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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15) ─ 태풍 직전의 고요

구름위 2012. 12. 6.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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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쪽 변경너머 머나먼 곳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야생 기러기가 사는데, 이놈들은 첫서리가 내리기 전, 살던곳을 떠나 중국 본토로 내려오고, 북변을 지키는 군사들은 이들을 보고 곧 겨울을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강희제는 기러기 몇마리를 잡아 장춘원(長春園) 물가에 만든 커다란 새장 속에 가두어 놓고, 마음껏 물을 먹게 하고 모이를 쪼아먹을 수 있게 했습니다.


 길고 긴 겨울이 지나고, 따사로운 봄이 올 적에, 이 기러기들 주위로 흰 오리들이 물위를 떠나디며 몰고, 다른 새장에는 공작과 뀡, 메추라기와 앵무새, 주먹만한 새끼학이 있으며, 비탈에 누워 있는 황갈색 사슴과 노루들은 막대기로 쿡쿡 찌르면 일어나서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입니다. 장춘원에는 작약, 백합, 자두, 복숭화, 목련은 물론 하미에서 들여온 포도나무가 수천 평의 땅에서 자라났습니다. 포도밭에는 백포도, 흑포도, 자줏빛 포도, 청포도 등 온갖 종류의 포도가 열리는 것입니다. 


 장춘원의 풍경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고, 그 정경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의 화류가(花柳歌)에서도 묘사가 될 정도입니다. 영남지방의 규방가사인 화류가에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화류간(花柳間)에 노든 벗님, 이내 말슴 들어 보소. 구십춘광(九十春光) 덧업서, 장춘원(長春園)에 피는 꽃이, 지난밤 찬 서리에, 하마 거의 이을러니, 이우러 떠러지면, 고은 색을 일흘로다. 관성자(管城予) 빗기 자바, 백화 방명로거 내니, 패강월 발근 달에, 선녀들도 하도만타."


 그러나 해야 할들은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으니, 언제나 풍경을 즐기고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강희제는 어린 시절부터 계속해서 학문을 수련하고 지식의 기반을 끊임없이 넒혀야 했습니다. 강희제 본인은 그런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짐은 8살, 황상에 올랐을 때부터 학문에 정진했다. 당시 장 아무개, 임 아무개라는 내시 둘이 짐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둘 다 명대에 글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주로 경서를 가르쳤다. 또 한림원의 심전이 짐에게 명대 동기창(董其昌)의 서체를 가르쳐 주었다. 훗날 짐은 열심히 공부하는 습관이 생겼고, 17년부터는 매일 오경(새벽 3시~5시)에 일어나,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전에도 역시 글을 읽었다. 때로는 너무 피곤해 피를 토하기도 했다."


 강희 9년의 1670년. 숙적 오배를 처리하고 1년이 지난 시기, 강희제는 옙웨 명해 경연일강제도를 실시했습니다. 경연이란 궁중에서 매년 봄과 가을에 한차례씩 강연을 하는 것이고, 일강이란 강관(講官)이 황제에게 경사를 강의하는 것입니다.


 일강은 당초에 이틀에 한 번씩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2년 후에는 매일 실시하는것으로 바뀌었고, 강희제는 이를 거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심지어 삼번의 난을 평정하던 시기에도 일강은 매일 이어졌고, 강희 12년의 1673년. 여름이 되자, 규정에 따라 일강을 잠시 중단하려 하자, 강희제는 대서(大暑)까지는 일강을 계속 하자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문의 도, 이는 중단이 없어야 가치가 있는 것이다."


 대서가 되어, 강관이 무더위에 황제의 몸이 축날 것을 우려해 일강을 중단하자고 하자, 강희제는 또다시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짐은 책을 읽으면 피로한 줄을 모른다."


 때로 학문을 강론할 강관이 사정이 생겨 없을때에는, 강희제는 혼자 일강에서 배운것을 복습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여름에 일강을 쉬게 될 때에는, 강관을 따로 불러 궁에서 경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강희 16년의 1677년 4월, 강관 나사리(喇沙里)가 일강을 시작하기 위해 막 책을 펼치자, 강희제는 잠시 멈추고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짐이 먼저 한 번 책의 내용을 이야기 해 보도록 하겠소."


