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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동 당시부터 절정기의 기량을 보자면, 만주 정권이 명나라를 이기고 중원의 패자로 떠오른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만주 정권이 아무리 실력을 길렀다고 하고 영특한 인물들이 연달아 출현하였다고 해도, 중원을 근거지로 삼고 있는 제국의 생산력과 수십대를 거치며 누적된 저력은 동시대 어지간한 다른 국가들과 비교하는 자체가 실례일 것입니다. 소빙기가 오며 대기근이 발생하고, 선대로부터 내려온 병폐와 재정 악화가 극에 달하고, 고대에는 발생 자체가 황제의 부덕을 의미하던 천재지변이 빈번해지고, 사회가 부패해지고, 기강이 무너지고, 대립이 극심해지고, 동시에 외적의 기세가 강력해지고.
어찌보면 명나라가 그런 망국(亡國)의 길로 상상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겪고도, 끝까지 청군이 자력으로 산해관을 넘지 못하게 저지하였던것은, 제국 최후의 저력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청군의 입관은 그들에게 있어 기적이자, 국운을 거는 일이었으며, 동시에 운명과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향방을 좌우하는것은 이자성과 싸우고 있는 오삼계를 돕는 오삼계 구원전으로, 이 한번의 회전에서 이자성 군대가 오삼계와 팔기군을 모두 무너뜨렸다면 그는 위대한 영웅으로 남았을 테고 청은 그동안 수없이 있었던, 변방의 호(胡)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이자성이 이 회전에서 패배했기에 청나라는 중화 제국으로서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싸움에, 삼군을 지휘하던 인물의 면면을 살펴보면 도르곤, 도도, 아지게 등입니다. 그리고 이 세명은 모두 같은 어머니를 가지고 태어난 동복형제이며, 공동체입니다. 다른 청나라 유력자들의 눈에 도르곤의 이러한 행위는 너무나도 뻔한 수작이었을텐데, 도르곤도 그다지 거리껴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는 모양새를 보면 차라리 계속 이런 모양을 만들어, 자신의 의도를 기정사실화 하려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운명적인 회전은 청군의 승리로 끝났고, 그 후에 벌어진 이자성 추격전에서 아지게 등은 대활약 했고 도도 역시 남벌을 시도하며 커다란 공을 세웠습니다. 이제 도르곤은 황제는 아니었으되 오히려 황제보다도 더 힘이 강력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가 같은 공동체이기에 권신이라 불리지는 않았지만, 권한은 일개 권신의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중국 드라마 대청풍운 중에 도르곤과 대옥아(大玉兒)의 대화. 황제가 되려는 도르곤을 대옥아가 막고, 대옥아를 다르던 도르곤은 짜증이 나서 같이 죽자고 하고, 그러면서 당신은 아들만 죽요하고 난 마음에도 없지 않느냐 하고 투정 부리는 대목입니다.
도르곤에 대해서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가, 형의 부인과 결혼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목민들의 형사취수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대상이 바로 보르지기트 붐부타이(博爾濟吉特 布木布泰), 훗날의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 입니다.
소설같은 이야기지만, 이에 관한 이야기가 이야기가 있습니다. 도르곤은 장황후와 이어지고, 장황후가 그 대신 아들인 순치제의 즉위에 협력해줄 것을 원하자, 결국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당시 장황후는 31세) 제위를 포기했다는 식입니다. 매우 낭만적인 이야기라 어지간하면 믿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다만 청 왕조의 기록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전혀' 기록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둘의 만남은 근거가 없는것인가? 그게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만주족 정권 초기의 기록은 후대의 덧칠이 있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바로 건륭제의 손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정도는 가볍게 누를 건륭제의 악랄한 사상통제와 기록 삭제 등은 나중을 위해서 지금은 언급하지 않기로 하고, 실제로 그런 기록이 없었건 삭제가 되었던 청나라 공식 기록에서 찾을 수가 없다면, 과연 이 결합의 근거는 어디에 있길래 근거가 아주 없다고 하는 것인가?
물론 민간에서의 일입니다. 소위 태후하가(太后下嫁)의 이야기에 대해서, 장황언(張煌言)의 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춘관(春官)이 어제 올린 새로운 의주(儀注).
대례(大禮)로 공손히 맞는 태후의 의례.
