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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아프리카로! - 어느 비행선의 7,000km의 여행

구름위 2012. 12. 26.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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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세계는 1차대전의 불길 속에서 불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계"라고 해야 그 전장은 거의 유럽이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은 서부전선이었지요. 동부전선의 러시아 전선도 꽤 전투가 치열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부차적인 전선이었고,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등장하는 로렌스의 상관 말마따나 "전쟁의 승패는 서부전선에서" 날 것이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습니다.

여긴 쓸데없는 전선이야!!(이 장군의 임지는 카이로임)



그러나 유럽 이외의 세계의 다른 부분에서 피어오르던 전화의 불길이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지요. 아시아 대륙에서는 칭따오 기지의 함락과 함께 일찌감치 전투가 종료되었으며 바다를 누비던 독일 유격함들도 이때쯤에는 대부분 수장되지만, 대서양과 지중해에서는 중앙제국(中央諸國)의 잠수함들이 연합국의 선박들을 연달아 침몰시키고 있었습니다. 또한 위의 장군님이 그토록 무시하시던 아라비아에서는 베드윈 유목민들이 낙타를 타고 달리며 터키군 열차를 공격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 시점에서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또 하나의 전역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어디냐고요? 바로 동아프리카였습니다.
(확실히 마이너 전선인 것이, 이번에 KODEF에서 나온 1차대전 개괄서에서는 아예 아프리카 전선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더군요)

개전 시점에서 동부 아프리카는 대략 5개국의 식민지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혼재하고 있었고 독일은 그중 영국과 바로 옆에 붙어 있었지요.

맨 아래, 탄자니아만 독일 식민지



원래 동아프리카에서 독일과 영국의 양 식민지 당국은 상호간 중립협정을 맺고 있었습니다. 설사 유럽에서 양국간에 전쟁이 벌어진다고 해도 두 식민지 당국은 상호간 적대행위를 하지 않고 우호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었지요. 이런 협정이 맺어진 배경에는 두 나라 모두 은연중에 가진 원주민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전쟁을 하자면 백인 병사가 부족하기 때문에 양측 모두 필연적으로 원주민 병사를 전선에 투입할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 백인을 죽여본 원주민 병사는 백인에 대한 경외감 같은 것을 상실하고 더 이상 순종적이지 않게 될 것이라는 점이 양 식민당국의 주된 근심거리였죠.

사실 이런 걱정은 헛된 것이 아니었던 게, 2차 대전 이후 이런 식민당국의 걱정이 본격적으로 현실이 됩니다. 영국 선전기관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군대에 넣으면서 "독일이라는 부족이 다른 부족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지배하려는 것은 나쁜 일이기 때문에" 이를 막으려면 너희들이 전쟁을 하러 가야 한다고 했거든요. 여기에서 흑인들이 "영국이 우리를 자기들 마음대로 지배하는 것도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여간, 본론으로 돌아가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프리카에도 전운이 엄습합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전역에서 곧바로 충돌이 시작되지는 않았어요. 서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인 토고는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지 3일만에 가나에서 온 영국군, 세네갈에서 온 프랑스군의 협공을 받고 점령당했습니다, 카메룬과 나미비아도 얼마 안 가서 같은 처지가 되었지만 유독 한 곳, 독일령 동아프리카(탕가니카Tanganyika, 지금의 탄자니아)만이 예외였지요. 이는 수비대(Schutztruppe, Protection Army) 사령관인 파울 폰 레토프-포르벡(Paul von Lettow-Vorbeck) 대령의 강력한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동아프리카에서 영국과 독일 두 나라 식민당국은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져도 현지에서는 서로 우호관계를 유지한다는 협정을 맺고 있었고 양 식민당국의 협조관계는 즉시 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독일 측은 여러 요인에서 볼 때 세력이 확실히 열세였고 영국 측도 서부전선의 전황도 확실하지 않은 판에 당장 새 전선을 만드는 게 시급하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이런 불안한 평온은 곧 깨지게 됩니다. 충돌의 계기는 영국 측에서 먼저 제공하게 되죠. 영국 해군이 독일령 탕가니카의 주요 항구도시인 탕가를 포격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폰 레토프-포르벡은 인접한 영국령 케냐에 대한 습격을 감행했습니다. 포르벡의 목표는 케냐에 부설된 영국의 철도망이었고, 이 철도는 케냐의 항구에서 우간다 지방 내륙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상업 루트이자 식민지배의 중요한 도구였으므로 영국으로서는 꼭 지켜야 했습니다.

