 한동안 붙잡아두는데 성공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 모두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했다는 점에서 승리한 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