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사,,국공 내전..

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25) ─ 역습과 역습

구름위 2012. 12. 6. 13:46
728x90

 



 순치 12년인 1661년 12월, 이 날은 대만의 역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날입니다. 정성공이 대만의 VOC 총독 프리데릭 코예트(Frederick Coyett)에게 항복을 받았고, VOC가 협약을 맺고 대만에서 완전 철수함으로서, 대만이 온전히 중국인들의 손에 들어온 것입니다.  





 프리데릭 코예트



 남경 공략전에서 밀려 대륙의 본토에서 튕겨져 나온 정성공은, 오뚝이같은 근성으로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대만을 자신의 수중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이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 다시 한번 본토로 올라갈 요량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만의 풍토병이 정성공에게 엄습했고, 그는 건강이 몹시 쇠약해지고 정신적인 불안 증세에 시달렸습니다. 이때, 하문에 있던 자신의 아들 정경이 그의 유모 ─ 가법을 따른다면 정성공의 첩실이 되는 ─ 와 관계를 맺어 아이 ─ 아마도 정극장(馮錫範) ─ 를 만드는 패륜의 이야기가 전해지자, 약화되어 있던 정성공의 정신은 급격하게 붕괴되어 결국 쓰러져버렸습니다. 발작적인 상태를 보이던 정성공은 결국 쓰러져서 사망했습니다.


 하문에 있던 정경은 그 즉시 풍석범(馮錫範), 진영화(陳永華), 주전빈 등의 측근을 거느리고 대만으로 가서 지위를 이어받으려 하였습니다. 이때, 대만의 이상 기후를 감지한 청나라의 복건 총독 이솔태(李率太)와 정남왕 경계무 등은 정씨 정권을 항복시키려고 사람을 하문으로 보내 회유했습니다.


 "제도를 준수하고, 변발을 하고 육지에 오르면 봉작을 우대한다."


 당시 대만으로 떠날 준비에 바쁘던 정경은 백부 정태(鄭泰)와 의논하여,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조선의 사례에 비추어, 변발을 하지 않고 신하라 칭하며 공물을 납부하겠다."


 이것이 그들의 화평 종건이었고, 청나라 조정에 올라갔습니다. 정경은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청나라 조정의 회유를 받아들이는 척 하며, 시간을 끄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일단 자신의 정권이 공고히 지기 전에는 청나라와 함부러 적대 행위를 하는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는 하문을 정태 등에게 맡겨 놓은 뒤,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팽호와 대만으로 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정성공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강희 2년인 1663년 전선 90여척에 진영화, 풍석범, 주전빈을 데리고 다시 하문으로 돌아왔고, 낌새가 이상한 정태를 연회 중에 기습하여 처단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쟁은 정씨 집단을 약화시켰습니다. 정태의 가족이나 그 측근이었더 장수들은 청나라에 잇달아 투항했고, 투항하는 과정에서 병사 수천명과 선박 수백여척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청나라 수군의 핵심으로, 정씨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여러가지 공헌을 하게 됩니다.


 일전에 정성공의 부하였다가 그를 배신하였고, 순치제에게 해안의 봉쇄를 주장했던 황오는 지금이 기회라며 공격을 주장했고, 시랑(施琅) 역시 그에 찬동했습니다. 시랑은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 시대부터 정씨 집단에 협력하던 백전노장으로, 수군에 관해서는 그 당시 중국에서 최고의 전문가였습니다. 그는 정성공과 사이가 안 좋아져 청나라에 항복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씨 집단은 서로 질시하고 마음속에는 응어리를 품고 있으며, 겉으로는 친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사이가 멀다. 여러 해가 지나면서 화합하기 어려운 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확실히 점차 와해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해안가에서 정씨 집안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고 있었습니다. 본래 정씨 집안은 남중국해에서 그들의 가공할 영향력을 이용해, 뱃사람들에게 회유와 협박으로 협조를 얻어내서 내부의 협력자를 만들었는데, 변방 주민을 강제로 내지에 이주시키다보니 현지와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들었고, 무엇보다 내륙의 양식들을 대만으로 이동시키지 못해 사료 값이나 군량의 보급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시랑은 지금이 하문 등을 탈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습니다.