춘관은 의례를 관장하는 관리로, 보통 예조(禮曹)라고 많이들 부릅니다. 의주는 의식의 순서를 적은 문서인데,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식으로 전제되어 있습니다. 물론 장황언은 정성공과 관계되어서 이름이 나오는 인물로, 반청투쟁을 하고 있는 사람이니 일부러 청나라 황족들을 욕할 필요도 있긴 합니다.
청사(淸史) 연구가 중에 맹삼(孟森)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역시 유명한 청나라 황족들의 소문 중 하나인 순치제의 순치출가(順治出家)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한적이 있는데, 역시 태후하가에 대해서도 논문을 썻습니다. 태후하가고실(太后下嫁考實)이라는 이름인데, 확증이라고까지 할만한것은 없다고 하였지만, 도르곤이 숙부 섭정왕(攝政王)에서 갑자기 황숙부 섭정왕으로 불리고, 다시 황부(皇父)가 되고, 사망한 직후에는 의황제(義皇帝), 그리고 성종(成宗)이라는 묘호까지 받았다는 사실은 아무리 도르곤이 공이 많다고 하여도 뭔가 이상한 일입니다.
맹삼은 최대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증거가 불확실하다' 고 하였고, 여기에 대해 호적(胡滴 : 후스)의 반론이 있습니다. 또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런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황부섭정왕이라는 말에 인조가 의아해하며 신하들에게 물어보는 부분입니다.
인조 50권, 27년(1649 기축 / 청 순치(順治) 6년) 2월 13일(임인) 1번째기사
“청국의 자문(咨文) 가운데에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어떤 거조인가?”
하니, 김자점이 아뢰기를,
“신이 여기 온 사신에게 물었더니, 답하기를 ‘이제는 숙(叔)자를 제거하고 조하(朝賀)하는 일도 황제와 마찬가지로 한다.’ 하였습니다.”
갑자기 숙 자를 없애고 황제와 마찬가지로 행동한다는 것도 기이한 일입니다. 최대한 보수적으로 보는 맹삼은 "청나라의 사절이 태후 재혼이라고 명백하게 이야기 한것이 아니니, 역시 증거가 부족하다." 고 했는데, 여기에 반박하는 측에서는 대국 청나라의 사신이 차마 민망해서, 유교적 질서가 매우 강한 조선에서 그냥 공주도 아니고 현 황제의 어머니인 태후가, 그것도 남편의 동생인 섭정과 재혼했다는 이야기는 민망하여 애둘러 돌려서 말한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일단 태후가 재혼했다는 식의 이야기는(재혼 자체가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반청 투쟁하는 장황언등이 말한바 있고, 반청 운동을 하는 장황언이 이런 말을 했다는건 조롱식의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명나라에서도 이러한데 조선에 이 일이 공공연하게 알려지면 조선에서도 알게 모르고 청나라 황족들을 짐승이라며 비난할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사실이니 대응하기도 약간 골치가 아프고 하니, 청나라 사신이 아예 돌려서 말했다는 식입니다.
어찌되었건 이 일은 결국 정황적인 면은 심증이 강하나, 결국 게중에 결정적인 증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야구선수가 약물을 복용하여 성적이 상승하고 체격 또한 우람해졌다가, 갑자기 체격이 줄어들고 성적이 하락한다면, 우리는 정황상 거의 이 선수가 약물을 사용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딱히 검사 결과가 있지 않는다면, 결국 확증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도르곤과 장황후가 재혼을 했는지, 혹은 안했는지가 중요한 이야기인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으로 본다면 그럴 수도 있으나, 역사에서 개인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며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집요하게 파고들 경우, 이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순치제의 마음에 일어날 격정에 대해서 말입니다.
순치제는 죽기 직전 스스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또한 장차 한(漢)의 풍속을 익혔으나, 순박한 구제(舊制)를 나날이 새롭게 고쳤다."
이를테면 자신이 너무 한문화에 젖어있었는데, 구시대 제도의 순박함이 좋았다는 식으로 자아비판을 한 셈입니다. 순치제는 어린 시절부터 자금성에서 지냈기에 한문화의 영향력은 기존의 만주족보다 훨씬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래도 이런 풍습은 받아들이기가 힘들 수 있습니다.
