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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동맹과 왕청어(초기 북유럽 해운업)

구름위 2012. 12. 11.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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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청어와 한자 동맹 (초기 북유럽 해운업)


지리상의 발견으로 인도로 가는 항로가 있기 전까지 인도와의 무역은 지중해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북유럽국가들이 지중해 국가들보다 힘이 세지 않는 한 교통에서 이익을 거두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북유럽은 동양산 사치품을 베네치아와 제노아를 통해 이탈리아 배를 이용하거나 육로로 공급 받았다.


당시 북유럽이 차지하고 있던 무역로는 러시아와 발트해산 가죽, 밀납, 목재들이 대상을 통해 중앙아시아 사막을 가로질러 '노브고로트(Novgorod)' 의 큰 시장으로 운송되는 페르시아와 중국산 비단과 함께, 서유럽으로 유입 되었다.


(Novgorod, 러시아 북서부의 '노브고로트' 주의 주도이며 '볼호프강'가에 있으며 하항(河港)이 있고 철도 분기점인 러시아의 고도이다. 중세 한자상인과 동방상인들의 교역도시로 성장하여 16세기 전 까지는 가장 발달한 도시 였으나 18세기 페테스브르크가 건설되면서 상업의 의미가 사라진 곳)


동양산 향료와 비단, 그리고 모스크바 지방의 가죽과 밀랍이 서유럽 제조품과 교환되었다.


(아래: 발트해 한자동맹 영향권 지도)

파일:Extent of the Hansa.jpg


제조품 중 모직 의류가 가장 중요했다. 의류 제조업은 베네치아와 이탈리아 다른 도시국가에서 이루어 졌지만, 그 중심지는 라인강 하구의 삼각주에 자리 잡은 플랑드르(프랑스 북서쪽끝에서 벨기에 서부에 이르는 지방. 英: 플란더스) 지방이었다. 이태리와 플랑드르 사람들은 원재료를 모두 잉글랜드에서 구입을 했다.


잉글랜드 양모는 선박 수요가 가장 많은 물품 중 하나 였다. 양모 일부는 베네치아 갈리아스 상선과 제노아의 캐릭선을 운반되기도 했지만 도버 해협의 가장 좁은 지역에 있는 칼레(Calais 프랑스 북부 파드칼레주의 항구·공업도시, 영국 도버와 43km떨어져 있다)를 경유하는 육로로 운송되기도 했다.


양털이나 반제품의 모직물들을 플랑드르 지역으로 운송을 전적으로 담당했던 배들은 북유럽의 배들이다. 그러나 잉글랜드 양털이 '황금양털'신화를 상기시킬 만큼 수지 맞는 장사이기는 했으나


(황금양털: 그리이스 신화에서 '아르고 원정대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 '이아손Iason' 이라는 영웅이 '아르고Argo'라는 빠른 배를 타고 북쪽나라로 가서 아득한 옛날 그리스인들이 잃어버린 황금양털 찾아온 후 왕이 된다는 이야기)


북유럽의 '왕 청어'(King Herring)의 수송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던 선박들의 수입 양만큼 많았을지는 의문이다.


중세에 생선을 육류에 비해서 필수품이라 생각 했던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극히 소수였다. 그렇다면 북유럽 바다에 널려있는 생선인 왕 청어가 어떻게 중요했고 부를 가져다 주었을까?


중세에는 모두가 가톨릭이나 그리이스 정교(Orthdox)를 믿었다. 가톨릭에선 단식일이 많았을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엄격히 준수 되었다. 특히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순절(Lent, 四旬이란 40일을 가리키는 말로 재Ash의 수요일부터 부활절까지 40일)같은 주기에는 육류를 대체 할 수 있는 생선이 없었다면 추운 날씨를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육류 자체는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비쌌기 때문에 빈민계급은 호시절에도 고기 맛을 보기가 매우 어려웠다.


특히 겨울철에는 건초가 부족하여 가축들이 비쩍 말랐기 때문에 고기 공급량도 줄어 들었다. 햄이나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별도로 치면, 저장용 고기는 향료에 절인 쇠고기처럼 값비싼 고급품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량의 말린 생선이나 소금에 절인 생선은 단식주간에 각 지역의 부족한 어획량의 보충원으로서, 그리고 일반 주민들을 위한 겨울철 식량과, 포위 공격을 견뎌야 하는 도시와 전쟁터의 군대를 위한 식량으로서 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래서 전쟁터에 출전한 사람들에게 '청어전쟁'이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15세기 오를레앙(파리 남쪽 115㎞에 있으며 루아르강에 면한 도시. 백년전쟁중인 1428년 10월부터 영국군의 포위공격으로 고립되었지만 다음해 5월 잔 다르크에 의해서 해방됨)이 포위 공격 때 영국함대가 호송하는 염장 생선의 안전한 운송은 그야말로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세가지 측면에서 영향을 미쳤다.
첫째, 당시는 오늘날에 비해 어업에 종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금보다 많았다.

