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樂市樂座를 통한 정보망의 완비

구름위 2012. 12. 13.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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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노부나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삶의 방식은 명쾌했다. 자신에게 부여된 운명으로 오직 천하평정을 목표로 한 삶을 살았다. 한편 그의 생애는 수많은 수수께끼들이 숨겨져 있다. 그 한 예로 자금에 관한 것이 있다. 노부나가가 20세에 장인 사이토 도산(齋藤道三)과의 대면시 5백정의 총포를 갖추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노부나가가 18세인 천문(天文)18년(1549) 오미(近江)의 國村의 철포鍛冶(대장간)에게 玉筒5백정을 주문하고 있다. 약관 18세의 젊은이가 쟁쟁한 다이묘가 군침을 흘리던 최신병기를 조달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자금은 어떻게 조달했는가가 의문이다.

 철포는 고가엿다. 그 대량생산의 기술과 시스템이 완성된 토요토미(豊臣)의 시대조차 玉筒이 쌀 9石의 가치였다. 아직 생산량이 적은 천문시대에는 생산량이 적은 만큼 그 가치는 더욱 귀했을 것이다. 쌀 15石의 가치라면 500정도에 7500石, 당시의 아시가루(足經)의 급료는 일년간 1石8斗정도다. 어떻게 약 4200명정도의 군단을 1년간 유지할 수 있고 월급으로 약 5만명정도의 막대한 자금을 노부나가는 철포를 구입하는데 써버린 것이다. 이 당시 노부나가의 힘은 오와리의 반 정도를 통치할 정도의 상태였다. 영지로부터 올라오는 것만으로 자금의 운용이 가능했을 리 없다.

 노부나가는 같은 시대의 다이묘에 비해 풍부하나 자굼력을 가지고 있었다. 천정2년(1574) 타케다 가쯔요리(武田勝賴)가 토토미(遠江)의 이에야스를 공격할 당시 구원군의 도착이 늦음의 보상으로 말 두필분의 황금을 이에야스에게 보냈다. 이에야스의 가신들은 “본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양이다”라고 놀랐다고 한다.

 사카이(界, 오사카 남동쪽의 항구)의 호상 津田宗及는 천정7년(1579)정월 아즈치(安土)의 천수각에서 황금 일만 매(枚)를 보고 細川幽齋·忠興부자도 같은 장소에서 다량의 황금을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기후성에도 일만오천관이상을 비축해두고 있었다. 이런 노부나가의 후반생에 걸친 황금의 출처는 대략 추측을 하면, 영록11년(1568)에 35세의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데리고 상경한 노부나가는 부장군이나 관령(管領)에 임명하겠다는 요시아키의 권고를 물리치고 그 대신에 이즈미(和泉)의 사카이(界), 오미의 草津, 이쿠노(生野)의 은산(銀山)을 자신이 갖고 싶다고 했다. 여기에서 노부나가의 시대를 꿰뚫어 보는 경제감각이 보여지고 있다.       

 

상업도시를 점령한다.

 우선 사카이(界), 草津, 오쓰(大津)의 도시는 당시의 상업유통의 중심지였다. 자금과 정보가 집중된 곳이었다. 노부나가는 副將軍이라는 구시대의 권위보다 이런 상업도시의 지배권과 가세권을 확보해려 했던 것이다. 가까이에 관리를 두고 곧 이어 사카이 상인들에게 만양의 군자금을 요구했다. 사카이의 상인들이 거부하자 10인의 대표를 투옥했다. 이 도시를 지배했던 구세력을 일소하고 신흥 호상(豪商)들을 노부나가의 편으로 만들었다.

 당시의 사카이는 일본최대의 총포생산지(토요토미 시대 생산력은 1일 15정, 년간 5000정이상의 총포를 생산)였고 화약의 연료인 초석(硝石)의 수입항구였다. 초석은 일본에서 생산이 안되고 중국이나 인도에서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노부나가의 생각으로는 사카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장악해야 할 곳이었다. 草津과 大津에서의 상납금도 막대했다. 이것은 토요토미 시대가 되면 大津으로부터는 년간 銀 700枚의 관세를 징수하고 있다. 비와호를 왕래하는 배의 關錢, 고슈(江州)舟役料도 은 1000枚정도의 막대한 자금이다.

