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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13) ─ 평화와 조화

구름위 2012. 12. 6.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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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 아담 샬 폰 벨(Johann Adam Schall von Bell, 1591.5.1 ~ 1666.8.15). 중국에선 탕약망(湯若望)으로 불리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예수회 선교사로서 젊은 날 마카오에서 네덜란드 군대를 저지해낸 적도 있습니다. 북경에 들어온 그는 당시 명나라에서 화포 제작과 관련된 일을 하다가, 만주족의 중국 진입이라는 변을 만났습니다. 북경의 대혼란 당시 일본도 한 자루로 폭도들로부터 자신을 지켜낸 그는, 만주족 왕조의 치하에서도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우선 아담 샬이 수학 능력이 있었고, 타협을 거부하는 고집, 그리고 외교 수완에 여러가지 행운이 따랐기에 가능한 결과 였습니다. 청나라 정부도 선교사들에게 거는 기대는 명나라와 다를것은 없었습니다. 행성들의 궤적을 알려주고, 일시고가 월식 및 유성우와 같은 예기치 못한 현상에 대비 할 수 있도록 해줄 역법, 성공적인 통치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역법입니다.


 명나라 정부에서 일하고 있던 시절, 중국 관리들은 아담 샬을 비난하며 불신했으나,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염치도 없이 청나라 정부로 적을 옮겨두고 있던 처지입니다. 전날에 아담 샬을 비난했던 그들은 이제 오히려 아담 샬을 설득해서 '새로운 주인'을 위해 역법을 계산하고자 했습니다. 아담 샬은 그들의 요청을 계산했고, 독자적인 책력을 준비했습니다. 그것은 중국이나 이슬람의 책력보다 더욱 정확하게 천문 현상을 예측해고, 다른 특장점도 많은 책력이었습니다.


 사실 아담 샬의 새로운 책력은 본래 명나라를 대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마테오 리치에게 서양 학문을 배우고 서구 문물에 매우 우호적이었던 서광계(徐光啓)의 지지로 아담 샬은 기존의 대통력(大統曆)을 보완하는 신역법(新歷法)을 준비했으나 공고롭게도 명나라가 그전에 망해버린 것입니다.


 아담 샬의 역법은 여러가지 면에서 매우 정확했습니다. 일례를 들자면 그의 책력은 1644년 9월 1일에 일식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북경의 황실 천문대에만 해당되는 내용을 자세히 제공해주는 대신, 중화 제국 전역의 많은 도성들에 각기 달리 나타나게 될 일식의 시각과 지속 시간을 알려주었습니다. 순치제가 이에 대해 알아보자 매우 정확했고, 만주족 정권은 이 예수회 사제에의 과학이라는 비밀 병기에 상당히 주목하게 됩니다. 


 청 왕조는 그를 황실의 천문대장인 흠천감감정(欽天監監正)에 임명했습니다. 아담 샬 개인으로 말하자면 이 직책을 맡을 의사는 전혀 없었지만, 여러 차례 황제의 특사들이 파견되어 그를 설득하자 동료들과 이야기해보고 60세의 나이에 이를 승낙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집권자는 도르곤이었습니다. 순치제는 도르곤의 꼭두각시나 다름이 없었던 상황인데, 어린 순치제는 성장하면서 낯선 예수회 사제들의 외국 학문에 상당한 신뢰감을 보였습니다. 황제가 점성술에 근거한 아담 샬의 자문에 크게 의존함에 따라 아담 샬은 상당한 수준의 권한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는 많은 조정 신료들의 두려움이나 시기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조정의 많은 만주족 신료들은 아담 샬에 대해 반대했지만, 어린 황제는 그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존경을 보냈습니다.


 아담 샬은 어린 황제가 성년에 이를 무렵에 최대의 정치적 승리를 거두게 되는데, 당시 도르곤은 더욱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여 스스로 황부라고 일컫던 시기였습니다. 도르곤이 황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오던 시점에서, 아담 샬은 어린 황제의 편이었습니다. 


 그는 한 기념물 건축 사업에 관여하기 시작했는데, 순치제의 신료들이 도르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북경의 황궁 입구에 두 개의 거대한 대리석 기둥을 세우는 일을 계획했습니다. 도르곤을 위한 이 공사에 아담 샬도 그 지식을 인정받아 자문을 하게 되었는데, 아담 샬은 자문 요청에는 도르래 공법을 소개하는 등 충실하게 응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실제로 나서게 되자 '점성술 상의 이유' 로 이 계획에 반대하는 입장을 내었습니다. 천문대장인 그만 할 수 있는 반박이었습니다.
 
