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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이 세상을 뒤엎었을때, 한족 지식인들은 능력이 있어도 그 뜻을 펼 수가 없었고, 차별 대우에 시달렸습니다. 만주족 정권의 청이 몽골의 막무가내 식보다는 조금 더 세련된 방법을 제시한다쳐도, 결국 청나라 역시 주체가 되는것은 만주족이고 한족은 차별 대우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몽골인은 친척과도 같은 대접이었고, 조선족도 그럭저럭 입장은 내었지만, 한족은 '한군팔기'에 편입된 인물들을 제외하면 아무래도 고난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민환의 건주견문록에는 만주족이 노비에게 농장을 경영하게 한다는데, 그 노비들은 아무래도 한족일 것입니다.
또 이를테면 축세창이라는 관리가 전쟁에서 납치되어온 한족 부녀를, 창녀로 만들어 파는것을 슬퍼하여 이를 금해 달라고 숭덕제에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숭덕제는 오히려 화를 내며 거절 했습니다.
"너는 몸은 청에 있지만 마음은 명에 있구나. 한족인 명이 몽골의 원을 멸망시켰을때, 각지에 있던 몽골 공신의 부녀를 창가에 넘기지 않았느냐? 명나라 각지에 그런 몽골 기녀의 후예가 있다. 너는 명나라의 관리로 일했을때, 몽골 공신의 후예가 창녀가 되는 것을 금지해 달라고 주청한 적이 있느냐?"
명나라가 몽골 공신의 여자들을 창관에 팔아넘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만 명태조 홍무제 주원장은 원나라 순제의 손자를 사로잡고도 종묘에 세우는 굴욕을 면하게 해주고, 오히려 북원으로 보내주는 관대한 처분을 베푼 바 있습니다.
여하간에 한족들이 청나라의 말발굽에 수난을 당한다면, 이는 명나라를 무너지게 한 황제나 지식인, 정치가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밖에 없습니다. 명나라는 홍치제 사망 이후(1505년 6월 8일) 16세기에 끊임없이 무너져내렸고, 경이적인 시스템의 힘으로 이를 늦추고 유지시켰을 뿐입니다. 만력제. 가정제. 천계제. 그들 모두에게는 명이 무너지게 된 대죄가 있습니다. 위충현 등도 말할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단지 사람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17세기의 거대한 소빙기. 어쩌면 그것은 16세기 부터 시작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런던에서 템스 강이 얼어붙고, 아열대의 강과 호수에서 얼음을 깨고서라도 배를 운행하려 애를 쓸때, 만리장성 이북 지역에서는 혹한이 일어났습니다. 유럽의 곡물가가 대거 상승할때, 명나라에는 절망적인 대기근이 닥치게 됩니다.
이미 1620여년 만력제 무렵부터 이러한 재앙의 전주곡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섬서성 일대에 기근이 들어,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곡식 한 말과 10살 짜리 어린 아이를 서로 바꾸고 있었고, 1628년에 일어난 대기근은 섬서에 또다시 일어난 대기근은 사람이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가, 세상이 얼마나 지옥으로 변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늘의 재앙이나 다름 없었던 것입니다.
하늘은 비를 뿌리지 않았습니다. 한달이 지나도, 반년이 지나도, 1년이 지나도 단 한방울의 빗방울이 땅바닥을 적셔주지 못했습니다. 모든것이 말라비틀어졌고 곡물의 수확은 불가능해져, 사람들은 쑥을 뜯어서 먹고 이상한 맛의 씨를 씹어 허기를 달랬습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사람은 행복한 편입니다.
닥치는대로 먹어치우다 보니, 당연히 이것이 몸에 좋을리가 없습니다. 형편없이 떨어진 면역력도 이에 더해져 사람들은 페스트에 시달렸고, 갑자기 부풀어오르는 배를 보며 보며 절망에 빠져야 했습니다. 어른들도 제 몸을 건사 못하였고, 갓난아기들은 변소에 빠져 살해당했습니다. 사람들을 묻는 구덩이들도, 이미 시체로 가득차 더 집어넣을 수 조차 없는 절망의 상태.
사람들은 흙을 집어먹었습니다. 집어먹을 흙조차 없자, 비둘기의 배설물 까지도 햚아서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아이를 바꿔서 잡아먹고, 자기 살이라도 발라서 삼켜먹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먹고, 남편이 아내를 먹고, 형과 동생들을 막론하고 서로를 잡아먹고……사람 고기를 절여서 팔고, 사람의 머리를 쪼개 뇌수를 빨아먹고, 한 사람이 굶어서 쓰러지면, 그 즉시 썩은개들처럼 몰려든 사람들이 시체를 '해체' 해 버렸습니다.