수십 차례에 걸친 포르벡군의 철도 습격을 견디다 못한 영국측은 이참에 독일령 동아프리카 전체를 손에 넣어 귀찮은 파리떼를 없애버리기로 합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는 이를 수행할만한 병력이 없으므로 인도에 있던 인도군 부대를 동원하지요. 이 전투가 1914년 11월 3일부터 5일까지 있었던 탕가 전투인데, 여기서 영국군은 낯선 지형 안에서 정글과 늪지로 몰린 데다 벌떼의 습격까지 받아 대참패를 당합니다. 그리고 포르벡은 패주하는 영국군이 버리고 간 영국제 소총과 기관총, 탄약으로 휘하 병력을 재무장하고(이들이 가지고 있던 독일제 군수품은 처음부터 그 양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동아프리카를 휩쓸기 시작하죠. 하지만 이번 포스팅의 중점은 포르벡군의 활약이 아니므로 그 이야기는 여기서 생략^^


독일 본국에서 포르벡 군에게 보급을 해주려면 가야 하는 바닷길



 

그 바다를 누가 지배하는지 보여주는, 남자를 절로 하악거리게 만드는 여왕폐하의 함대 다시 한 컷!
이번에는 1902년의 스피트헤드 관함식입니다 ㅋㅋ




하지만 여기서 감안해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독일령 동아프리카가 철저하게 고립된 전장이었다는 것입니다. 독일에서 동아프리카로 오려면 해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때 배가 지나야 하는 대서양과 지중해, 인도양의 제해권은 모조리 연합국 측에 있었으니만큼(독일 입장에서는 2차대전 때보다 불리한 것이, 이탈리아도 일본도 독일이 아니라 영국 편이라는 거죠) 포르벡이 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그 결과 포르벡의 본래 목적이었던 "주전선(역시 서부전선)에서 영국군 끌어내기"는 완벽하게 달성되었지만, 그 자신은 본국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고 고립된 싸움을 계속해야 했지요. 식량이야 현지에서도 구할 수 있었지만 무기, 탄약, 의약품과 같은 보급품은 노획하는 것 이외에는 거의 공급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포르벡은 보급품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서 정글 속에 탄약공장을 세워 탄약을 자체생산하기도 했지만, 그게 충분한 보급이 될 수 없다는 거야 당연했지요. 그래서 어떻게든 독일 본국으로부터 이들에게 보급을 해 줄 수 없을까....하고 생각한 끝에 나온 아이디어가 있었습니다.


"역시 영국이 제해권을 쥐고 있는 이상, 동아프리카까지 해로를 이용해서 보급하는 것은 무리야. 어떻게 포르벡 군에게 보급품을 보낼 방법이 없을까?"
"그렇지. 바다는 차단...잠깐, 바다로 갈 수 없다? 맞아! 그럼 하늘로 가면 되지!"



이런 대화가 실제로 있었다는 보장은 어디도 없습니다(먼산). 그런데 하늘? 747 여객기도 없던 시대에 하늘로?

그렇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비행기는 분명 없었지만, 이 시대 독일에도 먼 거리를 "날아갈" 수 있는 비행수단이 딱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체펠린 백작이 제작한 비행선이지요(전에 한번 포스팅했지요?^^). 네, 독일은 비행선을 띄워 아프리카에 있는 포르벡 군에게 보급을 할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걸 실행에 옮겼습니다.




1917년 늦은 봄....이미 아프리카에서의 항전은 3년째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1916년부터 남아프리카군이 공세에 참가하면서 포르벡군은 점차 열세로 몰리기 시작, 이때쯤에는 독일령 동아프리카 거의 전역을 상실하면서 기반이 될 수 있는 지역을 별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항구적으로 계속되는 말라리아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기간요원인 독일인 장병들의 건강은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었지만, 베를린의 독일 식민청(맞나요? 영어 원문은 Colonial Office입니다.)에서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할 경우 포르벡 군이 단 한 방에 독일령 식민지의 도시나 마을과 같은 거점을 모두 상실하고 황야의 덤불 속으로 밀려날 수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포르벡 군을 기다리는 운명은 소멸하는 것 뿐이었지요.

