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버디 전투에 대한 앞 포스팅에서 중간에 언급했던 샌 파스퀄 전투입니다. 이 전투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미국-멕시코 전쟁에 대해서 간단하게라도 언급을 해야 하지요.
이때 미국은 캘리포니아 등의 영유권을 놓고 멕시코와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캘리포니아는 프레몬트 탐험대에 의해 일시 점령되기는 했으나 곧 미국인의 통치를 거부하는 히스패닉 주민들의 대대적인 봉기가 일어나 일시 전세가 뒤집힌 상황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소수의 탐험대 및 현지 동조자만으로 광대한 캘리포니아 전체를 장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거든요. 친멕시코 파의 원주민들은 샌디에이고를 제외한 모든 도시에서 미국인들을 몰아낸 상태였습니다. 샌디에이고는 미국 태평양함대의 군함 몇 척이 정박하고 있었던 덕에 버틴 거였고요.
존 C. 프레몬트(John C. Frémont, 1813~1890). 사진은 남북전쟁 중 장군으로 복무할 때의 것.
(사진출처 : http://explorepahistory.com/images/ExplorePAHistory-a0b1g0-a_349.jpg)
한편 샌 파스퀄 전투에 참가한 커니 장군 휘하의 용기병 부대 300명은 프레몬트 대위가 캘리포니아를 "해방"한 사실을 모르고 뉴멕시코를 거쳐 캘리포니아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임무가 진짜 캘리포니아 해방이었죠. 사실 프레몬트 탐험대는 멕시코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파견된 것으로, 대륙횡단을 위한 적절한 루트를 탐색하는 것이 본래 임무였습니다. 하지만 긴 여행을 끝내고 캘리포니아에 와 보니 어느새 전쟁이 터져 있었고, 기왕 가지고 있던 무장으로 멕시코 주둔군에 전투를 건 것이 대박을 터뜨렸던 겁니다.
스티븐 와츠 커니(Stephen Watts Kearny, 1794~1848).
(사진출처 : http://www.nmmagazine.com/imgs/memorias/memorias_kearny.jpg)
뉴멕시코의 멕시코 총독을 축출하고 신정부를 수립한 후, 캘리포니아를 향하던 커니 장군은 이 소식을 가지고 캘리포니아에서 온 키트 카슨을 만나 사태를 파악하자 맥이 탁 풀렸습니다. 그래도 일단 명령을 받은만큼 캘리포니아까지 가기는 해야 했으므로 카슨에게 길안내를 부탁하지요. 카슨은 처음에는 워싱턴까지 보고서를 가지고 가겠다는 프레몬트와의 약속을 깨는 것을 마땅치 않아 했지만, 결국 커니 일행의 설득에 넘어가 보고서는 다른 안내인을 시켜 워싱턴으로 보내고 카슨은 커니 장군과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가게 됩니다. 한편 캘리포니아의 상황이 낙관적이라고 생각한 커니는 휘하의 용기병 300명 중 200명은 뉴멕시코로 돌려보내 혹시 있을지 모르는 멕시코군의 반격 및 인디언의 습격에 대한 방어를 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1백 명만 데리고 진군을 하다가....샌디에이고에 거의 다 간 상황에서 멕시코군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단 이는 멕시코 정규군은 아니고 칼리포르니오(californio)라고 하는 히스패닉 계 캘리포니아인으로 구성된 민병대였지요. 이들의 지도자는 안드레스 피코라는 히스패닉 유지였습니다.
(사진출처 : http://www.militarymuseum.org/Resources/AndresPico.jpg)
이때 커니 장군 휘하의 미군은 용기병대 약 1백 명 이외에, 인디언 안내인 및 현지인 동조자, 캘리포니아에 접어든 후 합류한 해병대 39명을 포함해서 179~200명 가량이었으며 3문의 소구경 야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피코가 앞에 있다는 것도 12월 5일에 샌디에이고에서 그를 마중온 해병들이 알려준 정보였죠.
하지만 미군 용기병들 중 제대로 된 말을 가진 이는 1/3 뿐, 나머지는 노새를 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동쪽에서 미주리를 출발하여 인디언 영토를 통과하고 소노라 사막을 건너 3,200km나 되는 행군을 한 끝에 캘리포니아에 막 도착했기 때문에 지쳐 있었지만, 싸울 기회가 왔다는 사실에 다소 신이 나 있었습니다. 여기서 샌디에이고까지는 아직 50km쯤 남아있었고요.
