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아메리카....

1862년 2월 21일 밸버디 전투, 북아메리카 최후의 창기병 돌격(上)

구름위 2012. 12. 26.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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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당시 남부와 북부의 세력권.
(사진출처 : http://firstencounter.pbworks.com/f/civil%20war%20map.gif)



1862년 2월 21일, 오늘날의 뉴멕시코 주에 속하는 밸버디(Valverde 원래 의미는 "푸른 골짜기." 스페인어로 읽으면 발베르데?)라는 퇴락한 마을에서 두 군대 사이에 전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지요. 그럼 본편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이 전투가 "왜" 벌어진 것인지에 대해 잠깐 둘러볼까요?


 

서로 노려보는 남군과 북군의 병사.
(사진출처 : http://riverdaughter.files.wordpress.com/2009/06/civil-war-soldiers2.jpg)



여기 오시는 분들은 다들 아시겠지만 미국은 딱 한 번 내전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남북전쟁이라고 부르고 미국인들은 내전Civil War 혹은 주 사이의 전쟁War Between the States라고 부르는 전쟁이죠.

이 전쟁에 대해서 보통 우리가 아는 역사는 게티즈버그, 아틀랜타, 빅스버그 등 주로 동부 지역 전선에서 벌어진 전투와 해상봉쇄 정도인데 사실 이건 어쩔 수 없는 결과에요. 남북 양측의 수도가 코앞에 있으니, 버지니아에서 주력이 충돌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전쟁은 동부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부에서도 전쟁은 있었어요. 이번 포스팅도 서부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1862년 2월, 루이지애나 출신의 남군 장성 헨리 홉킨스 시블리 준장은 3,500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텍사스주 엘파소를 출발했습니다. 다수의 기병으로 구성된 남군은 대부분 사냥총과 권총 정도로 빈약하게 무장하고 있었으나 사기는 높았고, 태평양까지 진군할 꿈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1차 목표는 콜로라도의 금광을 빼았아 남군의 군자금으로 하는 것이었고, 더 나아가 유타와 캘리포니아를 정복하여 태평양까지 노예제를 전파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죠. 지휘관인 시블리 준장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멕시코 영토인 소노라, 치와와, 바하 캘리포니아도 정복하든 매입하든 해서 몽땅 차지할 구상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대로 과대망상 인증
엘파소를 떠나 뉴멕시코로 들어선 시블리의 부대를 막아선 첫 번째 장애물은 산타페에서 240km 떨어진 크레이그 요새였습니다. 저항세력으,로서 북군의 존재 뿐 아니라, 보급에 곤란을 겪고 있는 시블리로서는 꼭 크레이그 요새를 함락하여 탄약, 식량 등 보급품을 노획할 필요가 있었지요. 그리고 시블리 준장은 남북전쟁이 발발하던 그 시점까지 연방군 소속으로 바로 이 크레이그 요새에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그 허실을 모조리 알고 있었습니다.

켄터키 출신으로 시블리의 절친한 친구인 에드워드 캔비 대령이 지휘하는 북군 수비대는 4천 명으로, 숫자는 시블리의 남군보다 우세했지만 그 점 말고는 그다지 형편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들 중 전쟁 전부터 있던 정규군 병력은 1200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뉴멕시코 현지에서 모집한 의용병이었는데, 이 얼마 안 되는 정규군 중 대다수가 또 남부 출신이었다는군요. 뉴멕시코 일대의 연방군 장교 중 절반은 전쟁이 터지자 사직한 후 남군으로 갔고, 시블리는 그중 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남부 출신 사병들이 장교들처럼 군대를 떠나지 않은 건 장교는 사표 쓰면 그만이었지만 사병들은 탈영병이 되어 범죄자 취급을 받기 때문이었거든요. 당연히 캔비 대령으로서는 이들의 충성심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쟁이 시작한 뒤에 입대한 의용병이라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뉴멕시코라는 지역의 특성상 이들 의용병은 당연하게도 거의 전원이 히스패닉이었고, 이들 의용병들이 남북전쟁의 발발 배경이나 연방정부의 대의에 대해 아무 지식도 없고 어느 편이 이기건 관심이 없었다는 건 자명했습니다. 대부분 영어도 할 줄 모르는 의용병들은 백인 장교들의 명령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위기 상황에서는 혼란에 빠질 가능성이 컸습니다. 때문에 캔비 대령은 이들도 믿지 않았고, 히스패닉 의용병이 탈영했다는 보고를 받으면 "우리 전력이 더 강해졌군-_-"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대부분의 미국인 장교들이 잘 모르는 스팀팩이 하나 있었습니다. 뭐냐고요? 간단합니다.


"텍사스인들이 쳐들어온다!"



....는 한 마디면 모든 설명이 필요없었습니다(...)

