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9월 12일 22시 07분, 기사십자장 수여자인 베르너 하르텐슈타인(Werner Hartenstein) 대위가 지휘하는 U-156호는 남대서양의 남위 5도 5분, 서경 11도 38분 지점에서 단독으로 항해하던 대형선 한 척에게 두 발의 어뢰를 명중시켜 23시 23분에 격침시켰습니다. 그 대형선박은 루돌프 샤프(Rudolph Sharp - 혹시 그 "샤프"의 후손일까요?^^) 선장의 지휘하에 수에즈를 출발하여 캐나다로 가는 중이던 영국의 병력 수송선 라코니아(Laconia. 19,695톤)호였는데, 이 배는 당시 200톤의 군수품과 80명의 민간인(주로 영국 식민지 공무원의 가족인 여자와 아이들), 주로 휴가자들인 268명의 영국 육군, 그리고 북아프리카에서 붙잡힌 1809명의 이탈리아군 포로들과 그들의 감시를 맡은 폴란드 병사 160명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승객과 승무원을 합친 총 승선 인원은 2741명. 물론 전쟁중에 군용선으로 쓰고 있는 만큼 아예 비무장은 아니어서, 대수상함용 포 8문과 대공포, 폭뢰, 아스딕(음파탐지기) 등을 장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U-156을 먼저 발견하지는 못했지요.

당시 라코니아호가 최초로 발신한 구조요청 메세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9월 12일 22시 22분에 주파수 600미터로 송신).
“SSS SSS 여기는 라코니아호, 남위 04도 34분, 서경 11도 25분 지점에서 어뢰에 피격당했다(SSS SSS 0434 South / 1125 West Laconia torpedoed).”
(※역자 주 : SSS는 SOS의 오타가 아니라 잠수함에게 공격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U-156의 승무원들은 구명보트에 탄 사람들과 바닷속을 헤엄치는 생존자들의 구조를 요청하는 목소리 중에서 이탈리아어로 외치는 소리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영국군 병력수송선이라고 생각하고 격침시켰는데 뜻밖에 우군인 이탈리아군이 잔뜩 타고 있었으니까요. 하르텐슈타인 함장은 이 해역에 상어가 우글거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서둘러 생존자의 구조를 시작하면서 잠수함대 사령부에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이때 U-156호가 사령부에 발송한 메시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발신 시각은 9월 13일 01시 25분).
(독일어 원문)Versenkt von Hartenstein Brite "Laconia". Marinequadrat FF 7721 310 Grad. Leider mit 1500 italie-nischen Kriegsgefangenen. Bisher 90 gefischt. 157 cbm. 19 Aale, Passat 3, erbitte Befehle.
(영문번역)Sunk by Hartenstein British "Laconia". Grid FF 7721 310 degrees. Unfortunately with 1,500 Italian POW"s. Till now 90 fished. 157 cubic meters (oil). 19 eels, trade wind 3, ask for orders.
(한국어번역)하르텐슈타인이 영국의 라코니아호를 격침시킴. 위치는 FF 7721 310도 지점. 불행히도 그 배에는 1,500명의 이탈리아인 포로가 탑승하고 있었음. 현재까지 90명을 구조. 연료잔량 157입방미터, 어뢰잔량 19발, 무역풍 3, 지시바람.
구조작업이 원활하지 못하자 이번에는 인근에 있는 모든 선박에 대해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구조작업에 협력해 줄 것을 요청하는 평문통신이 발신됩니다. 보다 많은 구조선, 가능하다면 연합군 소속의 배들이라도 불러모으기 위해서였지요. 영어로 된 비암호 송신문이 발신된 시각은 9월 13일 06시 00분이었고, 주파수는 25미터였습니다.
조난당한 라코니아호의 탑승자들을 구출하는 배가 있다면 본 함정은 그 배를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본 함정이 함정이나 군용기로부터 공격받지 않는 동안만 지속될 것입니다. 또한 본 함정은 현재 193명의 생존자를 구조하고 있습니다. 현재 라코니아호와 본 함정의 위치는 남위 4도 53분, 서경 11도 26분입니다. - 독일 잠수함.

