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아메리카....

1862년 2월 21일 밸버디 전투, 북아메리카 최후의 창기병 돌격(下)

구름위 2012. 12. 26.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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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그 요새 일대 작전.
(사진출처 : http://www.forttours.com/images/congen255.jpg)



먼저, 앞 편에 넣었으면 좋았을 시블리 준장의 우회기동작전 요도입니다. 크레이그 요새 및 밸버디 여울의 위치가 잘 나와 있지요? 지도 오른쪽(동쪽) 중간에 있는 시블리 준장의 캠프가 20일 밤 150마리의 마필을 잃은 그 곳입니다.
서쪽에는 남군의 우회를 파악한 후 북군이 내선의 이점을 살려 여울목을 지키러 가는 경로가 나타납니다. 리오그란데 강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가면 앨버커키입니다.

자, 그럼 전투가 시작되는 단계로 넘어가 볼까요.


 

전투가 벌어진 밸버디 일대의 지도 - 이런, 일찌감치 스포일링이군요;
여기 소개한 두 개의 지도는 제리 톰슨(Jerry Thompson) 著,
<남군의 장군(Confederate General)>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진출처 : http://www.forttours.com/images/valverdemap.jpg)



남군이 동쪽 강둑에 도달한 것은 2월 21일 오전 8시경입니다. 이때 북군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었지만, 곧 서쪽 강둑에 나타난 북군은 맹포격을 가해 남군이 여울을 건너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때 북군 포병은 알렉산더 맥크레이 대위라는 노스 캐롤라이나 출신 장교가 지휘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나는 주가 아니라 국가에 충성한다!"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연방군에 남아 있었죠. 맥크레이 대위의 지휘는 맹렬했습니다. 하지만 이 대위가 텍사스 연대가 아닌 노스 캐롤라이나 연대를 상대로도 똑같이 싸울 수 있었을지는 솔직히 조금 의구심이 감-_-
6문의 24파운드 곡사포를 장비한 맥크레이 대위의 포병대가 맹포격을 퍼붓자 남군 선두가 밀려났고, 북군 병력은 야포의 엄호를 받으면서 강을 건너 적을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포탄 때문에 남군이 있는 풀밭에 화재가 발생한 것도 남군을 물러나게 만드는 데 한 몫 했지요. 남군은 북군에게 돌파되지는 않았으나 결국 숲 언저리까지 밀려났으며, 상당한 병력을 잃었습니다. 12파운드 야포도 북군에게 빼았겼고, 북군 기병들은 남군 대포를 올가미로 묶어 끌고 갔다고 합니다. 이때 입에 부상을 입은 텍사스 병사 하나는 칼을 꺼내 너덜거리는 자기 혀를 스스로 잘라냈다고 하네요.

그리고 이때, 텍사스인들이 준비한 비장의 카드 중 하나였던 창기병 중대, 50명이 뛰어나왔습니다. 2.7미터 길이의 창대에 30센티미터 길이의 날을 단 장창으로 무장한 이들은 위 지도에서 확인 가능한 마른 강바닥에 숨어 있다가 나팔 소리와 함께 기습적으로 달려나왔지요. 이때 이들과 북군 대열의 거리는 약 300미터였습니다.

======== 자, 여기서 잠깐 끊습니다^^ ===========

잠깐 생각해 보시죠. 보통 우리가 아는 "남북전쟁의 미국 기병"은 칼도 잘 쓰지 않고 권총 올인에 가까운 집단입니다. 아직 후장 연발총이 널리 퍼지지 않은 시기(전쟁 후기에는 북군이 다수 사용하긴 하지만)라서 연발로 쏠 수 있는 적당한 화기가 없었던 데다, 칼보다는 총을 좋아하는 미국 특성상 그렇기도 했고요. 그런데 기병으로 제대로 훈련받은 정규군 기병도 아니고 사실상 민병대인 남군에 어떻게 창기병이 존재했을까요?

그 근원을 알기 위해서는 약 15년하고 두 달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미국은 캘리포니아 등을 놓고 멕시코와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미국-멕시코 전쟁인데요, 이 전쟁이 한팜 벌어지던 와중인 1846년 12월 6일에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벌어진 샌 파스퀄 전투라는 싸움이 있었습니다. 이때 미군은 멕시코 비정규군이 휘두르는 기병창의 위력을 절실하게 체험했거든요. 밸버디 전투에서 창을 들고 나온 남군 기병들은 이때의 전훈을 모범으로 삼아 뛰쳐나온 것이었죠.

* 샌 파스퀄 전투에 대해서는 쓰다 보니 너무 길어져서 별도 포스팅으로 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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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남군은 한 가지 잊고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두 전투가 벌어질 때 여건이 서로 달랐다는 점이죠. 샌 파스퀄 전투 당시, 미군의 총은 대부분 새벽이슬에 젖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벨버디 전투에 임한 북군의 총은 젖어 있지 않았습니다(...).

남군 창기병의 돌격 정면에 있던 북군 지휘관은 남군이 100미터 거리에 다가올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리다가 간단히 외쳤습니다.

"텍사스 놈들이다! 뜨거운 맛을 보여줘라!"