텍사스는 멕시코에서 분리된 1830년대부터 줄기차게 뉴멕시코를 병합하려고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텍사스인들의 구호는 "리오그란데가 텍사스의 경계다!"갑자기 어느 분들이 마구 떠오르는라는 것이었고, 콜로라도에 있는 리오그란데의 발원지까지 텍사스가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메마르고 쓸모없는 땅이라고 경멸하면서도 자기네가 가져야 한다고 한 건 도대체 무슨 심리인지?
이를 위해 텍사스인들은 말 뿐만 아니라 뉴멕시코에 대한 무력 침입도 감행했는데, 미국-멕시코 전쟁 직전에 발생한 이 침입에서 텍사스 부대는 멕시코군에게 격파당해 생존자 전원이 멕시코시티까지 끌려가 수감되었을 정도입니다. 두 지역 모두 미국 영토가 된 뒤에도 텍사스는 꾸준히 뉴멕시코를 병합하려고 했고 연방정부가 제동을 걸어 막아놓은 상태였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으니 뉴멕시코 주민들에게 있어서 텍사스인들의 침입이 주는 감정은 한국인들이 "왜놈들이 쳐들어왔다!"는 소리를 듣고 느끼는 것과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먼산). 그리고 이번에 쳐들어온 남군은 거의 전원이 텍사스 출신들이었으며, 부족한 보급품을 조달하기 위해 뉴멕시코 주민들을 약탈하고 여자들을 "착복"했습니다. 그런 주제에 뉴멕시코 주민들이 텍사스에의 합병을 바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니 웃기는 일이죠.

하지만 북군 수비대는 대부분이 보병이었으므로 훈련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들판으로 나갈 경우 남군의 기병대에게 농락당할 가능성이 컸고, 이를 우려한 캔비 대령은 시블리가 어떤 미끼를 던지든 요새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마침 산타페에서 보급물자가 도착한 뒤여서 농성할 물자는 충분했고, 바로 그 물자가 보급에 문제가 있는 남군의 최대 목표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때문에 캔비 대령은 토담을 쌓아 요새의 방벽을 강화하고 많은 대포를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2월 16일에 요새 앞에 도착한 시블리 준장은 자기가 재임할 때보다 강화된 요새를 보고 공성전을 포기, 일단 요새를 우회하기로 합니다. 전투도 한번 하지 않은 상태에서 벌써 500명에 달하는 병사를 천연두, 폐렴, 탈진, 아파치의 공격으로 잃은 시블리로서는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거든요. 하지만 사실 캔비가 설치한 대포는 진짜가 아니라 검게 칠한 소나무 기둥이었는데 말이죠(...)

캔비와 시블리는 상대방을 잘 알았고, 자신이 원하는 전장으로 상대를 끌어들일 수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캔비는 요새 밖으로 절대 나오지 않을 것이었고 시블리는 요새로 돌격하지 않을 게 분명했죠. 이에 시블리 준장은 결국 크레이그 요새를 우회하기로 결정합니다. 요새에서 보이지 않는 메사(바위산) 뒤편으로 돌아 요새 후방의 밸버디() 여울을 점거, 이곳을 지나는 북군의 보급로를 끊는다는 이 계획은 제대로 성공하면 북군을 요새에서 끌어내 야전을 치르도록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 계획의 단점은 스스로 북군 후방으로 들어감으로써 남군 역시 보급로를 끊기게 된다는 점이었지요.


 

빨간 별이 밸버디, 원이 크레이그 요새의 대략적인 위치입니다.



하여간 시블리 준장의 결정에 따라 2,500명의 남군은 18일에 크레이그 요새 전면을 떠나 우회기동을 시작합니다. 캔비 대령은 처음에는 남군이 다른 방면에서 요새를 강습하려는 줄 알았지만, 정찰을 위해 출동한 1의용대대장 키트 카슨이 남군의 의도를 올바르게 파악함에 따라 요새 밖으로 나가 남군을 요격하기로 결정합니다. 남군의 의도대로 되는 셈이긴 했지만, 남군 역시 요새를 우회하느라 리오그란데 강을 벗어나 물도 없는 산악지역으로 들어가 행군하자면 심히 고생을 해야 하는 데다가 리오그란데 강을 장애물로 이용할 수 있으므로 북군이 딱히 많이 불리해질 것은 없다고 본 거지요. 게다가 캔비 대령은 남군이 숙영을 준비하는 야밤에 폭탄을 터뜨려 안 그래도 목이 말라 스트레스가 쌓인 남군의 말과 노새를 무려 150필이나 물을 찾아 도망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마필은 강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북군이 홀랑 먹었지요.

그리고 2월 21일 아침, 마침내 밸버디에 도착한 남군은 강 동쪽 둑에 진을 친 다음 조금 늦게 강 서쪽에 도착한 북군과 여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게 됩니다. 시블리 준장이 바라고 바라던 결전이 드디어 벌어지게 된 것이죠. 뉴멕시코 일대의 지배권을 둘러싼 밸버디 전투의 막이 드디어 올랐습니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