 은광산 경영이외에 노부나가는 더욱이 전대미문의 경제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樂市樂座다. 일본의 중세도 노부나가의 시대가 되어 상품의 유통이 많아지고 넓은 범위에 걸쳐 물자의 흐름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것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사원과 공가등의 구세력에게 독점적인 판매권을 부여받은 상인조합인 「座」에 속하는 상인이 한정되어 있었다. 이 座席를 갖지 못하면 「市」에서 상업행위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상품경제는 이 한계를 어느새 넘어서 발달하고 있었다. 「座」의 상인만으로는 공급이 어려워서 여러 가지 형태의 상인이 등장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유랑하는 もぐり商人이 그들이다. 그들의 활동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전란과 도적도 두려워하지 않고 넓은 지역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노부나가에게 오기 전의 히데요시(秀吉)도 부랑자 행산단에 있었다. 노부나가는 이런 신흥상인에게 착안을 했던 것이다. 그이 생각은 정해진 틀이 없었다. 다른 다이묘가  もぐり商人를 단속했던 것과는 반대로 중세적인 고정관념을 버리고 이 활동성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樂市樂座」인 것이다.

 「座」에 얽매이지 않고 「市」의 座席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일정의 자릿세만 내면 자유롭게 영업을 할 수 있는 시장이다. 노부나가의  樂市에 거주하는 사람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자유를 부여받은 것이다.

 영록10년(1567) 이나바(稻葉)산성을 공략해서 미노를 수중에 넣은 직후 노부나가는 카노(加納)에 樂市령을 내렸다. 이것에 의하면 樂市場에 오는 사람은 각종의 세를 면제하고 영국내의 교통의 안전을 보장했다. 게다가 여기에 왕래하는 사람은 부담스런 빚도 탕감하는 것도 보장했다. 즉, 이 장소에 들어오면 영주의 세금을 체납한 농민이라도 土豪의 노예적인 농민이라도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돼 지나이마치(寺內町)라는 한정된 공간이 자유의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구시대의 권위가 부정되엇다. 봉사해야하는 것은 노부나가 한 사람이었다. 대단한 결단이 아닐 수 없다.

 

정보가 돈이 된다.

 이후 노부나가는 최후의 거성 아즈치(安土)의 성아래를 시작으로 오미(近江). 미노(美濃), 이세(伊勢), 호오료쿠(北陸)등에 차례로 樂市場을 열었다. 이런 장소에서 상업이 번영하고 노부나가에게 막대한 수입을 가져다 준 것이다.

 사카이(界)와 오쓰(大津)의 상업도시를 제압하고 게다가 새로운 상업정책을 실시해 막대한 자금원을 창출해낸 것이다. 하지만 노부나가의 「樂市樂座」정책은 단순히 자금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樂市樂座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 그것도 토지에 얽매인 농민과 그들을 지배해서 권위를 유지하고 있는 권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기성사회로 보면 무뢰한들이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진취적이고 자유의 기풍을 가진 종래의 사회에 얽매이지 않은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모인 것이다. 노부나가의 주위에는 혼돈스럽지만 시대를 넘어서 넘쳐 나는 에너지로 활동력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러한 그들은 또 엄청난 정보원(情報原)이었다.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여러 다이묘의 영지를 돌아 다닌 그들은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노부나가의 주위에 집중해 있던 것이다. 한 예로 기후(岐阜)시대의 히데요시에게는 연중 정체를 모르는 방문객과 손님이 있었다. 여행중이 승려, 행상인, 기술자, 낭인, 예술가 등이 온 것은 히데요시와의 면담때문이었을 것이다. 유랑하는 사람들을 조직해 최고로 우수한 정보망을 히데요시는 구축하고 있던 것이다. 그것도 노부나가의 지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럼 노부나가는 최고의 정보망을 가진 주인인 것이다. 노부나가는 정보가 戰國亂世를 평정하는 데 중요한 무기라는 것을 숙지하고 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