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연돌 구축함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미 의회는 ‘가장 강력한 해군에 필적하는’ 해군력 보유를 골자로 하는 해군법안을 가결시켰습니다. 이 법안에 따르면 미 해군은 1925년까지 전함 10척, 순양전함 6척, 초계순양함 10척, 구축함 50척, 잠수함 67척 등을 보유하게 될 터였죠. 허나 미국은 1917년 4월에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여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마자 호위함과 대잠함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917년의 시점에서 해전의 대세는 이미 대규모 수상함 세력에 의한 함대결전이 아닌 잠수함에 의한 통상파괴전으로 넘어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 때문에 미 의회는 부랴부랴 1916년의 해군법안을 보류시키고, 그 대신에 200척의 구축함을 추가로 건조하는 방안을 수립했습니다. 이 계획에 따라 등장한 배들이 바로 1차 세계대전 말기부터 1920년대 초까지 총 270척 이상이 건조된 ‘평갑판형 구축함’들입니다.
[붕어빵 찍어내듯 대량생산된 평갑판형들의 대 군단.]
이들 평갑판형 구축함들은 이전의 1,000톤급 구축함들에 비해 다소 배수량이 늘어서 기준배수량이 1,200톤으로 결정되었고 기관출력 27,000마력으로 최대 35노트의 속도를 낼 수 있었으며, 주 무장은 4인치 단장포 4문과 3인치 대공포 1문 및 21인치 어뢰발사관 12기와 폭뢰 궤조 2기 등이었습니다. 물론 가장 큰 특징은 이들의 또다른 별명이 ‘4파이프(four piper)’ 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연돌이 4개라는 점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이들 4연돌 구축함들은 미국 각지의 조선소 8곳에서 동시에 건조되기 시작했는데, 건조 작업은 미국의 막대한 산업능력을 대변하듯 무시무시한 속도와 규모로 진행되었죠. 그중 가장 빠른 경우는 워드함(USS Ward)의 건조작업이었는데, 용골이 놓인지 불과 17일만에 진수 작업을 마침으로써(평균은 4개월) 현재까지도 군함의 건조 속도에 관한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러한 결과, 1916년 12월에 1번함의 첫 용골이 놓인 후 1920년 9월에 마지막 함이 준공될 때까지 3년 9개월동안 총 273척이라는 숫자가 건조되는 쾌거를 올렸죠.
물론 이렇듯 전력화를 서두른 결과, 이들 평갑판형 구축함들은 전시급조형으로써 설계 면에서 다소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첫째 문제는 항속거리가 짧다는 것이었습니다. 1917년 이후의 전장 환경은 그 이전과 달리 구축함들 또한 함대와 함께 장거리 항해를 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으나, 평갑판형 구축함들의 대부분은 수차례에 걸친 연료탱크 증설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대서양을 횡단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죠. 이 문제는 1920년대 이후 해상보급이 일반화되고 나서야 완전히 해결되었습니다. 둘째 문제는 항양성이 미흡하다는 점이었습니다. 함수 부분이 1층 올라가지 않고 함수부터 함미까지 연속된 갑판이 이어지는 평갑판형의 특성상 항해 중에는 함수부가 파도로 뒤덮이기가 일쑤였고 지나치게 좁은 함폭과 V자형의 함미는 선회반경을 계획보다 늘리는 한편, 조금만 파도가 높아져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불안한 안정성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파도가 조금만 높아도 저렇게 배가 날아다니고 파도가 갑판을 씻죠--;]
[사람의 덩치와 비교해보면 확실히 폭이 좁긴 좁은 듯 합니다]
하지만 가장 평갑판형 구축함들을 곤란하게 했던 것은 바로 전쟁의 종식이었습니다. 평갑판형 구축함들이 한창 준공되고 있었던 1918년 11월에 1차 세계대전이 끝나버렸던 것이죠. 이제 미 해군은 팔리지 않는 재고 상품만 잔뜩 짊어지고 있는 회사 신세가 되어 평화시에는 그렇게까지 대량으로 필요하지는 않은 구축함들을 270척이나 끌어안고 고민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1차대전 후의 평화 시기를 맞은 미 해군이 대량으로 떠안게 된 평갑판형 구축함들에 대해 취한 가장 첫 번째 대책은 바로 타 함종으로의 전환이었습니다. 평갑판형 구축함들은 부족한 항해성능과 항속거리에도 불구하고 속도 면에서는 발군의 성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 고속성능을 살려 소해함이나 기뢰부설함, 고속수송함 등으로 개조되었죠. 또한 포격 훈련용 표적을 예인하는 표적 예인함이 되거나 그 자신이 무선으로 조종되는 표적함으로 개장되기도 했으며, 작은 덩치에도 불구하고 수상기를 실을 수 있도록 개조되어 수상기 모함으로 운용되는 녀석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개조가 군용으로만 한정된 것은 아니어서, 무장 등을 제거한 다음 민간에 불하되어 고속 화물선으로 운용되기도 했죠. (바나나처럼 금방 변해버리기 쉬운 열대과일들을 카리브 지역으로부터 운송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고 함.--;) 이렇게까지 해도 처분이 곤란한 배들은 그냥 스크랩되거나 아니면 모스볼 처리되어 항구에 계류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고속수송함으로 개장된 평갑판형]