다음날, U-156호는 400명 가량의 생존자를 구조하고 있었습니다. 일부는 선내에 태웠지만 약 200명은 갑판에 싣고 있었고 나머지 200명은 구명보트에 탄 채로 잠수함에 견인되고 있었지요. 선내 공간이 지극히 협소한 잠수함의 특성상 모든 생존자를 함내에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초 해군에서 잠수함이 전쟁규칙을 벗어난 비도덕적인 무기로 간주된 주요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것이었지요. 유명한 습격함인 1차대전 때의 제아들러나 엠덴, 2차대전 때의 그라프 슈페나 아틀란티스는 수상함이기 때문에 공간이 넉넉해서 격침한 배의 승무원을 자기 배에 옮겨 태울 수가 있었습니다만, 잠수함은 그것이 근원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육지에서 먼 바다에서 상선을 격침했을 때, 잠수함 승무원들이 생존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육지 방향을 가르쳐주는 정도였습니다. 식량이나 식수를 나누어주는 경우도 종종 있긴 했지만, 잠수함 승무원 자신들도 별로 보급이 넉넉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러기는 쉽지 않았지요. 영화 U-571에 나오는 것처럼 생존자에게 총격을 가하는 일도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일반적이지는 않았습니다. 확실한 사례는 딱 한 번이고, 그 함장과 승무원들은 종전 후 전범으로 처형됐어요. 사실 전사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말입니다만.
* 양차 대전에서 활약한 독일의 유명한 습격함(Raider)들. 전과는 나포한 척수 및 톤수입니다.

제아들러(Seeadler) - 16척, 30,099톤. 재미있는 건 이 배는 범선이지만 나포한 배 중에는 4척의 기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엠덴(Emden) - 32척, 영국 선박만 쳐서 8만 톤 격침. 전투함 3척을 격침시키고 항구 2개를 불바다로 만든 통상파괴전의 전설.

아드미랄 그라프 슈페(Admiral Graf Spee) - 9척, 5만톤. 크릭스마리네 최초의 장렬한 최후....랄까요.

아틀란티스(Atlantis) - 22척, 145,960톤. 해상 습격전의 신화이자, 2차대전에서 최대의 격침전과를 올린 독일 수상함.
하여간 시간이 지나면서 되니츠의 지시를 받은 추축국 함정을 중심으로 구조작업을 도와줄 배들이 속속 모여들었습니다. 9월 15일 11시 30분에는 에리히 뷰어데만(Erich Würdemann)대위가 지휘하는 U-506이 도착했고, 몇 시간 후에는 하로 샤흐트(Harro Schacht) 소령의 U-507과 마르코 레베딘(Marco Revedin) 함장이 지휘하는 이탈리아 해군의 잠수함 카펠리니(Cappellini - 이 배는 훗날 태평양으로 가서 작전을 하다가 이탈리아 항복 후 독일군이 접수하는데, 독일도 항복하자 일본 해군이 접수합니다. 종전 후 미군이 폐기)가 도착했지요. 두 척의 유보트는 인근에서 작전중에 행동을 중단하고 온 것이었고, 이탈리아 잠수함은 되니츠가 보르도의 이탈리아 잠수함 전단장에게 따로 요청해서 파견한 것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원래는 케이프타운 방면으로 출격중이던 유보트 전대가 방향을 바꿔 이쪽으로 가고 있었지요. 이들은 탱커까지 동반한 대규모 전대였습니다.
이 4척의 추축군 잠수함들은 각각 생존자를 태운 구명보트를 예인하면서, 그리고 자함에도 안팎에 생존자들을 하나 가득 태우고 아프리카 해안을 향해 항해했습니다. 아프리카 해안에는 영국 식민지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는 당시까지 비시 프랑스의 통제하에 있었으므로, 되니츠는 프랑스령 아이보리코스트(現 코트디부아르) 해안에 생존자를 내려놓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해군본부도 이미 중립국인 비시 프랑스 정부와 연락을 취해 인명구조에 협조하도록 조치를 취해 둔 상태였으므로, 다카르(위 지도에 있습니다.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전체의 수도였고 現 세네갈의 수도)의 비시 프랑스 당국도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갈리소니에르(La Galissonniere)급 경순양함 글로아르(Gloire)와 부갱빌(Bougainville)급 식민지 순찰함(Colonial sloop) 듀몽 드 우르빌(Dumont d´Urville), 샤모아(Chamois) 급 소해정 안나미테(Annamite)를 보내 이들을 마중하게 했지요. 프랑스 함대가 출동한다는 해군 본부의 통보를 받은 되니츠는 하르텐슈타인과 다른 두 척의 유보트에게는 계속 구조작업을 진행하도록 하고, 케이프타운으로 가던 잠수함들에게는 본래 목적지로 계속 가도록 명령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도적인 구조를 방해하는 악의 세력이 하늘 저편에서 나타납니다. 누구냐고요? 그야 당연히 미 공군(정확히는 육군항공대 - USAAF - 지만)이죠. 하늘에서 미군 비행기 말고 그 누가 나타나겠습니까.