이런 판국에 포르벡 군이 동아프리카에서의 전투를 지속할 수 있도록 보급품을 보낼 수 있는 수단은 체펠린 비행선 밖에 없었으므로 식민청에서는 포르벡 군의 의료지원을 위해 의약품과 의료 인력을 실은 비행선을 보낼 것을 제안합니다. 당시 미국의 참전으로 인해 독일해군의 위신이 형편없이 추락하고 있었던 만큼, 식민청은 자신의 몫인 아프리카 전선 일부에서나마 독일군이 선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의무라고 여겼던 거죠.

이때 영국측에서는 아프리카에 독일 비행선이 출현할 가능성에 대해서 크게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이 비행선을 사용해서 포르벡 군을 증원할 뿐 아니라 원주민들에게 반연합국 봉기를 부추길 가능성이 있다는 루머가 이미 돌고 있었거든요. 영국 뿐 아니라 벨기에와 프랑스 식민지에서도 독일이 유도한 원주민 봉기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었는데, 이미 1915년 여름부터 남아프리카 나탈 식민지에서는 줄루 천년운동 설교자들(millenarian preachers)에 의해 비행선과 관련된 반영국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신문에 보도된 독일 비행선의 영국 본토 도시들에 대한 폭격과 그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가리켜 "영국인들에 대한 신의 불쾌감"이 나타난 예라고 선전했던 겁니다.

한편 독일측에서는 자기편 주민들에게 거대한 비행선 함대가 곧 아프리카에 올 것이며 이 비행선에 실린 현대식 무기가 도착하면 독일인과 아프리카인 부대가 나란히 서서 함께 싸우게 될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비행선이 오는지 살피기 위해 늘 열렬하게 불타는 관측병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었지요.^^
하지만 뭐 비행선 함대 따위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다 아실 것이고......독일측에서는 포르벡 군의 지원을 위해 한 척의 비행선만을 준비했을 뿐이었습니다.

영국 식민지 당국은 이 위협을 아주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경순양함 쾨니히스베르크(인도양에서 통상파괴전을 벌이다가 1915년 7월 11일 격침, 잔존 승무원 188명(원래 개전시 승조인원 322명)이 운반 가능한 전 장비를 가지고 포르벡 군에 합류했습니다. 이들 중 1919년 이루어진 포르벡 군의 브란덴부르크문 행진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인원은 함장 막스 루프 대령(Capt. Max Looff) 이하 15명이었지요)의 함장인 막스 루프 대령이 자기들의 손에 떨어졌을 때, 영국인들은 자기들이 의심하던 확실한 증거를 잡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독일의 비행선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대령은 자신과 대면한 심문관이 속기 쉬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개뻥-_-을 쳤거든요. 대령은 영국인들에게 신형의 장거리 비행선이 포르벡 군 지원을 위해 출발할 것이며, 이 신형 비행선들은 최신형 야포와 충분한 탄약을 장비한 터프한 독일 해병 1개 중대(!!!)씩을 아프리카까지 수송할 수 있다고 뻥을 쳤던 겁니다.

하지만 진짜 체펠린 비행선은 독일에서 아프리카까지는 커녕 그 어디도 병력을 수송할 수 없었습니다. 비행선의 아프리카 운행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고, 한 척의 체펠린 비행선에 실을 수 있는 화물적재량은 고작해야 16톤에 불과했으니까요. 결국 독일측이 실어보내기로 한 보급품의 양은 포르벡이 지원해달라고 요청한 전문 의료인력 및 어학에 능숙한 전문가 수 명, 그리고 11톤의 탄약(기관총 30정 및 수리부품 포함)과 의료용품 3톤으로 결정되었습니다. 한편 이 비행은 비행선 자체도 돌아오지 않고 현지에서 해체하는 편도비행으로 결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현지에서는 재비행을 위한 수소의 재충전이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비행선은 고도를 조절하기 위해서 기낭 속의 수소를 방출하므로(고도를 낮출 때) 이를 보충해야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수소를 새로 만들 수는 없었지요. 원 계획을 세운 식민청 측에서는 해체한 비행선 외피로 텐트를 만드는 데 쓰면 좋을 거라고 제안했습니다.