 이리하여 복건 수사 제독 시랑은 쾌선 160여척, 병력 3,000명을 준비하여 훈련을 시켰고, 동시에 대만 수복에 열을 올리는 네덜란드 세력에 협조를 구하여 2563명의 병사와 440문의 대포, 17척의 거함도 얻어내었습니다. VOC는 이 일을 계기로 중국과 통상 무역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청나라 조정에서는 그냥 그들을 이용해먹을 요량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문 등지에서 대규모 해전이 벌어졌습니다. 20여척의 함선을 이끌고 있는 주전빈은 갑자기 기습을 감행, 네덜란드 함선에 불을 지르고, 놀라 달려온 청나라 군 제독 마득공의 함선을 완전히 격파했습니다. 바다 한 가운데에서 적군에 포위된 마득공은 자결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득공이 정군과 대치하는 동안, 총독 이솔태와 정남왕 경계무는 하문을 향해 진격했고, 시랑은 전선 100여척을 이끌고 달려왔으며 황오 역시 뒤를 따랐습니다. 시랑은 정군의 장수 황정을 물리쳤고, 하문을 함락했습니다.  다시 기세를 타서 금문까지 무너뜨리는데 성공했습니다.


 청나라 군대는 놀라 달아나려는 정경에게 투항을 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정경은 여전히 이러한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고려의 경우처럼, 만일 변발하고 투항해야 한다면 나는 죽어도 동의하지 않겠다."


 청나라 사신은 일이 여의치 않자 정경의 수하인 홍욱과 은밀히 내통하여 정경을 사로잡을 것을 요청했습니다. 만일 홍욱이 이 일을 승낙하기만 한다면, 그에게 후작을 내려주고 천주(泉州)를 세습하여 살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입니다. 홍욱은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웃으면서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청군의 공작으로 정군 내에 투항파가 생기려는 모습을 보고 정경에게 건의했습니다.


 "하문과 금문이 함락되어 민심이 어지럽습니다. 경계무와 이솔태는 계속 사람을 보내고는 있으나, 사실 이것은 회유하려는것이 목적이 아니고 민심을 어지럽히려는 계략입니다. 신속히 대만으로 가는 것이 더 낫습니다. 시간을 늦춘다면 변란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정경은 기회를 보아 전함 수십척을 이끌고, 바람을 타고 서둘러 대만으로 퇴각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성공 휘하에서 많은 공을 세운 주전빈을 포함해 여러 장수들이 청군에 항복했습니다. 이때 기세가 워낙 좋았기에 청나라 조정은 대만 정벌까지 고려하였습니다. 이 해의 12월, 그리고 1665년 3월 26일, 두 차례나 걸쳐 시랑에게 수군을 이끌고 대만을 원정하게 하였지만, 둘 모두 해상의 기후 상태가 좋지 않아 돌아와야 했습니다. 시랑은 2번째 시도가 실패로 끝난 후, 다시 한번 시도하였으나 또 해상 기후의 악화로 선박들이 난파되어 철수했습니다.


 이 3번의 시도가 전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익하게 끝나자, 청나라 조정은 대만 정벌의 실효성에 대하여 큰 의심을 가졌습니다. 이 당시 청은 막 영력제를 처단하고 정씨 집단을 내몰아 정복 전쟁을 완수한 뒤라, 장기간의 불안정한 정세 때문에 도적때가 들끓고 민생이 도탄에 빠졌으며 재정 상황 역시 불안정했습니다. 전쟁의 상처를 회복하려면, 전쟁을 하지 않고 휴식하는게 제일입니다. 그리고 당시는 오배의 무리가 세력을 떨치고, 또 오배를 처단한 뒤에는 대대적 정비가 필요했던 시점이라, 청군으 무력 토벌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청나라는 정경에 대해 화평 협상을 벌이려고 하면서 대륙 본토와 섬 대만 사이에는 화해 무드가 조성되었습니다. 청 조정은 1667년 6월 사람을 보내 회유 작업을 벌였고, 정경은 또다시 조선의 사례를 들먹이며 만일 이와 같다면 항복할 의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불만족스럽게 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수사 제독 시랑입니다. 그는 회유를 계속 벌이는 입장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무력 토벌과 병행되어야만 회유도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사신을 두 차례나 보냈지만 대만 측은 중요한 관원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대만의 무력 토벌과 회유는 동격이 되어야 합니다. 무력 토벌은 회유에 포함됩니다."
 