둘째, 어민들이 잡은 생선을 들려오는 곳은 생선을 보존하기 위한 소금을 대량 생산으로 수입해야 했고, 이 일대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위한 식량과 필수품들을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대시장으로 바뀌었다.

세째, 청어잡이에 종사하는 선주들은 북유럽과 서유럽 전역에서 수요가 막대한 상품을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물건은 뭐든지 청어와 바꿀 수 있었기에 청어를 처분하기 위한 원거리 항해용 큰 배를 만들었다.


왕 청어의 중요성은 12~13세기 발트해 입구에서 스카니아(Scania) 어업이 흥성하면서였다. 1년 중 10달을 조용하게 보내다가 7월25일 ~ 9월29일까지 유럽에서 가장 바쁜 시장으로 변한다.


이 사업에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낸 것은 한자도시 상인들이었다. 적어도 3세기 동안 북유럽 바닷길을 장악한 한자 동맹은 게르만 상업도시의 연합체로서, 각 도시들은 황제에게 충성 서약을 했지만 상업과 대내 문제에선 전적으로 자치권을 행사 했다.


한자 동맹의 점진적이며 비공개적으로 형성 되었기 때문에 그 기원은 불분명하다.
13세기에 동맹이 조직되어 있었고, 1370년 한자동맹이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맺은 '슈트랄준트조약'은 한자동맹이 유럽에서 강대국의 하나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뤼베크, 브레멘, 함브르크, 그 밖의 한자 도시들은 오랫동안 중요한 무역 중심지였다.

한자의 위대성은 스카니아 어업의 많은 부분과 발트해의 '뤼겐(Rugen)섬' (위, 발트해 지도에서 참조) 연안에서 이루어지는 청어잡이를 장악 한데 근거 하고 있다.


(아래 : 함부르크)

 

 


게르만인들이 직접 어업에 참여 하지는 않았다. 스카니아 지방은 데인족의 영토였고, 어부들도 대부분 데인족과 스웨덴족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조업 보다는 무역에 더 관심이 많았다. 어획량을 사들이고, 소금에 절이고, 포장하고, 분배하는 과정에서 더 큰 이익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의 중간도매인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리고 소금과 소금 저장 용기, 일꾼들에게 필요한 식료품과 맥주를 공급하면서 돈을 벌어 들였다.


1463년 데인인과 게르만 사이에 일어난 자유 어획투쟁에서 약 2만 명이라는 엄청난 사람들이 관계했고 알려지고 있다.


무엇보다 어획분배 사업은 진짜 황금알을 낳는 사업이었다.
독일본토, 러시아, 폴란드, 발트해 제국, 플랑드르, 스페인, 프랑스, 포루투갈에서 청어를 사려고 줄을 서있었고 한자 상인들은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원거리 항해 선박을 이용해서 청어를 처분하고 그 지역 특산물을 사다가 물품이 없는 지역에 공급했기 때문에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활동범위를 확장하고자 했기 때문에 드디어 전 북유럽에서 거대무역 중개상이자 운송업자가 되었다.


한자 도시가 있는 곳이면 콘토르(Kontors : 일종의 은행) 또는 상업관이 있었다. 상인들은 이곳에 머물면서 상관장과 자치회의 명령에 준수 할 것임을 서약 했다.
무역을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들어 갔으며 외교적 수단을 동원해서 거침없이 일했다. 상관이 설치된 나라의 대외 무역을 독점할 필요가 있을 때는 전쟁도 불사 했다.

한자 상인들은 통치조직이 미약하거나 상업조직이 발달하지 않는 도시에서는 절대적인 독점권을 확보했다. 특히 한자상인들은 스카니아 어업을 장악한 뒤에 발트해와 스칸디나비아 무역을 거의 장악했으며 노브고로드(Novgorod) 에 정착하여 러시아와의 무역도 독점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자도시들은 강력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16세기 중엽까지 한자는 독일 외국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도시들의 공동체로서 한자의회가 최고 기관이었다. 17세기 완전히 몰락할 때까지 한자는 명확한 재정규칙을 가진 소수 도시들의 연합체 였다.