이제 실제적인 계획수립 단계에서 당시 건조중이던 L-57이 아프리카로 보낼 배로 예정되었습니다. 아프리카로 보내지기 위해 개장된 L-57은 원래보다 길이가 30m 길어졌고(애초 길이는 198m), 내부에 들어가는 수소의 양은 190만 입방미터에서 240만 입방미터로 증대되었지요. 덕분에 이 비행선은 그때까지 제작된 비행선 중 가장 대규모의 비행선이 되었습니다.1917년 9월 26일의 1차 시험비행에 이어 10월 4일에 2차 시험비행이 있었고, 카이저 빌헬름 2세의 아프리카 비행 승인이 떨어지자 해군 참모본부는 무전을 통해 포르벡에게 비행선의 준비를 알렸습니다(L-57은 독일 해군 소유).

두 번째 시험비행 후 L-57은 베를린 인근의 유테르보그(Jüterbog) 비행선 기지에서 화물을 적재하기 시작했는데, 이 배의 함장인 루드비히 보크홀트(Ludwig Bockholt) 대위(Kapitänleutnant)는 이대로 출발해서는 좀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배가 가야 할 먼 길을 생각할 때, 아무래도 모든 짐을 실은 후 만재상태에서의 마지막 시험비행을 해볼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거든요. 그 결과 10월 7일에 3번째 시험비행이 있었지만 그만 여기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륙 준비를 하는 동안 몰아친 강풍이 비행선을 끌어올렸고, 보크홀트 함장은 이 폭풍을 가로질러서 계류장으로 돌아가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보다는 바람을 타고 빠져나가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이 비행선에는 악천후용 장비의 탑재가 늦어지고 있었고, 바람은 갈수록 세어지기만 했으므로 결국 지상에 격돌하면서 400명의 지상요원 상당수가 손실되고 말았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비행선의 수소 탱크도 폭발, 비행선은 완전히 소실되었지요. 기적적으로 승무원들은 전혀 부상을 입지 않았습니다.

2일 후 해군본부는 사고로 손실된 L-57 대신 같은 사양으로 개조된 L-59를 아프리카로 파견하기로 결정합니다. 비행계획은 그전대로, 함장으로도 보크홀트가 재임용되죠(사고 책임은 묻지 않은 듯). 계획은 급진전되어 10월 25일에 L-59의 첫 시험비행이 실시되고, 9일 후인 11월 3일에는 프리드리히스하펜(Friedrichshafen)에서 동맹국인 불가리아의 잠볼리(Jamboli, 오늘날의 잠볼(Jambol))기지로 이동배치됩니다. 이곳은 독일군이 사용할 수 있는 최남단 비행선 기지였거든요. 오스만 제국이 비행선을 운용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기반시설을 갖추고 있었다면, 아마 비행거리를 절반 쯤은 단축할 수 있었을 테지만...

건조중인 L-59호 비행선



L-59는 유례가 없는 크기로 건조되었기 때문에, 그 덩치를 조절하기 위한 밸러스트(무게추)의 양이나 엔진의 출력에 다소 제한이 있는 등 비행성이 형편없었습니다. 덕분에 최초 두 번의 아프리카행 시도는 얼마 가지 못하고 실패했고, 마침내 11월 21일 아침에야 꼬리 쪽에서 부는 순풍을 타고 지중해를 건너는 데 성공하지요. 이때 L-59는 가능한 많은 화물을 적재하고 자체중량을 줄이기 위해서 폭탄이나 기관총 같은 모든 자체무장은 철거한 상태였습니다(본래는 12정 가량의 맥심 기관총을 장비). 심지어 밸러스트도 물로 채운 상태였죠.

