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민스키 여단이라고 하면 2차대전에 대해 좀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한번쯤 들어본 부대 이름일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중적인 2차대전 서적인 "알기 쉬운 2차대전사"에도 등장하는 부대거든요. 이 책에서 카민스키 여단은 딜레방거 여단과 함께 바르샤바 봉기 진압에 투입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데, "병력 대부분이 소련군 포로와 범죄자들로 이루어진 부대로 전투보다는 살인과 약탈, 강간에 더 능력을 보였"다고 묘사됩니다. 타임라이프 2차대전사의 바르샤바 봉기를 다룬 부분(국내 미출간)에도 등장하지만, 여기서의 평가도 별 차이는 없습니다. 카민스키 여단이 딜레방거 여단보다 폴란드 민간인을 덜 학살하긴 했는데, 그 이유는 카민스키 여단의 병사들이 딜레방거 여단보다 인도적이어서가 아니라 이들이 "전투"보다는 약탈과 강간, 술잔치에 열중한 탓이었습니다. 얘네들 진군 경로에 보드카 양조장이 있었거든요(먼산).
하지만 카민스키 여단이 시작부터 이렇게 개판은 아니었습니다. 원래 부대 구성원이 소련군 포로나 범죄자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고요. 그럼 이 부대가 창설되던 시점으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1941년 겨울, 소련 영토 깊숙이 진입한 독일군은 소비에트 빨치산의 활동으로 후방과의 연락 유지에 큰 곤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초래된 것은 전적으로 독일측의 멍청한 행동 때문이었지요. 애초 독일군이 진격했을때 많은 수의 소련 인민들은 스탈린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해방군으로서 독일군을 환영했던 바, 이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우리는 너희를 모두 죽이러 왔다!"고 천명하는 바보짓을 한 건 독일군 스스로였습니다. 당연히 주민들이 독일군을 점점 더 싫어하게 될 수 밖에 없고, 빨치산의 활동 영역은 넓어져 가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러시아 땅에서 밀려나는 그날까지 독일군은 빨치산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지요.
1942년 봄, 아직 땅이 녹지 않은 추운 날씨를 뚫고 한 마리의 말이 끄는 썰매가 러시아 민간인 몇 사람을 태운 채 브리얀스크 남동쪽에 있는 나블리야와 로코트라는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이 썰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우두머리는 독일주둔군 지휘관에게 제2기갑군 사령과 류돌프 슈미트(Rudolf Schmidt) 원수가 서명한 명령서를 내놓았는데, 이 명령서에는 이 명령서를 가진 사람에게 가능한 모든 협력을 하라는 지시와 함께 이 사람을 "나블리야, 로코프, 드미트로프스크, 드미트리예프, 셰프스크 등의 지방도시를 포함하는 지역의 지사로 임명하라"는 내용도 적혀 있었지요. 이 명령서를 가지고 온 사람이 바로 카민스키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옛 학우이자 빨치산과 싸우다가 전사한 콘스탄틴 보스코보이니크(Constantine Voskoboinik)의 후임으로 온 것이었죠.
카민스키는 제정러시아령인 비텝스크에서 폴란드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적백내전중에는 적군에서 복무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상트 페테르스부르크의 공과대학에서 학위를 땄지요. 그후 기술자로 활동하다가 1930년에 반혁명분자로 몰려 잠시 투옥되었고, 1937년 후반에 또 체포되어 브리얀스크 인근의 노동수용소에 설치된 증류실에서 노동형에 처해집니다. 그는 4년이 지난 1941년에야 수용소를 빠져나와 이곳으로 왔던 것입니다.
슈미트 원수는 카민스키에게 이 허가증을 통해 완전한 자유재량권을 부여했습니다. 카민스키는 이 지역에서 독자적인 행동권과 함께 지방 관리의 임명권, 경제권을 편제할 권리까지 가지고 있었지요. 어떤 독일군 장교도 카민스키의 행동에 대해 간섭할 수 없었으며, 그는 오직 슈미트 원수 단 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이 지역의 왕이나 마찬가지였지요.
