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前드레드노트급 전함(Pre-Dreadnought)의 무장 배치
근대적인 前드레드노트급 전함(Pre-Dreadnought)으로부터 2차대전기의 16, 18인치 포를 탑재한 괴물들에 이르기까지, 약 50여 년 동안 전함이라는 물건은 아주 숨 가쁘게 진화해왔습니다. 해군의 전체 역사에 비하면 50년이라는 세월이 그다지 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前드레드노트급 전함과 최후세대의 아이오와·야마토·뱅가드 등과는 별로 공통점이 없어 보일 정도죠. 그런 변화의 과정을 찬찬히 살펴보는 것도 전함이라는 병기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리라 생각합니다.
1859년에 건조된 세계 최초의 장갑함인 프랑스의 글르아나 그 대항함인 영국의 워리어 등 1세대의 장갑함들은 무장 배치 면에서 사실상 이전의 범장 전열함들과 거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허나 때는 해군에도 기술 혁신에 따른 변화의 칼바람이 불던 19세기였으므로, 그 이후 각국 해군마다 다종·다양한 함종과 무장배치를 모색하는 과도기가 찾아오죠. 이 시기를 제대로 다루자면 무장 탑재방식의 변화(포탑의 발달 등)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복잡한 얘기가 별도의 글로 작성해야 할 정도로 얽히므로 생략하고 넘어가겠습니다.
[前드레드노트급 전함의 첫 주자 로열 서브린]
이런저런 과도기적 형태들이 모색된 가운데, 1890년대에 이르면 여러 가지 특성 면에서 비로소 前드레드노트급 전함의 효시라 할 만한 군함이 등장합니다. 바로 1892년에 건조된 영국의 로열 서브린(Royal Sovereign)이죠. 로열 서브린 급에서 최초로..
① 건현이 높고 항양성이 있는 선체를 채택
② 갑판 전·후에 각각 2문의 중포(12인치급)를 배치하고 그 사이의 현측에 몇 문의 부포(주로 6인치급)를 포곽(casemate) 형태로 배치
한다는 원칙이 정립되었던 것입니다.
[준 드레드노트급 전함 아가멤논. 기존의 부포 외에도 9.2인치 부포가 포탑 형태로 탑재되었죠]
이후 주포가 노출된 바벳 형태에서 포탑 형태로 바뀌는 등의 변화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로열 서브린의 무장 배치방식이 후대의 前드레드노트급 전함에서도 답습되었죠. 1900년 이후부터는 보다 대구경의 부포(8~9.2인치)를 탑재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러일전쟁 이후에 건조된 준 드레드노트급 전함들(Semi-Dreadnought)은 대부분 8~9.2인치의 대구경 부포들을 주포와 마찬가지로 포탑화 하여 갑판 좌우의 양 측면에 배치하는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2. 드레드노트(Dreadnought)의 시대
1906년, 영국은 <단일거포전함(All Big Gun Ship)> 이론에 따라 모든 부포를 폐지한 채 오로지 10문의 12인치 주포만을 탑재하고, 사상 최초로 증기터빈을 추진기관으로 채택하여 21노트라는 고속을 달성한 신형 전함 ‘드레드노트(Dreadnought)’호를 취역시켰습니다. 이는 건함사에 있어서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고 신형함 1척의 이름이 그대로 새 세대의 전함들을 대표하는 명칭이 되어 드레드노트급 전함들의 시대가 개막되었죠.