도르곤은 독재자였습니다. 물론 세운 공도 막대하고, 행동 자체도 독재자의 그것이었습니다. 무적이었던 도르곤의 시대가 종결되어 청나라가 갑자기 새로운 면모로 나아가게 된것은 정말 급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1650년 12월 31일, 사냥을 나섰던 도르곤이 갑자기 급사해버린 것입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일단 도르곤은 죽은 후에 황제로까지 떠받들여졌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세력은 붕괴되었는데, 동생인 도도가 1년전에 죽은 탓이 있습니다. 도르곤에 눌린 정적들은 물론이고 측근이었던 수크사하(蘇克薩哈 : 소극살합)이 먼저 나서서, 자신의 딸이 도르곤에게 순사를 강요받았다며 호소했습니다. 각종 고발들이 죽은 도르곤에게 쏟아졌습니다.
또한 도르곤은 본래 지르하란 등과 공동 섭정왕 노릇을 하기로 했으나, 물론 도르곤은 이를 거의 무시했습니다. 지르하란도 앙심이 깊어졌기에 앞장 서서 도르곤을 욕하는데 공격수로 뛰었습니다. 그야말로 청나라 조정의 모든 사람들이 나서서 도르곤이 역모를 꾸밀 계획이었다고 비난의 쏟아졌습니다. 죽은 자는 반론 할 수 없으므로, 전날의 영광도 무색하게 도르곤은 2개워도 안 되어 온갖 죄상을 뒤짚어쓰고 가산을 몰수당했고, 아지게에게는 죽음이 내려졌습니다. 권력 무상, 도르곤의 영화는 이렇게 끝나버렸습니다.
도르곤의 명예가 회복된것은 죽은 지 120년이 지난, 건륭제의 시대입니다. 건륭 38년, 1773년 도르곤의 공적은 인정되었으며, 황폐화된 묘도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5년뒤에는 도르곤에계 예왕(叡王)의 칭호가 내려졌고, 시호로 충(忠)이 내려졌는데, 충이라는 소리는 도르곤이 모반을 꾸미지 않았다고 인정한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순치제에게 가장 위협적이었을, 그리고 어쩌면 증오의 대상일 수도 있는 도르곤은 이렇게 역사 속에서 서둘러 퇴장을 해버렸습니다. 이는 순치제에게는 매우 큰 도움입니다. 하지만 순치 8년인 1651년(도르곤이 사망한것은 순치 7년 12월)부터, 순치 13년인 1656년 무렵까지는 순치제도 만만찮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의정왕대신회의(議政王大臣會議)가 문제입니다.

의정왕대신회의란 청태조 천명제 누르하치가 만든, 황제 측근의 관리와 황실 귀족들이 함께 논의하던 체계를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입니다. 누르하치가 본래 군사를 처음 일으키던 시기에는 이정청송(理政聽訟) 대신이라는 5명의 신하들이 의정에 참여했고, 이들을 의정5대신이라고 일컫었습니다. 당시에는 누르하치의 조카들이 모두 나이가 어려, 5명의 대신들이 장수를 겸직하고 군주를 보좌해서 개국에 큰 공을 세웠고, 그 권세가 강력해서 군사는 물론 중대한 나라의 일들이 이들의 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어린 조카들이 점차 장성해가자, 각자 패륵이나 태길이란 직책으로 1기를 거느리게 됩니다. 팔기제도가 확립된 후에는 사천왕을 중심으로 하는 의정체계가 갖추어졌고, 후에 8화석패륵(和碩貝勒)이 국정을 함께 논의하는 방안을 건의하면서 의정체계는 새롭게 변모해 나갑니다. 이 8화석패륵은 유기적인 조직을 형성해서 황제를 견제하고 감독하며, 심지어 이론적으로는 황제를 폐위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간에도 구속력이 있어, 단독으로는 어떤 일도 처리하거나 결정할 수 없었고, 한 개인의 권력을 휘두르고 조정을 분열시킬 수도 없습니다. 억지로 비슷하게 보려고 하면 덩샤오핑 사후 현대 중국 정치판과도 유사성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홍타이지가 청나라를 개국하고, 점차 중앙집권적 면모를 확립해 나가자, 이들의 권한도 점점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천총 5년인 1631년부터 6부와 이번원, 도찰원, 내삼원 등 정부기구가 잇달아 설치되어 의정왕대신회의의 많은 권한이 대체되고, 각부에서 자체적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일만 의정왕대신회의에서 논의하도록 되었습니다.