북군 보병들이 가한 단 두 차례의 일제사격으로 남군 창기병들은 전멸했고, 20명 가량은 즉사했으며 나머지는 모조리 부상을 입었습니다. 살아돌아온 창병들은 그자리에서 애지중지하던 창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총으로 재무장했다고 하네요(먼산). 이로써 (아마도) 북미 최후의 창기병 돌격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남군의 창기병 반격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해서 북군이 딱히 유리해지지도 않았습니다. 오후까지 교착상태가 이어지자 북군 지휘관 캔비 대령은 예비로 남겨둔 카슨의 자원병 대대를 우익에 투입하여 전선을 돌파, 남군을 포위하려고 계획했는데 이 작전은 초기에는 잘 되어갔습니다. 문제는 카슨이 전진하는 동안 버티어야 할 좌익부대가 버티지 못했다는 거죠. 이틀이나 강에서 떨어져 행군한 데다 온종일 전투를 치르느라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었던 남군의 물에 대한 욕구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겼던 겁니다-_;;;
북군의 좌익은 물을 찾아 필사적으로 돌격하는 남군의 제파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3번째 돌격에 돌파당했고, 곡사포 진지도 빼았겼으며 매크레이 대위도 전사했습니다. 캔비 대령은 무사했으나 대신 말이 총에 맞았죠. 마침내 오후 5시에 북군은 크레이그 요새를 향해 총퇴각했습니다. 창기병 돌격이라는 뻘짓에도 불구하고 남군은 이겼고, 피로 물든 리오그란데로 내려가 그 물을 마셨습니다. 이 전투에서 발생한 북군의 최종 손실은 263명, 남군은 200여 명.

자, 그럼 남군의 뉴멕시코 침공작전이 어떻게 끝났는지 뒷이야기를 간략하게 해 볼까요?

이 전투 이후 남군은 언뜻 잘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북군의 신속한 후퇴 때문에 크레이그 요새를 빼았지 못했으므로 남군의 보급 사정은 극도로 나빴고, 그동안 잃은 말과 노새도 보충하지 못해 남군은 실질적으로 보병 중심으로 바뀐 상태였다고 해요. 크레이그 요새를 손에 넣을 가망이 없자 이들은 대신 북군의 또 다른 보급창고가 있는 앨버커키를 향해 북진하면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했습니다. 당연히 뉴멕시코인들의 텍사스에 대한 전통적인 반감은 UP(↑)되었지요.
하지만 보람없게도 이들이 앨버커키에 막 도착했을 때, 시내는 거의 무인지경이 되어 있었고 북군의 창고는 캔비의 명령에 따라 불타고 있었습니다. 잔뜩 기대하고 있던 물자가 사라진 것에 실망한 남군은 주민들을 약탈했고, 자연히 민심은 더 멀어졌습니다. 계속 전진한 남군은 역시 무인지경이 된 주도 산타페를 3월 13일에 무혈 점령했으며 뉴멕시코 주정부는 라스베가스로 옮겨갔습니다. 껍데기만 차지했을지언정, 텍사스인들은 숙원을 풀었기 때문인지 사기가 올랐습니다.

하지만 이 거지떼같은 행군이 영속적인 성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죠. 기껏 점령한 산타페 역시 물자라곤 없었고, 인근 지역의 모든 북군 물자는 지나쳐온 크레이그 요새와 동쪽에 있는 유니온 요새에 있었습니다. 텍사스에서 오는 길이 크레이그 요새로 가로막혀 있으므로 본국으로부터의 보급도 불가능했고 말이죠.
그리고 이런 남군을 향해 콜로라도에서 모집된 북군 의용병 부대가 달려왔습니다. 이들은 13일만에 640km를 달려 3월 11일에 유니온 요새에 도착했고, 기다리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곧바로 전투에 나섰습니다. 곧이어 벌어진 아파치 협곡 전투, 글로리에타 전투는 모두 북군의 콜로라도 병사들의 승리로 돌아갔고 남군의 텍사스 병사들은 패배를 곱씹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후방으로 침투한 북군 별동대에게 남군의 생명선이었던 80대의 보급마차가 모조리 파괴되고, 500~600마리나 되는 말과 노새도 모조리 죽임을 당하자 남군은 더 이상 버틸 수조차 없게 되었죠. 싸울 기력을 잃은 남군은 산타페로 철수했습니다.

4월이 되자 마침내 캔비도 남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캔비가 앨버커키를 공격할 움직임을 보이자 산타페에서 굶주리고 있던 남군은 최후의 보급품을 지키기 위해 앨버커키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캔비의 의도는 남군과 싸우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냥 끌어내서 텍사스로 보내는 것, 그것뿐이었거든요. 굶주리고 약해진 남군을 이기는 거야 쉽겠지만, 그랬다가는 수백 명의 부상병을 포로로 잡게 될 것이고 그들을 먹여살려야 할 것이었기 때문이죠. 그것은 너무 큰 부담이었습니다.
남군 역시 고이 보내주겠다는 캔비의 의도를 알고 서둘러 빠져나갔죠. 이들은 결국 텍사스로 돌아가기는 했으나, 대략 1/3은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텍사스를 출발할 때는 3500명이던 것이, 500명은 전사 혹은 병사하고 500명은 탈영했거나 포로가 되었죠. 이것으로 남군의 뉴멕시코 진공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으음, 처음에는 시대에 뒤진 창기병 돌격이라는 뻘짓거리 하나에 대해서만 다루려던 것이 본의 아니게 길어져 버렸군요. 재미있게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중간에 예화로 다루었던 샌 파스퀄 전투에 대한 포스팅은 가급적 서두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그쪽은 여기서 삽입하려고 쓰다가 뺀 거라, 내용도 거의 다 됐으니까요^^;



참고자료 :

피와 천둥의 시대, 햄튼 사이즈, 갈라파고스, 2009

http://www.forttours.com/pages/valverde.asp
http://www.militarymuseum.org/SanPasqual.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