 
 시랑은 자신의 책략을 성심껏 써서 중앙에 상소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강희는 막 친정을 시작했고, 실질적으로는 오배 등이 여전히 전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배 등은 시랑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여 아예 보고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랑을 북경으로 불러들이고, 그의 수사 제독 직을 없애버려 정경에게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 우호적인 분위기를 이어가려고 했습니다.
 
 
 1669년에는 청나라 쪽에서는 형부 상서 명주, 정남왕 경계무 등이 파견되어 천주에서 정경이 보낸 사람들과 회담을 벌였습니다. 정경이 보낸 사람들은 계속 똑같은 소리를 반복했습니다.
 
 
 "조선의 사례에 비추어 변발을 하지 않고 대만을 세습하여 신하로 칭하고 공납을 바치면 그만이다."
 
 
 명주는 강희의 의사를 표명하며 반대했습니다. 
 
 
 "제도를 준수하여 변발을 하고 투항하면 작위와 봉록을 우대하고 아낌없이 상을 내릴 것이다. 대만 지역에 거주함도 허가한다. 그러나 조선과 비교하여 변발을 하지 않고, 다만 공납을 바치고 투항하겠다는 것은 절대로 윤허할 수 없다. 번봉하여 대만을 세습함은 허가하나, 번봉을 받아들여 신하로 칭하면 자연히 그 제도와 복장을 다르게 할 수 없다."
 
 
 조선은 고래부터 아예 중국과는 다른, 그들에게 있어 이민족의 땅에 이민족의 풍습을 가지고 있고, 그 사람들도 모두 외국인입니다. 그런데 대만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복건에 있던 중국인들이 그저 땅만 옮겨가서 살고 있을 뿐이니, 그 사람들은 모두 외국인이 아니라 중국인이고 중국인에게는 청나라 조정이 내린 의무 ─ 즉 변발을 해야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회담은 성과없이 끝나버렸습니다.
 
 
 청나라의 철기병은 대만의 정경을 상대함에 있어서는 아무런 위력도 발휘할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해양의 파도가 심하고, 정씨 집단은 당시로서는 적어도 인적 자원에서는 남중국해에서 최고 수준의 선원들을 보유하고 있어, 어마어마한 영토와 국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거의 동격이나 마찬가지 입장에서 서로를 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정경은 투항도 분명히 고려는 해보았지만, 자신이 투항 후에 안전할것이라는 보장은 할 수가 없고, 지금은 청조와 1:1로 마주대할 수 있는 입장이니 이를 포기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는 정성공 시대부터 이어진 대만 개발이 효과를 거두어, 황무지 개간에서 상당한 성과를 내어 풍작을 내어 생활이 여유로웠고 면화를 심어 자급자족할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해상 봉쇄책으로 분명히 대만도 타격을 입긴 했지만, 과거 명나라의 교역 금지로 정권이 붕괴 위협까지 받았던 청나라의 홍타이지에 비해 훨씬 여유로웠습니다. 바로 남중국해의 풍부한 교역 루트 때문입니다.
 