[드레드노트 호. 이전 시대의 무장 배치 형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독일 최초의 드레드노트인 나싸우급. 이 경우는 준 드레드노트 때의 배치 형태를 그대로 답습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런 혁신적 요소와는 달리, 드레드노트는 무장 배치에 있어서는 이전 시대 전함들의 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여 함체 측면에 2기의 포탑을 양 날개 식으로 배치했습니다. 이 방식의 문제점은 좌현이든 우현이든 측면 방향으로 포격할 때 날개 부분의 포탑 1기는 놀고 있게 된다는 것이죠. 때문에 해군 일각에서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써 순양전함 인빈시블에서 채택한 것이 측면의 포탑을 서로 엇갈리게 배치하는 방식, 통칭 ‘앙-에슐론(En-echelon)’입니다. 본래 앙-에슐론은 충각전법이 해군전술의 대세였던 1880년대 경에 ‘중앙포탑함(Central turret Ship)’ 이라는 함형에 채택된 방식이었는데, 이는 적함에 충돌하기 위해 돌격하는 중에도 함의 화력을 전방으로 100% 발휘하고자 하는데서 유래된 것입니다. (물론 드레드노트급 전함 시대의 앙-에슐론 배치는 저것과는 조금 목적이 다릅니다)
(※ 오류 수정(11.7) : 인빈시블의 앙-에슐론식 배치는 드레드노트에 적용된 양날개 형식의 배치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전함들은 1907년에 첫 기공되는 세인트 빈센트 급 때까지 양날개 형식의 배치를 유지했습니다. (또한 드레드노트와 인빈시블은 같은 시기에 설계되었습니다) 영국해군에게 있어서 앙-에슐론이 양날개 형식의 완전한 대안으로 자리잡은 것이 과연 맞는지, 만약 그러하다면 순양전함에 적용된 앙-에슐론식 배치가 전함에까지 적용되는데 왜 2년 가까운 시간차가 있었는지 좀 더 꼼꼼히 따져봐야 할 문제로 보입니다. -???님의 지적으로 2007. 11. 7 수정-)
[이탈리아의 중앙포탑함 듀일리오]
[앙-에슐론 방식이 적용된 영국과 독일의 순양전함들]
이론상 인빈시블의 앙-에슐론 배치는 좌·우 어느 쪽으로도 탑재하고 있는 포탑 4기를 전부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실제로는 함 중앙의 2, 3번 포탑이 서로 지나치게 가까웠기 때문에 사계가 잘 확보되지 않았고 부가적으로 함체에의 충격, 충격파로 인한 갑판 손상 등으로 인해 반대쪽 현측으로의 사격은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문제는 뒤이어 건조되는 인디패티거블 급에서 중앙부 포탑간의 간격을 넓힘으로써 개선되었죠.
그러나 앙-에슐론 방식의 채택 후에도 포탑 지향의 문제는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엇갈린 배치를 통해 반대쪽 현측으로 사격을 할 수 있다 해도 상부 구조물이나 반대쪽에 위치한 포탑 등으로 인해 사계는 여전히 좁았고 각도에 따라서는 여전히 한쪽의 포탑을 사용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3. 적층식 포탑 배치(Superfiring Turret)
단일거포전함 이론에 따라 각국에서 새로운 건함 형태를 모색하던 1904년 무렵, 미국에서도 사우스캐롤라이나라는 이름의 드레드노트형 전함이 한창 설계 중에 있었습니다. ‘새로운 전함의 무장 배치는 어떤 식으로 되어야 할까?’ 대부분의 설계관들이 前드레드노트급의 그것을 별다른 개선 없이 적용하려고 했지만, 단 한 명―수석 설계관인 워싱턴 L. 캡스(Washington L. Capps)―만은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죠.
캡스는 전함을 개함 단위가 아닌 ‘전열’을 이루는 구성 요소로써 인식했습니다. 이쪽 전열의 상대는 결국 이쪽 전열의 어느 한 방향에만 위치할 적 전열... 그렇다면 기존의 전함처럼 여러 방향으로의 사격 가능성을 고려할 필요는 없어지는 것이고, 포탑은 가급적 선체 중심선상에 일직선상으로 배치하는 것이 바람직할 터였습니다. 하지만 배의 길이나 공간 문제 등을 고려해볼 때 다수의 포탑을 모두 일직선상에서 배치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캡스는 적층식 포탑 배치(Superfiring Turret)를 고안해냈습니다. 이는 복수의 포탑을 단차를 두고 배치하는 것으로써, 이를테면 일반적인 2차대전 시기의 전함에서 1번 포탑과 2번 포탑이 높이를 달리하여 나란히 모여있는 것 등이 대표적인 적층식 배치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최초의 드레드노트인 사우스 캐롤라이나. 2개의 포탑이 단차를 이루며 설치되어 완전한 일직선상의 배치를 완성하였죠]
그러나 발전과 진보는 항상 시행착오와 암중모색의 과정을 거치는 법이며 적층식 배치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적층식 배치가 기술적으로 별 문제가 없다는걸 아는 우리들로서는 좀 우스운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이런 사실이 미지의 영역에 속했던 당시 사람들은 혹시나 포탑의 바로 위에서 다른 포가 발사되면 ‘종효과’ 마냥, 밑에 있는 포나 포탑 안의 장비·인원에게 어떤 악영향 같은게 있지 않은가 진지하게 걱정했던 모양입니다. 새장형 마스트 때와 마찬가지로 새 전함에 적용될 여러 신기술들에 대해 많은 논란이 일자, 미 해군은 1907년 3월에 2연장 포탑을 지닌 모니터함 플로리다함의 포 1문을 포탑 위로 옮긴 후 실사격을 해보는 실험을 실시했죠. (충격파가 포탑 내부에 미칠 영향을 실험하느라 안에 동물을 집어넣기도 했다고 함.-_-;)
[독일의 순양전함 몰트케. 영국과 독일은 우선 후부에만 적층식 배치를 적용하고 앙-에슐론을 혼용하는 식으로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시피 당연히 별 문제없다는 것이었고 그 이후 미국을 포함한 각국 전함에서 적층식 배치가 일반화되었습니다. 영국의 경우 1909년에 기공된 넵튠 급에서 실험적으로 후미에 적층식 배치를 적용하였고, 이후 최초의 超드레드노트급 전함인 오라이온 급에서 전면적으로 적층식 배치를 도입함으로써 일직선상의 포탑 배치를 완성했죠. (독일은 카이저 급에서 실험적 적용 후 쾨니히 급부터 전면 적용.)