지사가 된 카민스키는 즉각 자기 영역 내 도시의 행정을 주관할 시장을 임명하고, 집단농장제도의 폐지를 선포했습니다. 농토는 물론 수확한 농작물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고 아직 남아있는 농기구 및 가축도 모두 각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물론 독일군의 지원을 받아 치안을 유지하고 지역방어를 맡을 민병대도 창설했지요.
토지와 곡식, 암소, 말, 돼지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게 된 농부들은 곧 태도를 바꾸어 독일군에 대한 지지를 보냈습니다. 독일군들은 증오의 대상이었던 집단농장을 해체해 주었을 뿐 아니라 행정의 전권을 장악한 카민스키의 책임하에 주민들에게 자치권까지 부여했으므로, 다른 지역에서처럼 독일군들이 주민들을 착취하거나 마음대로 학살하는 등의 일이 전혀 없었거든요. 이 지역에서 독일군의 역할은 전적으로 군사적인 필요에만 국한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이 지주가 된 이 지역의 농민들은 예전과 달리 게릴라들에게 강렬한 분노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브리얀스크에서 남쪽의 르고프로 가는 철로를 경계로, 카민스키의 지배영역인 동쪽은 평야로 이루어져 있어 확보가 쉬웠지만 서쪽은 숲이 우거져 있어 독일군이 손을 대지 못한 탓에 상당수의 빨치산들이 활동하고 있었거든요. 그 결과 카민스키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식량을 찾는 게릴라들이 집단농장의 재산을 가져가더라도 농민들은 그저 무감각하게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죠. 빨치산들에게 식량과 가축을 준다는 것은 농부 그 자신의 암소가, 자신의 돼지가, 자신의 곡식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많은 수의 젊은이들이 카민스키 휘하의 민병대에 입대했고 지주들은 이들을 여러 면에서 가능한 최선을 다해 지원해주었습니다. 1942년 여름에는 카민스키 민병대의 활동으로 인해 지주들은 더 이상 게릴라 부대의 습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지요. 빨치산이 은신처인 숲을 벗어난다는 것은 곧 충돌을 뜻했고, 아무리 적은 양의 식량도 피를 흘리지 않고는 얻을 수 없었습니다. 민병대와 빨치산 모두 지역 주민들에게 생존의 기반을 두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서로 양립할 수 없었던만큼 치열하게 싸울 수밖에 없었던 거죠.
슈미트 원수가 의도했던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게릴라들과 독일군의 사주를 받은 지주들은 상호간의 정치적 견해나 작금의 전쟁, 양자가 모두 가진 독일에 대한 혐오감 따위는 깡그리 잊어버렸죠. 지주들에게 있어서 게릴라는 자신들의 재산을 위협하는 적이었고, 게릴라들에게 지주들은 독일군보다 증오스러운 국가반역자였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자원한 지역민으로 구성된 이 카민스키 민병대의 활동은 정말 열성적이었습니다. 독일군이 장비를 지원해주지 않자 이들은 퇴각하는 소련군이 숲에다 버리고 간 무기들을 주워모아 무장했고, 심지어는 전차-대전차포-곡사포-박격포-기관총 같은 중장비까지 재생했습니다. 그 결과 이 민병대는 여단 병력까지 성장하게 되었는데, 500에서 600명의 병력을 가진 5,6개의 보병대대와 10~12대의 경전차를 보유한 전차중대, 20문 가량의 포를 보유한 포병대대로 이루어진 민병대 치고는 엄청나게 막강한 부대가 되었지요. 그리고 1942년 말에는 민병대의 규모가 만 명 가까이로 확장되었으며, 여기에 독일군이 소련군으로부터 노획한 야포 36문과 T-34/76 전차 24대를 제공받았습니다.
카민스키 민병대가 이만한 병력을 갖게 되자 촌락이나 도시에 대한 게릴라의 습격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고, 이젠 도리어 반격도 충분히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1943년 봄에는 소규모 독일군 부대의 지원을 받아 역습을 가한 결과 드미트로프스크, 드미트리예프, 세프스크, 로코트 사이의 거의 전지역에서 게릴라를 완전히 축출했으며, 로코트로부터는 북서쪽으로 10 내지 15km, 브리얀스크-르고프 철도로부터는 서쪽으로 약 7km 떨어진 <해방구역>의 거의 변방까지 게릴라들을 밀어붙였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독일군 당국으로부터 단 한 정의 총도, 단 한 발의 탄환도 지원받지 않으면서 이루어낸 성과였죠. 시간만 충분했다면 카민스키는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전 지역에서 단 한 명의 게릴라도 남기지 않고 청소하는데 성공했을 겁니다.