또한 홍타이지 본인도 술수를 보며 의정 임명권을 장악해,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쫒아내고 측근을 등용 할 수 있는 모습으로 바꾸고, 숭덕으로 연호를 바꾼 이후에는 어떤 사안에 대해 의정왕대신회의가 논의를 하는가, 하지 않는가 역시 황제가 결정하는 사항이 되었습니다.
물론 도르곤 시대에는 도르곤이 혼자서 마음대로 했기에 역시 의정왕대신회의는 유명무실합니다. 문제는 도르곤이 급사하고 어린 순치제가 뒤를 이어받은 지금부터입니다.
도르곤 제거 과정에서 활약한 지르하란이 전면에 나서면서, 본인, 두 아들, 그리고 조카 한 명이 모두 의정왕 패륵 대신 자리를 비집고 끼어들오기 시작합니다. 패륵대신의 수도 한참 약화되어 6명이 되었던것을, 13명으로 갑자기 두 배 이상 증가해버렸습니다. 순치 8년부터 13년동안 의정대신을 해먹은 인물만 해도 30여명이었고, 나름대로 목소리를 내는 인물들이 모두 한번쯤 발을 담구고 가는 직책으로 변보했습니다. 그들은 나라와 조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관장했고, 때로는 황제의 뜻마저도 거스르기에 이릅니다.
북유록(北遊錄)에서는 의정왕대신회의를 국의(國議)라고 칭하였는데, 실상을 이렇게 기록하기에 이릅니다.
"청조의 대사는 황제의 뜻과 관계없이, 제후와 대신들이 결정하였고, 6부의 일도 의정왕들의 말 한 마디로 결정되었다."
순치제는 이들 의정대신들의 입김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기회가 왔습니다. 순치 13년, 지르하란이 사망한 것입니다. 이틈에 다시 전면에 나선 순치제는 10명 가량을 면직시키거나 처형시켰고, 게중에는 갑자기 자연사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일단 이렇게 되면서 의정대신들 중에 황족들의 숫자가 크게 줄게 됩니다. 개국 초기에는 황족들이 권신들보다 강력한 위협인 경우가 많고, 특히 청나라 정부 같은 경우는 개국공신들이 대부분 황족들이기에 이런 견제는 순치제가 정치를 하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일단 자기가 나설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놓은 순치제는 점차 자신의 의도를 실현시켜 나가기 시작합니다. 순치제가 지금까지 보기에, 전대인 명나라에 병폐를 안겨준것은 환관의 무리들입니다. 환관은 일종의 필요악과 같아 결국 쓸 수 밖에 없지만, 자신은 물론 후세가 그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선 환관을 크게 누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환관 조직 자체는 필요했기에 명대의 환관 제도를 본따 십삼아문(十三衙門)이라는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금중(禁中)에는 철폐를 세우고, 환관이 정치적인 일이나, 관리의 일에 함부로 말하는 자는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인 능지처참의 벌을 내리겠다고 경고했습니다.
이 역시 명나라의 역사에서 배운 일인데, 주원장이 그런 식으로 환관을 견제한적이 있습니다. 다만 이쪽은 영락제가 환관의 도움을 받아 정변을 완수했기에 그러한 점이 무시되었지만, 순치제는 정상적으로 강희제에게 계승을 완수했음으로, 이러한 환관의 병폐는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오량보라는 환관이 조정의 대신들과 사사로이 친하게 지내자, 그를 처형해버렸습니다. 일단 초기의 구상이 후대로 무사히 전해지자, 청나라는 다른 점은 몰라도 환관으로 인한 병폐는 그다지 크지 않았습니다.

주원장의 계획을 일그러뜨린 영락제.
다음은 내삼원(內三院)의 일입니다. 홍타이지 집권 시절 천총 10년인 1636년, 문관(文館)을 내국사원(內國史院) ·내비서원 ·내홍문원(內弘文院) 등으로 분리하였는데, 이를 내삼원이라고 했습니다. 내삼원은 황제를 보필하는 핵심 기구입니다. 내삼원이 6부에 해당하거나 6부를 직접 관리하는것은 아닙니다. 대신에 황제의 참모로서 구체적인 건의를 하고, 황제가 여기에 건의를 하면 곧 관련 기관으로 명령을 하달해서 집행하는 식으로, 일종의 비서기관이 됩니다.