(※ 보충(11.7) : 영국이 최초에 적층식 배치를 후미에만 적용했던 것은 중량배분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전방에 포탑들이 몰리면 함수가 무거워져서 능파성이 나빠질거라 여겼던 것이죠. -2007. 11. 7 보충-)
4. 다연장 포탑화 및 중앙부 포탑의 폐지
적층식 배치가 일반화된 이후 1911년경에 이르면 각국의 전함들은 13.5~14인치 주포를 2연장 포탑 형태로 5기(10문) 정도 탑재하는 것이 대체적인 표준선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대체로 함교 전방에 적층식으로 2기, 중앙부에 1~2기, 그리고 후미에 다시 적층식으로 1~2기를 배치하곤 했으며 심한 경우 영국의 에이진코트처럼 포탑이 7기나 되는 경우도 있었죠. 적층식 배치가 실용화됐다고는 하나 이 정도 수의 포탑을 일직선상으로 배치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고, 배의 길이가 지나치게 늘어난다든가 포탑의 배치 간격이 길어지다 보니 살포계(탄착군)가 넓어진다든가 하는 문제가 나타나곤 했습니다. 허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이상 화력을 증강해야 할 경우의 문제였죠.
[2연장 다포탑의 정점이라 할 전함 에이진코트. 포탑이 무려 7기-_-;]
화력 증강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나누어 ① 주포를 보다 대구경화 한다, ② 주포의 탑재수를 늘린다 등 2가지입니다. 물론 주포의 탑재수를 늘리는 것도 다시 종래의 2연장 포탑을 고수한 채 단순히 포탑 수만 늘리는가, 아니면 포탑을 다연장화 하여 가급적 적은 포탑 수를 유지하는가 하는 복잡한 문제가 걸리게 됩니다만. 허나 발전과 진보는 언제나 시행착오와 암중모색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당시로서는 주포 구경을 늘리는 것이나 다연장 포탑을 개발하는 것 모두 어느 정도 기술적으로 실패할 위험성을 안고 있었습니다.
가장 무난한 것은 역시 기존에 검증된 2연장 포탑의 다수 탑재였고 일본은 나가토 급 건조 이전까지 2연장 포탑 6기 체제를 유지했죠. 한편 영국해군(그리고 그에 뒤이어 독일해군도)이 채택한 것은 주포 구경의 확대였습니다. 1912년에 기공된 전함 퀸·엘리자베스를 시작으로 영국해군은 전함 주포의 표준선을 15인치로 한 단계 올려서 이를 2연장 4기 형태로 탑재하는 노선을 취했죠.
[소련의 강구트급 전함 : 이렇게 적층식 배치를 채택하지 않은 채 다연장 포탑만을 적용하는 스타일도 있었습니다.]
포탑의 다연장화 노선을 취한 국가들도 있었습니다. 다연장 포탑을 채택할 경우 동일한 수의 주포를 보다 적은 수의 포탑으로 확보할 수 있으므로 줄어든 포탑만큼 방어 구역이 축소되고, 이로 인해 절감된 중량과 공간을 다른 용도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이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포탑에 탑재되는 포들은 공간과 용적을 부분적으로 공유하게 되므로 다연장화 할수록 중량 효율이 증가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2연장 포탑 6기의 중량을 합한 것보다는 3연장 포탑 4기의 중량을 합한 것이 좀 더 가벼운 것 등이 그런 예이죠.