1922년의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이래로 각국은 순양함, 구축함 등 소형함의 건조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으므로 미국의 구축함 전력은 개함의 성능 면에서는 금세 열강의 평균 수준에 비해 뒤처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273척이라는 ‘규모’와 다양한 용도로의 전환이라는 ‘범용성’은 1930년대에 파라거트급 구축함이 건조될 때까지 미 해군의 다양한 잡무를 도맡아 하는 등뼈 역할로써 평갑판형 구축함의 존재 의의를 여전히 가능하게 했죠.
2. 평갑판형 구축함들에 관련된 다양한 사건들
평갑판형은 1930년대부터 이미 함대 구축함으로서의 역할을 다른 신형 구축함들에게 넘겨준 상태였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호위 구축함이나 고속수송함 등 보조적인 임무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까지도 현역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전간기나 2차대전 중에 벌어진 여러 사건들 중에는 평갑판형 구축함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례가 종종 나타나곤 합니다. 이번 장에서는 그런 사례들을 간략하게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전간기 미 해군 최대의 해난사고 : Honda Point Disaster
전간기인 1923년 9월에는 평갑판형 구축함 7척이 캘리포니아 해안의 혼다 곷(Honda Point)에 집단으로 좌초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고는 통칭 ‘Honda Point Disaster'라고 불리며, 미 해군에서 발생했던 평시 최악의 해난사고였죠.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1923년 9월 8일 오전 9시경, 샌프란시스코에서 기항 중이던 제 11 구축함 전대는 기관 운용 및 전투 기동 평가를 위해 샌디에이고를 향해 출항하였습니다. 전대는 기함인 델피함(USS Delphy)를 선두로 하여 약 20노트의 속도로 남하를 계속하였으며 항해 12시간째인 오후 9시경에 산타 바바라 해협을 통과할 예정이었죠. 그런데 당시 전대는 야간항해에 더해 안개와 높은 파도까지 겹쳐서 시계가 극도로 짧은 아주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었습니다. 때문에 선두에 위치한 기함의 항로를 의지하여 전대 전체가 줄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가는 듯한 형국이었죠.
[비참한 참사의 현장]
오후 9시경, 기함의 함장 에드워드 왓슨 중령은 전대가 예정대로 산타 바바라 해협 입구에 도달하였다고 판단하여 항로를 동쪽으로 수정하고 나머지 함정들도 기함을 따라 줄줄이 동쪽으로 침로를 수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전대는 실제로는 해협 입구보다 수 km 정도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침로 수정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기함인 델피는 혼다 곷 해변에 좌초되는 신세가 되었죠. 가까이 뒤따르던 나머지 구축함들도 기함의 경고를 받았으나, 이미 피할 여유가 없었기에 모두들 암초에 충돌하여 좌초하거나 순식간에 침몰하는 신세가 되었죠. 당시 다수의 승조원들이 취침 중이었기에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고 대부분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급히 배를 빠져나와야 했습니다.
이런 탓에 좌초를 간신히 면한 대열 후미의 구축함 4척이 급히 구조활동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23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말았죠. 또한 좌초된 7척은 모두 구난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고 1923년 11월 20일에 공식적으로 손실 처리되었습니다.