누군가가 이를 꾸짖으면,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먹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나를 먹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목숨을 연명하여도, 병에 걸려 죽고 독이 올라 죽은 사람들이 과연 좋은 '먹을거리' 로 합당하리라고 볼 순 없습니다. 부적절한 사람 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얼굴이 곧 부어오르고, 안에서 열기가 나면서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누군가의 먹을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도 죽고, 저렇게 해도 죽습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부호를 털어 원수를 값고, 그들의 재물로 목숨을 연명하는것이 땅바닥에 쓰러져 남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야 나을 것입니다. 마무재(馬懋才)라는 관리는 이러한 섬서의 실태를 보고하면서, 백성들의 마음가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굶주림으로 죽는 것과 강도가 되어 죽는 것, 두 가지 밖에 없다. 앉아서 굶어 죽느니 차라리 도적이 되어 배부르게 죽는 편이 낫다.”
처음에는 단순한 폭도들이었겠지만, 점차 많은 사람들은 이런 단체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폭도 집단은 점차 반란 세력으로 일신해가기 시작합니다.
먼저 일어선 사람이 바로 왕가윤(王嘉胤)입니다. 그 밑으로 굶주린 백성들과, 군량을 지급받지 못해 마찬가지로 굶어 죽게 된 병사들이 합류했습니다. 그리고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명나라 조정이 수많은 역관을 없애자, 졸지에 실업자가 된 사람들도 이곳에 끼어들었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 이자성(李自成)도 있습니다.

왕가윤의 밑에 고영상(高迎祥) 장헌충(張献忠), 마수례, 나여재 같은 난다 긴다 하는 인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자성은 처음에는 고영상의 부하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후금이 발호하고, 원숭환이 북방에서 이를 저지시키고 있을때, 이들은 순식간에 세력을 과시하며 사방을 함락시켰습니다. 명나라는 홍승주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대군을 동원하여 토벌에 나섰는데, 3만 혹은 4만이나 되는 농민군은 그러나 훈련이 부족해 명나라 정규군에 압도당했고, 왕가윤도 살해당했습니다. 하지만 반란군은 줄어들기는 커녕, 오히려 더 늘어났습니다.
상천룡. 과천성, 혼세왕.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온갖 도적패들이 사방을 활보했습니다. 산서 지역에만 무려 36영, 숫자로는 20여만의 무리가 모였습니다. 게중에 고영상도 있었습니다. 고영상은 스스로 틈왕(闖王)을 일컫었는데, 틈이라는것은 용맹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반란의 세력은 땅에서뿐만 아니라, 해상에서도 활보했습니다. 명나라의 남중국해는 혼란과 혼돈의 도가니였고, 해적에 외국세력까지 끼어들어 더할 나위 없는 어지로운 행보를 보였습니다. 이 가운데, 정지룡(郑芝龙)이라고 하는 정말 괴이한 인물까지 등장했는데, 그는 VOC의 네덜란드 총독을 친구로 하고, 일본인 아내를 두었으며, 흑인으로 이루어진 경호대를 손에 가지고 있었고,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무역 상단이었습니다. 일개 해적인 그의 세력이 남중국해를 장악할 지경에 이르자, 명나라는 그를 회유해서 벼슬을 주고 어떻게든 저지시켰습니다. 하지만 과연 정지룡이 이에 만족한 것인지, 더 가공할 속셈을 숨기고 있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정지룡이라는 괴인은 어떻게 조용하게 시켰다 해도, 땅에서는 한치 앞을 보기 힘든 전개가 진행되었습니다. 반란이야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핵심적인 반란의 세력은 산서에서 하남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서로 나뉘어져 힘을 집결하지 못했고 이에 홍승주는 적을 각개격파, 반란군을 섬멸해 버렸습니다.
13가(家) 72영(營)에 이르는 반란군은 차례차례 홍승주에 당해버렸고, 고영상도 사로잡혀 북경에서 처형되었습니다. 1635년 경 더욱 강력해진 홍승주의 공격에 반란군을 살기 위해 형양(衡陽)에서 흩어졌던 세력을 한데 뭉쳐 모았고, 이 시기부터 이자성은 두각을 드러내었습니다. 고영상에 이어서 2대 틈왕이 된 이자성은 정부에 저항하면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사천으로 도주했습니다.