비행을 시작한 보크홀트와 승무원들은 포르벡 군과 무전 연결을 시도했으나 아직 아프리카에서 독일군이 통제하고 있는 어떤 지역과도 무전을 주고받을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연락두절 상태로나마 순조롭게 지중해를 건너던 L-59호는 또다른 시련을 받습니다. 크레타 섬 상공에서 천둥을 수반한 폭풍우와 마주쳐버렸거든요. 이런 경우에 대비한 표준절차에 따라 L-59는 교신범위 내에서 무전 연결을 재시도합니다. 이때 베를린의 식민청에서는 "지난 몇 주 동안 포르벡 군이 여력을 모두 소진했으므로 작전을 취소할 것을 권한다"는 해군의 조언을 받고 고심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독일군이 이미 항복했고 폰 레토프-포르벡 대령과 다 죽어가는 부하 수백 명 만이 덤불 속을 헤메고 있다는 이야기였죠. 결국 식민청은 비행선을 귀환시키기로 결심하지만 폭풍 속에 있는 L-59는 귀환 명령을 받지 못하고 계속 남쪽으로 갑니다.

비행 둘째 날인 11월 22일 05시 15분, L-59는 리비아 해안을 가로질러 사막으로 들어가는데 여기서 강력한 상승기류를 만나게 됩니다. 사막의 모래가 햇빛에 가열되어 만들어내는 뜨거운 공기로 인해 만들어진 바람이었죠. 그런데 정오경에 추진기가 과열되어버렸고 수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비행선은 계속 전진했지만 무전 상태는 역시 좋지 않아서, 송신은 아예 불가능했고 수신도 제한적으로만 가능했습니다.

어둠이 깔릴 때쯤 L-59는 나일 강에 도착합니다. 나일 강 만큼 확실한 랜드마크-_-b도 없으니, 이제 보크홀트는 강을 따라 남쪽으로 비행선을 몰아갔는데...다음날인 23일 오전 3시 경 사고가 발생해서 여정이 끝날 뻔 합니다. 야간이라 비행선 내부의 수소가 냉각되면서 고도를 잃었고, 갑자기 비행선이 실속 상태로 접어들면서 그만 추락할 뻔 했거든요. 이때 주 무전기도 떨어져 나갔고 승무원들은 무게를 줄여 추락을 막기 위해 싣고 있던 탄약 수 톤을 비행선 밖으로 미친 듯이 집어던졌습니다.
이런 사고에도 불구하고 보크홀트 함장은 수단을 지나 계속 남쪽으로 가라고 명령했지만, 이날 12시 45분에 하르툼 상공에 도달했을 때 L-59의 무전기가 베를린에서 온 전파를 잡았습니다. 만약 보크홀트가 포르벡 군과 무전이 연결되고 있었다면, 베를린 당국에 해군의 정보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보고하고 계속 남행할 수 있었겠지만 그 자신도 포르벡 군의 상황을 모르는 이상, 베를린의 지시를 거부할 수는 없었지요. 결국 그는 L-59의 방향을 북쪽으로 되돌립니다.

여기 표시된 곳이 하르툼. L-59는 여기까지 온 거죠.



* 전쟁이 끝난 뒤에 리차드 마이너츠하겐(Richard Meinertzhagen)이라는 영국 정보장교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이때 L-59가 수신한 무전의 정체는 영국이 실시한 "더러운 속임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L-59의 전쟁 중 기록을 보면 무전의 발신자가 해군 참모총장인 헤닝 폰 홀첸도르프(Henning Von Holtzendorff) 제독으로 되어 있습니다. 더 상세한 자료를 접하지 못한 상황에서 두 이야기를 종합하자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요.

1. 영국 정보부의 "속임수"는 L-59가 수신한 가짜 무전이 아니고, 독일 해군 본부에 포르벡 군이 항복했다는 가짜 정보를 넣은 것이었다.
2. 영국 정보부가 폰 홀첸도르프 제독의 명의를 도용한 무전을 넣었다.