2) 2차대전 최초의 미국함 손실 : 루벤 제임스 격침 사건
1941년 9월 이래 미국과 독일은 비록 공식적으로 전쟁 상태에 놓여 있진 않았지만, 대서양 상에서는 사실상 실질적인 적대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1941년 9월에는 구축함 그리어(USS Greer)가 유보트와 교전했으며, 10월에는 아이슬란드에서 귀환 중이던 구축함 키어니(USS Kearney)가 어뢰를 맞았죠. 한편 10월 31일에는 이번 장의 주인공인 루벤 제임스(USS Reuben James)가 유보트의 어뢰를 맞아 침몰함으로써 공식 참전 이전의 첫 번째 미국함 손실을 기록했습니다. 1941년 10월 31일, 루벤 제임스는 HX-156 선단과 동행하며 근접 호위 중에 있었습니다. 당시 루벤 제임스는 선단 내의 탄약 운반선과 유보트의 예상 위치를 잇는 선상의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오전 5시 25분경 함수 전방에 유보트의 어뢰를 맞고 탄약고가 유폭하여 불과 5분만에 함체가 둘로 쪼개진 채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생존자는 159명 중 44명뿐이었죠. 이 사건 이후 미국과 독일의 갈등은 한층 더 격화되었고, 루즈벨트는 유보트에 대해 ‘적극적인 방어’를 주창하기에 이르릅니다.
[(좌) 침몰하는 루벤 제임스 / (우) 루벤 제임스의 격침을 알리는 신문 기사]
3) 태평양 전쟁 최초의 포격 : 워드함(USS Ward)의 일본 특수 잠항정 격침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므로 생략합니다.
(자세한 설명은 ‘불타는 하늘’의 해당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4) HMS 캠벨타운의 생 나자르 도크 습격
1940년 9월, 미국은 버뮤다 해역의 영국 기지 사용권과 맞바꾸어 모스볼 상태로 보관중이던 50척의 평갑판형 구축함을 영국에 대여했습니다. 이들 구축함들은 이후 대잠 구축함으로써 유보트에 맞서 선단을 호위하는데 사용되었으나, 앞서 언급했듯이 열악한 항해 성능 때문에 영국해군 내에서 악평이 자자했죠. 그런 배들 중 1척으로 뷰캐넌함(USS Buchanan)이 있었습니다. 뷰캐넌은 영국 해군에게 넘겨진 후 HMS 캠벨타운(HMS Campbeltown)으로 개명되어 북대서양의 선단 호위 임무 및 유보트에 피격된 배들의 생존자들을 구조하는 임무 등에 투입되었죠.
그런 와중에 1942년 초에는 진수 후 의장 작업 중이던 독일의 전함 티르피츠가 완공되어 노르웨이로 이동하였습니다. 영국 해군은 티르피츠의 노르웨이 이동을 비스마르크 때처럼 북대서양으로 진출하려는 시도로 해석하였고, 이제나 저제나 티르피츠가 뛰쳐나올까봐 말 그대로 ‘비상’이 걸렸죠. 때문에 영국 해군은 티르피츠의 대서양 진출 후 모항이 될 만한 곳을 사전에 파괴하여 활동을 방해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그 시점에서 티르피츠의 모항이 될 수 있을만한 항구는 단 하나, 바로 생 나자르(St. Nazaire)뿐이었죠. 모든 군함은 병기와 연료의 공급 외에도 적절한 정비와 수리를 받아야만 합니다. 당시 독일 본국의 모항을 제외한다면 티르피츠 정도의 거함을 수용할 수 있을만한 드라이독을 가진 항구는 흔치 않았죠. 그런데 당시 생 나자르 항에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대양여객선 노르망디호의 정비를 위한 드라이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파괴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생 나자르는 유보트의 모항도 겸하고 있어서 프랑스 대서양 함대의 모항이었던 브레스트 항 다음으로 강력한 주둔군이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결국 영국측이 수립한 계획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생 나자르 항의 개요도와 돌입목표]
① 드라이독 파괴는 폭격이 아닌 코만도부대에 의한 직접 폭파로 실행 예정.
② 작전 전, 양동 목적으로 영국 공군을 중심으로 하여 대규모 폭격을 가함.
