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강희제의 전략적 딜레마
- 놀라고 두려워하는일은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것은 분명할 것입니다. 젊은 시절의 강희에게 있어 '속수무책'이라는 단어만큼 어울리지 않는 말도 없을 터인데, 사태에 재빠르게 대응하는 면에서 있어 강희는 확실히 손을 쓰는것이 빨랐습니다. 그는 즉시 대군을 서안으로 파견했고, 섬서로 오삼계 대군이 물밑듯이 들어오는 일을 막았습니다. 양양에 있던 병력이 서안으로 일부 이동했고, 용맹한 몽고병사 3,500여명도 서안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북경에 주둔하는 팔기병 중 일부를 또 뽑아 보냈습니다.
- 관군을 파견하여 섬서를 방어하는 일에 몰두하면서, 동시에 서북에서의 동란을 일거에 잠재울 방법에 대하여 강희는 고심했습니다. 가장 좋은 일은 왕보신이 이제라도 마음을 돌리는 일입니다. 강희가 생각하기에 왕보신과 청나라 조정은 그리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 왕보신도 자기에게 충성을 다했다고 믿었습니다. 당장 얼마전까지만 해도, 오삼계가 회유하는 편지를 오히려 자신에게 보내준 인물이 아닙니까. 강희가 왕보신의 반란에 정말 깜짝놀란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 따라서, 왕보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왕보신의 반란이 명확해진 현 상태에서도 강희는 병부에 명해 왕보신의 처자를 "절대로 해치지 않고, 모두 잘 보살펴" 주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보신의 아들 왕계정을 황궁으로 불렀습니다. 왕계정이 황궁에 들어오자, 강희는 불문곡직하고 곧바로 입을 열었습니다.
- "너희 부친이 반란을 일으켰다."
- 왕계정은 순간 머미를 들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 매다가 대답했습니다.
- "저는 조금도 알지 못합니다."
- 강희는 반란에 관한 상소를 왕계정에게 보여주었고, 왕계정은 글을 읽으면서 두려운 마움에 식은 땀을 계속 흘리고 얼굴색은 붉어지다가, 나중에는 하얗게 되어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이제 꼼짝없이 형틀에 묶여, 반역자의 일족이라는 이유로 살점이 수천조각 뜯겨나갈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잠시간 침묵이 흐르다가,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막락의 불화에 대해 몇가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강희는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듯, 그를 위로하면서 말했습니다.
-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네 부친의 충정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결코 모반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경략인 막락이 화해와 조정에 실패하여, 반란이 일어나고, 너희 부친을 위협하여 어쩔 수 없이 반란에 따르도록 했을 것이다. 너는 즉시 가서 부친에게 나의 말을 전하라. 너희 부친은 무죄이고, 경략을 살해한 죄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다. 너희 부친이 부대원들을 단속하는데 노력하여, 적을 격파하고 공을 세우면, 나는 일체의 죄를 사면할 수 있다. 이는 결코 헛된 말이 아니다."
- 그 후 왕계정은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무사히 아버지 왕보신이 있는곳까지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다 살아난 왕계정은 즉시 아버지를 저지시키기 위해 현지로 파견되었습니다.
- 그러면서 강희는 섬서 총독 합점에게 명해 왕보신을 회유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묘한 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난을 일으킨 관병들은 "사천의 길이 험하고 멀며, 군량은 계속 이어이지 않으니, 죽을까 두려워하여 여러 차례 변란을 일으킨 것." 이며, "관병이 난을 주동하고, 변란이 갑작스럽게 일어났으므로 부득이한 상황이었다." 라고 하면서, 반란군의 죄를 가중시키기 말고 즉각 위무하여 군영에 돌아오기를 원하는 자는 즉시 복귀시키고, 만일 귀농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로 이전의 죄를 추궁하지 말라고 하여 용서해주고, 연좌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근본적으로 강희는 왕보신의 토벌보다는 회유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복잡한 상황
왕보신에게 보낸 강희의 칙서 내용을 전부 올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내용만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자고 하면, 이 칙서에서는 왕보신을 질책하는 말은 전혀 없습니다. 기껏해야 매우 놀랐다 정도로, 왕보신의 죄는 아무것도 없고, 군신이 아니라 부자와 같이 여기며, 어쩔 수 없이 사태를 일으킨것을 불쌍히 여기며 전혀 책망하거나 추궁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심지어, 사태가 벌어진 원인은 강희 스스로가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지 못해 일어난것이라며 자신의 허물을 자책할 정도입니다.
