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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8) ─ 승리로 가는 길

구름위 2012. 12. 6.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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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숭환은 1630년에 죽었고, 후금은 1631년부터 홍이포 생산 공정에 착수했습니다. 내부를 다시 한번 다듬는 시기이기에 당분간 명군과의 전면적인 교전은 벌이지 않았으나, 이전에 재미를 본 내몽골 지역을 통한 기습이나 사이사이 나있는 길로 벌이는 습격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이럴 경우 전면전은 못 되고 보급로 문제 등으로 길게 싸우기도 힘드나, 최소한 약탈은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더 잡아와서 생산력을 높이고, 필요한 물건을 보충하는 일입니다.


 내부 문제를 정비한다고 했는데, 우선 천총제는 이 기간동안 흑룡강 유역과 길림 동부 경계지역에 아직도 드문드문 남아있는 여진 부족들을 모조리 통합하여 판도를 더 넒혔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일로 몽골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후금군이 내몽골로 진입해서 북경으로 진군하는 루트를 새로 열기도 했고, 후금의 근간을 이루는 사람들 중 몽골인 출신도 숫자가 상당하니 이 문제는 한번쯤 손을 털고 가야 할 일입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후금은 라마승들의 파견등으로 몽골 각 부와 외교적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소위 만몽 일체 정책으로 여진족 왕실의 여인 27명이 몽골의 왕공귀족들과 혼인하고, 반대로 57명의 몽골여인들이 만주의 황가와 귀족들과 혼인했습니다. 이러한 혼인동맹은 중원을 도모하기 전에 몽골과의 동맹을 굳건히 하려는 정책이었던 것입니다.


 게중에 문제가 되는건 차하르의 링단 칸(林丹汗) 입니다. 그는 다름아닌 보르지기트(Боржигин)를 성씨로 사용했으며, 16살의 어린 나이로 1604년 대칸에 즉위, 원(元)나라의 부흥을 원하고 쿠빌라이칸의 전생(轉生)이라고 하여 호토쿠트(활불)칸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사키아파(派) 라마교를 신봉하여 불경(佛經)의 번역을 보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문제는 한참 성장하던 만주의 무리가 몽골인에 혼인 정책을 시도하니, 특히 동부쪽에 있던 몽골 부족들이 점점 후금 쪽으로 붙어가게 되면서 링단 칸의 영향력이 흐려지기 시작하고, 링단 칸은 이탈을 막기 위해 군사적으로 다른 부족들을 누르는 강경 정책으로 일관하였으나, 이는 오히려 더욱 큰 반발을 불러와 이탈을 가속화 시켰습니다.


 결국 링단에게 반발하는 몽골 부족의 우두머리들이 후금과 공공연히 동맹하고, 후금도 그들을 지원하고, 부족들끼리 단결하여 버티자 전투가 벌어지면서 링단도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632년 무렵 천총제는 일단의 원정을 통해 링단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어 서쪽으로 도망가게 했는데, 링단은 1634년에 사망했고 1635년에 급기야 코르친등의 부족들이 제 발로 항복을 함과 동시에 링단의 아들들과 대신들이 옥새를 들고 항복하러 와서 일단의 평정 작업이 끝나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감과 힘을 기른 후, 내몽골의 각 부를 평정한 이듬해, 천총제 홍타이지는 대금이라는 기존의 국호를 대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바꾸었습니다. 이제부턴 숭덕제라는 표현을 쓰겠습니다. 1636년의 일이었는데 이제 만주는 한 개의 국가가 아니라 천하에 군림하는 황제국으로 면모를 일신하것이었고, 명나라와는 더 이상 협상의 여지도 없어졌으며 사생결단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후금이 황제국이되면서 가장 곤란해진것은 물론 조선으로, 조선의 입장에선 더 이상 현상유지식 중립정책이 불가능해졌고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해 병자호란이 일어난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숭덕제가 국호를 여진인들의 시조 국가인 금에서 청으로 바꾼것도 당시의 상황을 보면 그럴듯 합니다. 이제 만주는 더 이상 여진인들의 좁은 공동체를 떠나 만주와 몽골을 포괄하며, 조선을 영향력 아래 두고 있고 요서와 요동 사방으로 세력이 뻗어있습니다. 일종의 민족 연합인 셈입니다. 