때문에 43년 여름에는 그를 암살하려는 소련측의 음모도 수 차례 있었습니다. 덕택에 카민스키는 수 차례나 죽음의 위기를 넘겼고, 심지어는 카민스키의 사령부에 첩자를 박아넣어 그를 암살하려던 계획이 적발되는 바람에 사령부 주변 나무가 졸지에 줄줄이 매달린 내통자들의 시체로 장식되기도 했습니다. 사령부 요원이 너무 많이 처형되는 바람에 부대가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서 독일군 연락장교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였지요.
하지만 문제는 카민스키의 능력과는 별개로 그들을 비호하고 있던 독일군 그 자체가 쿠르스크 전투의 패배로 인해서 서쪽으로 철수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소련군이 들어오면 카민스키 민병대의 대원들이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했고, 결국 이들은 가족을 데리고 독일군과 함께 철수했는데 그 수가 3만에 달했다고 하네요.
서쪽으로 퇴각하는 혼란의 와중에 탈주자의 수는 늘어만 갔고, 그 과정에서 접촉한 빨치산들은 카민스키에게 병력을 이끌고 투항할 것을 제안했습니다만 카민스키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투항제의에 응하기는 커녕 연대병력을 몽땅 이끌고 빨치산으로 넘어가려고 한 2연대장을 체포해서 부대원들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버렸죠. 그리고도 탈주자가 속출했지만 카민스키는 부대를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태도로 부하들을 다루었습니다.
이들은 결국 벨로루시 폴로츠크(Polotsk) 지구의 레펠(Lepel)이라는 도시로 이동한 후 이곳을 담당지역으로 지정받고 이해 내내 이 지역의 빨치산들과 격전을 치르게 됩니다. 1944년 초에는 원래 폴란드의 서부 영토였다가 독일령으로 통합된 바르테가우(Warthegau) 지역으로 다시 이동하는데, 이 시점에서 그동안 손실된 병력의 보충을 위해 주로 벨로루시인 경찰부대, 그리고 소련군 포로나 범죄자로 인원을 보충받습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무장친위대 29사단(러시아 제1사단)으로 재편됩니다만, 열성자원의 유입은 부대의 기강이 악화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지휘관 카민스키도 무장친위대 소장으로 임관되고, 그동안의 전공에 대한 보상으로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만 부대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조치였죠.
사실 부대원들의 사기는 계속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서쪽으로의 철수 초기에야 이들도 독일군이 소련군을 쳐부수면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이후 전황이 계속 악화되면서 고향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기만 했습니다. 고향을 떠난지 몇 주 지나지 않아서 카민스키의 부하들은 싸워야 할 이유를 상실했을 뿐 아니라 외부인력을 보충받고 독일군 지휘체계에 편입되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고유성까지 박탈당했고, 설사 탈출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더라도 소련 당국으로부터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통감하면서 자포자기한 막장집단이 되고 맙니다. 결국 이들은 민간인을 약탈하는가 하면 진탕 취해서 독일군 병사들과 싸움질을 벌이거나 자기들끼리 싸움판을 벌였고, 정작 전투임무는 거절하는 도적집단 비슷한 존재가 되었는데 그 결정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 바르샤바였습니다.
