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전국시대의 개막 - 응인의 난

구름위 2012. 12. 13.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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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일본은 천왕과 귀족의 정치가 끝나고, 무사들이 막부를 열어 통치를 했다.

일본 두 번째 막부인 아시카가家의 무로마치 막부는 말기적 증상으로 이미 쇼군의 힘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는 국고를 축내었고, 여러차례 덕정령(德政令)을 발표했으나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런 차에 먼저 막부의 수상이라고 할 수 있는 관령가 3가문 중,하타케야마, 시바 양가문이 가독상속으로 내분이

일어나 세력이 약화되었다.

오직 3관령가 중 호소가와(細川)家만이 멀쩡하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쿄토 내외의 형사임무와 경비를 돌아가며 맏던 4직- 아카마쓰(赤松), 잇시키(一色), 야마나(山名),

쿄코쿠(京極) 4가문중 야마나씨가 두들어 지게 강성하게 되어 호소가와家와 알력이 생기게 되었다.

(아카마쓰家가 쇼군을 암살하는 바람에 토벌당하게 되었고, 그 토벌을  야마나家가 맡아서 아카마쓰家의
 영지를 차지했기 때문.)

이런 상황에서 관령가 중의 하나인 하타케야마家에서 상속싸움이 벌어지고, 호소카와와 야마나는 각각 다른 사람을

지원함으로써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엔 쇼군가의 상속싸움이 벌어졌다.

8대쇼군 요시마사의 동생 요시미와 쇼군의 처 히노 도미코의 늦둥이 아들 요시히사가 충돌했는데 요시히사측에서

요시미 암살을 시도했다.

이에 유력 수호(지방 태수)들이 이에 반대, 군대를 상경시켜 대항했다.

결국 암살은 실패했으나 쿄토에는 군대가 남아있었다.

1467년 정월, 하타케야마의 상속다툼이 교토에서 전면전으로 발발...

이로써 오닌(應仁)의 난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5월에는 호소카와편(동군)과 야마나편(서군)의 편싸움으로 확대되었다.

동군 24개국 16만명과 서군 20개국 11만명이 쿄토에서 시가전을 벌려 쿄토는 잿더미로 변했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동안 지방으로까지 싸움이 번졌다.

1473년 양군의 리더 호소카와 모치토요와 야마나 가쓰모토가 병사하자 전쟁은 지루해졌다.

서군에 있던 요시히사 모자가 동군에 붙자 동군에 있던 요시미가 불편해서 서군으로 옮기는 등 전쟁의

목적부터가 애매하게 되어 버렸다.

다음해 호소카와와 야마나 씨가 화해하고 1477년 남은 다이묘들도 화의를 하고 귀국해 버린다.

11년 간의 전란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전쟁은 끝났지만, 막부의 힘은 소멸했다.

쇼군은 쿄토 일대인 야마시로國만을 차지한 보통 다이묘로 전락했다.

막부권력의 해체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다이묘들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국(領國)을 통치하던 수호를 재치고 그 대리인이던 수호대나 그 영국내의 유력 인물이

영국의 주인이 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것이 전국시대의 개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