이 시기 이자성은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며 분투했고,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아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북경에서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사천을 뚫고 다시 하남으로 내려간 이자성은 이때부터 세력을 크게 불릴 수 있었는데, 하남은 당시에 절망의 땅이라 대기근으로 수많은 유랑민들이 있엇고, 그들은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에 분개하여 살기 위해 이자성의 군세에 가담했습니다. 1640여년이 지나자, 이자성의 무리는 점차 틈군이라는 실체적인 조직으로 변모했고, 정부를 만들 구상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명나라 말기에는 각지에서 작금의 현상에 절망하는 지식인들이 있었습니다. 우금성(牛金星)과 이엄(李嚴)같은 사람들이 이자성군에 합류, 이 도적 집단은 점차 제대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명나라 말기에 각지에 도적 집단은 많았으나, 이자성군은 다른군과 다르게 규율이 엄격했습니다. 지식인을 흡수하여 정신적인 기풍을 갖춘 이자성군은 확실히 앞서 나가고 있었고, 숭덕제가 저 멀리 북쪽에서 홍승주를 물리친 1641년 이르면 이제 전중국에 반란 세력의 가장 큰 둘은 이자성과 장헌충, 두 명으로 판도가 좁혀지게 됩니다.

이자성에게 농민과 같은 우직함과 통쾌함이 있다면, 장헌충은 교활한 인물이었고, 동료들과 사이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 단점때문에 고립되고 패배하여 정부군에 투항한적이 있었으나, 교활한 면모를 과시하며 정부군을 습격, 병사들을 몰아 사천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사천의 병사가 섬서로 출병하여 그곳이 무주공산이었기에 이를 노린것인데, 병부상서 양사창이 사천으로 군대를 보내 다시 교묘하게 달아나야 했고, 1641년 명나라 장군 좌량옥(左良玉)의 군대에 위기 봉착, 이자성 밑으로 아예 항복해버릴까 고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자성은 장헌충의 교활함을 경계하여 군대의 지휘권을 박탈해야겠다는 조건을 제시했고, 일개 식객으로 떨어지기는 싫었던 장헌충은 어려움을 무릎쓰고 여러 작은 조직들을 굉장한 수완으로 모아 집단을 만들어내 었습니다. 그도 나름대로 난세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1643년, 호북의 요충지인 무창(武昌)을 취하였고, 스스로 대서왕(大西王)을 칭하고 사천에서 대서국을 세워 황제가 되고, 연호를 대순(大順)이라고 정하기에 이릅니다. 장헌충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 군기를 엄정하게 하면서 농노를 해방하고, 파자군이라는 여성부대를 만드는 묘한 결단을 벌였는데, 토호나 지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탄압하여 그들의 재물을 자신의 힘으로 사용했습니다.
장헌충은 역사의 기록 속에서는 가공할 살인귀로 알려져 있고, 엄청난 대학살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장헌충이 사람을 학살했다는 기록을 모으면 이는 사천의 총 인구도 훨씬 넘어가게 됨으로, 그는 사천의 모든 사람을 어린아이 할것 없이 죽였다는 소리인데 그렇다면 나라를 세우고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은 전혀 되지 않습니다. 장헌충이 몇몇 잔혹한 짓을 저지렀을것은 분명하나, 그 주요 타켓이 된 토호나 지주 계층이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여건이 되고, 후에 중국에 집권하는 청나라는 '이자성, 장헌충 등을 물리치고 명나라의 원한을 갚았다.' 라는 스탠스를 취했기에, 청나라의 여건에 따라 날조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실상을 보자면 청나라 군이 사천에 들어와 학살한 일을 장헌충의 짓이라고 날조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찌되었건 비타협적인 장헌충이 이자성의 세력에 합류를 하지 않으면서, 중국 내에 있는 농민 혁명의 갈래는 두가지로 나뉘어 힘이 합해지진 못했습니다. 이자성은 장헌충에 비해 잔혹 일화가 더 적은 편인데, 아무래도 그의 세력이 지식인들이 있었고 하여 장헌충 수준으로 토호 등에 대탄압을 가하지 않은것도 원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자성도 복왕이라는 존재만은 그렇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만력제의 아들로, 만력제가 엄청난 금은재보를 털어 주었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에 천하 모든 백성들이 그에게 증오심을 품고 있어서, 이자성 군이 밀려들자 달아나던 복왕을 잡아서 죽여버린 것입니다.
선제(만력제)는 천하를 어렵게 하여, 왕(복왕)을 살찌웠다.
그리고는 복왕의 집에 산더미처럼 쌓인 재물을 백성들에게 돌리고는, 복왕의 집을 불태워버렸고, 복왕의 피를 사슴 고기와 섞어서 소위 복록주(福祿酒)라는 술을 만들어서 먹었다고 합니다.