왕보신은 칙서의 내용을 듣고 난후, 변란이 일어난 원인은 오직 막락이 마땅함을 잃어 군심이 복종하지 않은 탓이라고 둘러대면서, 자신은 결코 따르지 않았지만 상황이 기정사실이 되어버려 본인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관병의 목숨을 조정이 보장해준다면, 자신은 죽는다고 하더라도 기꺼워 하겠다고 대답합니다.
강희가 본래 "기왕의 일은 모두 추궁하지 않겠다." 하여 공언하였는데, 왕보신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서 구체적인 투항의 행동을 하지 않자, 강희는 재빠른 판단력으로 왕보신이 근시일내에 투항할것이라는 생각을 포기했습니다. 따라서 군사적인 대비와 함께, 회유 정책을 동시에 벌이면서 침착하고 끈기있게 사태를 지켜보며, 만일의 변화에 대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실제로 왕보신은 투항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막락은청나라 조정의 중신이고, 서북의 최고 지휘관이었는데, 아무리 황제가 공언을 한다 하여도 처벌을 받지 않는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던 것입니다. 조정에서 파견된 낭중(郎中)이 계속 왕보신을 재촉하자 왕보신은 그 낭중을 살해해 버리고 맙니다.

왕보신의 반란 소식은 당연히 오삼계도 들었습니다. 오삼계는 정말 기뻐하면서 즉각 왕보신에게 은을 무려 2,000만냥이나 보내어 위로하고, '평요대장군섬서동로총병' 이라는 거창한 지휘를 왕보신에게 내렸습니다. 갈곳이 없는 왕보신은 오삼계의 품으로 날아왔습니다. 강희는 이런 움직임을 경계하며, 현지에 나가 있는 장군 동액에게 어서 움직이라고 재촉했지만, 동액은 전투를 두려워해 전혀 싸우지를 않았습니다. 삼번의 난 초기에 원할한 대응을 조정이 하지 못한것은, 강희가 내린 판단을 현지의 지휘관들이 겁을 먹고 우물거려 기회를 놓친 경우가 매우 많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오삼계와 왕보신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힘을 합쳐 활보하고, 오삼계가 막대한 자금력과 인력으로 뿌린 사람들이 섬서와 감숙에서 관병들의 반란을 선도하니, 서북이 진동하면서 난주(蘭州) 등이 무너지고 수많은 관병들이 저마다 성을 헌납하여 왕보신을 따랐습니다. 눈깜짝할 사이에 섬서와 감숙의 거의 전역의 관리와 장수들이 반란군에 합류했는데, 사태가 어찌나 심각했는지 섬서에서는 서안만 달랑 남았을 뿐이고, 감숙에서도 하서주랑(河西走廊)을 제외하고는 모두 오삼계 세력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이때가 그야말로 최고의 위기였을 것입니다.
왕보신의 배반은 일종의 변고이며, 어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강희에게 있어 정말 짜증스러운 것은 현지에 나가있는 패륵 동액의 태도로, 심지어 항복했다고 하는 말까지 있을만큼 겁을 집어먹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강희는 동액에게 최후의 통첩을 내렸습니다. 질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줄이자면,
"이 모든일은 동액 등이 물러나 위축되었기 때문에 벌어난 일이다. 마땅히 해직해야 하나, 다만 전쟁 중이므로 군사를 이끌고 평량, 진주 등지를 안정시키며, 이전처럼 물러서서 군기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동액은 이러한 칙서를 받자, 어쩔 수 없이 내키지 않았지만 군대를 진주(秦州)로 이동시켜 1675년 3월에 진주를 포위했습니다. 강희는 이 싸움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섬서 총독, 사천 총독에게 모두 소속 부대를 이끌고 진주로 오라고 하였고, 도통 도해에게 홍이포를 이끌고 응원하도록 했습니다.