사진은 초계중인 캐나다군 기체.
9월 16일 11시 25분, 미군의 B-24 리버레이터기 한 대(조종사 제임스 D 하든 중위(James D. Harden, Lieutenant))가 아센션 제도(지도 참고) 방면에서 날아왔습니다. 이 폭격기는 수상항해중인 유보트를 발견하자 주위를 맴돌다가 사라졌는데, 당시 U-156은 적십자기를 게양한 데다가 폭격기를 향한 적대행위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갑판 위에 사람을 잔뜩 태우고 구명 보트까지 줄줄이 끌고 있으니 누가 봐도 인명 구조중이라는 것이 확연한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이 리버레이터 폭격기는 기지와 교신을 주고받은 후 30분 뒤에 돌아와서는 발광신호, 무선연락, 적십자기 등등을 모조리 무시하고 유보트를 향해 5발의 폭탄을 연달아 던졌습니다(...).
이 폭격은 조종사의 상관인 로버트 리차드슨 3세 대위(Robert C. Richardson III, Captain)의 직접 명령에 의한 것으로, 후에 이들은 "주변 해역에 연합군 선박 2척이 있었으므로" 유보트의 출현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장래 유보트가 연합군 배를 격침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선박 및 인명피해를 막는 쪽이 지금 당장 구조되는 인명보다 소중하다고 판단했던 거죠.
국제법적으로 따지면 미군 쪽도 완전히 할 말이 없지는 않습니다. 해전에 관한 법규를 규정한 헤이그 조약에서는 분명히 인도적 목적을 가진 병원선이나 구조선에게는 공격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했지만, 그 대신 선체를 희게 칠하고 빨간 십자가를 그려야만 한다고 규정하고 있거든요. 뿐만 아니라 일체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전투임무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전투함정(유보트)이 적십자기를 게양했다는 것만으로는 완전히 보호받을 수 없다는 논리가 되는 거죠. 하지만 잠수함에는 조종사가 육안으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생존자가 잔뜩 타고 있었고, 이런 구조활동은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이 불문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탄을 떨어트렸다는 것은 분명히 전쟁범죄가 될 수 있습니다.........만, 미국은 승전국이죠(웃음). 게다가 폭탄은 한 발도 명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피해도 없었고, 그래서 이 문제는 그냥 묻혔습니다.
명중은 하지 않았다고 해도 12시 32분에 가해진 이 폭격에 피해를 본 하르텐슈타인은 구명보트와 연결된 줄을 끊고 갑판 위에 늘어선 수백명의 생존자들을 다시 바닷속에 내팽개친 채 황급히 잠항해야만 했습니다. 부상한 상태에서 계속 공격을 받았다간 회피도 하지 못하고 가라앉기 십상이니까요. (추가문장) 이때의 폭격으로 구명정 1척이 전복되었으며 U-156은 선체 및 장비에 상당한 손상을 입었습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폭격을 당해 손상을 입은 배는 하르텐슈타인의 U-156 뿐이었고 아직 합류하지 않은 세 척의 다른 잠수함들(U-506, 507, 카펠리니)은 무사했습니다. 때문에 되니츠는 U-156을 제외한 두 척의 유보트에게는 구조작업의 계속을 명령했고, 이들은 이틀 후인 9월 18일에 비시 프랑스 당국이 파견한 함대와 만나 구명보트에 태우거나 선내에 탑승시켜 거기까지 데려온 생존자 전원을 인도합니다. 덕분에 미군의 태클(...이라고 밖에 부를 수가 없습니다)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생존자가 무사히 구출되었고, 이후 20일까지 프랑스 해군이 중심이 된 사고 해역에서의 구조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전체 탑승 인원 2741명 중 1083명이 구조되어 바다에서 목숨을 건졌습니다. 결국 이 사고로 승무원 97명, 영국 민간인과 군인을 포함한 승객 133명, 자유폴란드군 33명, 이탈리아 포로 1394명이 목숨을 잃었지요.