③ 혼란을 틈타 드라이독의 갑문 파괴 목적으로 폭약을 만재한 구축함과 병력을 실은 보트가 항구에 돌입.
④ 구축함이 남쪽 갑문에 격돌한 후 코만도 부대원들은 상륙하여 드라이독의 주요 지점 및 북쪽 갑문을 파괴.
⑤ 각 병력들이 보트를 통해 해상으로 탈출한 후, 구축함 내에 설치된 지연신관이 작동하여 드라이독의 남쪽 갑문을 파괴하며 마무리.
이 작전의 주역으로 선정된 것이 바로 캠벨타운함이었죠.
작전은 1942년 3월 26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캠벨타운은 항구 잠입을 위해 독일해군의 구축함과 유사한 외관을 갖도록 개조되었고 함미에는 독일 해군기를 게양하였죠. 한편 병력 수송을 위한 18척의 모터보트와 이들의 호위를 위한 구축함 2척이 준비되었고 총병력 611명이 이들 선박에 분승하여 생 나자르항으로 이동을 개시하였습니다. 30일 오전 1시 20분경 항구에 도착한 병력들은 약 20노트의 속도로 갑문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는데, 독일구축함처럼 개조된 캠벨타운의 외관과 코만도 부대원들이 독일식 발광신호로 응답한 것 때문에 항구의 독일 방어병력들은 당초 이들이 영국군임을 알아채지 못했죠. 캠벨타운이 갑문으로부터 약 1km 정도까지 접근하여 영국 해군기를 올린 후에야 비로소 포화가 날아오기 시작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서 캠벨타운은 갑문에 격돌하여 2m가량 박혀버린 후 지연신관이 작동돼버린 상태였습니다.
[갑문으로 돌입하는 HMS 캠벨타운]
[작전의 결과물들]
이제 캠벨타운에 타고 있던 코만도 부대원들은 드라이독에 진입하여 독일군들과 격렬한 교전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캠벨타운을 제외한 나머지 모터보트들이 거의 대부분 항구에 도달하기 전에 격침되거나 파손된 탓에 영국측의 지상병력은 독일군에 비해 열세에 놓여 있었고 2시경에 이르면 항구의 타 지구로부터 독일측 증원병력이 도착하여 코만도 부대원들은 거의 전멸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죠. 결국 오전 9시경에 이르러 대부분의 코만도 부대원들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히면서 교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연신관은 그 와중에도 작동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교전이 끝난 후 독일군이 캠벨타운 내부를 샅샅이 수색했음에도 불구하고 폭약은 발견되지 않았고, 예정시간 9시를 훌쩍 넘긴 10시 35분경에 갑자기 폭발하여 독일군 200명 이상을 살상하는 한편, 목표인 남쪽 갑문을 완전히 파괴하였죠. 이로써 드라이독은 기능을 상실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인 1947년까지 복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코만도 부대원들의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완수되었고 캠벨타운도 제 역할을 다한 셈이었죠. (물론 독일측이 정말 티르피츠를 대서양에 내보낼 생각이 있었는가는 별개의 이야기입니다만...;;)
5) 자바해를 떠도는 의문의 구축함 : USS 스튜어트의 경우
1943년 중순 무렵, 자바해 근처를 지나는 미군의 정찰기 조종사들은 무언가 이상해보이는 구축함 1척을 종종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상부구조물은 전체적으로 일본배의 그것처럼 보이지만 함체의 특성은 아무리 봐도 미국의 구형 구축함인 녀석이었죠. 기지로 귀환한 이들 조종사들은 즉각 이 이상한 구축함에 대해 보고하곤 했지만, 이런 보고는 대개 무시되어버리곤 했습니다. 대개 육군의 조종사들이란 배의 함종 판별에 서투르다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 관념이었으니 말이죠. 하지만 그 이후로도 미국 구축함처럼 보이는 이상한 배를 목격했다는 보고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의문의 구축함의 정체는?]
자바해는 1942년 이래로 일본이 점령하여 이제는 일본의 남방 자원공급의 핵심이 된 주요 거점인데 그런 곳에서 미국 구축함이 돌아다니고 있다? 이런 의문스러운 상황에 대해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마침내는 미국이 일본배로 위장한 특수임무함을 자바해에 투입시켰다던지, 현대판 유령선이 나타났느니 하는 이야기까지 돌게 되었죠. 하지만 이 모든 소문의 진상은 1945년 8월에 일본이 항복하자 의문의 구축함의 실물이 발견됨으로써 마침내 드러났습니다.