오삼계나 왕보신도 호락호락 당해줄 생각은 없어, 4월에 1만여의 군사를 진주로 파견했습니다. 진주 내에 있던 반란군은 8,000명으로, 1만여 구원병이 오자 성밖으로 갑자기 뛰쳐 나가 관군을 동시에 요격했습니다. 그런데 동액은 이 싸움에서 재빠른 지시로 군사를 나누어 응전함으로서, 이들을 모두 패퇴시켰습니다. 이 능력있는 모습을 보면 왜 동액이 그렇게 꾸물거리면서 싸움을 두려워했는지 의아스러울 정도입니다. 동액은 이후로도 계속 꾸물대는 모습을 보이는데, 천성이 겁이 많거나 온화한듯 합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반란군의 기세는 갑자기 위축되었고, 여러 장수들이 항복했으며, 사천등지에서 지원 온 병사들도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동액은 진주에 진입했고, 후퇴하는 적들을 추격했습니다. 왕보신이 평량에서 패잔병들을 모으고 있을때, 강희는 자신의 직감으로 지금이 반격의 적시임을 분명하게 파악했습니다. 그는 동액에게 지시했습니다.
"적이 두려워할때, 각 로의 관군은 마땅히 승리의 여세를 몰아 평량을 공격하라."
강희의 지시에 따라 각로의 관군은 섬서와 감숙에서 전면적인 대반격, 승리의 전격전(電撃戰)이 벌어지게 됩니다. 한족 출신의 섬서 제독 장용은 조주, 하주 두 성을 공략한 뒤 공창(鞏昌)으로 진격하여 신속하게 포위했습니다. 왕보신은 3,000여명의 구원병을 보내고, 성내에서도 사면의 문을 모두 열고 6,000명이나 되는 군세가 한꺼번에 튀어나와 협격했으나, 장용은 용맹무쌍하게 싸워 수많은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적군을 다시 성안으로 몰아버렸습니다. 동액이 즉시 원병을 보내어 한꺼번에 기세를 타자, 결국 공창도 함락되었습니다.
같은 시각, 서녕 총병관 왕진보는 군사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난주를 압박하여 1개월간 포위하여 적을 항복시켜 난주를 수복했습니다. 진주, 난주, 공창, 연안 등지가 모두 평정됨에 따라 흩어졌던 관병도 구름같이 몰려들었습니다. 이제 평량만 공략하면 일이 되어보였는데, 살육을 막기 위해 왕보신에 대해 회유정책이 계속 되었고, 그때마다 왕보신은 어중간한 태도를 보이며 회전양면전술을 구사하려했습니다. 강희는 왕보신이 핑계를 대고 시간을 벌려고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강희는 동액을 재촉하여 평량을 공격토록 함과 동시에, 한족 출신 부대원들을 존중해줄것을 요청했습니다. 장용 같은 인물은 한족임에도 매우 용맹했던것입니다. 강희는 절대로 이들을 소홀이 대하여, 불만을 야기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잘싸우던 동액은 또다시 전투에 대한 두려움이 되살아났고, 또 왕보신이 투항의 기미를 약간이나마 보이고 있자 차라리 싸우지 않고 왕보신을 투항시키려고 평량에 대한 포위도 어중간하게 하고, 계속 대화를 요청했습니다. 왕보신은 동액의 이런 기미를 알아차리고 성을 나서서 공격을 하는 한편, 다른쪽으로는 대화를 통해 관군의 공격을 막았습니다.
강희는 계속해서 이렇게 동액에게 말했습니다.
"왕보신이 항복을 요청함은 모두 기만이다. 우리 군대의 공격을 늦추려는 계책일 뿐이다. 너희들은 급히 평량을 공격해야 한다."
그런데 동액은 이런 소리만을 반복했습니다.
"청컨대 비중 있는 대신을 보내 항복을 받도록 해 주십시오."
강희는 답답해서 어쩔 줄을 모르며 동액을 질책했습니다. 동액의 모습을 보면 분명히 능력이 없는것은 아닌데, 계속 머뭇거리면서 어중간한 모습만을 보이고 있으니 해임하기도, 그대로 두기도 답답한 노릇입니다. 실제로 왕보신은 앞으로는 관군과 담판하면서, 밖으로는 1만 부대를 보내 포위망을 뚫어버리고 각지에서 관군을 물리쳤습니다. 이에 호응하여 오삼계가 지원군을 보내어 관군의 병력을 분산시키고 평량의 군대와 화합하려 하자, 형세가 다시 이상하게 변해버리고 맙니다.
이 모두 왕보신의 세력을 일소하면 끝날 일입니다. 강희는 지독하게 말을 안듣는 동액을 몇번이나 질책해서 간신히 움직이게 했는데, 평량성 아래의 해자가 깊고 지형이 험해 공략이 쉽지 않았습니다. 동액은 '나는 나고 너는 너다' 는 식으로 진격하지 않고 성에서 3리 떨어진곳에 군영을 두었습니다. 이 사태가 무려 1년이나 이어지며 1676년 2월에까지 이르자, 강희는 하나의 결단을 내립니다.