같은 시기, 장헌충도 이제 질세라 2월 무렵 양양을 떨어뜨리고 양왕(襄王) 주익명(朱翊銘)을 살해했습니다. 본래 병부상서 양사창은 양양을 군사령부로 삼았는데, 군대도 대군이고 군수품도 풍부하여 충분히 싸워볼만 하였으나 사람됨이 졸렬하여 간단하게 성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장헌충은 은자 15만냥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했습니다. 이에 양사창은 자결했고, 뒤를 이은 정계예(丁啓睿)는 이자성 군단의 막강함을 몹시 두려워했음으로, 그보다는 세력이 약했던 장헌충에게 공격을 집중하자고 하였습니다.
이에 좌량옥이 장헌충을 물리쳐 그를 다시 사천으로 돌아가게 했으나, 이자성 군단은 파죽지세로 아무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11월 이자성은 남양을 떨어뜨렸고, 당왕(唐王) 주율막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개봉을 공격, 병부시랑 손전정의 원군에 고전을 하였으나 1642년 9월 무렵 황하의 둑을 터서 개봉을 물에 잠겨, 북문을 깨고 개봉 함락에 성공했습니다. 강물의 소리가 마치 천둥과도 같았다고 합니다.
명나라 정부는 이제 완전히 여력을 상실하여 개봉에 제대로 식량조차 보내지 못했습니다. 명나라 병졸은 굶주려서 감나무 밭의 파란 감을 먹으며 간신히 목숨을 연명했습니다. 2개월 후 이자성은 여녕에 이르렀고, 1643년에는 승천을 점령했습니다. 그는 양양을 양경(襄京)이라 개명하고 스스로를 신순왕(新順王)이라 하였습니다. 정부 기구도 착착 완성되어 여러 관직을 두었습니다.
이미 숭정제는 절망에 빠져 이성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갈수록 신경질적이 되었고, 감정표현이 잦아졌으며, 모든 실패를 대신이나 장군들 탓으로 여겨 총독을 죽이고 순무를 죽이고 장군을 죽였습니다. 대신들은 어차피 처형당할까 싶어 자결하였고, 혹은 아예 적에 투항했습니다. 숭정제는 계속 화를 내고 있었으나, 냉정함은 사라졌고 이성은 마비되었습니다.
이 농민 반란군은 오히려 따지자면 변경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인 청나라 만주족 정권보다도 더욱 절망적인 상대였습니다. 외적과 싸운다면 국내의 역량으로 보급을 해주며 버티면 됩니다. 하지만 내부의 적을 상대하는 방법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봉기군이 일어난 자체가 나라가 엉망이 된 탓이니, 이들과 싸우면서 나라가 더 엉망이 되면 또다시 봉기군의 세력이 커지는등 수습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 군대가 동북에 버티고 있는한, 강력한 동북군대를 빼내와서 적을 막는 방법은 불가능합니다. 그 순간 명나라는 멸망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예군단을 동북에 쑤셔넣고 있는한, 봉기군을 완전 진압하는것도 불가능합니다. 이미 명나라는 어떤 방도도 없는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1644년. 정월 초하루. 이자성은 서안에서 즉위식을 가졌고, 국호를 순, 연호를 옃앙으로 정했습니다. 서안을 예전 이름인 장안으로 고치고, 서경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천하에 황제라고 일컫는 이가 세명이 되었습니다. 대명의 황제, 청국의 황제, 그리고 대순황제 이자성, 이렇게 말입니다.
이성을 상실한 숭정제는 이 소식을 듣자 직접 정벌하러 가겠다고 부르짖었습니다. 이때 대학사 이건태(李建泰)가 자신이 나서서 적을 막아보겠다며 사재를 털어 병사를 모아 서쪽으로 가게 되어, 숭정제의 친정은 무산되었습니다. 숭정제는 이건태의 출발을 직접 문루위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사재를 털어 모아 만든 병사, 숫자는 겨우 500명일 뿐입니다. 숭정제가 무슨 생각을 하며 떠나가는 이건태의 군사를 지켜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건태도 방도는 없었기에 보정으로 가서 성 안에 들어앉아 버렸습니다.
이자성은 곧 동정군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산서로 진입, 2월에 태원(太原)을 함락시키게 됩니다. 이는 명나라 북경 정부에 최종적인 종말을 알리는 전주곡이었습니다. 숭정제는 스스로를 벌하는 조서를 내리고, 최후의 순간에 내탕금을 털어 직접 부대를 모집했지만, 이는 모두 늦은 일입니다. 남경 천도 이야기도 나왔으나 너무 꾸물거린 탓에 이 시점에선 다 늦은 일이었습니다.