바르샤바 봉기 진압을 맡은 친위대 보안군을 지원하러 출동하라는 히믈러의 명령을 받은 카민스키는 자신의 부관인 유리 프롤로프(Yuri Frolov) 중령에게 T34 전차 4대와 Su-76 자주포 1문, 몇문의 야포가 딸린 미혼의 병사 1,700명을 1연대로 편성하여 파견했는데, 중령은 휘하 병력에게 "무제한적인 강간과 약탈"을 허용했고 대부분의 병사들이 "무척 기쁘게" 그 지시를 수행했습니다-_-;; 사실상 카민스키 여단은 전투의지 따위는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여단장인 카민스키 자신도 민가에서 약탈품을 찾으러 다니는 형편이었지요. 여기서 카민스키의 부하들은 1만 명 가까운 시민을 학살합니다(그래도 딜레방거 여단보다는 덜 죽였습니다;;;). 만행을 명령한 프롤로프 중령은 후에 시가전에서 화염방사기에 맞아 사망하지요.
바르샤바에서 보인 카민스키 여단의 행태는 정말 개판 그 자체였고, 너무 안 싸운 탓에(그러면서도 병력은 500이나 잃었습니다) 시외로 돌려진 후에도 곳곳에서 손실을 입었습니다. 결국 친위대 수뇌부로서도 이들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게 되어 카민스키와 여단 지휘부는 국가의 재산을 훔친 죄로 전원 우치(Łódź, 독일명 Litzmannstadt. 영어로 로즈Lodz)에서 군사재판에 회부, 처형합니다. 카민스키의 부하들이 "기쁨을 통한 힘(Kraft durch Freude, KDF)"소속의 독일 소녀 두 명을 강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던 것 역시 게슈타포가 카민스키를 처형할 수밖에 없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죠.
카민스키가 처형되자 그와 부하들이 자기들 몫("러시아 해방 자금"이라는 이름을 붙였던)으로 챙기려고 계획했던 약탈품들은 모조리 히믈러에게 보내졌습니다(먼산). 카민스키의 부하들에게는 그가 폴란드 게릴라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는 거짓 해명이 전해졌지요. 부하들이 그 이야기를 믿으려들지 않자, 게슈타포는 카민스키의 차를 도랑에 처박은 다음 기관총을 갈기고 거위 피를 뿌려서 습격 현장을 조작했습니다. 그제야 사령관의 전사를 확신한 카민스키 여단은 빨치산 활동이 없는 북쪽으로 이동했지요.
이후 카민스키 여단이 받았던 친위대 29사단의 사단번호는 회수되어 "이탈리아 1사단"에 부여됩니다. 여단의 잔존병력은 안드레이 블라소프 장군의 러시아 해방군(ROA)에 편입할 예정이었으나 블라소프 장군이 이를 거부했죠. "용병이자 인간쓰레기"인 놈들을 자기 부대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고, 세심한 시험을 통과한 10%만을 자기 부대에 받아들이는데 동의합니다. 이때까지 이들을 따라온 민간인들은 포메라니아에 노동자로 보내졌고,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병력은 어디로 갔는지 확실하지 않네요. 30SS 사단으로 보내졌지 않았을까 싶은데, 확실히는 못 찾았습니다.
결국...카민스키 여단의 사례는, 사람은 확고하게 싸워야 할 목적이 있을 때, 그리고 그 목적이 자신의 집과 가족, 재산을 지키는 것일 때 싸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나선다는 의미가 될 듯 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잃는 순간,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고 방황하게 되는 것은 굳이 전쟁이 아닌 다른 일에 있어서도 별 차이가 없겠지요. 인생의 목적을 잃었을 때 방황하게 되는 사례는 굳이 전쟁사가 아니라도 흔하지 않습니까^^
딜레방거 여단과 더불어 독일군의 양대 막장으로 유명한 카민스키 여단이지만,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다르게 이들이 의도적으로 범죄자나 포로로 구성된 것도 아니었고 처음부터 막장도 아니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작성한 포스팅이라는 말과 함께 마무리.
참고자료 :
위키(영) -
29th Waffen Grenadier Division of the SS RONA (1st Russian)
30th Waffen Grenadier Division of the SS (2nd Russian)
Bronislav Kaminski
Kaminski Brigade
Lokot Autonomy
Reichsgau Wartheland
Warsaw Uprising
Time Life WWII Series - Soviet Juggernaut, EARL F. ZIEMKE, Time Life Books, 1980
현대게릴라전 연구(세계총서 vol.10) 중에서 <소비에트 전투게릴라>, 에른스트 폰 도나니, 세계,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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