하지만 미군은 지쳐 있었고 말과 노새들도 상태가 좋지 않았으므로, 정면으로 싸운다는 것은 좋지 않았습니다. 피코가 지휘하는 100여 명의 히스패닉계 캘리포니아인들은 모두 기병으로, 이들의 승마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들의 말은 잘 먹고 충분히 휴식을 취해 원기가 왕성한데 비해 미군 쪽은 기병의 1/3만 말을 탄 데다(이미 말했지만 나머지는 노새) 그나마 지쳐 있었죠. 때문에 커니 장군은 피코가 자신들의 접근을 알기 전에 척후를 보내 한밤중에 캘리포니아인들의 말을 훔쳐옴으로서 상황을 역전시키려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척후병들이 마을에서 너무 조급하게 굴다가 소리를 내서 들켜버렸거든요. 게다가 그중 멍청한 한 명은 US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힌 푸른 군복 상의를 마을에 놓고 왔습니다-_-
하지만 이때까지도 커니 장군에게는 승산이 있었습니다. 캘리포니아인들은 미군이 근처에 있다는 것은 알 것이지만 이쪽의 확실한 형편은 모르므로, 숫적 우세를 이용해서 새벽을 틈타 기습한다면 이길 수도 있었거든요. 때문에 장군은 자고 있는 병사들을 깨워 얼른 골짜기를 내려갔습니다만, 명령 전달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속보!"라는 지시를 받은 선두의 장교가 "돌격!"으로 잘못 알아듣고 내달리는 바람에, 부대가 분리되고 말았죠. 제대로 된 말을 탄 1/3과 노새를 탄 나머지로 말입니다. 장군은 불행히도 노새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앞으로 달려나간 병력을 지휘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어요.
그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미군이 접근하고 있음을 깨닫고 말에 올라탄 채 차후 작전을 논의하고 있던 캘리포니아인들은 느닷없이 미국인들이 돌격해오자 깜짝 놀랐고, 잠시 사격전을 벌이다가 곧 후퇴했습니다. 곧 달려온 미군들도 총을 쏘아댔으나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탓에 대부분의 총이 사막을 건너는 동안 녹이 슬거나 새벽의 습기에 절어서 탄환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칼을 뽑아 들고 추격해야 했지요. 캘리포니아인들도 일단은 계속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도망치면서 뒤를 돌아보니 이게 상황이 웃기는 겁니다. 쫓아오는 미군들은 그 숫자도 적고, 말 상태도 형편없었으니까요. 이건 만만한 상대라고 본 캘리포니아인들은 즉시 말머리를 돌려 미군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이와 같이 전술적 대응이 상당히 유연한 것도 비정규군이 갖는 특성 중 하나죠.
네, 바로 이 캘리포니아 기병들이 창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겁니다-_-
미군 기병들은 자루 길이만 2.7미터나 되는 전시대적인 무기에 순간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상대를 비웃었지만 다음 순간 창날이 몸을 꿰뚫기 시작했죠. 미군들의 기병총은 젖어서 발사가 되지 않으니 몽둥이 정도 역할밖에 못 했고, 기병도는 길이가 짧아 창에 맞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권총은 쓸 수 있었지만 장전된 총탄 몇 발을 쏘고 나면 말 위에서는 재장전이 거의 불가능했으니 이래서야 창을 휘두르는 적에게 접근하는 것조차 난감했죠. 결국 미군 용기병 거의 전원에 이 창에 맞아 부상을 입었습니다.
캘리포니아인들의 기발한 무기는 기병창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것도 있었지요.
(사진출처 : http://www.rawhidereata.com/pb/images/img1444574215b19b1f.jpg)
이것만 가지고는 무슨 용도의 물건인지 잘 알아보지 못할 분도 계실 겁니다. 사용중인 모습을 하나 더 보여드리지요.
이젠 확실히 아시겠죠? 바로 올가미였습니다. 당시 멕시코에는 이런 속담들이 있었다는군요.
"캘리포니아인은 올가미를 발로 던져도 다른 멕시코인이 손으로 던지는 것보다 잘 던진다."