숭정제는, 자아비판은 했으나 자신이 잘못되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정이 환관의 손아귀에 있을때 황제에 올랐고, 내부에는 반란군이 외부에는 강대한 외적을 둔 상태에서 정치하여 모두를 감시하는 통에 결국 모두를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종의 피해망상증으로 그는 자주 의심에 빠졌고, 여러 사람을 죽였습니다. 성품적인 면이라기보다, 이는 차라리 병적인 면이었다고 보는것이 그럴 듯 합니다.
물론 숭정제의 잘못을 떠나 실제로 그 당시 명의 신하들은 별볼일이 없기도 했습니다. 이자성은 후에 숭정제에 대해,
"군(숭정제)는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았다."
하여 평가했습니다. 새로운 왕조를 열며, 전대의 악행을 거론하는것은 당연한 일이나, 이자성 조차도 숭정제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는것은, 나름대로 숭정제가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는것은 반란군이나 일반 백성들조차도, 충성은 못해도 어느정도 이해는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자성은 같은 조서에서 명나라의 신하들을 욕하기를,
"신하들은 언제나 제 이익만 챙기고, 파벌 항쟁 하여 공평하고 충성함이 적어져 버렸다."
하면서 또한 뇌물이 횡행하고 정부의 위령은 시행되지 않아 일부 특권자가 이익을 독점하여,
"민간의 몸에서 배어 나오는 고생한 수익은 거의 다했다."
하여, 스스로 백성의 초췌함을 목격하고는 살을 에는 듯한 아픔을 느껴, 일개 민간인으로서 일어날 결심을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황제는 본래부터 그렇게 못된것은 아니었으나, 왕조는 토대가 썩어 민간이 심하게 고통을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나름대로 공평하게 기술하고 자기 과장이 적은 글로서, 이자성 스스로 자신의 덕이 매우 뛰어났다거나 하는 언급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모든 내용을 이자성이 직접 작성한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본디 그의 의도도 어느정도 반영되었음은 분명. 이자성이라는 사람의 우직함을 어느정도 보여주는 일입니다.
이자성의 군대는 이제 시시각각 몰려들었습니다. 늦었지만, 남경으로 천도하자는 의견도 다시 있었습니다. 하지만 숭정제는 이때 쯤 되자 무언가 결심하여 거절해버렸습니다.
"국군은 사직에서 죽어야 한다. 짐이 어찌 갈 수 있겠는가."
하여 남천하자는 의견을 뿌리쳤습니다. 숭정제는 물론 결점이 많았던 황제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기개는 있었습니다. 또한 지독할 정도로 자신에 대한 자존심도 있었고, 여기서 달아난다는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일입니다. 숭정제는 최후에 대한 준비를 했습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산해관의 오삼계, 거용관의 당통등에게 백작의 칭호를 내렸으나, 당통은 그 즉시 이자성에게 항복했습니다. 명나라 조정은 계속하여 이자성 군대로 첩자를 보냈지만 첩자들은 그 즉시 이자성에게 항복하여 아무런 정보와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고, 어전회의는 계속하여 열렸지만 적에 대해 아는것이 없으니 무슨 답이 나올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자성은 투항자와 내부의 밀고자로 어전회의 광경을 제 눈으로 본것처럼 똑똑히 알 수 있었습니다
숭정제가 보낸 태감인 환관 두훈(杜勳) 마저도 이자성에게 항복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자성의 명령을 봤고 돌아왔으니, 그 명령이란 다름 아닌 숭정제에게 이쯤에서 자결할것을 권하는 것입니다.
"이자성은 무릇 불신(不臣)의 마음은 없었다. 나라를 그르치는 간당(奸黨)이 조정에 가득하여 왕실을 돕기 바랬다. 그러나 지금 대세는 이미 기울어진 바, 청한다. 상(上) 이여. 자재(自裁) 하시라."
이에 대한 숭정제의 반응은 놀랍게도,
황제는 노하여 이를 질책하고 내보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숭정제는 이미 다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17세기 중국의 화폐 단위는 은 1온스에 상당하는 냥이었는데, 매월 40만냥이 북쪽 변경 방어부대에 조달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재정은 바닥났고, 나라는 기근에 빠졌으며, 천연두가 창궐하였고, 대운하는 황폐화되었으며, 내부에는 수십만의 반란군이 있고 외부에는 몇십만의 기병이 있었습니다. 가뭄과 기근, 역병과 마마, 날벼락 치는 하늘과 휘몰아치는 붉은 비바람같은 기상 이변, 그리고 산적과 해적들이 더욱 기승을 부렸습니다. 지독하게 외로운 남자인 숭정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방법도 낼 수 없는 상황에서, 예정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 안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숭정제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짤막하게 감상을 말했습니다.
"내 백성을, 괴롭히는구나."