재주와 지략이 뛰어난 인물, 대학사 도해를 초원 대장군으로 삼아, 섬서로 파견하여, 한족과 만주족 모든 부대를 통솔케하고, 패륵 동액 이하 모든 인물들이 도해의 지휘를 받게 한 것입니다.
상지신의 전략적 딜레마
1676년 2월 21일, 도해가 서북으로 파견될 무렵 광동에서 커다란 변란이 일어납니다. 상지신이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1674년 7월부터 1675년 동안 관군은 치열하게 경정충과 싸웠고, 상가희가 청조에 협력함에 따라 상가희 역시 경정충 등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상가희는 광동 동쪽, 즉 경정충의 복건과 가까운 곳에서 변란이 계속 일어나자 이를 토벌하였는데, 갑자기 대만의 정경이 1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들 반란군을 도와주는 바람에 패퇴했습니다. 또한 경정충이 군대를 동원하여 광동성의 여러곳을 점령함으로서, 광동과 강서(장시성)의 연결을 아예 단절시켜 버렸습니다.
또한 여기에 오삼계까지 군대를 파견하여 상가희를 협공하자, 상가희는 북경에 하루 빨리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강서와 광동의 연결이 모조리 끊어지자 관군은 상가희를 도우려 해도 도울 방법이 없었습니다. 울화통이 터진 고령의 상가희는 병세가 급속하게 악화되어 자리에 누워버렸으며, 졸지에 모든 권한이 상지신의 손에 들어오고 말았습니다. 이게 문제였습니다.
후계문제로 불만이 극심했던 상지신은 일을 터뜨려 상가희의 책사 김광을 살해하고, 오삼계와 협력하기로 약조하면서 상가희가 있는 왕부를 감시했습니다. 상가희는 이런 일을 당하자 너무나 부끄러웠고, 자식에 대한 원망이 극심했으나 할 수 있는게 없었습니다.
상가희는 조정에 충성을 맹세했고, 적극적으로 조정의 토벌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상지신이 이제 아비의 몸과 명예를 완전히 실추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상가희는 나이가 너무 많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비통해하면서 자신이 죽어 결백을 알려야 한다고 했고, 아픈 몸으로 일어나 죽을 힘을 다해 끈을 묶고 자진하려 했습니다. 수하들이 조기에 발견하여 이를 저지했으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임종하게 된 상가희는 직전에 여러 아들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황제의 큰 은혜를 입었다. 상황이 이에 이르러, 적을 살해할 수도 없으니 죽는다 해도 허물이 남을 것이다."
그리하여 황제가 하사한 관복을 주고 강희가 있는 북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혼백이 되어서라도 황제를 섬길 것이다."
그리고는 바로 세상을 작별했습니다. 격동기를 온몸으로 지낸, 일흔두살의 백전노장이 맞은 장엄한 최후였습니다. 훗날 아들 상지효가 상가희의 유골을 북경으로 운반하자, 강희는 이 장렬한 무장에 보답하기 위하여 내대신, 학사, 시위를 보내고 8,000냥을 사하했으며, 융숭한 예의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비석을 세워 충성심을 기렸습니다.
그러나 상가희가 죽자 번부를 완전 장악한 상지신은, 우선 상지효는 고향으로 가서 쉬라고 권하고는 대만의 정경과 협상을 하여 해안의 군사적 위협을 줄였습니다. 상지신은 어부지리를 노리려고 했는데, 예컨대 그는 목적이 어디까지나 번부를 장악하여 상가희의 후계자가 되는것이었을뿐, 애시당초 오삼계 등과는 목적이 달랐습니다. 그가 오삼계에게 협력하고 있다고는 하나, 실제적으론 오군이 광동에 진입하는것을 저지했고, 병력지원 요청도 무시했습니다. 삼번은 서로끼리도 반목하고 있었습니다.
'역사 ,세계사 > 중국사,,국공 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23) ─ 뒤집히는 대세 (0) | 2012.12.06 |
---|---|
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22) ─ 서북 평정 (0) | 2012.12.06 |
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20) ─ 사태는 점점 최악으로 (0) | 2012.12.06 |
중화제국의마지막 황혼, (19) ─ 악화되는 정세 (0) | 2012.12.06 |
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18) ─ 오삼계의 위망이, 천하를 뒤엎다. (0) | 2012.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