순치제는 아직 조정에 아직 의정 대신들의 세력이 강성했을 시절부터 내삼원에 대한 조치에 들어갑니다. 순치 10년인 1653년 1월 7일, 순치제는 황제가 비답을 작성한 모든 상소문은 내원을 거쳐 각 과로 하달되도록 했는데, 이는 어지를 날조하여 6부를 움직이려는 불순한 의도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상소문이 오고가는 와중에서 손을 보는 불한당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순치제는 이에 대한 점도 염려해서, 같은 해인 10월 26일에는 황제가 내려 보낸 상소문이 내원을 거치면서 첨삭되거나 수정되지 못하도록 대학사와 학사등을 번갈아 상주시켜, 고칠 경우가 있으면 황제에게 직접 보고하고 고치도록 명령합니다.
또한 순치 15년인 1658년 7월 23일에는 역대 왕조의 제도를 자세하게 연구해본 뒤,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 기구를 만들기 위해 내삼원을 통폐합하여 내각(內閣)을 조직하고, 한림원(翰林院)을 만들었습니다. 다만 아직은 내각에서 만주족들이 절대 강세로 한족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달라이라마 5세와 순치제
순치제의 치세에서 가장 인상이 강한 부분은 다름아닌 달라이라마 5세를 초청한 일입니다. 이는 티베트는 물론 중앙 아시아 세계에 청나라의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게 된 계기가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삼번의 난(三藩─亂)이 일어나기 직전, 아직은 무언가 불안정한 청나라에 대한 중앙 아시아의 입장 정리에도 도움이 되는 사건입니다.
청조의 황제들이 티벳 불교계의 주요 라마를 초빙하여 법회를 열고 사원 건설을 주재하게 하였으며, 이들을 북경에 머물게 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는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심지어 건륭제 시절에는 조선 선비들이 판첸 라마를 만난 일까지 있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열하일기의 묘사입니다.
차茶를 몇 순배 돌린 뒤에 반선은 소리를 내어 조선 사신이 온 이유를 물었다. 그 목소리가 전각 안을 울려 마치 항아리 안에서 외쳐 부르는 것 같았다. 엷은 미소를 띠며 머리를 구부려 좌우를 둘러보는데, 눈썹 사이에 주름이 생기며 동자가 반쯤 튀어나왔다. 눈을 얇게 뜨고 깊이 이리저리 굴리는 품이 흡사 근시안처럼 보였으며, 눈알 아래는 더욱 하얘지고 흐리멍덩해져서 더더욱 정채가 없었다.
라마가 말을 받아서 몽고 왕에게 전하고, 몽고 왕이 군기대신에게 전하고, 군기대신이 오림포에게 전해서 우리 통역관에게 전하게 했으니, 대개 다섯 차례나 통역을 거쳤다. 상판사 조달동趙達東이 일어나 팔뚝을 휘저으며,
"만고에 흉악한 놈일세. 반드시 뒤끝이 좋지 않아 개죽음을 하고 말 거야."
라고 말하기에 내가 눈짓으로 말렸다.
아무래도 조선인들에게는 여러가지로 꺼려지는 상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보통 이러한 티벳 불교와 청조의 관계를 간단하게 여길수도 있으나, 다른 각도로 살펴보면 역시 다른 의미가 나오기도 합니다.
우선 청나라 정부가 일반적인 중국 왕조와는 성격이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나중에 더 언급을 하게 될 내용이지만 그들은 중국에서는 유교적 질서의 중화 제국이었고, 몽골에서는 초원의 칸이었으며, 과거 중국 왕조의 영향력 아래 있던 나라들에게는 조공 질서의 천조국이었고, 중앙 아시아 지역에서는 흡사 서양의 제국주의적 국가와 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티베트에 대해서, 그들은 아예 황제 자체가 독실한 불교 신자이거나, 혹은 절친한 친구와 같은 입장으로 접근하여 이들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킵니다.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묘사된 건륭제의 초상은 이에 대한 결정판입니다.