 이보다 앞서, 1632년 무려에 숭덕제는 동포들이 자신들을 스스로 일컫어 '여진'이라고 부르는것을 금지시켰습니다. 여진이 아니라 만주족으로 확실히 전환이 되었는데, 구시대의 느낌을 지우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예전부터 만주, 하다, 우라, 예허, 후이파 등의 이름이 있었다. 무지한 제가 때때로 제신(諸申 여진)이라고 부른다. 제신은 곧 석북초묵륵근의 후예로 우리나라와는 관계가 없다. 앞으로 모든 사람에게 오로지 우리나라를 만주라는 원래 이름으로 부르는 것만을 허용한다. 그 각 기의 패륵에 속한 자는 칭하여 어떠한 기, 패륵가의 제신이라고 부르지 말라."


 일련의 확장작업이 벌어지면서, 명나라에 대한 공격도 다시 이루어졌습니다. 숭덕 원년이자 병자호란이 일어났돈 1636년, 아지게가 이끄는 군대가 또 빙 돌아가면서 12개 성을 떨어뜨렸고, 56번의 크고 작은 전투를 벌여 사람과 가축 18만을 약탈했습니다. 거의 마음대로 북경 앞까지 나타는 셈인데, 이 경우 보급로의 문제가 있어 약탈 이상의 전과를 벌이기는 힘들긴 합니다.


庚申,大清兵入濟南,德王由樞被執,布政使張秉文等死之.戊辰,劉宇亮、孫傳庭會師十八萬於晉州,不敢進.丁丑,改洪承疇總督薊、遼,孫傳庭總督保定、山東、河北.二月乙未,劉宇亮罷.大清兵北歸.三月丙寅,出青山口.凡深入二千里.

숭정 12년정월 경신일, 청군이 제남부에 돌입하여 덕왕 주유추를 사로잡았고, 산동포정사 장병문 등이 죽었다. 무진일에 유우량, 손전정 등이 18만 군대를 이끌고 진주에 집결하였으나 감히 나아가질 못했다. 정축일에 홍승주를 계주, 요주의 총독으로 삼고, 손전정을 보정, 산동, 하북의 총독으로 삼았으며, 2월 을미일에 유우량을 파직했다. 청군은 북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3월 병인일에 청산구를 통해 귀환하였는데, 대저 2천여리를 침입한 것이었다. 


丙寅,多爾袞、杜度等疏報自北京至山西界,復至山東,攻濟南府破之,蹂躪數千里,明兵望風披靡,克府一州三縣五十七,總督宣大盧象昇戰死,擒德王朱由賸, 郡王朱慈漻, 奉國將軍朱慈黨、總督太監馮允昇等,俘獲人口五十餘萬,他物稱是.是役也,揚武大將軍貝勒岳託、輔國公瑪瞻卒於軍.上聞震悼,輟飲食三日.



숭덕 4년(1639년) 3월 병인일, 도르곤(多爾袞), 투도(杜度) 등이 상소를 올려 보고하기를, 북경에서 산서지계로 갔다가, 다시 또 산동에 이르러 제남부를 공격하였으니, 수천리를 유린하였으나 명군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고, 부(府) 1개, 주(州) 3개, 현(縣) 57개를 깨트렸다고 하였다. 

(명측에서는) 선부, 대동 총독인 노상승이 전사했고, 덕왕주유승, 군왕 주자류, 봉국장군 주자당, 총독태감 풍윤승 등과 함께 사로잡은 인구가 50여만이 되었는데, 기타 물건도 이처럼 많이 노획하였다.  이번 싸움에서 (청측에서는) 양무대장군 겸 바일러인 요토(岳託)와 보국공 마첨이 전사했다. 청 태종이 이를 듣고 매우 애도하며 3일간 식사를 들지 못했다.



 1638~39년 무렵. 숭덕제는 직접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다시 한번 내몽골을 지나 대규모 군사를 출동시킵니다. 무려 산동지역까지 진격, 제남에서 명나라 황족인 덕왕 주우츄를 사로잡아 귀환했습니다. 2천여리를 들어오긴 했으나 오래 작전을 벌일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으므로 약탈을 한 뒤 귀환하는것인데, 약탈한 인구가 50여만이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명군의 장수들은 겁을 몹시 내었기에, 귀환하는 청군을 제대로 타격하지도 못합니다.