이탈리아는 일찍부터 3연장 포탑에 주목하여 1909년에 이탈리아 최초의 드레드노트급 전함 단테·알리기에리를 건조할 때 3연장 포탑 4기를 모두 일직선상에 배치하는 방식을 채택하였고, 그 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프랑스 등이 3연장 포탑 노선을 채택했습니다. 미국 또한 1900년대 초부터 부분적으로 다연장 포탑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사우스캐롤라이나 급에 3연장 포탑을 탑재하려는 설계안도 있었지만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되었다가, 1912년에 네바다 급을 건조하면서 2연장 포탑과 3연장 포탑을 혼재하는 방식으로 포탑의 다연장화를 실현했죠.
[3연장 포탑과 적층식이 적용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테게토프와 미국의 네바다]
물론 다연장화가 마냥 순탄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후대의 포탑들이 각 포가 독립적으로 부·앙각 조절이 가능했던 것과 달리, 초기의 3연장 포탑은 3문의 포들이 모두 하나의 포가에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개별 사격이 불가능했으며 포 1문의 고장이 전체 포탑의 사용불가로 이어질 수도 있었죠. 또한 2연장에 비해 구조적으로 복잡해졌기 때문에 트러블도 잦았고, 중앙부 포에서 발사된 포탄이 좌·우측 포의 포탄과 상호 간섭을 일으켜 명중률이 저하되는 문제 등도 발생하곤 했죠. 허나 초기의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는 점차 개선이 이루어져 이후의 테네시 급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전함들은 14인치 3연장 4기 체제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 수정(11.7) : 위에 언급된 초기형 3연장 포탑의 단점은 전적으로 미국의 네바다급의 그것에만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이탈리아나 오스트리아 등의 3연장 포탑 등도 개발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거라고 일단 추측할 수는 있겠지만, 실제 결과물이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상세한 내용을 아시는 분 계시면 댓글 등으로 언급 부탁드립니다. -???님의 지적으로 2007. 11. 7 수정-)
[전함 포탑 배치의 최종적 주류라고 할 수 있는 형태들]
어쨌거나 대구경화나 다연장화를 통해 포탑 수를 줄이는데 성공하게 되면, 더 이상 갑판 상의 구조물들로 인해 함수나 함미의 포탑들에 비해 사각에 많은 제한을 받는 중앙부 포탑을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이때부터 대체로 함수 쪽에 2기, 함미 쪽에 1~2기의 포탑을 균형 있게 배치하는 형태가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죠.
이런 경향을 한층 더 가속화한 것이 1922년의 워싱턴 해군군축조약이었습니다. 조약의 엄격한 배수량 제한은 각국의 설계자들로 하여금 한정된 배수량 속에서 최대한의 중량 효율을 이끌어내도록 강제하였으므로 각국의 포탑 형식 또한 다연장화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죠. 그 결과 대부분의 전함들이 3~4연장 포탑을 함수 쪽에 2기, 함미 쪽에 1~2기 식으로 배치하는 방식으로 수렴되어 감으로써 현재의 전함 팬들에게 가장 친숙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형태가 완성되었습니다.
5. 이단과 변종들
위에서 언급된 형태들이 여러 다양한 시도들 중 시행착오와 암중모색의 위기를 살아남아 진화상의 주류를 이룬 방식들이었다면, 후대에 계승되지 못한 채 진화의 계보에서 도태되어 사장돼버린 배치 형태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중포탑 : 다포탑이라면 왠지 위·아래의 포탑이 따로따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는 못합니다.]
1) 이중포탑(Superposed Turret)
마치 스팀펑크물에나 나올 것 같은 이 괴상한 배치 형태는 미국의 前드레드노트급 전함인 키어사지 급과 버지니아 급에 적용된 ‘이중포탑(Superposed Turret)’입니다. 키어사지 급이 설계될 1890년대 당시만 해도 미국해군은 예산 문제로 인해 배수량에 많은 제한을 받고 있었습니다. 한정된 배수량의 틀 안에서 나날이 상승해가는 장비 중량을 감당해내려면 어딘가를 절감할 필요가 있었고 거기서 주목된 것이 부포의 중심선상 배치였죠.