순치제가 달라이라마 5세를 처음 만난것은 1653년 초, 5세가 북경을 방문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일찍부터 중화제국의 위대한 황제를 변방의 왕들이 방문하는 일은 드문 일은 결코 아닙니다. 영락제 시절, 보르네오의 국왕 마나야나가 영락제를 보러 입조한 적이 있고, 영락제 9년에는 말라카의 국왕도 500여명을 이끌고 영락제를 배알한 적이 있습니다. 당장 우리나라도 고려 시대에 고려의 왕들이 (대부분 강제적인 호출로 인해) 불려 간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달라이 라마 5세의 이 방문은 조금 성격이 다릅니다. 전에 홍타이지 시절 서장 불교가 만주에 들어오게 되는 일을 다루면서, 간략하게 청태종이 달라이 라마를 초청한적이 있었다고 언급했습니다. 이 당시 5세는 본인 대신 다른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홍타이지 시절이라면 청이 중국에 입관조차 하지 못했던 시절입니다. 그시절부터 순치제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집요하게 5세를 초청한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은 현재 티벳을 서장장족자치구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의 글에서 이 문제로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굳이 이 야기를 언급한 까닭은, 청조의 티베트 정책을 연구하는 중국 학계의 경우는 아무래도 이런 정치적인 입장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티베트가 중국에 포함되는것이 옳다면 옳음을 밝혀야 하고, 옳지 않다면 옳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쪽의 경우는 주로 나오게 되는 논의는 대게 달라이라마가 북경에 도착한 이후 순치제를 만나는 과정과, 그가 북경을 떠나 몽골에서 책봉을 받는 과정에 중점을 두고 연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가 책봉을 받는 순간 티베트가 청조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고, 종국에 가서는 청조에 복속되어 (이 뒤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오늘' 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중국 학계에서 내세우는 주장이 근거도 없고 말도 안되는 어거지식이라는건 결코 아닙니다. 청조의 티베트 복속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는 식을 내세우는 경우만 제외한다면. 다만 집중해서 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이야기죠. 이쪽의 시각이 청나라와 티베트의 외교질서의 큰 틀에서 보려고 한다면, 서구쪽은 이 방문이 티베트와 청조 양쪽에서 미친 영향, 그리고 이 영향이 내륙아시아 질서 속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보려는 시각이 있습니다. 또한 중국 학계에서도 이 경우 몽골에 미친 영향력 등에 주목하는 경우는 또 다른 식으로 이를 보기도 합니다.

달라이라마 5세 악왕롭상가쵸(Lobsang Gyatso : 1617–1682)
종교적 입장에서 보자면야 달라이 라마는 다 범상한 존재들은 아니지만, 5세는 또 다른 인물입니다. 티베트 역사에 대해 보게 되면 지겨울 정도로 언급되는 토번의 송천감뽀 이래 티베트 역사상에서는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근대 티베트 역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입니다. 5세의 별칭 중 하나, "아빠첸뽀(Inga pa chen po)" 즉 위대한 5세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의 시기에 이르러 겔룩 교단이 티베트의 종교와 세속 권력을 장악했고, 간덴포당 정권을 수립하였으며, 청조의 초청을 받고 북경까지 방문하여 겔룩 교단의 교세와 티베트의 위상을 제고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티베트인들의 5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평안하소서. 마하 사마디 서친한(할하 좌익의 영수. 마하사다미[maq-a samadi]라는 칭호는 티베트의 고위 승려로부터 수여받는 불교식 칭호)이 성스러운 자(청태종)에게 글을 씁니다. 평안하신지요. 저도 이곳에서 편안합니다. 달라이라마를 초청한다고 하는데 실로 옳은 일입니다. 이곳의 일곱 개 호쇼 할하도 초청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서방 오이라트도 초청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초청을 위해 보내는 사람을 이곳에 들르게 하십시오. 함께 가면 좋지 않겠습니까? (할하) 세 한의 의견이 일치함으로 이렇게 안부를 묻는 사신을 보낸 것입니다."
이는 할하 좌익의 서친한이 1637년 무렵 청태종에게 보낸 서한으로, 주지했다시피 청태종 시절부터 달라이라마 초청 작업이 시작되었다는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청조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할하 몽골의 실력자들이 이 문제를 꽤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도 보여줍니다.