 
 정씨의 선단은 이미 할아버지 정지룡의 시대부터 바다의 전설이자 남중국해의 해상왕이 되어, 교역으로 엄청난 부를 누렸습니다. 일개 해적에 불과한 정지룡이 복건 융무제 정권의 핵심이 되었을 정도입니다. 정경은 팽호를 문호로 삼고 일본, 필리핀, 월남, 태국, 육곤(六昆 : 섬라의 속국), 대니(大泥), 캄보디아, 자바, 동서양(동양은 필리핀과 브루나이 방면, 서양은 베트남과 말라카 방면)으로 자유롭게 통상 무역을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금은과 약재 등을 마음대로 얻을 수 있었고 필리핀으로서는 나무, 후추, 단향, 상아 등을 얻을 수 있었으며, 또한 식량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무역으로 원하는 바를 모두 얻고 흑자를 얻으니 회유 정책 따위가 귀에 들어올리 만무한 것입니다. 무기를 만들 재료도, 설탕이나 특산품을 동남아에서 구입하여 일본에 판매한뒤, 그 이익으로 재료를 사들여 만들면 그만입니다.





 결국 누구를 위한 평화 회담인지 모를 이 애매한 관계는 삼번의 난으로 모두 무너졌습니다. 1673년, 경정충은 부하 황용을 보내 정경을 회유하여, 이 난에 그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이리하여 정경이 움직였는데, 사실 경정충은 본래 자신이 여러 지역을 장악하는데 조금 문제가 생길것을 우려하여 정경을 끌어들였는데, 삼번의 난 초기에 정경충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여러 지역을 장악해나갔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경정충은 자신이 왜 정경을 끌어들였을까 하고 후회해버립니다.


 그리고, 경정충의 수하가 하문에서 정경과 연락하기로 했었는데, 하문이 황폐화되어 있고 들에는 풀이 가득하며, 선박이 드문드문 있고 사람이 적어 처량하다고 보고를 하자, 경정충은 갑자기 정경을 촌놈같이 여기고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경정충이 왕래를 서로 금지하자 정경은 몹시 화가 나서, 풍석범과 유국현(劉國軒) 등에게 명령하여 해징, 천주와 장주를 함락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때서야 경정충은 서로 피차 통상 무역을 금지하지 말자고 했지만, 정경은 경정충이 먹물도 마르기 전에 약속을 배신했다고 욕했습니다. 


 때마침 강희도 오삼계와 싸우는데 역량을 집중하여 다른 반군에 대해서는 회유를 병행했고, 특히 대만에 대하여는 회유를 좀 더 중시하자, 딱히 청군과 싸울 이유도 없어진 정군은 경정충이 청군과 싸우는 사이에 그의 뒤를 사정없이 후려쳤습니다. 경정충은 오히려 골치 아픈 상대만 끌어들이게 된 것입니다.


 청군과 정군의 격돌이 본격화 되었던것은 1677년 이후부터 입니다. 이때 상지신과 경정충이 모두 항복 의사를 청나라에 보였기에, 청군은 동남 지역에서 정군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강친왕 걸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항복을 권유했지만, 풍석범은 아군에게 식량을 지원해주고, 얻은 지역을 지키기 해준다면 병사와 민중을 쉬게 하겠다고 요구했습니다. 화의는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강력한 선공은 정군이 먼저 때렸습니다. 유국헌은 수만명을 이끌고 각지의 청군을 공격하였고, 강친왕은 수하 장수들을 해징으로 파견해 이를 막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국헌은 청군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청군은 바다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나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는 조수의 높낮이를 이용해서 동서를 사정없이 찔러대었습니다. 깃발을 휘날리며 강동으로 들어가서 적을 공격하다가, 갑자기 조수를 따라서 해징으로 물러나는가 하면, 다시 조수가 갑자기 불어대는 틈에 기세를 올려 장주를 공격하고, 조수가 낮아지면 쏜살같이 빠져나가더니 갑자기 육지에 올라 적을 공격하여 청군은 전혀 대응도 제대로 못하고 얻어맞기만 했습니다.