즉, 키어사지 이전의 아이오와(BB-14)는 8인치 부포를 2연장 포탑 형태로 좌현과 우현에 각각 2기씩 총 4기를 탑재하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한쪽 방향에 지향될 수 있는 부포탑 수는 최대 2기뿐, 그렇다면 2기의 부포탑을 중심선상에 배치하여 좌·우 어느 쪽으로도 지향이 가능하도록 한다면 포탑 2기 분의 중량을 절감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발상이었죠. 게다가 바벳 장갑이나 양탄기, 포탑의 인원 등 다른 부분들도 공유할 수 있다는 것도 나름대로 큰 장점이었습니다.
[버지니아급(BB-15)에 적용된 이중포탑]
그러나 적층식 배치의 선구적 발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이중포탑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사장되고 말았습니다. 외관으로 알아볼 수 있듯이 주포와 다른 방향을 지향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① 하나의 포탑에서 2종의 포를 취급하려다 보니 구조적으로 복잡해지고 작업공간이 협소해졌음.
② 주포탑이 부포탑의 하중까지 감당해야 하여 지지구조를 보강해야 했으므로 생각만큼 중량 절감 효과가 크지 않았음.
③ 2종의 포가 하나의 양탄기를 공유했기 때문에 주포와 부포의 장전이 서로의 발사속도를 갉아먹는 형국이 됨.
이런 문제점들 외에도 결정적으로 후기형 이중포탑을 탑재한 버지니아 급이 건조되는 도중에 영국에서 드레드노트가 완공되었기 때문에 이중포탑은 더 이상 살아남을 여지가 없었죠.
2) 전방 집중식 포탑 배치 : 순양전함 G3와 넬슨
1차대전 종전 이후 독일은 해군 강국의 지위를 상실했지만, 영·미·일 등 주요 해군 열강 사이에서는 다시금 건함 경쟁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황 하에서 영국은 전쟁 중의 교훈을 살려 ‘집중방어(All Or Nothing)' 개념을 도입한 신형 전함과 순양전함 설계에 착수하여 각각 N3와 G3라는 가칭의 설계안을 완성하였죠.
[48,000톤에 18인치 포 9문을 탑재한 전함 설계안 N3.]
이들의 주된 특징은 그 이전까지의 일반적인 형태와 달리 주포탑 전부를 연돌 앞으로 집중 배치한 파격적인 외관에 있었습니다. 주포탑을 집중함으로써 장갑대의 길이를 줄일 수 있고, 이로 인해 절감된 중량을 방어력의 향상에 돌릴 수 있다는 발상이었죠. 특히 G3의 경우는 16인치 포 9문에다가 최대속도는 32노트, 최대 14인치에 달하는 경사 현측장갑과 강화된 갑판장갑, 양용포의 채택이라든가 하는 것을 불과 48,000톤이라는 배수량 안에 달성할 수 있었던 (그것도 1920년대 초에) 무시무시한 스펙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 발효되면서 이들의 건조도 취소돼버리긴 했지만, G3의 설계안은 다소의 수정을 거쳐 넬슨급 전함의 설계로 이어졌죠.
[G3의 수정판이라 할 넬슨급. 저 괴악한 외형은 아무리 해도 적응이....;;]
문제는 넬슨급이 건조된 이후에 드러났습니다. 기본 설계가 뛰어난 탓도 있어서 넬슨 또한 35,000톤이라는 제한 안에서 당대 최강의 방어력과 화력, 그리고 적절한 정도의 최대속도를 갖춘 훌륭한 전함이 되었죠. 허나 무장 배치 면에서는 포탑의 집중 배치가 오히려 악영향을 가져온 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G3와 N3에서 함교 앞에 2기, 바로 뒤에 1기 식으로 집중 배치되었던 주포탑은 넬슨급에서는 한층 더 그런 경향이 강해져 3기 모두 함교 앞으로 몰렸습니다. 그 결과 3번 포탑의 발포 시에 함교가 포구 화염이나 충격파의 영향을 받는 일이 잦았고, 때때로 함교의 유리창 등이 깨지는 일도 있었으므로 3번 포탑을 후방으로 지향한 채 포격하는 것은 가급적 자제되었죠.