이 서신에서 볼만한 것은 5세의 초청을 위해 청조가 주변 몽골 실력자들의 동의를 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청조 독자적으로 티베트에 사신을 파견하기보다는 먼저 할하 좌익의 동의를 구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할하 좌익의 여러 한들은 자신들과 함께 사신을 파견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청조가 여러 몽골 정권과 경쟁을 하면서, 티베트와 직접 소통 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17세기 후반 내륙아시아는 어지러운 정세로 움직입니다. 할하 좌우익이 분쟁하여 할하 좌익이 우익을 복속하는 형태로 나오자, 오이라트의 준가르가 대두하여 할하 좌익과 대치하고, 다시 동부에서 거대한 청조가 꿈틀거리며 반응하는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널리 베푸는 자, 조화로운 화평을 이루는 성스러운 칸(汗)의 명령. 자삭토한에게 글을 보낸다. 모든 일은 천명의 힘으로 되는것이라고 그대의 글에 적혀 있다. 그대는 이 사실을 줄곧 알고 있었다. 몽골국의 권좌. 그 자리를 그대의 하늘이 내게 베푸셔서, 이미 나에게 주셨는데, 비천한 그대가 억지를 부리며, 모든 것을 통치하는 칸처럼, 단지 근친들 사이의 군주일 뿐인 그대가 자만해서 명분 없는 글을 보냈다. 그러나 이것이 그대에게 적합한가? (중략) 투버드(티베트)에 사신을 보냄에 즈음하여, 파견되는 승려들을 훅호트에 보냈다. 그대의 말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몇 차례 변경에 가도록 했다.
겨울의 첫째 달 초에 엿새에."
이는 1640년 청태종이 할하 우익의 자삭토한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당시 청조가 할하 우익과 꽤 긴장 관계를 보이고 있고, 혹호트 이서 지역을 할하 우익이 장악하고 있어 청조는 티베트와 접촉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티베트와 청조는 1648년 이후로 여러 차례 상호 사신을 교환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는 할하 우익이 당시 세력이 후퇴했음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1630년대부터 40년대에 암도와 티벳 일대를 장악했던 것은 호쇼트 몽골의 구시한(1582-1654)라는 인물입니다. 암도와 티베트를 발판으로 하고 있는 구시한이 달라이라마와 같은 교단의 지도자가 몽골과 만주로 교세를 확장하는것을 후원하여, 어지러운 정세속에서 도움을 주고 조율을 하고 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달라이라마 쪽에서는 본래 여름에 만나자, 그리고 동부 몽골의 초원에서 서로 만나자는 식으로 나왔습니다. 이는 청나라로서는 조금 무리인 일이라, 회담 장소의 변경을 요구하여 결국 장소는 북경으로 정해졌습니다. 순치제는 이제 달라이라마 5세를 북경까지 유인하는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대신 순치제도 거대한 궁성이 아닌, 궁성 밖에서 까지 나가 맞아들이는 식으로 최대한의 양보를 보였습니다.
"화살 4개가 날아갈 만큼 거리까지 간 후, 나는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고, 황제도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는 서로 십여 보씩을 걸은 후, 손을 맞잡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 후 황제는 허리 높이의 의자에 앉았고, 나로 하여금 가까이에 앉도록 했는데, 나는 황제의 의자보다 조금 낮은 자리에 앉았다. 차를 마실 때, 나에게 먼저 마시라고 했지만, 나는 감당할 수가 없는 일이라고 하여 우리는 동시에 함께 마셨다. 이처럼 나를 대하는 예의가 돈독했다."

라사의 포탈라와 티베트 남부 삼예 사원의 벽화는 당시의 정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림에서 순치제는 정말 살짝 더 위에 앉아 있긴 하나, 거의 동일한 위치나 다름없습니다. 이는 이 방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양자는 좌우에 나란히 앉아 서로에게 예를 다함으로서, 불교 세계의 양대 지주임을 상호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몽골의 다이가에서 5세가 귀환을 준비하고 있자, 순치제는 5세에게 책문을 내려주었습니다.