한자동맹의 흔적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오늘날에도 독일지역은 여전히 한자동맹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이는 도시들이 많다. 한자도시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외양이 비슷하다.


(브루게의 모습)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우선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운하와 튼튼한 성벽은 도시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한다. 또 수많은 교회의 첨탑들이 솟아 있고, 성벽 안에는 좁은 도로와 골목길이 이리저리 뒤엉켜 있다. 하지만 도시 한복판에는 시원하게 넓은 광장이 있어서 화합이나 모임의 장소로 쓰였다. 그리고 광장 한쪽엔 화려한 시청건물이 서 있다.


(한자도시의 전형적인 특징을 가진 도시 : 뤼베크)

 

 

 

그리고 보통 도시에선 찾아보기 힘든 항구들이 도시를 둘러싼 성벽 앞에 있었다.
함부르크를 제외하곤 항만 시설은 거의 없었다. 항구에 들어온 배들은 말뚝에 배를 묶어 두었고 선주는 말뚝 사용료를 지불 하였다.


플랑드르의 브루게, 북부독일의 뤼베크, 함부르크, 브레멘, 노르웨이의 베르겐 등 많은 한자도시가 있지만 그 중에서 뤼베크는 한자도시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항구는 브루게에서 모방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자 도시들은 상업뿐 아니라 정신, 문화적 자산에도 기여를 했다. 그리고 초등 교육에서부터 대학교 교육까지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 했다. 그리고 한자도시간에는 단일화 경향이 강했다.


그리고 한자 도시들은 각기 특별한 전문 물품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
13세기 한자동맹도시에서
뤼베크는 만물상,
쾰른은 포도주 집,
부라운슈바이크는 옷감의 집,
단치히(현, 그단스크)는 곡물의 집,
함부르크는 맥주의 집,
막데브르크는 빵집,
뤼네브르크는 소금의 집,
레벨은 밀납과 아마의 집,
크라카우는 구리의 집,
비스베어는 역청과 타르의 집

과 같은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한자 상인들은 전쟁이 주는 피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해군력보다 선박 건조용 재료를 독점 공급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해군을 건설하고 해양팽창을 도모하는 나라들은 한자도시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굳게 뭉쳐 있었던 한자도시들은 한나라 또는 한 도시에 대해서 거래 중지를 할 수 있어서 전쟁을 하지 않고도 자신들의 주장을 실현 시킬 수 있었다.


한자 동맹이 정치적 동맹이나 적대관계에 상관없이 경제적 목표만을 추구하고 협약을 체결하며 의무를 수행하고 중립을 지킬 때 까지는 그 무엇도 한자동맹을 방해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한자 도시들이 지중해 밖의 운송무역을 독점한 것은 아니었다. 무게가 많이 나가는 잉글랜드산 양모를 플랑드르 항구로 운송하고 브루게의 수공 업자들이 만든 제품을 잉글랜드와 다른 지역으로 분배하는 일은 플랑드르 상선들이 독점 했다.


특히 한자 상인들이 운송하지 못했던 지역 중 비스케이만 무역 가운데 가장 유명 했던 것은 보르도 산 포도주 수출 무역 있었다. 잉글랜드 측면으로 보면 게르만인들이 주로 맥주를 선호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게르만인들은 포도주가 필요하면 라인란트(Rhineland)에서 조달 했다.

 

 따라서 포도주 무역은 잉글랜드인들과 프랑스 인들에게 넘어 갔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15세기 중엽까지 보르도 항구와 가스코뉴(Gascogne)와 기앙느(Guienne)의 포도 밭은 프랑스 영내의 잉글랜드 영토였다.


발트해 지역 외에 한자 상인들이 견고하게 자리 잡은 곳은 잉글랜드였다. 두말 할 필요 없이 '황금 양털'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양털 운송이 플랑드르에 한정이 되었었지만 1347년 칼레를 함락시고 난 다음 잉글랜드령이 된 칼레로 운송이 되었다.


칼레는 플랑드르, 독일, 프랑스 인들의 자유도시가 되었고 이태리로 가는 대륙 횡단로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쯤에서 잉글랜드는 조잡한 모직물을 만들기 시작 했고 플랑드르에 수출 하였다. 이 때 런던과 브루게에 거점을 확보 했던 한자 상인들이 초창기 모직물 수출을 장악해서 이익을 보았다.