 
 "별들의 신호가 모두 이 일에 대해 경고하고 있소이다."
 
 
 도르곤은 화를 냈지만, 결국 아담 샬의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공고롭게도 도르곤이 이후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자, 순치제는 아담 샬에게 더욱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순치제의 어머니가 1651년 병에 걸렸을때, 아담 샬은 그녀를 돌보는 역할을 맡았는데 크리스트 교도로서의 경건한 모습과 중국에 대한 예의와 존경을 보이며 그들의 전통 예법을 숙지한 신사 아담 샬은 황태후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황태후는 그를 '수양 아버지' 라고 부르게 되었고, 순치제는 아담 샬이 앞날을 예지함은 물론, 병을 고치는 능력까지 있다고 확신하면서 그를 '할아버지' 라고 일컫었습니다.


 이후 순치제가 여자들을 가까이 하게 되면서, 일부일처제와 관련된 크리스트교 적인 면에서 황제는 흥미를 잃었지만, 그렇다고 아담 샬 개인에 대한 평가가 낮아진 것은 아닙니다. 순치제는 최소한 한달에 한번은 아담 샬을 만났고, 신뢰할 수 있는 사제에게 형언할 수 없는 존경심을 보냈습니다. 순치제는 아담 샬이 신하의 예를 취하며 허리를 굽히거나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황제를 뵙기 위한 허락도 필요 없이 매번 만날 수 있었는데, 이는 도르곤 조차도 누리지 못한 특권입니다.


 일부 신료들은 이러한 순치제의 '할아버지'의 격식없는 관계를 못 마땅해 했습니다. 아담 샬의 누추한 숙소에 순치제는 불쑥 방문했고, 황제에게 어울릴만한 의자가 아닌 평범한 의자에 앉아 아담 샬이 먹는 변변치 못한 술과 음식을 나눠먹으며 서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황실 연회에서 늙고 노곤한 아담 샬이 추위를 타는 듯 하자, 황제는 친히 자신의 외투를 벗어 이 노인에게 덮어 주었으며, 직접 사냥해서 잡은 산토끼 두 마리를 그에게 하사했다고도 합니다. 아담 샬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순치제와 스스럼 없는 농담을 나눌 정도가 되었습니다.


 순치제에게 있어 아담 샬은 대신들보다 편하고 비천한 환관들보다 멋지고 예의를 아는 친구였습니다. 이렇게 드러내놓고 서양 오랑캐에 대한 총애를 보이자 이에 대한 반발도 심해져서, 순치 14년인 1657년, 오명현(吳明炫)이 상소를 올려 새로운 역법에 오차가 있다며 따졌지만, 순치제가 조사해보자 신역법에는 전혀 착오가 없어 오명현은 죽을뻔했습니다. 그 후 강남 휘주 관리인 양광선이 서양 학문을 비난하면서, 아담 샬의 신역법을 욕했지만 순치제는 아담 샬을 굳건히 옹호했습니다. 양광선과 오명헌의 일파는 이후에도 아담 샬을 계속 괴롭힙니다.


 순치제는 정성공을 격퇴한 뒤, 황호의 조언에 따라 지상 최대의 해안 봉쇄 정책으로 정성공에게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하지만 정작 북경에서 그 이야기는 관심 밖에 있었는데, 순치제가 다른 문제에 골몰해 있었던 탓입니다. 그는 효헌황후(孝獻皇后), 즉 동악비(董鄂妃)를 상대로 불같은 사랑에 빠져있었습니다. 


 이 시점에 이르러 순치제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꽤나 괘팍한 성격이 되었는데, 아담 샬에게는 여전히 신뢰를 보였습니다. 심지어 아담 샬은 간혹 순치제의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서로 격렬하게 논쟁도 벌였고, 이는 물론 아담 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러했다면 즉시 죽어버렸을 겁니다. 애정의 결과로 동악비는 임신을 했는데, 그녀가 낳은 아들은 유산되어버렸습니다. 당연히 두 사람은 큰 충격을 받았고, 특히 동악비는 천연두까지 걸려 죽고 맙니다.