"캘리포니아인에게 안장은 집이고, 말은 제2의 자아이고, 창과 올가미는 남자다운 운동이다."
15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미군 기병들은 말 그대로 처발렸습니다. 사방에서 창이 날아드는가 하면,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날아든 올가미가 사람을 나꿔채서는 그대로 바닥에 처박았으니까요. 올가미에 낚여 땅바닥에 나뒹구는 기병의 몸에는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모르는 창날이 박혀들었습니다. 그나마 미군 전원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면 그래도 형편이 좀 나았을 텐데, 너무 달리다가 상태가 좋은 말을 탄 병사부터 축차적으로 뛰어들었으니 차례로 다구리를 당한 거지요. 이렇게 선두가 처발리는 사이 헐레벌떡 당도한 뒷쪽 열의 병사들이 전투에 가담하고, 포병들이 서둘러 대포를 거치하고 쏘기 시작하자 숫적으로 열세인 캘리포니아인들은 그제야 물러갔습니다. 그러면서도 대포 3문 중 하나를 올가미로 낚아채서 끌고 갔지요.
이 전투에서 미군은 21명(위키에 의하면 17명)이 전사하고 다수의 중경상자를 냈습니다. 이에 반해 멕시코군의 사상자는 전사 2명에 부상 12명 뿐이었다고 하네요. 뒤늦게 전투에 뛰어든 커니 장군도 두 군데를 창에 찔렸지만, 킷 카슨은 캘리포니아인들과 말을 타고 싸운다는 게 얼마나 바보짓인지 너무도 잘 알았으므로 난전에 뛰어들지 않고 기회를 보아 총만 쏘고 있었던 덕에 다치지 않았습니다.
이 전투는 끝까지 전장에 남아 있었던 미군이 이긴 것으로 간주되긴 합니다만, 미국-멕시코 전쟁 사상 가장 큰 피해(물론 상대적으로)를 입은 승리이자 미군이 거둔 가장 쪽팔린 승리로 꼽힌다고 합니다. 몇 배나 되는 피해를 입으면서도 적을 격파한 것도 아니고, 피코의 기병대는 말짱한 데다 곡사포 사정거리 바로 밖을 계속 맴돌면서 한번 더 칠 기회만 노리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인근의 캘리포니아인들이 몰려들어 그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쯤 되면 커니 장군으로서는 전멸을 각오해야 했지요. 하지만 다수의 부상자와 힘 빠진 말과 노새를 거느리고는 도저히 평원을 지나 샌디에이고로 갈 수 없었습니다. 결국 샌디에이고를 50km(위키에 의하면 45km) 남겨둔 언덕 위에서 이들은 농성을 위한 야영지를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커니와 부하들은 식량이 떨어져 노새를 잡아먹어야 할 만큼 보급사정이 좋지 못했고, 어서 샌디에이고에 가지 못한다면 싸우다 죽지 않더라도 굶어죽게 될 판이었습니다. 결국 커니 장군은 샌디에이고를 점령하고 있는 해군에게 추가지원을 요청하기로 하고 카슨을 보냅니다. 카슨은 이 임무에 기꺼이 자원했고, 해군 중위 한 명과 인디언 안내인만 데리고 밤을 틈타 캠프를 빠져나갔습니다. 놀랍게도 이들은 모두 멕시코인들의 포위망을 뚫고 샌디에이고에 도착했으며, 해군은 200명의 구원부대를 보내 피코를 쫓아내고 커니를 구출했습니다. 이로써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미군의 가장 쪽팔린 승리, 샌 파스퀄 전투는 끝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기병창에 놀라움을 느낀 사람들 중 일부가 밸버디 전투에서 그 영광을 재현하고자 들고 나온 것이죠 ㅋㅋㅋ
어떻게, 재미있으셨나 모르겠습니다?^^
덧. 역시 미국이다 보니 샌 파스퀄 전투의 리인액트도 있습니다.
아마 캘리포니아에 사는 히스패닉들이 주로 즐기는 행사가 아닐까 싶군요^^
참고자료 :
피와 천둥의 시대, 햄튼 사이즈, 갈라파고스, 2009
http://www.forttours.com/pages/valverde.asp
http://www.militarymuseum.org/SanPasqual.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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