 바로 이번의 싸움에서 은퇴해 있었던 손승종은 가족 모두와 함께 순사하였고, 아버지의 상을 치루던 노상승(盧象昇)이라는 사람은 그러나 더 큰 조국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2만의 병사를 이끌고 청군과 격돌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병부상서 양사창(楊嗣昌)은 노상승이 영웅적인 분투를 하고 있음에도 겁을 집어먹고 원군을 파견하지 않았고, 노상승은 열세를 극복못하고 져버린 것입니다. 관리들이 몸보신만을 생각하고 있으니, 명나라도 말기적 증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 싸움에서 대패륵 다이샨의 아들인 요토가 사망했습니다. 그는 유력자였기에 이 죽음에 대해 숭덕제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성의 표시를 보였습니다. 훗날 장병린(章炳麟)은 노상승이 요토를 활로 쏘아 죽였다고 했는데, 장병린이 혁명가이며 썩어빠진 청나라 정부를 타도하는게 목적이었다는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번의 출병에서 앞서 말했듯이 50만이나 되는 인원을 포로로 잡았고, 은도 100여만 냥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어도 청군은 단 한 치의 땅도 취하지 않고 물러났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취하지 못한 것입니다.


 산해관을 마지노선처럼 만들어 놓고 내몽골을 이용해 우회 공격을 한다쳐도, 앞서 말했듯이 보급로가 너무나 길어집니다. 이미 일전에 조대수가 퇴로를 차단하자 후금군이 곤경에 처한적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보급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약탈도 한계가 있고, 이민족인 청군이 중원에 들어오는 순간 지나가는 모든곳에서 적들과 싸워야 합니다. 영토를 점령하고 지키고 있는다 해도, 오직 군사들뿐으로 생산력을 보일 수도 없습니다. 산해관을 함락시키지 못하는 한 중원 정복은 꿈에서나 가능할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산해관을 공략하려고 해도, 우선 바깥의 네개 성인 송산, 행산, 금주, 탑산을 함락시켜야 합니다. 일찍이 원숭환부터 이루어진 방위 시스템으로 산해관은 이들 네 성과 유기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기에, 성 하나를 함락시키는것조차 쉽지가 않은 일이었습니다.


 숭덕제는 우선 금주성 한 곳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금주가 공격받는다면 그 즉시 송산과 행산에서 구원병이 오도록 연락이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서로간의 연락망을 끊어야만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청군은 우선 금주에 대한 원군 통로에 목책 등을 쌓아 막고, 금주에는 포위 군단을 배치하여 그곳을 고립시키는 작전을 취했습니다.


 명나라는 이에 대해 홍승주(洪承疇) 등을 지휘관으로 하여 13~15만에 이르는 대규모 구원 부대를 차출 했고, 이 부대에는 왕박, 당통, 조변교, 오삼계, 백광은, 마과, 왕정신, 양국주 등의 총병들이 합류했습니다.


 홍승주의 전략은 이전에 이 지역에 부임했던 웅정필, 원숭환 등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방어 하면서 지키다 보면 결국 청군은 단단한 방어선을 뚫을 방도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도 그런 방식은 효과가 있었는데, 문제는 다른데 있었습니다. 


 내부적 반란과 기근으로 당시 명은 재정이 매우 악화 일로에 다다랐고, 병부상서 진신갑(陳新甲)은 싸움이 길어지면 전비 지출이 매우 많아질것이라 두려워 하면서 무조건 속전만이 해결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진신갑이 현장에 파견한 장약기(張若麒)라는 사람이 또한 매우 괴상하고 성격이 급한 사림이라, 거짓 승전보를 북경에 수없이 올리니 홍승주는 별 수 없이 공세적인 방법으로 전략을 전환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숭덕제는 이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고, 코피까지 흘리는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급하게 말을 달려 현장으로 출동했습니다. 흐르는 코피를 보고 부하가 천천히 가자고 권하였으나,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숭덕제는 이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행군의 제승(制勝)이나 이(利)는 신속 함에 있다. 짐은 적이 이를 듣고 곧 달아날까 두려울 뿐이다. 만약 달아나지 않는다면, 이를 깨는 것은 개를 풀어 짐승을 쫒는 것처럼 얻기 쉬운 일이다."


 결국 내키지 않게 야전에 끌려나온 홍승주와, 코피를 흘리면서까지 야전을 벌이고 싶은 숭덕제의 싸움은 청군의 대승으로 끝나버려습니다. 5만 명이상의 병력이 사망했고 홍승주는 항복했으며, 오삼계와 왕박은 간신히 산해관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산해관 밖 네 성이 모조리 청군의 손아귀에 떨어져버렸던 것입니다.