 강희제가 깊은 관심을 보인 학문은 유학 외에도 서양의 학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강희 3년인 1664년 7월, 과거 아담 샬의 역법을 헐뜯었던 양광선은 또다시 서양의 과학을 부정하고 신역법을 비방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는 오배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고, 강희제는 11살 밖에 되지 않던 시기입니다. 오배가 신역법에 10가지 착오가 있다며 선교사 아담 샬을 비롯한 흠천감 관리들을 능지처참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강희제는 이를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당시 아담 샬은 무려 72세의 고령. 그리고 4월 20일 한번 쓰러지게 되자, 타인의 부축 없이는 걸을 수도 없고 말하고 쓰는 것도 매우 어려움을 느끼는 처지에 직면 했습니다. 


 그러한 몸 상태이니, 아담 샬과 그의 동료들이 그릇된 종교 이념을 설파하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낯선 과학으로 중국의 전통적인 점성술을 파괴하고, 또한 아담 샬이 만주족 황실을 저주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비밀스런 가톨릭의 요술을 사용했다는 비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순치제의 갓난 아들이 죽었을 당시, 아담 샬이 그 묏자리와 장례 일자를 정하는 일의 최종 책임을 지면서 의도적으로 제 목적을 위해 풍수를 이용했고, 그로 인해 부정이 탄 장례식이 곧바로 황태자 어머니와 사망 원인이 되었으며,이후에 황태자의 아버지인 순치제의 죽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남회인(南懷仁)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벨기에의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1659년에 중국에 건너왔습니다. 오배의 공격으로 그도 옥살이를 하는등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담 샬은, 자기 변호는 커녕 중개자를 통해서 간신히 우물거리는 말이나 전달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나온 그의 답변은 지난날 그가 보여주었던 기지와 재치의 흔적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론 고통을 앓는 자의 앞뒤없는 중얼거림 그 자체 였습니다. 재판은 수개월에 거쳐서 진행되었고, 아담 샬과 동료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아담 샬은 모든 명예와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슬에 묶여 투옥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댬 살과 친분이 있던 효장태후가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자, 최종 판결은 의정왕대신회의까지 넘어갔습니다. 논의는 다시 몇개월에 거쳐서 이루어졌고, 피고인 아담 샬은 마침내 임석한 자리에서 쓰러질 정도로 쇠약해졌습니다. 그러한 기나긴 회의 끝에 의정왕대신회의는 요망한 술수를 부린 죄로 아담 샬에게 참수형을 선고했습니다. 


 오배의 일파는 끝까지 능지처참을 해야 한다고 아우성을 벌였지만, 갑자기 혜성 하나가 북경 하늘에 나타나고, 북경에 대지진이 벌어져 아담 샬이 갇혀 있던 감옥의 담벼락까지 무너지자, 미신을 신봉하던 신료들은 이를 불안하게 여겼습니다. 여기에 효장태후가 거듭된 항의를 하니, 결국 아담 샬은 간신히 능지처참을 면했습니다. 늙고 병든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 이듬 해 잠을 자던 도중, 평화롭게 세상을 떠나고, 자신이 기리고 있던 하나님의 곁으로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오배의 일파는 학술적 논쟁을 정치적 분쟁으로 발전시켜 역법 개혁자들을 탄압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앞장섰던 양광선은 흠천감감부(監副)로 임명되었지만, 정작 역법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또한 그 자신도 이 사실은 알고 있었기에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사임 의사를 밝혔지만 인정받지 못했고, 오히려 오배의 줄을 타고 승직되기까지 합니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이 학문적 지식을 갖춘 ─ 동시에 같이 아담 샬을 공격한 ─ 오명현의 아우 오명선을 감부로 천거했습니다.