그 외에도 후방으로 옮겨진 함교의 위치에 따른 시야와 조종성 문제라든가 지나치게 빡빡한 설계에 따른 사소한 트러블들이 많았으므로 영국 해군은 넬슨 이후의 KGV급에서는 다시 일반적인 전·후방의 균형적인 포탑 배치 형태로 돌아가고 맙니다.
3) 3연장 이상의 포탑
포탑은 이론상 다연장화 할수록 중량효율이 좋아집니다. 그렇다면 3연장을 넘어서 4연장, 5연장 포탑 등도 나올법한데 이들은 대세가 되지 못하고 반짝하다 사라지고 말죠. 왜 그랬을까요?
[4연장 포탑들 : 좌로부터 러시아의 16인치 포 전함 시안, 영국의 KGV급, 프랑스의 리슐리외급.]
하나는 앞에서도 언급했던 구조적인 복잡성 문제 때문입니다. 하나의 포탑에 보다 많은 수의 포를 밀어 넣을수록 구조는 복잡해지고 그만큼 기계적 신뢰성 확보에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KGV급의 4연장 포탑으로써, 덴마크 해협 해전 당시 출동한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전투 도중 전·후의 4연장 포탑이 모두 고장을 일으켜 불과 2문의 14인치 포만으로 교전에 임해야 했던 순간이 있었죠. (1943년 중반에 가서야 그럭저럭 안정적인 운용이 가능하게 되었음) 물론 프랑스제 4연장 포탑이나 러시아의 16인치 계획함에 탑재되려던 4연장 포탑처럼 2연장 포탑 2기를 횡으로 연결한 듯한 형태도 있습니다만.
다른 하나는 피탄이나 고장이 일어날 경우 화력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주포가 15인치 이상의 대구경이 되었을 경우 배수량 제한상 탑재할 수 있는 수량은 대략 8~9문, 이것을 4연장 이상의 포탑에 집어넣으면 최대 2기가 한계입니다. 이렇게 되면 유사시 포탑이 피탄되거나 아니면 관통되진 않아도 충격 등 기타 사유로 작동불능이 될 경우 일거에 보유 화력의 절반을 상실하게 되죠. 실제로 1942년 11월의 카사블랑카 상륙전 당시 항구 내에 계류돼있던 프랑스 전함 쟝·바르는 2기의 4연장 포탑 중 1기만이 완성돼있었으며, 그나마도 미국 전함 메사추세츠의 16인치 포탄이 바벳에 명중한 뒤 그 충격으로 포탑의 회전기구가 고장나자 화력이 완전히 무력화되고 말았습니다.
(※주 : 6연장 포탑은 미국의 틸만 계획 설계안 중의 하나로 등장한 적이 있었지만, 이 계획 자체가 진지하게 건조를 고려하고 있었다고 보기 어려웠으므로 과연 6연장 포탑이 기술적으로 가능했을지는 의문입니다.)
[노스캐롤라이나급의 설계안 중 하나. 전방에는 캐터펄트와 수상기 운용갑판을 설치하고 주포는 4연장화 하여 후부 갑판에 밀어 넣은 복합 전함 스타일이지만, 다행히도 채택되지 않았죠-_-;]
결론적으로 다연장화 할수록 증가해가는 중량 효율과 그에 비례하는 구조적 복잡성 및 포탑 수 사이에서, 4연장도 6연장도 아닌 3연장 포탑이 적절한 밸런스를 유지한 가장 최적의 형태로 인정받아 살아남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를테면 여러 유명전함들의 초기 시안들을 뒤져보다 보면 각양각색의 기괴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형태들도 많이 보이곤 합니다. 하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선택된 것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바로 그 평범한 형태이죠.
[참고문헌 / 자료출처]
- 아오키 에이치, 최재수 譯,『시파워의 세계사 : 제 2권』, 2000, 한국해사문제연구소
- 배군님과 ???님의 관련 글들
- William H. Garzke Jr/Robert O. Dulin Jr, British, Soviet, French, and Dutch Battleships of World War II, 1980, Jane's Publishing
- Norman Friedman, US Battleships : An Illustrated Design History, 1985, Naval Institute Press
- Antony Preston, The World's Worst Warships, 2002, Conway Maritime Press
- http://www.d3.dion.ne.jp/~ironclad/wardroom/Central_turret/centralturret3.htm
- http://www.historyofwar.org/articles/concepts_superfiring_turret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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