중세 잉글랜드는 가난 하고 물질문명이 대류에 비해서 뒤 떨어져 있었다. 특히 자본 축적과, 산업과 기술, 윤택한 삶과 생활 예절이라는 측면에서 이탈리아, 독일, 플랑드르의 대상도시의 자본가 계급에 비해 크게 뒤져 있었다. 그래서 잉글랜드 주산물 수출의 대부분은 외국인들이 차지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 잉글랜드 해운 상황으로 보면 해적 질보다 더 좋은 무역 이익은 없었다. 칼레로 운송되는 배를 약탈하거나 포도주 배를 약탈 하는 식으로 해적들이 난무 했다. 잉글랜드 인들은 천상 어쩔 수 없는 해적 이었기 때문이다.


16세기에 이르러 네덜란드인들은 프랑스, 플랑드르, 잉글랜드에 염장생선을 공급하는 한자 상인들을 몰아 냈고

17세기 초부터는 독일과 발트해 시장까지 장악하기 시작 했다.
이제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이 과거 한자 상인들의 도시와 같은 물류의 중심지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한자 상인의 자리를 네덜란드인들이 차지하게 되었고 한자 도시들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한자 무역은 30년 종교 전쟁(1618-48)으로 독일 전역이 황폐화 됨으로써 완전히 몰락하였고, 앤트워프의 경제 활동은 스페인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한자 상인들에게는 이기적이면서 파렴치한 면도 없지 않았지만 생활 수준을 전반적으로 끌어 올리는데 필요한 물품 교환을 촉진 시켰고 상업에 필요한 조직을 만드는 방법을 후대에 제시해 줌으로써 유럽과 잉글랜드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13~15세기에 북유럽의 중요한 경제적·정치적 세력이었다(독일어 Hanse는 '무리'나 '친구'라는 뜻의 고트어에서 유래한 중세 독일어로서, '길드'나 '조합'을 의미했음). 한자 동맹의 전신은 독일 상인들이 활동한 2개의 주요지역, 즉 북해 연안의 저지대 및 브리튼 섬과 교역 관계를 갖고 있던 라인란트, 독일인들이 유럽 북동부의 방대한 배후지와 서유럽 및 지중해 지역 사이에서 중개상 노릇을 한 발트 해 연안지역에 있던 지방의 상인단체들이었다. 1280년대에 이미 라인 지방의 다양한 상인 집단들은 그들의 공통된 이익을 지키기 위해 협력했고, 발트 해 무역을 지배한 뤼베크 및 그밖의 독일 북부 도시들과 동맹을 맺었다. 동맹의 목적은 해적 및 산적을 진압하고, 등대를 세워 항해의 안전을 촉진하며, 수로 안내인 등을 훈련시키고, 무역기지와 독점권을 확립함으로써 교역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많은 외국 도시(예를 들면 노르웨이의 베르겐, 러시아의 노브고로트, 영국의 런던)에 상업 지역(kontore)을 세웠다. 수십 년 뒤 한자 동맹의 공격적인 보호무역정책은 현지 상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1368~70년에 한자 동맹은 덴마크 왕 발데마르 4세의 단호한 저항에 부딪쳤다. 발데마르는 발트 해 남서부지역을 지배하여, 그곳에서 한자 동맹이 장악한 경제적 지배력을 종식시키려고 애썼다.

 

<한자동맹>

13~15세기에 북유럽의 중요한 경제적·정치적 세력이었다(독일어 Hanse는 '무리'나 '친구'라는 뜻의 고트어에서 유래한 중세 독일어로서, '길드'나 '조합'을 의미했음). 한자 동맹의 전신은 독일 상인들이 활동한 2개의 주요지역, 즉 북해 연안의 저지대 및 브리튼 섬과 교역 관계를 갖고 있던 라인란트, 독일인들이 유럽 북동부의 방대한 배후지와 서유럽 및 지중해 지역 사이에서 중개상 노릇을 한 발트 해 연안지역에 있던 지방의 상인단체들이었다.

1280년대에 이미 라인 지방의 다양한 상인 집단들은 그들의 공통된 이익을 지키기 위해 협력했고, 발트 해 무역을 지배한 뤼베크 및 그밖의 독일 북부 도시들과 동맹을 맺었다.