이야기는 태평양 전쟁 개전 초인 194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필리핀에 주둔 중이던 미국 아시아 함대에는 USS 스튜어트라는 평갑판형 구축함이 1척 있었습니다. 개전 후인 1942년 2월 19일, 스튜어트는 네덜란드 구축함 트롬프 및 다른 평갑판형 구축함들과 함께 반둥해협 해전에 참가했습니다. 이 해전에서 스튜어트는 비록 중대한 피해를 입진 않았지만 후부 조타실에 5인치 포탄을 맞음으로써 항해상의 애로점을 떠안게 되었죠. 연합국의 잔존 함대는 수리를 위해 수라바야 항에 입항했고, 스튜어트는 즉시 드라이독에 보내져 수리를 위해 용골을 고정하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드라이독에서 넘어져버린 스튜어트]
하지만 패색이 짙은 와중의 혼란한 상황으로 인해 작업은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고, 용골 고정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스튜어트는 드라이독 내부에서 옆으로 기울어져 오히려 추진축이 휘고 함체가 우그러지는 등의 추가 피해만 입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군의 공습까지 시작되자 수리는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고, 결국 스튜어트는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폭약으로 처분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스튜어트의 함명은 1942년 3월 25일에 미 해군의 함정 목록에서 삭제되었고 ‘스튜어트’라는 함명은 새로 건조되는 호위 구축함에게 넘겨지게 되었죠.
그러나 사실 처분 작업은 패주와 철수의 혼란상으로 인해 완벽히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일본군의 수라바야 점령 후 근 1년간 드라이독에 처박혀 있던 스튜어트의 잔해는 1943년 2월에 인양되었으며, 이후 몇 달 동안 무장과 장비를 일본군의 그것에 맞도록 개장하는 작업을 거친 후 1943년 9월에 경비정 102호로써 취역하게 되었죠. 본래의 미제 4인치 포 대신 일본제 3인치 포가 장착되었고 일본식 삼각장이 설치되었으며, 연돌 또한 1번 연돌이 뒤로 만곡하여 2번 연돌과 합쳐지는 일본식 스타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후 ‘경비정 102호’는 자바해 인근에 주둔하면서 미국 잠수함을 격침시키기도 하였으며, 근처 해역을 지나는 미군 정찰기에게 목격되어 그 존재가 드러난 것이었죠.
[표적이 되어 침몰하는 舊스튜어트]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면서 ‘경비정 102호’ 또한 미군의 손으로 되돌아가게 되었으며, 10월에는 다시금 미 해군 함정으로 재취역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한번 함정 목록에서도 삭제됐던데다 함명마저 다른 배에게 넘어간 상태. 뭐랄까... 죽은줄 알았던 전 약혼자가 다시 살아온 심정 같은거랄까요. 아무튼 재취역한 이 구축함은 공식적으로는 함명 없이 형식번호인 DD-224로만 호칭되었습니다. 하지만 승조원들은 이 배를 흔히 ‘舊 스튜어트(Ex-Stewart)’라고 부르거나 ‘RAMP-224(Recovered Allied Military Personnel : 귀환병이라는 의미)’이라고 부르곤 했죠. 그리곤 태평양을 건너 미 서해안으로 건너간 스튜어트는 1946년 4월에 항공기의 표적으로 사용되어 처분되면서 이번엔 진짜로 함정 목록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기구한 함생이었달까요.
[참고문헌 / 자료 출처]
- George W. Baer, 김주식 譯, 『미국 해군 100년사』, 한국해양전략연구소, 2005
- James L. George, 허홍범 譯, 『군함의 역사』, 한국해양전략연구소, 2004
- http://www.destroyerhistory.org/flushdeck/index.html
- http://www.hazegray.org/features/flushdeck/
- http://www.history.navy.mil/photos/events/ev-1920s/ev-1923/hondapt.htm
- http://en.wikipedia.org/wiki/Honda_Point_Disaster
- http://en.wikipedia.org/wiki/USS_Reuben_James_(DD-245)
- http://www.history.navy.mil/photos/sh-usn/usnsh-w/dd139.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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