이제 끝이었습니다. 명태조 홍무제 주원장부터 시작한 명제국도 몰락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경에, 아직 명나라의 제2정부가 남아있었고, 숭정제에게는 명나라의 황제이자 황통을 잇는 자로서 그것을 잇게 해야할 의무가 있어습니다. 그는 자신의 두 아들에게 평범한 사람의 옷을 입힌 후에 말했습니다.
"난리 속으로 모습을 감추거라. 말투를 고치고, 나이 든 사람을 부르면 어르신(翁)' 이라고 불러야 한단다. 장년인 사람을 만나면 "백(伯)"이나 "숙부"라고 부르면 된다."
그러면서 허리띠를 단단하게 매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고, 숭정제의 황후 주씨는 목을 매달아 죽었습니다.
그 무렵 이자성은, 승천문(承天門 : 천안문) 쪽으로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드디어 북경에 입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명계유문(明季遺聞)에서 이를 기록하기를,
"적(敵 이자성)은 황갑(黃甲)을 입어, 사방은 황운(黃雲)이 들판을 덮은 것 같았으며, 요란한 포성 그치지 않았다."
고 하였습니다. 이자성은 감개가 무량하여, 화살을 꺼내 들고 승천문의 "천" 자에 화살을 견주며 말했습니다.
"만약 이것이 맞추어지게 된다면, 하늘은 나를 받아들인다는 것이이라!"
대단히 쉬운 조준이었습니다.
화살은 빗나갔습니다.
수하들은 웃어넘겼고, 이자성도 그들과 같이 궁성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때, 온갖 격정에 젖어 있던 숭정제는 칼을 잡아들었습니다. 그리고 15살이 된 장평공주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한스럽게 부르짖었습니다.
"네가……어찌하여 우리 집안에 태어났다는 말이더냐!"
칼이 휘둘러졌고, 숭정제는 다시 6살이 된 소인공주를 찾아가서 그녀를 살해했습니다. 대체 어떤 심정으로 자신의 두 딸을 살해했을지, 숭정제의 마음 속에서 휘몰아치던 폭풍이 어느 정도일지 아무도 짐작조차 못할 일입니다. 하지만 장평공주는 죽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딸입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어찌하여 우리 집안에 태어났냐고, 그리하여 이런 모습이 되고 마냐고 부르짖으며 칼을 휘두르는데, 그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갈수 있을리가 없습니다. 저도 모르게 칼을 든 손은 힘이 풀렸고, 그리하여 그녀는 죽지 않았던 것입니다. 장평공주는 정신을 차린 후 스스로 자결하려 했지만 몸종들은 오열하는 그녀를 붙잡고 강제로 끌어냈습니다.
숭정제는 두 딸을 보내고 자신만 살아있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밤이 되자 숭정제는 백관을 불러 모으기 위해 스스로 경종을 울렸지만,
온 자가 없었다.
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정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명나라 조정에 악귀같은 간신들만 가득찬 것은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황제와 마지막을 같이 하고픈 신하들도 있었지만, 북경은 이미 이자성군의 손아귀에 떨어졌고, 자금성까지의 길은 교통차단이 내려져 있었을 것입니다.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자들의 피눈물을 뒤로 하고, 숭정제는 환관 왕승온을 데리고 자금성 뒤편의 경산에 올라갔습니다. 숭정제는 목을 매었습니다.
─ 짐은 죽어 지하의 선제를 볼 낯이 없다. 따라서 머리로 얼굴을 가린다. 적이 짐의 시체를 찢도록 하겠다. 내 백성은 한 사람도 다치게 하지 말아라. 문관은 모두 죽여도 상관없다.
숭정제가 마지막으로 기록한 말의 일부분이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스스로의 자존심은 지켰으며, 동시에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실로 고집스러운 사나이였습니다.
대학사 범경문(范景文)은 숭정제의 죽음 소식을 듣자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습니다. 예원로(倪元璐)는 북쪽으로 아버지에게 절하고 남쪽으로 어머니에게 절을 올린 후에 스스로 목을 매었습니다. 좌도어사 이방화(李邦華)는 남송의 대충신 문천상의 사당에 가서 자살했습니다. 병주우시랑 왕거언은 성벽에서 몸을 던졌고, 죽지 않자 다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형부우시랑 맹조상은 아들과 함께 자살했습니다. 부자의 아내들도 자살했습니다. 좌부도어사 시방요는 독을 먹고 순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도 수배는 훨씬 많을 정부의 고관들은 이자성에게 굽실거리며 찾아와 알랑거렸습니다. 구역질 나는 이야기지만, 동시에 전혀 다른 성격의 신하도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오삼계(吳三桂) 였습니다.
