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러시아의 국회의원이자 모스크바 국제 관계 대학의 교수인 블라지미르 메진스키가 쓴 <러시아와 그 적들 그리고 거짓말>에서 참조했습니다.
------------------------------------------------------------------ 중세시대에 공개처형을 관람하는 것은 서유럽 성인들의 놀이문화였다. 유럽의 사형관람은 오락이자 구경거리였다. 극장에 가듯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사행집행인의 이름과 그들이 어떻게 사형을 집행하는지 논의하며 아는 척하는 것이 매너로 여겨졌다. 유럽에서는 교수대와 사형 도구를 가리켜 '마셴카 교수대', '여윈 표클라(사형용 도끼)', 같은 애칭으로 불렀다. 영국은 마셴카를 '리틀 메리'라고 불렀고, 사형용 도끼를 독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는 '여윈 거트루트',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빠른 알베르트'라고 불렀다. 계몽사상이 뚜렷하고 3권 분립이 이루어진 시기의 영국에서는 창고 2개를 불지른 죄로 8세 소년을 사형시켰다. 사람들은 이를 구경하면서 노래하고 웃었다. 영국에서는 어린 아이가 손으로 사형수를 만지면 행복을 가져다 주고, 교수대의 나무조각을 빨거나 이쑤시개처럼 사용하면 치통을 막는 약이 된다는 미신도 널리 퍼져 있었다. 독일에서는 사형수를 목매달아 죽인 밧줄이 집안에 행복을 가져다 주고, 프랑스에서는 사형수의 손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해준다는 미신도 생겨났다. 1788년 영국에서는 사형당한 죄수에게 군중들이 달려들어 말 그대로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시신을 부위별로 나누어 가진 사건도 있었다. 운이 좋았던 어느 선술집 주인은 사형수의 머리를 가져가 썩은 냄새가 나기 직전까지 자신의 가게에 걸어놓고 손님들을 끌어 모았다. 프랑스 파리의 그레브 광장에서 벌어진 공개처형은 파리 시민들을 흥분시켰다. 그들은 사형 장면을 보면서 즐기고 노래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러시아 작가인 표트르 드미트리예비치 보보리킨은 1864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리에 반 년만 살면 알 것이다. '라 코케트' 감옥 근처에서 집행된 공개처형이 얼마나 잔혹한지! 이보다 더 잔혹한 장면은 상상할 수 없다. 호색가, 고급 매춘부와 퇴물, 바람둥이, 도둑, 도망간 유형수에 이르기까지 수천 명의 사람이 주변 술집에 모여 술에 취해 형편없는 노래를 불렀다. 새벽이 되어서야 사형수들이 매달려 있는 광장을 둘러싼 경비대쪽으로 다가가 이 소름끼치는 기구를 불렀다. 멀리서는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 매혹적인 구경거리를 기다리며 사형장에 있다는 기쁨으로 환호하며, 즐겁게 밤을 지세웠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교수대가 기요틴(거대한 칼날을 장착해 죄수의 목을 자르는 기계)으로 대체된 후, 프랑스인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서 다시 교수대로 바꾸라고 요구했다. 이런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나폴레옹 시대와 부르봉 왕조 시대 이후, 프랑스의 사형 집행 기구는 다시 교수대로 바뀌었다. 파리에서 최후의 공개처형은 무려 2차 세계 대전 바로 전에도 벌어졌다. 소련의 배우, 알렉산드르 베르틴스키는 그가 사랑하는 파리의 광장에서 군중들이 소리지르고 즐긴 공개처형 장소에 있었다. 사형장면을 본 알렉산드르는 그가 본 참혹한 광경을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실만큼, 사형을 저속하게 평가했다. 그의 오랜 팬이었던 연미복을 잘 차려 입은 어느 신사가 다가와서 술집에서 그를 만나 같이 술을 마셨다. 이 신사는 그에게 공개처형은 예술활동에 좋은 것이 아니니, 더 이상 그런 구경거리에 가지 말라고 부탁했다. 알고 보니 이 신사는 파리의 공식 사형집행인이었다! 이밖에도 19세기, 영국 상류사회의 신하들은 금요일이나 토요일마다 부인을 데리고 감옥으로 행차했다. 감옥에 갇힌 창녀들이 서로 대결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미리 좋은 좌석을 사 구경거리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잡아달라고 감옥소에 부탁까지 했다. 영국의 신사숙녀들은 이 흥미로운 행사에 다니면서 사형 집행인의 이름, 그들의 행동, 창녀들을 파악했다. 지난 경기, 또는 다른 창녀와 비교하거나 예전의 상처와 비교하는 일을 에티켓으로 삼았다. 1810년에서 1826년까지 영국 런던의 미들섹스 백작령에서만 2755명이 사형을 당했다. 미들섹스 백작령과 런던 전역에는 약 800만 명이 살았다. 3천명 당 한 명이 사형당한 것이다. 런던의 명소 중 하나가 사형대인데, 어떤 사형대에는 여러 높이의 기둥과 21개의 올가미가 있었다. 20세기 초까지 약 500년 동안 연속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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