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디드 니 학살사건
1890년에 일어난 수족 인디언의 학살사건 (The Massacre of the Wounded Knee)
1890년 12월, 미군 부대는 아녀자를 포함한 인디언 수족 150명을 학살했다.
1848년부터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자 백인들이 서부로 대규모 이주를 시작했고,
미 정부의 수많은 거짓 조약에 의해 인디언의 영토는 점점 줄어 들었다.
수족은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백인들이 지정한 보호구역으로 쫓겨가야 했다.
1880년대말 그나마 지켜졌던 보호구역마저 축소되자 테톤수족은 반아사 상태에 빠졌다.
그러자 부족회의를 열어 백인의 멸망과 풍요로운 과거의 재현을 기원하자며
예언자 와보카의 말에 따라 '고스트 댄스'라 불리는 의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이것은 침울했던 인디언들에게 활기를 불어 넣어주었고 열광으로 번졌다.
이 사실은 곧 내부 배신자에 의해 미 정부에 보고됐고 군대의 개입을 불렀다.
백인들은 이것을 또 다른 저항을 위한 단결의 수단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1890년 12월 28일, 커스터 중령이 이끄는 제7기병대의 추적대가 들이닥쳤다.
그들의 의식이 미군에 의해 저지되자, 인디언들은 조용히 투항했다.
그날 밤, 무장해제당한 인디언들이 운디드니 강가에서 야영을 하던 중 피살되었다.
백인의 저격에 의한 살인으로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미군은 인디언들을 살육했다.
이 학살은 백인들이 인디언을 정복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 학살의 전말
급진파 인디언이 사우스 다코타주의 운디드 니에서 농성을 벌이면서 인디언 정책의 전환을 요구한 사건.
운디드 니는 1890년 약 300명의 인디언이 500명의 기병대에 포위돼 학살당한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1890년 약 300명의 인디언이 이 마을을 습격하여 11명의 백인을 인질로 잡고 교회에서 농성을 벌였다.
인질은 3일 후에 석방됐으나, 인디언은 그후에도 운디드 니를 점거한 채 내무부 인디언국의 개혁,
상원에 의한 과거 371건의 준수되지 않은 조약의 재조정, 인디언의 생활실태조사 등을 요구했다.
이 점거사건의 주동세력은 아메리카 인디언 운동의 급진파로 알려졌다.
사슴이 뿔을 가는 달(12월)에 인디언들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수우족의 대추장 시팅불이 사살되었다.
지도자를 잃은 수우족은 다른 추장 ‘붉은구름’이 있는 지역으로 옮겨가다가
미 제7기병대와 만나 운디드니 샛강 근처 기병대 기지로 연행되었다.
운명의 그날 밤, 미군이 무장 해제를 명령했지만 젊은 인디언 전사 ‘검은 코요테’가 총을 내려놓지 않았다.
화가 난 미군 병사들이 달려들어 총을 붙잡는 순간 저 멀리서 총성이 울렸다.
언덕 위의 미군 기관총이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불을 뿜었다.
그것은 전투가 아니었다. 학살이었다. 350명의 인디언 가운데 150명이 현장에서 사살됐다.
죽은 사람 가운데 절반은 그 전사들의 가족인 부녀자와 어린이였다.
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한 인디언 여성은 이렇게 절규했다.
“우리는 도망치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들소라도 되는 것처럼 무조건 쏘아 댔다.
미군들은 비열한 자들이었다. 아녀자에게 총을 쏘아 대다니!
인디언 전사라면 백인 어린이들에게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 고스트 댄스 (Ghost Dance)
1890년 10월, 미네콘주족의 키킹베어는 수족의 지도자인 시팅불을 찾아갔다.
키킹베어는 예언자 와보카에게서 고스트 댄스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실상 키킹베어는 와보카에게서 감명을 받고 그와 함께 고스트 댄스 제전을 처음으로 연 사람이었다.
처음에 시팅불은 죽은 자들이 되살아난다는 것을 의심했지만 그것을 막을 의도는 없었다.
인디언 배신자들은 이런 의식에 불안해하며 자신의 거주 구역에 백인 군인들을 불러들였다.
시팅불은 키킹베어가 마술적 기호가 그려진 옷을 입고 춤을 춘다면,
총탄을 피할 수 있다고 확언하는 바람에, 그가 고스트 댄스를 가르칠 것을 허락하였다.
이것은 키킹베어가 시팅불을 사망으로 몰아가는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시팅불이 이 운동을 후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미 정부는 긴장하엿다.
시팅불은 지난 번 리틀빅혼 전투에서 미군에게 패배를 안겨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는 수족 전체로부터 존경받는 전사이자, 지도자였다.
1890년, 시팅불이 처음으로 고스트 댄스를 개최한지 두 달 밖에 안 되어
그에게는 체포령이 떨어졌으며 이 혼란의 와중에서 그가 사살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빅푸트의 무리로 도망쳤고, 또 키킹불의 무리와 합세하면서
그들과 또 다시 긴 여정을 거치다가 백인들에게 항복했고 운디드니 계곡으로 옮겨 캠프를 쳤다.
그러나 항복의 과정에서 우발적인 총격 사건이 벌어지면서, 운디드니의 학살을 몰고왔다.
당시 서남부에 살고 있던 인디언 부족들도 고스트 댄스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운디드니의 학살로 이 종교운동은 끝이 났고 인디언들은 크게 낙담했다.
이후 인디언들은 새로운 거주구역으로 뒤섞여 버리고 그들 고유의 문화를 상실해버렸다.
고스트 댄스는 바로 이 잃어버린 삶의 방식의 하나였다.
그러나 와보카 사상의 많은 부분이 파이유트족의 종교 행사로 이어져 내려와서
현재까지도 실행되고 있으며, 이 고스트 댄스를 기억하려는 역사적 탐구는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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