숭정제는 나라를 망친 군주인가
이런 이야기에 개인의 사족을 붙여봐야 의미 있는 일이 될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와 동시대에 살며, 역시 치열하게 자신의 투쟁을 지속한 인물의 평가를 듣는편이, 더욱 객관적인 일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담천(談遷 1594~1658)은 명말 청초의 재야 지식인입니다. 관료진출에 실패하였고 28세부터 명나라 역사의 저술에 뜻을 부었습니다. 그는 국각(國覺)에서 300여년의 역사를 서술하였습니다.
15세기 명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강력한 국가였고, 시대를 초월한 관료체계와 가공할 규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270여년간 공고히 버티던 나라가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멸망했는지는 모두에게 관심의 대상이 될테고, 이를 저술하는 사람이, 명의 멸망을 더욱 안타까워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궁금하였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명이 멸망하게 되었을까?
간혹 우리는 큰 문제를 너무나 간략하게 풀이하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조선이 근대화에 늦은 이유, 유교 떄문에. 서양이 동양을 누르고 패러다임이 된 이유, 수학 때문에. 어떠한 나라가 멸망한 이유, 지배층이 썩어서. 이런 식의 접근은 강렬한 인상은 줄지 몰라도 근본적인 궁금증을 풀어주는 데는 거의 기여하는 바가 없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을 묘사하는데도 수십가지의 입장이 필요하며, 하물며 한 나라의 멸망이라면 역시 단 한 두가지의 원인으로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담천 역시 다각도로 문제에 접근했습니다. 그는 명의 쇠티 현상을 만력, 천계제의 시대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았지만, 이 가운데 숭정제에 대한 입장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담천의 국각에서 숭정제에 대한 부분은 833쪽으로, 숭정제 이전 명조의 역사 260여년에 관해서는 5384쪽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담천은 이 부분을 작성하기 위하여 직접 현지답사, 증언청취 등을 하여 상세한 자료를 모집하고 기록 했습니다.
담천은 중국에서 소위 말하는 전형적인 망국의 군주, 즉 음란하고 포악하거나, 나약하고 우매한것으로 유명한 망국의 군주들과 숭정제를 비교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숭정제는 이들에 비해선 음란, 포약, 나약, 우매한 군주는 아니라고 하였고, 오히려 근검, 명민하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숭정제가 망국 군주의 오명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것은 숭정제 본인이 범한 오류가 크기 때문이라는것입니다. 담천이 꼽은 숭정제 비판은 크게 4가지 형태로 압축 됩니다.
1. 인선부당의 오류
담천이 꼽은 숭정제의 가장 큰 오류입니다. 담천의 생각에, 국가의 성쇄와 흥망은 사람들이 크게 결정하는것인데, 숭정제는 인사정책의 난맥을 보였습니다. 적임자를 제대로 쓰지 못했고, 숭정제가 총애한 관료들의 무능을 열거했습니다.
숭정제가 적극 등용한 인물 가운데 한명은 이자성에게 목숨을 구걸하며, 명나라를 욕했는데 이자성은 그 태도가 어이없어 "너는 장원급제한지 3년도 안되어 재상으로 발탁되는 등 우대되었는데, 그리 헐뜯는가?" 하고 고문하자, 수만 금을 내놓았고, 이자성이 이에 대해 "명 황제는 네가 청렴하다고 신임하였는데, 도대체 이것들은 어디서 난 것인가?" 하고 묻자 "나를 구해주시면, 17살 난 딸이 있는데 매우 미인입니다. 장군에게 바치겠습니다." 하자 이자성의 부하가 더럽다고 발로 찼다는 이야기를 언급했습니다. 숭정제가 총애하여 국정을 일임한 이들 관료는 지조와 의리가 없었고 부패한 간적들일 뿐이었습니다.
숭정제도 실제로 자신의 인사 조치에 대해 후회하는 뜻을 보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숭정제의 후회는 '그들을 뽑은 자신'에 대한 후회라기보다는, "천하를 잃은 것은 모두 평소에 탐관오리들이 망쳤기 때문이다." 혹은 "군은 망국(亡國)의 군이 아니지만 신하들은 모두가 망국의 신하다." 같이 책임회피에 가까운 말들입니다. 하지만 백번양보하여 모든것이 신하들의 책임이라고 해도, 그들은 숭정제가 선발하고 신임했으니, 이는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 입니다.