 거의 대세를 결정지었다라고 할 수 있는 이 싸움의 결과는, 조정과 현장의 의사소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패인이었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하면 예산 문제도 없습니다. 그런데 관료들은 자기가 담당하는 일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고, 결국 이는 지구책을 속전으로 바꾸어 최악의 결과를 이루어내었습니다.


 이에 대해 숭정제의 책임을 묻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과실을 보이면 좌천도 아니고 처형을 하니, 멀리 내다보는 것은 무의미하고 관료들은 자기들 눈 앞의 일이나 해결하려 하게되고, 대국적인 판단은 이 과정에서 사라져버린다고 말입니다. 숭정제가 조급한 마음만 있을뿐 경험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홍승주의 패배 소식에 처음 북경 조정은 당연히 그가 순직했을 것으로 여기고, 단을 쌓고 영령에 대해 제사를 무려 16번이나 지냈고, 이 중에는 숭정제가 친히 제사에 참석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홍승주가 살아 있고 항복했다고 전해지니, 사람들은 모두 경악해 마지 않았습니다. 홍승주는 계요총독이었고, 이는 원숭환의 요동경략 이상의 중책. 너무 엄청난 인물이 항복을 해버렸기에 민간에서도 이를 두고 분분한 소문이 생겨났습니다.


 홍승주가 재주가 뛰어났기에 숭덕제가 이를 아껴 항복할 것을 권했고, 단식하고 죽으려는 홍승주를 어떻게든 붙잡으려 숭덕제가 범문정(范文程)을 통해 알아낸 홍승주의 약점이 미녀를 밝히는 면모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옥중으로 미녀를 보내 인삼즙을 먹게 했다는데, 굶어 죽으려면 인삼즙을 먹어서는 안되지만 미녀에는 배겨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미녀 중에 숭덕제의 애첩이 있다는 이야기부터 해서, 그 미녀의 정체가 사실은 몽골 귀족의 딸이었다는 이야기, 심지어 그 애첩이 애비(愛婢)가 아니라 대비(大妃)라는 이야기까지 있었는데, 이는 야설에서나 일어날 일이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절대로 없었을 것입니다. 말을 해본김에 더 하자면 홍승주를 유혹하던 여자가 홍타이지의 아내이고 순치제의 어머니, 강희제의 할머니인 효장문황후라는 이야기있는데, 그런 야사도 있다 정도로만 알면 족할듯 합니다.


 일반적인 기록에서는 홍승주가 먼저 항복을 청했고, 범문정이 홍승주가 믿을만 하다고 보증하여 항복을 허락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쪽이 홍타이지의 어머니가 옥중으로 가 홍승주를 몸으로 유혹했다는 이야기보다는 믿을만할 것입니다.


 아무튼 그런 이야기들이 민간에 나돌만큼 홍승주의 변절은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농민 반란군의 일까지 겹쳐, 수없이 편을 바꾸고 주군을 몰살한 정권에 충성을 맹세하고, 다시 편을 바꾸고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군신과 나라에 대한 절조와 충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이들 모두는 변명의 여지가 없으나, 그러나, 난세입니다. 난세에서는 온갖 일이 벌어지고, 비슷해 보이는 일에 다다르는 결과도 모두 다르게 됩니다. 그들 모두는 각자의 개체이고,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절조가 없고 비열하여 배신을 하였는가, 죽고 싶었지만 남은 사람들을 생각하여 그럴 수가 없었는가, 항복을 하고 다시 저항할 생각이었는가, 이미 대세가 기울었고 시대의 흐름에 타야 한다고 생각을 했던 것일까.


 우리는 그들 모두의 뒷 이야기를 알 도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더없이 혼란한 세상에서, 서로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음은 분명합니다.


 치열하게 산 인물이라면, 아버지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 역시 마찬가지 였을 것입니다. 청나라가 멸망하기 1년전, 갑자기 홍타이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52세. 아무런 병도 없었고, 기색도 없었으나 급사하였습니다. 이 일이 벌어지기 얼마 전에 잠깐 홍타이지가 병에 걸려 자리를 누웠다는 말이 있었고, 그 전으로 따지자면 무리를 하느라 코피를 흘렸다는 기록으로 보면, 어느정도 예상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는 원숭환이라는 강적을 물리쳤고, 조선을 정벌했으며, 몽고를 복속시켰고, 명군에 대한 거의 최종적인 우위를 확보했습니다. 남은 일은 남은 사람들의 몫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