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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23) ─ 뒤집히는 대세

구름위 2012. 12. 6.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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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전역


 강희는 삼번의 난 기간 초반 동안, 파견된 대장군들의 놀라울 정도의 무능과 어이가 없을 정도의 소심한 행태에 대하여 할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심과 놀라울 정도의 자제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강서에 나가 있는 간친왕 나포에게 문자 그대로 최후통첩을 날렸습니다.


 "장사를 회복하고, 호남을 평정하며, 길안의 대군에 의존하여 대응해야 한다. 만일 이전처럼 지체하고, 관망하여 안친왕의 대군이 이탈하면, 나포 등은 군기를 어긴 예에 따라 중죄로 다스리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협박을 당한 나포 등은 비로소 군사를 이끌고 길안을 포위하려 했습니다. 오군에는 고대절이라는 뛰어난 장수가 4,000여명의 병사로 길안을 사수하고 있었는데, 고대절이 워낙 용맹하고 휘하 부대도 정예병이라 전투력이 대단했습니다. 그는 고작 100여명의 기병으로 관군의 대군영과 격돌하여 관군을 대파시켰습니다. 나포는 놀라서 도망쳤는데, 문제는 고대절의 동료인 한대임이 고대절을 시기해, 오삼계의 부하 중에 한명인 호국주 앞에서 고대절을 이간질 했습니다. 핍박을 받은 고대절은 울화가 터져 죽었고, 한대임은 길안에서 꼼짝도 안했습니다. 나포는 다시 길안을 포위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오삼계는 길안이 위급하자 이를 구원하려고 했습니다. 반대쪽에 있는 관군의 장군 늑이금이 겁을 집어먹고 진군하지 못하기에 그는 마음 놓고 왕서, 도모, 마보 등의 지휘관에게 각각 3,000여명, 즉 9,000여명의 병사를 주어 길안으로 진군시켰습니다.


 이 장수들의 기량을 보자면, 왕서는 용맹한데 반하여 마보는 겁이 많았습니다. 왕서는 마보에게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병사를 구원하려면, 뜨거운 불에서 구하고 끓는 물에서 꺼내 주는 것처럼 해야 한다. 대군은 응당 신속히 100리 떨어진 평향으로 가야 한다. 구원병이 모두 도착하면 길안의 포위는 곧 풀어진다."


 마보는 동의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관군이 길안을 포위하고, 평향 일대에도 반드시 매복을 숨겨 놓았을 것이다. 그러니 잘못 진군하면 전멸한다. 형양을 도강하여 가면 적이 가로막는 바가 없다. 시일은 비록 늦어지지만 만전의 계책이 된다."


 왕서는 서둘러 진군해야 한다고 여기고, 마보는 천천히 가자고 주장하였는데, 왕서는 비록 내키지는 않았지만 마보의 주장을 억지로 따랐습니다. 그렇게 보름을 진군하고 비로소 길안 경내에 진입했고, 성까지 가려면 중간에 강을 건너야 했는데 선박이 필요했습니다. 마보는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우리의 구원병이 도착했으니, 관군은 반드시 우리가 강을 건너기 전에 와서 저지 할 것이므로, 그들이 절반 정도를 건너오면 우리가 진격하자."


 잠시 후 관군이 와서 강을 건넜습니다. 왕서는 마보에게 어서 계획대로 하라고 재촉하였으나, 마보는 정작 나서야 할 때가 되자 겁을 먹고 머뭇거렸습니다. 왕서는 군사를 이끌고 빠르게 공격하여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는데, 마보는 병사를 전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왕서가 너무나 화가 나고 분해 싸우다 말고 마보의 군영 안으로 따지러 들어갔는데 마보가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병사들에게 물어보자,


 "장군은 지하 토굴에 숨었습니다."


 라는 대답이 들어왔습니다. 왕서가 지하 토굴로 달려가 보니, 과연 마보가 쪼그리고 숨어 있었습니다. 왕서가 마보의 몸을 일으키자, 마보는,


 "화포의 위력이 강해 잠시 몸을 숨겼소."