또한 담천은 숭정제가 관료들의 생명을 벌레처럼 가볍게 취급한것에 대해서도 비평했습니다. 그는 명나라에서 고위관리로 처형당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하여 숭정제가 많은 관료들을 무자비하게 처형시키고 추방했음을 단 한마디로 압축해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정작 국가가 위기에 닥쳤을 때는, 단지 "여러 신하들을 불러 놓고 울며, 속수무책으로 서로 쳐다만 볼 뿐 아무런 대책이 없는" 상황을 초래하였음을 지적했습니다. 그 외에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현실성이 없는 인사정책 등이 나라를 동요시키는 일이라고 비판했습니다.
2. 환관중용의 오류
환관은 필요악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숭정제는 즉위 이전에 가장 극심한 환관의 폐헤를 보았는데, 즉위하고 나서 위충현 일파를 과감하게 숙청했습니다. 이는 대단히 명쾌한 처사로 한때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고, 담천도 이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헌데 숭정제는 정작 환관정치를 다시 벌이면서, 어느 군주 못지 않게 환관을 신임하고 요직에 등용했습니다. 그의 재위기간 중에 충당된 숫자만 1만여명이었고, 사실 이로 인한 재정 소모도 적은 편이 아닙니다. 신하들이 환관의 폐헤에 대해 걱정할때면 숭정제는 항상 자신만만하여,
"이들은 내가 조정한다."
하였습니다. 환관의 폐헤도 알게 모르게 있어서, 담천은 숭정제가 시종일관 환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와 비극을 상기시켰습니다.
3. 간언배척의 오류
군주제에서 군주가 어느정도 간언을 받아들이는지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숭정제는 표면상으로 간언을 잘 수용한다고 했으나, 정작 항상 간언을 무시했고, 대신들의 반응에 몹시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이며 '진노함을 그치지 않고 얼굴 색과 목소리가 날카로워지는' 상황이 많았습니다. 담천은 숭정제가 '좋은 말은 받아들이고 싫은 말은 배척하는 군주' 로, 결코 신하들의 간언을 수용할만큼 도량 있는 군주는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독선과 아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4. 애민위선의 오류
재위기간 중, 숭정제는 말끝마다 자신이 백성을 사랑하는 황제라고 말하였고, 애민 군주임을 여러 차례 표명했습니다. 자식 같은 백성을 잘 돌보지 못하여 가슴아파다는 표현은 바로 그러한 예로,죽을 때조차도 백성들은 상하게 하지 말라는 비장한 유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담천은 이것이 위선이라고 여겼습니다. 숭정제는 입으로만 애민을 외쳤지 현실성이 없었습니다.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면 탐관오리를 척결하거나 조세 감면을 벌이거나 하는 행동을 보여야지, 매일 입으로는 애민을 외치고 감정에 호소하지만 실제적은 것은 하나도 없어 말만 남발하니 백성들도 습관이 되어, 정부에서 무엇을 하여도 믿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숭정제가 진짜로 애민의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 방법을 모르는 군주였습니다.
그리하여 담천은 최종적으로 숭정제의 통치는 완전히 실패하다고 여겼습니다.
"국가는 무엇에 의지하는가? 백성에 의지한다. 백성이 지지하면 위기라도 극복 할 수 있지만, 백성이 저버리면 경륜도 어찌할 수가 없다."
결국 담천은 국민 지지를 상실한 숭정제의 통치는 완전실패이고, 이는 숭정제 스스로 자초한 바가 큰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요컨데 그는 숭정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는데, 정작 청나라에서 제작한 명사에서는 여러가지 정치적인 문제때문에 숭정제에 대해서 꽤 우호적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이는 개인의 평가를 떠나 명조의 정통성 계승, 인심획득등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물론 숭정제가 단순히 망국 군주로 여기기 힘들 만큼 복잡한 면모를 지니고 있는것도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담천은 청나라 정부는 거의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숭정제에 대해서는 날이 서게 비판을 했습니다. 이는 물론 개인적인 사가의 입장을 견지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명말 청초라는 시대배경 속에서 사상, 경제, 문화 등 큰 변화가 일어나고, 정치 사상에 대해서도 민간에서부터 변화가 번져오고 있었습니다. 군주권력, 군주독재, 군신 관념에 대한 동요도 말입니다.
고염무(顧炎武), 황종희(黃宗羲) 등 대 사상가부터, 비교적 무명의 지식인들 조차도 무언가 새로운 군주관을 제기함과 동시에, 군주존재에 대해, 혹은 군주권에 대해서 심히 반대하는 불만과 회의적 시각이 싹을 트기 시작했다는 것.
이들은 비록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거나 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리고 청조의 강화된 사상통제가 이어지며 후대에 어떠한 영향을 조금이라도 남겼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이러한 명말 청초 지식인들의 입장을 군주독재에 대한 화의와 반론으로 여기는 시가도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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