최후로 구조된 생존자는 표류 39일만에 구명정에서 발견된 토니 라지(Tony Large)라는 더반 출신의 남아프리카인 의용 수병이었는데, 이 사람은 이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장해의 심연In Deep and Troubled Waters"이라는 자서전도 썼더군요.
* 라코니아 호 생존자의 숫자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타임라이프 2차대전사 "대서양 전투"의 경우 총 1200명으로 적고 있고, 위키에서는 대략 1500명 내외로 봅니다. 주된 참고 자료로 사용한 uboat.net에서는 두 개의 지문에서 각각 1083명과 1500명을 내세우고 있고, 하르텐슈타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개설된 사이트라는 http://wernerhartenstein.tripod.com/에서는 1100명 가량으로 기록하고 있더군요.
한편 당시 유보트 함대 사령관이었던 칼 되니츠의 회고록인 "10년 20일"에서는 정확한 구조자 숫자를 "영국인 811명중 800명, 이태리인 1800명 중 450명"으로 적고 있습니다만 이 숫자는 최종 생존자가 아니라 유보트가 공습을 받기 전까지 구조한 숫자, 즉 미군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해 잠항할 때 익사한 숫자가 빠진 인원수일 공산이 큽니다. 하르텐슈타인 본인은 후에 작전중 공습으로 전사했으므로 별도의 기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상을 종합한 결과 본 포스팅에서는 uboat.net의 기록이 가장 상세한 것으로 보고 최종 생존자 1083명이라는 기록에 따라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다른 부분에 있어서도 자료간에 상충되는 부분이 있을 경우 uboat.net의 내용을 정본으로 간주했습니다. 위키와 차이가 나는 부분이 많더군요.
생존자 구성에서 다소 특기할 점은 이탈리아 포로의 생존자가 지극히 적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영국측의 책임인데, 호송병들이 지들은 탈출하면서 이탈리아 포로들이 갇힌 격실의 문을 잠가둔 채로 자기들만 도망쳤거든요. 그 결과 영국인들은 대부분 살아남은 데 반해서 1809명의 이탈리아인 포로 중 단 415명만이 살아서 구조되었습니다.
이후 나머지 연합국측 생존자 668명(영국 해군 - 장교1/사병 178, 영국 육군 - 장교 17/사병 87, 영국 공군 - 장교 9/사병 70, 상선함대(Merchant Navy) - 사관 8/선원 178, 자유폴란드군 장교 - 1/사병 69, 여자와 아이 50명)은 이들을 구조해 온 프랑스 순양함 글로와르 편에 9월 26일자로 카사블랑카로 송환됩니다. 솔직히 이 사람들이 살아남은 것은 리버레이터기의 폭탄이 빗나간 덕분이었지요(웃음).
이 사고는 전범재판에서 되니츠에 대해 가장 논란거리가 된 것중 하나인, 이른바 “라코니아 명령”으로 알려진 명령을 내리는데 가장 중대한 원인이 됩니다. 그 내용은, "이제 어떤 유보트도 구조작업에 참여하지 말고 생존자를 방치하라"는 내용이었지요. 그때까지는 많은 유보트들이 생존자들에게 물과 식량을 제공하고 가장 가까운 육지의 방향을 알려주는등 탑승자들의 생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완전히 금지시킨 것입니다.
1) Jegliche Rettungsversuche von Angehversenkter Schiffe, also auch das Auffischen Schwimmender und Anbordgabe auf Rettungs- boote, Aufrichten gekenterter Rettungsboote, Abgabe von Nahrungsmitteln und Wasser haben zu unterbleiben. Rettung widerspricht den primitivsten Forderungen der Kriegsf?hrung nach Vernichtung feindlicher Schiffe und deren Besatzungen.