 라고 대답했습니다. 왕서가 마보를 끄집어서 밖으로 나오자, 마침 밤이 다 되어 전투가 종료되었습니다. 마보는 밤을 틈타 적군과 5리 정도 더 떨어져서 진영을 꾸미자고 하자, 왕서는 이에 동의했습니다. 마보가 앞장서서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는데, 10리, 이어서 20여리, 더 나아가서 30여리를 물러나면서도 멈추려는 생각이 없고 오히려 이 틈에 줄행랑을 치자는 식의 움직임을 보이자, 왕서는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병사들을 멈추게 했습니다. 하지만 마보는 기어코 10여리를 더 물러나서 겨우 군사를 멈추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왕서는 출진을 재촉하였으나, 마보는,


 "병사들이 피로하오."


 라고 하면서 이틀은 쉬어야 출전이 가능하다고 말 했고, 이틀 뒤에 왕서가 다시 전투를 재촉하자,


 "쉬면서 힘을 기릅시다."


 하는 요지의 제안을 했습니다. 도저히 나가서 싸우려고 하질 않았기에 왕서는 큰 길에 자신의 군영을 세우고, 도모의 군사는 왼편 고개에, 마보의 군사는 오른쪽 고개에 군영을 세워 관군을 기다리면서 적이 오면 서로 도와주어 싸울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자, 관군쪽에서도 오군이 위축되어 있는것을 눈치챘습니다. 그리하여 1만 부대를 공격하여 왕서를 공격하고, 다른 2개 군단으로 좌우 언덕의 적병을 막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왕서는 군사의 절반을 잃었고, 서둘러 마보에게 구원을 오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마보는 또 겁을 내어 구원병을 보내지 않습니다. 참다 참다 못한 마보 휘하 총병, 나여백이라는 사람이 분노하면서 소리쳤습니다.


 "왕 장군의 핍박이 이렇게 심한데도 어찌 보고만 있는가! 어서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해 주어야 한다!"


 이리하여 마보의 군대가 움직이는 기미가 보이자 관군은 후퇴했습니다. 이 싸움에서 왕서의 군사는 태반이 죽었으나 마보나 도모는 전혀 피해가 없어서, 마보는 스스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여기면서 이를 틈타 군사를 귀환시켜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우리 세 명은 이 승리를 틈타 군사를 귀환시켜야 한다. 길안은 강으로 막혀 있으므로 이후 다시 대군을 정돈한 뒤 구원하기로 하자."


 이렇게 어이없이 구원병은 되돌아갔고, 길안에서는 구원병이 온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포위가 200일 되자 길안은 양식이 떨어졌고, 결국 길안을 지키던 한대임은 어둠을 틈타 몰래 군사를 이끌고 남문으로 달아났습니다. 관군은 길안을 점령했고 도망간 한대임을 쫒으면서 강희의 명에 따라 그에게 용서해줄테니 투항하라고 권하였습니다. 당시 왕보신의 항복과, 또 복건과 광동 등지에서의 패전 소식이 들려오자, 한대임은 고민하다가 관군에 항복합니다. 이렇게 서북에 이어 강서도 간신히 평정되었습니다.



복건 전역


 경정충이 한참 기세를 타고 있었을 무렵, 강희는 경정충이 지금 한참 세력을 떨치고는 있지만, 오삼계와 달리 회유의 여지는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문에 경정충의 자손들은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있었고, 회유 공작을 펼쳤지만 이때는 경정충이 세력이 강해 회유 요청을 무시하고 사신들을 구금했습니다.


 하지만 강희는 회유 정책을 계속하면서, 동시에 1674년 7월 무렵 절강 총독 이지방 등에게 명하여 무력 토벌을 병행하게 했습니다. 강희에게 있어 행운이 있다면, 복건 전역의 이지방은 서북의 동액이나 늑이금, 나포 처럼 겁쟁이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적군이 수만 부대를 이끌고 공격해오자, 도망칠것을 권하는 수하들에게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나는 전군의 사령관이다. 내가 물러나면 적을 받아들이게 된다. 오늘의 승패는 곧 나의 생사이다."