여기서 제 의견은 1번입니다. 왜냐 하면 당시 베를린에서 L-59의 철수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니 말이죠. 만약 그 무전 자체가 가짜였다면 보크홀트에 대한 문책이 거론되었을 거고 그에 따른 이야기가 또 나왔을 텐데, 그런 게 전혀 없었거든요. 아니, 있었는데 제가 못 찾은 걸수도 있지만. 하여간 지금까지는 못 봤습니다
.


베를린의 무전을 받아 임무를 중단하고 북상하던 L-59는 터키 서부를 지나다가 또 폭풍을 만났고, 게다가 야간에 기낭이 냉각되는 사태를 또 겪으면서 밸러스트를 거의 다 써버리는 바람에 매우 위태로운 상태로 착륙합니다. 이 때가 11월 25일 07시 40분이었으니, L-59는 만 4일 가까이 계속 비행했던 셈이죠.
이 95시간의 비행 동안 L-59는 4,340마일(7천km) 이상의 장거리 비행 기록을 세웠으나 포르벡 군을 지원하는 본래 임무 수행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래도 큰 영향은 없었던 것이...L-59가 불가리아에 착륙했을 때, 포르벡 군은 영국군에 밀린 나머지 끝내 독일령 동아프리카를 포기하고 로부마 강(Rovuma River)을 건너 포르투갈령 모잠비크로 들어가고 있었거든요. 이들의 대장정은 다음해까지도 계속되었고, 결국 끝까지 패배하지 않은 유일한 독일군이 됩니다. 그런데 1917년의 이 유례 없는 대륙간 비행의 성공은 독일 비행선 업계에 기술적인 자극이 되었고, 1919년에는 영국 비행선이 첫 대서양 횡단을 이루게 되면서 이어지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대륙간 비행선 상업운항이 활성화되는 밑바탕이 만들어진니다. 이들의 전시 임무는 결국 실패했지만, 그래도 항공사적으로는 나름 업적을 남긴 셈이지요.


뒷이야기 : 임무에서 귀환한 L-59는 폭격용으로 개조되어 잠볼리 기지에 계속 주둔하지만 제대로 된 실전임무는 단 한 번, 1918년 3월 11일 밤에 나폴리 항을 공습한 것 뿐이었습니다. 보크홀트는 페터 슈트라세의 해군 비행선 사령부에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체펠린 비행선의 주요 타겟으로 삼아야 한다는 메모를 보낸 바도 있었는데, 대략 24발의 폭탄이 투하되었으나 원래 표적이었던 해군기지, 가스 공장과 바그놀리(Bagnoli) 제철소에는 단 한 발도 맞지 않았습니다. 대신 도시 북서부 외곽의 민간인 거주지에 떨어진 폭탄에 맞아 16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40명의 부상자가 발생합니다.

L-59가 갔던 여러 목표들




보크홀트는 이번에는 이집트의 포트사이드와 크레타 섬의 수다 만에 있는 영국 해군기지를 폭격하려고 시도합니다만, 악천후 때문에 두 번 모두 실패합니다. 4월 7일에는 말타 폭격을 위해서 출격하지만, 이날 밤 독일 잠수함 UB-53의 상공을 지나가는 것이 UB-53의 함장에게 목격된 후 행방이 묘연해집니다. 여기에 UB-53 함장의 보고에 의하면 체펠린 비행선이 폭발하기 전 서치라이트의 대공조명과 함께 지상포대의 사격이 있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날 L-59에 탑승하고 있던 보크홀트 외 21명의 승무원 중 생환자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연합군도 L-59를 격추했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으므로 독일군은 L-59를 사고로 손실한 것으로 처리했습니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비행선 사령부에서는 UB-53이 L-59를 이탈리아 비행선으로 오인, 격추시켜놓고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강력하게 의심하고 있었지요. 비행선 사령부의 추론이 사실이라면, 사상 최장거리의 비행을 한 승무원들 치고는 이들의 최후는 참 억울했던 셈입니다.


참고 사이트 :
http://faculty.ed.umuc.edu/~jmatthew/naples/zeppattack.htm
http://www.ntz.info/gen/n02100.html
http://www.theaerodrome.com/forum/aircraft/35105-zeppelin-armament.html
http://www.avalanchepress.com/L59.php<
http://www.deutsche-schutzgebiete.de/ostafrika_1914.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