"하늘의 보살핌으로 시간을(현재를) 다스리는, 황제의 명령, 내가 듣자 하니, 모두를 아울러 다스리는 자와 홀로 선한 자가 근원을 밝히는 도리는 같지 않다고 하며, 세상을 떠난 자와 세상에 존재하는 자가 가르침을 세우는 이치 또한 다르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마음을 밝게 하고, 천성에 따른 행위를 분명히 하며, 온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만민의 영도자는 모두 한 가지 뜻으로 통하게 된다. 롭상잠소(=롭상갸쵸) 달라이라마 당신은 빛나는 지성을 바르게 키우고, 지혜가 매우 깊은 까닭으로, 마음과 행동 모두를 다스려, 일체의 사물을 헛된 것이라고 하고, 그로써 불법을 널리 알려 우매한 중생을 가르쳐 이끌었으니, 불법이 서쪽에서 성하여, 그 선한 이름이 동쪽에 알려진것을 아버지가 들어 찬양하고, 그대(달라이라마)가 미리 하늘의 뜻을 알고,
'용의 해(1652년)에 만나도록 합시다.'
라고 하였다. 나는 하늘의 보살핌으로 시간을 다스리며, 천하를 평정한 후, 진정으로 초청하기에 적당한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지금 보아하니, 사람됨이 자애롭고, 언사에 절도가 있으며,총기와 현명함, 학식을 고루 갖춘 등 은혜를 베풀고, 이치를 궁구하는 문을 널리 열었으니, 이는 마치 밝은 길 위의 계단과 배 같으며, 또는 불법이 높은 산, 하늘의 별 같음이다. 이에 나는 인장을 주어, 세상의 모든 불교 교단을 이끄는, 달라이라마로 추대하였다. 적당한 때에 가서 불교를 융성하게 한 까닭으로 모두 기뻐하며 연회를 베풀도록 하였다. 불법을 떨치게 하고, 수없이 많은 중생을 구제하였으니, 이것으로 상중의 상이라 하겠다. 이로 인해 인장을 주었다."
중화제국의 황제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를 달라이라마에게 하고 있습니다. 순치제는 이로 인해 달라이라마 교권에 절대적인 지위를 부여했고, 그 지지자로서 청조의 입장을 술회함으로서 불교 세계 내부에서 양자가 갖는 입지를 분명하게 하였습니다.
교단의 보호자로서, 보다 많은 시주층을 확보하려고 했던 티베트의 요구. 불교 세계의 관계망 속에 적극 참여함으로서 내륙아시아 지역 질서의 조정자로 등장하려는 중국 제국의 바램. 이런 '교단과 세속 군주의 관계' 는 비단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 순치제와 5세의 만남에 대해 가장 적절한 과거의 예시는 쿠빌라이 칸과 팍빠 라마의 관계, 16세기 몽골의 알탄칸과 3세 달라이라마의 관계를 떠올리면 됩니다.
이러한 만남은 서로간의 시대적인 요구에 가깝습니다. 황제 개인의 취향은 아주 약간은 반영될지 모르나 큰 의미를 부여하긴 어렵습니다. 순치제의 이 5세와의 만남은 한참 전 태종때부터 준비되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건륭제 시대때도 그런 기조는 변하지 않습니다.
태종 홍타이지 당시, 청은 티베트에 사신파견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이제 청은 중국 제국의 주인이 되어, 여러 몽골 실력자들의 동의를 구하고, 몽골의 내부 갈등을 이용하는가 하면, 다양한 계통의 라마들을 포섭하면서 끝내 성공적으로 5세를 북경에 초청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내륙아시아에서 5세의 행차는 실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켜, 그가 이르는 곳마다 대규모 법회가 열리고 각지의 시주와 승려가 운집하여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5세가 북경에 머물던 기간에도 이러한 행렬은 계속되어, 그를 보려고 줄지은 인파가 가득했고, 산적해 있던 중국 불교계의 문제를 판결해 줄것을 요구하는 승려들의 면담도 줄을 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겔룩 교단의 종교적 권위가 얼마나 가공해졌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5세는 이번 북경을 통해 3세 달라이라마의 행적을 쫒아 북경 망문을 수행했고, 암도와 청해, 몽골과 만주로의 전교 활동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5세의 뒤에 몽골이 있든, 청나라가 있든, 이 5세의 전교 여행과 다른 활동들은, 지금까지도 달라이 라마가 그 권위를 발휘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순치제 역시 득을 보았습니다. 5세 초빙을 성사시켰다는것, 그것은 드디어 당시 내륙아시아의 관계망에 청조가 진입하였다는것을 의미합니다. 불교 세계의 변방에서 중심으로의 첫 발. 중국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이루어냈던 청 제국이 중앙 아시아로 가는 첫 발걸음은 이렇게 화려하게 내밀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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