동맹의 목적은 해적 및 산적을 진압하고, 등대를 세워 항해의 안전을 촉진하며, 수로 안내인 등을 훈련시키고, 무역기지와 독점권을 확립함으로써 교역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많은 외국 도시(예를 들면 노르웨이의 베르겐, 러시아의 노브고로트, 영국의 런던)에 상업 지역(kontore)을 세웠다.

수십 년 뒤 한자 동맹의 공격적인 보호무역정책은 현지 상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1368~70년에 한자 동맹은 덴마크 왕 발데마르 4세의 단호한 저항에 부딪쳤다. 발데마르는 발트 해 남서부지역을 지배하여, 그곳에서 한자 동맹이 장악한 경제적 지배력을 종식시키려고 애썼다.

 

한자 동맹은 특별 회의를 소집하여 군대를 모집하기로 결정했는데, 이 군대가 그후 덴마크군을 결정적으로 무찔렀기 때문에 한자 동맹은 잠시 덴마크를 지배하게 되었다.

14세기에 한자 동맹은 대부분 독일 도시인 100여 개의 도시를 회원으로 거느렸다. 한자 동맹에는 정관도 없었고, 육군이나 해군의 상비군도 없었으며, 정기 집회(의회)를 제외하고는 관리기구도 없었다. 각 도시의 특유한 이해관계와 지역적인 이익이 공통된 관심사보다 비중이 커지기 시작하자, 15세기초부터는 정기 집회를 소집하는 일도 점점 뜸해졌다.

비(非)게르만족이 세운 발트 해 국가들의 세력이 점점 커진 것도 한자 동맹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리투아니아·폴란드는 1368년에 통일되었다. 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는 1400년경에 연방을 결성했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1478년에 노브고로트를 점령하고, 그곳의 독일 상인들을 추방했다.

16세기 중엽에 이르자 네덜란드인이 발트 해에서 서쪽으로 상품을 수송하는 해운업을 장악하게 되어 뤼베크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독일 자체에서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같은 군주국 통합체가 한자 동맹을 약화시켜, 한자 동맹은 신대륙 발견 시대에 서서히 사라졌다. 한자 동맹의 집회가 마지막으로 열린 것은 1669년이었다.

12, 13세기경 유럽에는 한자(Hansa)라고 불리는 편력상인(遍歷商人)들의 단체가 많이 있었는데, 14세기 중반에 이르자 그들 사이에서 ‘독일한자’ 또는 ‘한자동맹’이라는 도시동맹(都市同盟)이 성장하여, 중세 상업사상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즉, 독일 본국의 도시 사이에는 자치의 확보, 치안의 유지 등의 필요성에서 도시 상호간의 정치적 ·군사적 동맹을 결성(예컨대 1230년의 뤼베크 ·함부르크 간의 조약 체결)하는 기운이 높아졌다.

14세기 전반 플랑드르에서 압박을 받은 독일상인이 대항책으로서 본국 도시에 연합적인 지원을 요구한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한자동맹이 성립되었다. 또, 1358년 플랑드르에 대한 상업봉쇄 선언을 할 때 라인강부터 북해 ·발트해에 면한 많은 도시가 ‘독일한자’라는 도시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1366년부터 외지에서의 한자 무역의 특권은 동맹에 가입한 도시 시민에 한하게 하여 그 기초가 더욱 견고해졌다.

 

한자동맹의 실체는 극히 탄력성 있는 경제적 ·정치적 연합이었기 때문에, 한자 특권을 가지는 도시의 수는 그때 그때의 사정에 따라서 증감하였다. 흔히 ‘한자의 도시는 77’이라고 했지만, 최성기에는 100을 헤아릴 정도였다. 뤼베크를 맹주로 하여 브레멘 ·함부르크 ·쾰른 등이 4대 주요도시이며, 뤼베크에 ‘한자회의’를 두고 다수결로 정책을 결정하였다.

한자 상인이 취급한 상품은 지중해 무역과는 뚜렷하게 대조적이었으며, 후자가 주로 사치품이었던 것에 비하여 전자는 모피 ·벌꿀 ·생선 ·곡물 ·타르 ·목재 ·호박(琥珀) ·모직물 ·양모 등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같은 군주국 통합체로부터 압박을 받고, 한편으로는 영국 ·네덜란드 등 신흥국에 밀려서 한자는 점차 쇠퇴하여 1597년 런던 상관(商館)이 폐쇄되고, 1669년 한자회의가 마지막으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