 젊은 군주, 순치제는 생에 느껴보지 못했던 비통함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는 세상사에 지쳐버렸습니다. 의욕을 상실한 황제는 급속도로 병에 굴복해버렸고, 어떤 처방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병상에서 죽음을 맞이하던 황제는, 아담 샬에게 만약 자기가 살아난다면 크리스트교도가 되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하늘의 섭리를 이해하는 할아버지도 죽어가는 사람을 죽음이라는 이름의 바다에서 건져 올릴 수는 없었습니다.


 죽어가는 황제는 거듭 아담 샬에게 누가 황위를 계승하면 좋을지, 최후의 순간에도 현명한 판단을 부탁했습니다. 아담 샬이 조용히 불러준 이름은 다름 아닌 히오완예이, 중국식으로 말하자면 현엽이라고 불리우는 한 사내 아이였습니다. 히오완예이는 천연두를 한번 앓고 난 뒤여서, 이제 중화제국에 절실하게 필요한 오랜 재위가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순치제는 자신이 그동안 지은 죄 때문에 하느님 앞에 서기가 부끄럽다는 요지의 말을 했고, 그리고 사망했습니다. 


 이후 발표된 유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짐의 아들인 강비 동가씨 소생의 제3황자 현엽은 연치가 겨우 8살이나 그 용모가 단정하고 영민하니 이 나라 종묘사직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고로 현엽을 황태자에 책봉하여 다음 황제에 올리도록 하라. 27일 동안 상복을 입다가 그 뒤 옷을 대례복으로 갈아입고 즉위식을 치르도록 하라. 특히, 영시위내대신 색니, 소극살합, 알필륭, 오배는 조정의 원훈이자 개국공신으로 짐이 언제나 신뢰하던 대신들이니 충성을 다하여 신제를 보좌하고 정무를 처리하라. 

朕子玄燁,佟氏妃所生也,年八歲,岐嶷穎慧,克承宗祧,茲立為皇太子,即遵典制,持服二十七日,釋服,即皇帝位。特命內大臣索尼、蘇克薩哈、遏必隆、鰲拜為輔臣,伊等皆勛舊重臣,朕以腹心寄託,其勉天忠盡,保翊沖主,佐理政務。


 순치제의 죽음을 둘러싼 묘한 이상기류 때문에, 간혹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순치제가 새로운 황제의 즉위식 때, 수많은 인파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뒤를 이은 새로운 제국의 황제에게 무릎을 꿇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는 순치제가 죽지 않고 황위에서 물러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꾸며낸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와 관련되어 오대산 청량사의 주지와 관련된 기괴한 이야기가 매우 다양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 이 절의 주지를 모델로 하여 만든 상이 있는데, 그 모습이 죽었다는 황제와 꼭 닮았다는가 하면, 새 황제는 즉위 후 10년동안 세 번을 청량사에 왔는데, 주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단 한번도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670년 주지가 35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새 황제가 실물 크기의 주지 금상을 절에 내리고, 그의 무덤에 부장할 보화들도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파일

 순치제의 죽음이란 진상이 어찌되었건, 8살의 꼬마 아이는 만주와 중국, 내몽골을 관할하는 거대한 세계 제국의 주인으로 갑자기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떠밀려 왔습니다. 이를 가는 동방의 조선인들, 야만스런 러시아의 서양 오랑캐들, 헛된 꿈을 꾸며 반격의 준비를 대만의 명나라 망령들, 사막의 늑대들인 준가르와 노회한 삼번의 무장들이 버티고 있으며, 많은 공을 세운 대신들이 의심쩍은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던, 그 자리로 말입니다. 


소년은 대제국의 주인이던 자신의 아버지를 거의 볼 기회도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종소리는 북경의 겨울하늘로 퍼져 나갔고, 건청궁에 있던 아홉 마리의 용이 그려진 누런 비단 휘장 뒤에 순치제의 시신이 모셔졌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와 소년의 머리를 깎았고, 하얀 상복을 입혀 주었습니다.


 새 시대를 이끌어갈 소년에게 사람들은 안녕과 평화를 뜻하는 강(康), 조화와 흥성을 희(熙)라는 말을 주었습니다. 강희(康熙). 평화로운 조화. 이 소년이, 이 거대한 제국에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지, 아무도 짐작 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