 친정을 시작한 강희제는 양광선이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한번 처벌을 받았던 페르비스트를 흠천감으로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1668년 ─ 즉 오배 축출 1년전 ─ 11월 경, 신역법과 구역법에 대해 ─ 16세의 나이로 ─ 철저하게 검증을 가한 결과, 신역법이 매우 오차가 적다는 사실을 알아 내었습니다. 하지만 서둘러 일을 처리하지 않고 여러 차례 검증을 다시 실시하고, 학자들로부터 많은 의견을 수렴하여 신역법이 구역법보다 우월하다는 여론을 조성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결국 페르비스튼 녹천감감부(錄天監監副)로 기용되었고, 무능한 양광선의 관직은 박탈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역법에 관한 논쟁은 일단락이 되었습니다. 아담 샬도 오배에게 고통을 입어, 오배와 그 일파에 대해 반감이 극심한 페르비스트는 오배 세력이 축출되자 양광선을 처벌해줄 것을 강희제에게 건의했지만, 강희제는 학문적인 일을 정치적인 문제로 확대시키는것은 옳지 않다며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 그는 서양 학문에 대한 편견이 줄어들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단 오배 세력을 축출하고 난 뒤, 내각에서 오배 세력을 축출하는 일이 벌어지고 나자, 그 자리를 메운것은 남인, 즉 강남의 한족 출신 관리들이었습니다. 섭정왕 도르곤 시절부터 한족관리에 대한 임용이 벌어지고 있긴 했으나, 내각등에서 한족들은 여전히 그 숫자가 매우 극소수였고, 일부 있는 사람들도 스스로를 지키는것도 힘들었기에 함부로 발언할수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강희제가 일강기거주관(日講起居注官)을 설립해 한림원과 첨사부(詹事府) 가운데 학식이 뛰어난 인물들을 선발하여 자신에게 자문을 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13년간 42명의 한족 관리가 일강기거주관을 거쳐갔고, 이 가운데 남방 출신이 32명이었습니다.


 물론 만주족 대신들 사이에서, 한족, 특히 강남 한족에 대한 반발이 없지도 않았습니다. 색액도가 한족 관리 웅사이등을 몰아내려는 술수를 보이자, 강희제는 이를 눈치채고 색액도와 친분이 깊은 만주족 대학사 파태를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으며, 그 대신에 만주족 이부상서와 호부상서인 명주(明珠)를 기용했습니다. 명주가 공이 있기도 했지만, 남인들과 친분이 돈독했기 때문에 그를 기용한 것입니다. 


 또 상소문에 비답, 즉 답하는 내용을 적는 일을 오로지 황제의 업무로 만들었습니다. 만약 이게 다른 사람들의 손을 거친다면, 황제의 위상을 추락시키거나 혹은 중간에 좋지 못한 마음을 품은 자가 농간을 부릴 수도 있습니다. 강희제는 이를 철저히 방지해, 말년까지도 직접 비답을 작성하고 누구에게도 이 일을 대리시키지 않았습니다. 오른손이 병들어 글을 쓸 수 없으면, 차라리 왼손으로 썻습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황제의 업무는 매우 과중해질테지만, 강희제는 그 정도는 아랑 곧 하지 않았습니다. 


 국제 관계에 있어서는, 대체적으로 관대한 태도를 견지했습니다. 당시 청나라의 대외사정상, 쓸데없는 분쟁을 더 만드는 것은 현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664년 3월 16일, 동쪽과 남쪽의 속국들과의 일을 담당하고 있는 예부에서 안남국(安南國), 즉 베트남에서 보낸 조공품이 청의 규정에 부합하지 않자, 안남국에 청의 규정을 준수해 다시 물품을 보낼 것을 명령해 달라고 상소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11살의 강희제는 이 상소에 다음과 같은 비답을 적었습니다. 


 "외국인들이 청을 흠모하여 조공을 바치면, 그대로 받으면 그만이다. 규정에 부합하는지 여부가 중요하겠는가. 예부는 연회를 열어, 먼길을 찾아온 안남국의 사신들을 대접하라."


 강희 7년, 5월 27일에는 안남의 국왕 여유희(黎維禧)가 6년에 한 번 조공을 바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예부에서는 규정과 같이 3년에 한번이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쪽 역시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베트남이 청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지세가 험하여 조공을 바치는데 매우 큰 어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유희는 "비록 조공을 바치는 연한이 달라져도, 폐하에 대한 공경심에는 전혀 변함이 없을 것." 이라는 요지의 서신을 보냈고, 이를 본 강희제는 예부에 명해 안남국의 요청을 들어주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6년 후, 약속했던 기일이 되어 조공품이 오자, 예부는 확인결과 바친 금은 그릇이 조공 목록품에 기록된 것보다 적다는 것을 파악하여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강희제는 대학사를 불러서 말했습니다.