 청나라의 해징공 황방세는 유국헌에게 상대도 되지 못하고 농락당하여, 말에서 떨어졌다가 주위의 도움으로 간신히 말에 올라타 장주성으로 도망갈 수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유국헌은 여유롭게 해징을 포위하여 해자를 구축하고는, 성 안쪽으로 통하는 물길을 막아버렸습니다. 청군의 장수들이 기명 수만명을 이끌고 공격해왔으나, 오히려 대패했습니다. 해징 내부에서 밀고 나가려는 공격도 모두 막혀버렸습니다. 성 내는 외부의 원조가 단절되고, 양식도 부족해서 싸우는데 쓸 좋은 말을 잡아먹어야만 했으며, 참새와 쥐를 잡아먹었고 가죽을 물에 듬그고 끓여먹었습니다. 성내의 관병은 굶어 죽거나 물에 빠지거나 혹은 투항하여, 결국 해징이 함락되었습니다.


 해징이 함락되자 각지에서 항복을 요청하는 서신이 몰려왔고, 기세를 탄 정군은 천주까지 포위했습니다. 강희는 다급하게 강남의 병력을 복건으로 투입하는 한편, 강친왕등에게 너무 기죽지 말라고 격려까지 해주었습니다.


 "해징을 빼앗겼다고 실망할 것은 없다. 더욱 격려하고 적을 물리치고 강토를 수복한다면, 이전의 죄는 모두 없어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복건 총독을 해임하고, 순무는 나이가 많다는 핑계로 모양새 좋게 관직을 바꾼뒤에, 전문가를 이쪽으로 파견했습니다. 다름 아닌 요계성(姚啓聖) 이었습니다.




 복건 포정사였던 요계성은 복건 총독으로 승진되었습니다. 당시 정군은 겉으로는 세력을 일시에 얻었지만, 실제로는 허약했습니다. 병력은 제한되어 있었고, 전선은 장기화될 가능성이 충분했습니다. 그러므로 군사력의 분산을 가져오면 정군은 대응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요계성은 정군의 핵심을 살펴 수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적의 병력은 3만에 불과하지만, 모여 있으면 강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러 읍(邑)을 얻으면 반드시 무리를 나누어 방어해야 한다. 무리가 나뉘면 세력이 약화되고, 세력이 약화되면 무너뜨리기 쉽다. 이는 병법에서 말한 바, 병력이 많으면 분산이 중요하고, 병력이 적으면 통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당시 정군의 명장이었던 유국헌역시 병력의 부족 사태는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현지의 장정들을 억지로 충당해서 병력으로 삼았고, 그들의 가족은 대만으로 보내어 일종의 인질로 삼아버렸습니다. 수대, 아니 수십년 동안을 농사짓고 살던 땅에서 쫒겨난 사람들은 당연히 불만이 가득했고, 천주 지역이 빈한하고 군수도 부족했습니다. 각종 명목으로 세금을 뜯어내 백성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지만, 그래도 물자 부족은 여전했습니다.


 강희는 3군을 파견하여 3가지 길로 천주를 구원하라고 명령했고, 유국헌은 이에 천주에서 물러나 장주를 공격했습니다. 요계성은 천주에 있던 2만여 녹기병을 파견하여 구원하려고 했는데, 아무리 구원 요청을 해도 천주의 장수들이 겁을 먹어 싸우려고 하질 않았습니다. 요계성은 그러자 현지에서 시간 낭비하는것보다, 발 빠르게 강희에게 상소를 하여 사태를 설명했습니다.


 "군대를 움직이려고 해도, 반드시 대장 및 왕의 명령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앉아서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강희는 즉시 총독이 즉시 녹기병을 파견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굳이 왕들의 허가를 기다려 일을 늦추지 않아도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요계성은 곧바로 언제 올지 기약도 없는 천주의 구원병에 미련을 끊고, 당시 청조에 항복한 정남왕 경정충, 장군 뇌탑 등에게 병력을 이끌고 오라고 요청했고, 직접 경정충 등과 함께 전선을 독려해씁니다. 치열한 전투끝에 정군이 무너져 익사자만 1만여 명이 나왔습니다. 유국헌은 해징으로 철수 했습니다.


 요계성은 정경에게 연해 도시에서 물러나 대만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해징이 아까운 정경이 이를 거부하자, 강희에게 보고하여 현지의 백성들을 강제로 내지로 이주시켜 버리는 강경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방어망을 펼치면서 정군의 식량 공급을 막았습니다.