 그러면서 겁을 먹고 진군하지 않는 장수들을 곧바로 군중 앞에서 참수했습니다. 이지방은 7월 12일부터 18일까지 다섯 번 적과 생사를 건 사투를 펼쳐 적을 대패시키고 승기를 틈타 잃었던 지역을 수복했습니다. 경정충은 세력을 조직하여 수만 부대를 조직, 역공을 취했으나 복건의 관군은 다른 곳의 관군하고는 달리, 용맹무쌍하여 수차례 적을 격파했습니다. 이 지역에 파견된 강친왕 걸서는 반란구을 수차례 참패 시켰고, 10월, 반란군 도독 서상조 휘하 마병 및 보병 5만여명을 대파, 적 3만을 참수하고 기세를 타고 진격하여 반란군을 격퇴하고 추가로 1만여 명을 죽였습니다.


 경정충은 예상외로 막강한 관군의 공격에 맥을 추지 못했습니다. 1676년 2월 7일, 관군은 반란군 2만여명을 참수시켜 또다시 대승을 거두었고, 한편 대만에서 불러온 정경과의 불화까지 터져 5월이 되자 파견 시켰던 군대를 전부 회군시켜야 했습니다. 군량이 결핍되고, 병사들은 도망가고, 부하들은 지휘를 듣지 않고, 심지어 수하 8,000여명이 달아나는 사건 까지 생겼습니다. 더구나 기껏 불러온 대만의 정경은 이 기회에 자신의 배후를 압박하여 복건의 절반을 차지한데다, 관군의 이지방과 강친왕이 자신을 상대로 연전연승하자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상황을 포착한 강희는 경정충에게 다시 한번 투항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지금 대군이 선하령에 주둔하고 말을 달려 포성을 공격했다. 포성은 복건성의 재화와 세금의 원천인데 목구멍을 잃었으니 식량을 보급받을 수 없다. 건녕 및 연평이 무너져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는, 무리를 이끌고 항복해 왕작을 그대로 유지하고 백만의 백성을 보전하는 편이 낫다. 게다가 정경은 그대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군읍을 탈취할 때 그대가 마땅히 대군을 도와 토벌하여 공을 세우면 되거늘, 왜 오랏동안 원수를 섬기고 있는가."


 방법이 곤란해진 경정충은 하는 수 없이 투항했고, 1677년 무렵에는 관군과 힘을 합쳐 대만의 정경을 하문으로 내쫒았습니다. 이로서 복건이 평정되었습니다. 복건은 서북 등에 비하면, 당초 경정충의 기세에 비해서는 상당히 순조롭게 일이 풀린 편이었습니다. 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군 지휘관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유능하고 결단력이 있었던 탓으로, 이길 싸움도 질질 끌며 늘어지는 형편없는 모습이 복건에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군사작전들이 점차 성공으로 향하고 있을때, 오삼계와 어중간한 동맹 관계를 유지하던 상지신은 1676년 12월 무렵 강희에게 항복을 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했습니다. 강희는 슬슬 답답하던 여러 전역의 상황이 호전되고 있었고, 오삼계를 고립시킬 요량으로 상지신을 칭찬하면서 이전의 죄를 전혀 묻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상지시은 1677년 5월 무렵 정식으로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친왕의 직위를 인정받은 상지신은 군사력을 보존하려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6월, 강희는 상지신에게 호남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지만 상지신은 핑계를 대며 이를 무시했습니다. 7월, 오삼계 반란군 수만명이 호남으로 진격하여 이를 막으라는 명령을 내려도, 상지신은 여전히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오삼계 반란군이 소주 등에 공격을 퍼붓자, 강희는 연거푸 두 차례나 상지신에게 명령을 내려 구원을 하도록 했으나 상지신은 또 핑계를 대면서 빠졌고, 1678년 2월에도 비슷한 상황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상황은 계속 이어져, 강희는 상지신에게 직접 출정하지 않아도 되니 병사라도 보내라고 했지만, 상지신이 이를 전혀 듣지 않고 무시하는 모습이 계속 이어집니다. 


 다만 이런 상지신의 온갖 기만 행위에도 전역은 분명히 역전되고 있었습니다. 치명적이었던 1674년과 1675년을 지난뒤, 1676년 등에 각지에서 반격이 시작되어 1677년 쯤이면 어느정도 성과를 내면서 여러 전역에서 강희의 군대가 오군을 상대로 제압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승리의 전조에 불을 밝히고, 성과가 훨씬 빨리 나타나게 만드는 대사건이 벌어집니다.




 오삼계가 사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