 "외국에서 바친 조공은 그 양이 중요한게 아니오. 정성이 중요한 것이니 성의가 있다면 그만이오. 조공품의 수량을 가지고 논한다면, 다른 나라는 청을 우습게 볼 것이외다. 게다가 조공을 바치기 위해, 험하고 먼 길을 거쳐 온 사신들이 아니오?"


 그리하여 안남의 조공품이 적다고 죄를 따지지 말 것을 예부에 명령했습니다.


 

 물론 청은 틀림없이 만주족 정권이 세운, 만주족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제국을 구성하는 절대 다수는 한족의 백성들이었고, 영광과 위업도 그들의 협조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한족은 끊임없이 범위가 확장되며, 본디 족속이 다르던 수많은 민족들이 끓는 용광로처럼 하나가 되면서 나온 민족으로, 만주족도 중국의 지배자가 되고 싶다면 좋건 나쁘건 그들과의 협력과 또한 융합은 피할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청이 중원에 들어온 초기에는 만주족 관리의 품급(品級은 한족 관리보다 2,3급. 심지어는 4,5급까지 높았습니다. 순치제는 만주족 관리의 품급을 한족들과 동등하게 조정했지만, 전형적인 만주족 무장인 오배가 실권을 잡자 다시금 차별 대우가 극심해졌습니다. 오배를 숙청한 후, 강희제는 만주족과 한족 관리들의 직무는 통일했지만 품급에는 차이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곧 이를 시정해 만주족과 한족 관리의 풍급과 수속을 획일화 시켰습니다. 이는 한족 관리들에게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


 일단 품급이 획일화 되자, 만주족과 한족 관리들의 대우도 점차 평등해졌습니다. 강희 11년 6월, 예부상서 공정자(龔鼎孶)가 병에 걸려 쓰러졌습니다. 강희제는 이를 듣고 만주족 학사 부달례(傅達禮)를 불러 말했습니다.


 "만주족 대신이 병에 걸리면, 모두 의원을 보내 치료하오. 예부상서 공정자가 병이 났다고 하는데, 짐은 만주족 신하와 한족 시하를 평등하게 대하니, 근시시위 오해와 함께 어의 여문조를 데리고 공정자의 집에 한번 다녀 오시오."


 그러면서 어의에게도 정성을 다해 치료할것을 당부했습니다. 또한 강희 14년인 1675년 9월에는 명나라 황제들의 능묘가 훼손되고, 주변 나무들이 앙상하게 죽어 있는것을 보고 크게 안타까워 해서, 예부에 다음과 같은 어지를 내려 시정하도록 했습니다.


 "황릉을 지키는 묘지기를 두어, 능묘를 세심하게 보살피고, 해당 지역의 지방 관리에게 수시로 황릉을 관리하도록 하여, 짐이 선대 황제들을 예로서 대한다는 것을 보여 주게 하라."


 좀 더 미래의 일까지 이야기해보자면, 1683년 무렵에는 9월 9일, "이 나라의 백성들은 민족을 가리지 않고 모두 짐의 적자(嫡子)다." 라는 글을 발표했으며, 다음해 11월 2일, 남순 중 위대한 명태조 홍무제의 묘에 도착하자, 직접 효릉에 세번 절하고 능을 지키는 태감과 묘지기에게 상을 내리고, 황릉 주변에서 장작을 채취하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강희제의 이 행위는 한족 관리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어, 수많은 관리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진심으로 감격했고, 총독 왕신(汪新)은 "고금을 통틀어 이렇게 위대한 일은 없었다." 라고 극찬했습니다. 물론 만주족에게 있는 우대는 여전히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강희제도 이를 없앨 생각은 없었지만, 이러한 행위들은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민족적 적대감을 최소한 위협적인 수준에서 두고 볼 정도, 혹은 어느정도 안심 할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내렸습니다. 만주족과 한족이 모두 하나라는 인식은 이론적으로 특수한 의의를 가지며 강희제의 통치 기반을 단단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오배를 물리친 강희제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진정으로 제국의 평온과 황제의 권력을 확립하려면,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됩니다. 삼번, 그리고 백전노장 오삼계. 강희제 인생을 통틀어 보아도 가장 위협적이며, 청나라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싸움 중 하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