 양군이 대치하는 가운데, 강친왕은 정군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만일 무장을 풀고 귀순만하면, 조선의 사례에 따라 처리하겠다는 것입니다. 정경은 즉시 찬성했습니다. 변발만 하지 않도록 해준다면 바로 싸움을 멈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풍석범이 반대했습니다.


 "해징은 하문의 문호이므로, 절대로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자 강친왕이 보낸 사자는 풍석범의 의견에 반발했습니다.


 "만일 조선의 사례에 따르고자 하면, 귀하의 번은 마땅히 대만으로 물러나야 한다. 모든 해도는 조정에 귀속되므로, 팽호를 경께로 삼고 통상 무역을 하면 그만이다. 해징은 조정의 판도 안에 있다."


 "병만을 쉬게 하고 지방을 지키는데 어찌 현재의 토지를 포기해야 하는 근거가 있는가. 해마다 무역으로 얻은 이익 중 세금 6만 냥을 납부하면 된다."


 강친왕은 지방의 중요한 임무는 총독에게 책임이 있으니, 요계성에게 이 일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았습니다. 요계성은 벌컥 화를 내며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조그마한 지역이라도, 모두 왕에게 속한다. 누가 감히 판도의 봉토를 공소로 삼고자 하는가?"


 이렇게 되자 모든 논의는 중단되었습니다. 이때 오삼계가 죽고, 청군이 호남을 석권하자, 청나라 조정에서는 더욱 많은 병력을 정씨 집단을 상대하는데 파견했습니다. 또한 네덜란드 함대에 도움을 요청하고, 수군을 훈련시켜 정군에 비슷한 역량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현지에 파견된 지휘관들은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것인가에 대해 치열하게 논쟁했습니다. 문제는 네덜란드 선박이, 싸움에 끼어드는데 비하여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적어 협조를 하지 않으려고 한 일 때문입니다. 육지의 전장에서 선발된 청군의 지휘관들은 자신들의 해군 역량에 대해 몹시 우려를 나타내었습니다. 그들은 직접 창설된 수군에 신뢰를 보이지 못하고 반드시 네덜란드 협판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의정왕대신회의는 현지의 보고를 듣고, 확실히 네덜란드 선박의 도움을 받는다면 효과는 확실할 것이며, 다만 청나라 수군 자체적인 역량으로도 일이 가능하다고 여기면 잘 상의해서 한번 해 보라는 답을 내렸습니다. 강희는 현지 지휘관들의 이런 생산적인 논쟁을 격려했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우려가 되면, 이전에 문서를 갖추고 보고했다는 이유로 바꾸기를 꺼려하여 억지로 수행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총독 요계성과 강친왕등은 신중론을 펴는 입장이었고, 제독 만정색(萬正色) 등은 네덜란드 선박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공격이 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모두 양쪽에서 쌍방의 형세를 구체적으로 판단하고 분석하여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강희에게 보고했습니다. 강희는 만정색의 제안을 보고 기뻐하여, 즉각 진격을 명했습니다.


 이리하여 1680여년 2월 4일, 만정색은 수군을 통솔하여 정군과 교전하여 3,000여명을 전사시키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강친왕 걸서는 항주에 주둔하는 만주 녹기병을 이끌고 정군의 식량 근거지인 여러 섬을 압박했으며, 유국헌을 패퇴시켜 달아나게 했습니다. 유국헌이 달아나자 해징 등도 함락되었습니다. 총독 요계성과 장군 뇌탑은 수륙 관병을 이끌고 공격을 감행하여 빼앗긴 여러 곳을 수복했고, 순무 오홍조는 직접 하문으로 진격하여 정군을 몰아내었습니다. 다시 요계성은 정군의 장수 주천귀를 회유했고, 주천귀는 다른 장군 마흥룡을 바다에 빠뜨려 죽이고 2만의 관병과 300여 척의 선박을 이끌고 청나라에 투항했습니다. 


 1680년 5월, 정군은 모조리 대륙에서 튕겨져 나왔습니다. 이제는 청군이 역공을 취할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