2) Die Befehle ?ber das Mitbringen von Kapitund Chefingenieuren bleiben bestehen.
3) Schiffbr?chige nur dann retten, wenn ihre Aussagen f?r das Boot von Wichtigkeit sind.
4) Bleibt hart. Denkt daran, das der Gegner bei seinen Bombenangriffen auf deutsche Stkeine R?cksicht auf Frauen und Kinder nimmt!
1) Every attempt to save survivors of sunken ships, also the fishing up of swimming men and putting them on board lifeboats, the setup right of overturned lifeboats, the handing over of food and water have be discontinued. These rescues contradict the primary demands of warfare esp. the destruction of enemy ships and their crews.
2) The orders concerning the bringing in of skippers and chief engineers stay in effect.
3) Survivors are only to rescue, if their statements are import!ant for the boat.
4) Stay hard. Don"t forget, that the enemy didn"t take any regard for woman and children when bombarding German towns.
1) 침몰선의 생존자를 구조하기 위해 물에 빠져 수영을 하고 있는 생존자를 배 위로 끌어올려 주거나, 혹은 구명보트에 태워주거나 뒤집힌 구명보트를 다시 바로잡아주고 식량이나 식수를 공급해주는 행위를 앞으로 금지한다. 이런 구조활동은 잠수함전의 가장 큰 목표인 적의 함선과 승무원을 격멸한다는 의도에 배치되는 것이다.
2) 선장과 기관장을 생포하는 데 관한 기존의 명령은 여전히 유효하다.(*)
3) 생존자를 구하는 것이 배의 안전보다 더 중요하다면 그렇게 하라.
4) 생존자를 구출하러 나서기 전에 심사숙고하라. 지금 저들은 여자나 어린애들에게 조금의 사정도 두지 않고 독일의 도시들을 폭격하고 있다는 것을 잊었는가!
(* 주 : 원래 선장이나 기관장 등의 간부 선원은 정보를 캐기 위해 가급적 생포하고 있었습니다)
후일담 : 침몰된 선박의 생존자에 대한 구호활동을 금지한 이 명령은 1946년 뉘른베르크에서 실시된 되니츠의 전범재판에서 유죄선고의 증거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논란의 대상이 됩니다. 대부분의 관계자들은 독일의 유보트 작전으로 인한 연합군 해상운송의 피해가 엄청나게 컸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미국 역시 일본의 해상운송을 상대로 독일의 그것보다 절대 뒤지지 않는 수준의 통상파괴전을 벌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독일군은 가능한 전쟁법규를 지키려고 노력한 데다 공격 목표도 전투함이나 상선단에 한정했으며 생존자에 대한 총격 따위도 가하지 않았지만, 미군 잠수함들은 전쟁법규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일본군 수송선만 공격하는게 아니라 코딱지만한 목조 어선까지 눈에 띄는대로 몽땅 두들겨 부쉈죠.
만약에 영국측이 요구했던 대로 되니츠에게 잠수함전의 죄를 물어 전범재판에 회부한다면, 그보다 더한 활동을 한 미군 잠수함 부대도 전범재판에 회부되어야 했습니다. 되니츠의 기소에 동의할 수 없었던 미 해군의 니미츠 제독까지 변호에 나섰고, 결국 그 부분의 혐의에 대해서는 영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반대한 탓에 되니츠는 잠수함전에 관련된 혐의로 전범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위가 있으니만큼 완전한 무죄 판결을 받지는 못해서 반평화범죄와 반인류범죄에서 유죄를 선고받았고, 최종적으로 10년의 형기를 언도받았으나 재판이 종료되기 전까지의 수감 기간이 합쳐져 실제로는 11년 6개월간 감옥에 있다가 1956년 10월 1일에 출감합니다. 사람들은 "되니츠의 진짜 죄목은 잠수함부대를 너무도 잘 조직해서 연합군에게 너무 큰 위협을 끼쳤기 때문(...)일 거라"고 할 정도였지요(웃음).
*참고
- 타임라이프 "대서양 전투"
- 칼 되니츠, "10년 20일"
- http://uboat.net
- http://wernerhartenstein.tripod.com/
- 위키피디아(영), Italian submarine Cappell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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